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07화 (207/250)

< 75장 - 영웅 조혁수 (1) >

한국을 떠난 뒤, 조혁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히어로무비란 무엇일까?

어린 시절의 조혁수는 왜 그 영웅들에 열광했으며, 그 영웅담이 현대에 갖는 가치는 어떤 것일까?

상업적으로 정의하자면 그 답은 단순할 것이다.

현실에 지친 대중에게 강력한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대리만족감을 위주로 흥행을 일구는 장르.

그 만족감을 키우기 위해 큰 스케일의 액션과 최첨단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큰돈으로 큰돈을 버는 빅딜.

평론가들은 그런 관점에서 히어로영화의 대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저 힘을 사용해 때려 부수는 팝콘무비 따위는 무가치하며, 그런 것들보다 인간의 정신을 관조하는 깊이 있는 영화에 더 큰 관심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

특히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거장들이 그런 태도를 견지하곤 했다.

그러나 조혁수는 그들의 이분법적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영화의 가치가 시간 때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히어로무비가 그 수준이라는 단정에는 불쾌감이 들었다.

오랫동안 사랑했던 그의 히어로들이 그저 힘과 폭력의 대리만족 따위로 치부되는 일에 그는 죄책감까지 느꼈다.

‘그런 게 아냐. 그들의 폭력은 행위 자체로 그치는 게 아니야.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피상적인 대리만족이라고 믿는 것뿐. 불가능을 이뤄내는 히어로들은 우리에게 뭔가 다른 것을 전해주고 있어. 그건 아마도, 현실 속의 이야기로는 선입견 때문에 채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가치를 서로 나누는 장······.’

그런 생각이 미국에 머물면서 점차 강해졌다.

아직까지 히어로무비를 아이들을 위한 동화 정도로 생각하는 한국과 달리, 이미 미국의 시민들은 히어로의 탐구자.

어느 집에 방문해도 히어로 코믹스나 피규어를 하나 이상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게 단지 너드 문화의 확산 때문이라고 믿는 건 우스운 일반화일 터였다.

<다크나이트> 촬영을 진행하며 조혁수는 그런 관점을 조금씩 발전시키게 됐다.

그의 배역은 부도덕한 사업으로 돈을 버는 미스터 라우.

그 인물이 되어 고담 시티를 암중에서 수호하는 배트맨이나 모든 질서를 파괴하려는 조커와 어우러지며, 조혁수는 히어로의 진정한 존재가치를 내면화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도시의 질서를 지키려는 영웅. 그리고 그와의 싸움을 통해서만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빌런. 그들의 액션은 팝콘무비의 눈요기가 아냐. 이들의 삶이 시각적으로 부딪치는 그 시퀀스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꿈과 짓눌린 자의식을 직시할 수 있어. 그럼으로써, 그들처럼 특별한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님에도, 내면의 선과 악이라는 경계에서 자신의 기준을 다잡으며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거야. 그야말로 어른들을 위한 동화. 크리스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만들고 있는 건 결코 인간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냐.’

기실 히어로라는 것은 인류의 공통적인 설화.

신과 인간 사이의 아이라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영웅들이나 알에서 태어나 초인적인 도술로 시대를 바로잡는 한국의 영웅들이나, 선인들이 그 이야기들을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결국 인간이었다.

그리고 과학문명이 발달한 현대에도 그 경향성은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배트맨은 평범한 인간이다.

그저 장난기 많고 뛰어다니기 좋아하는 남자아이였고, 양친에 죽음에 얽힌 죄책감으로 오래 방황했으며, 영웅이 된 뒤로도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는 극히 사실적인 인간.

다만 남들보다 큰 힘을 가졌기에 그 고뇌가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표출될 따름이었다.

그러니, 히어로의 가치란 보다 객관화된 인간성의 탐구.

슈퍼파워라는 초현실주의적 표현 속에서 오히려 현실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또 다른 예술의 깃발이었다.

그런 생각 속에서 불타 죽는 라우의 마지막 씬까지 연기한 조혁수는, 곧바로 새로운 경험을 추진했다.

<다크나이트>의 촬영을 마친 히스 레저가 쉴 시간도 없이 투입될 영화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을 견학하는 것.

배역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한 연기로 촬영 내내 감탄을 불러일으켰던 명배우는, 그 제의에 작은 우려를 표출했다.

“조,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줘.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딸이 있고, 내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표현했던 배역은 그저 연기였어. 알고 있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냐. 나도 여자를 좋아해.”

“그렇다면 왜 런던까지 따라오겠다는 거야?”

“테리 길리엄 감독의 연출에 관심이 있어. 슈퍼히어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사람이 악마를 등장시키며 만든다는 영화가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은 거야.”

크리스토퍼 놀란이 신성이라고 한다면, 테리 길리엄은 SF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명작들을 쏟아내며 세계 최고의 감독들 가운데 꼽히는 인물.

그가 연출하는 판타지 스토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뭐야, 나하고 무관한 일이었군? 그런 거라면 좋아. 나도 조를 인간 대 인간으로서 좋아하니까. 물론 배우로도.”

“마찬가지야. 네 연기를 보면 뭔가······ 아직 가물가물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기분이거든.”

“과찬의 말씀. 하지만 방은 공유하지 않을 거야. 난 잠을 잘 못 자는 편이라.”

“물론. 난 어지간하면 일찍 잠드는 편이야. 연기에 대해 고민할 게 있다면 몰라도.”

그 합의는, 그러나 런던에 도착한 뒤에 바로 뒤집혔다.

거의 매일 밤마다 한 방에 모여 서로의 연기를 부딪치게 된 까닭.

거장의 주연이라는 점에 부담감이 커진 히스가 리허설을 부탁하자, 조혁수가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승락했던 것이다.

히스가 동양의 배우에게 경외를 느낀 건 그 과정에서였다.

“조. 당신은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고작 리허설을 위해 잠깐 봐주는 배역인데, 거기에 들이는 그 노력들이 대체······.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써내려간 이 주석들은 내겐 너무 놀라워.”

“별 소릴 다 하네. 이것도 발전의 발판이야. 당장 뭐라도 하지 않으면 괴물한테 잡아먹힐 것 같은데, 난 머리가 나빠서 적어놓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린단 말이지.”

“괴물한테? 아, 혹시 더 댄서 말하는 거야?”

“그래, 그놈. 아주 징그러운 천재 놈이지. 너나 나하고는 전혀 달라. 그놈은 어떤 노력도 없이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걸 가져버리지. 그러면서 너무도 당연한 어떤 것들은 오히려 쉽게 놓치곤 하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리가 흥미로운 괴물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조가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니.”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연하의 배우를 보며, 조혁수는 살짝 웃었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딸 사진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전부 배역에 대해서밖에 생각하질 않는 거 알아.”

“응? 그게 티가 많이 나?”

“내가 관찰력이 좋은 편이라. 불면증도 그것 때문일 거야. 히스, 생각을 줄여. 나처럼 메모를 해서 머릿속을 비워. 그러면 훨씬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거야.”

“하하, 이거 그건가? 아시안의 영혼이 담긴 요가의 가르침?”

“그쪽이랑은 상관없어. 기도 아니고 초능력도 아냐. 그냥 상식적인 선에서 말하는 거다.”

“그런 거야? 그렇다면······ 한번 시도는 해볼게.”

그 대화 끝에 조혁수는 속으로만 혀를 찼다.

‘아이처럼 웃기는. 하여튼 신기한 녀석이란 말이야. 강정후와도 다르고 이찬과도 다른 평범한 재능으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자신을 바꿀 수 있다니.’

조커의 모습은 조금도 떠올릴 수 없는 맑은 웃음.

그렇지만 <다크나이트> 촬영 중에 마주했던 히스 레저는 그야말로 현세에 강림한 아치에너미였다.

그렇기에 그는 조혁수에게 있어서 일종의 지향점이었다.

‘이 녀석은 내 메모들을 보며 감탄한 모양이지만, 사실 그게 아니란 말이지. 히스 레저야말로 정말 미쳐 있는 배우야. 안정록 선배님께서 유언으로 남겨주셨던 바로 그 미친 연기의 주인공. 내가 무수한 메모로 간신히 따라잡아야 했던 감정들을, 자신의 몸으로 부딪쳐 하나의 인격으로 체화하는 또 다른 천재. 이 녀석을 배워가야 해. 그래야만 이찬에게도 지지 않을 나만의 무기를 완성할 수 있어.’

그렇게 점차 가까워진 덕분에, 이후 런던 시퀀스의 촬영을 마치고 휴가가 주어졌을 때 히스가 조혁수를 자신의 뉴욕 아파트로 초대했다.

“조, 히어로무비에 대해서 토론하고 싶다고 했었지? 내 집이 꽤 넓어. 거기서는 작품을 잠깐 내려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야. 잠 따위는 잊어버리고 실컷 떠들어보자고. 어때?”

“초대는 감사하게 받겠는데······ 부탁이니 잠은 좀 재워줘.”

그렇게 조혁수는 히스의 자택에 방문했다.

간간이 만나게 된 호스트의 딸은 부친을 꼭 닮아 무척 귀여웠고, 이 시대에 히어로무비가 줄 수 있는 인간적인 가치에 대해서 토론하다보면 정말로 며칠이고 밤을 새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를 통해서 얻은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깨달음.

이후 캐나다 밴쿠버로 이동해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나머지 시퀀스를 견학할 무렵에, 조혁수는 자신이 만들어나갈 히어로의 가치를 확신하게 됐다.

‘히스는, 히어로야. 우리는 미쳐야만 완성할 수 있는 연기의 길 위에 있고, 히어로는 자신을 바쳐야만 얻을 수 있는 초월적인 걸 추구하지. 그 마음. 스스로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진정한 승화를 기원하는 그들의 노력이 팝콘무비로만 남을 리 없어. 나는······ 내 히어로는······ 초현실적이기에 가장 진하게 공감을 남기는 인물이 될 거야. 최고의 히어로가 이 안에 있다. 미진한 능력이지만 어떻게든 꺼내겠어. 그래야, 발인도 도울 수 없었던 그분께 향이라도 피울 자격이 생길 테니.’

이찬을 내보내고 호텔 방에서 홀로 마주한 안정록의 유지는, 사실 조혁수를 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장남에게 동생들의 미래를 부탁하며 미안해하는 노인의 작은 미련.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조혁수는 생각했다.

‘난 그 군인 놈이나 꼬마 놈보다는 나이를 먹었으니까. 원래 장남보다는 어린 놈들이 더 마음에 사무치는 법이야. 치사해도 어쩌겠어? 유언이니 들어드려야지. 그러니 강정후가 전역하기 전까지는 내가 꼬마의 빌런이다. 첫 히어로 배역에 미쳐서, 히스 이상으로 내 모든 것을 쏟아부음으로써, 이찬의 벽이 되겠다. 그 뒤에는······ 뭐 알아서들 하겠지.’

그렇게 조혁수가 귀국의 시기를 조율할 무렵, 히스 역시 그를 관찰하며 마음에 파문이 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사람은 미쳤어. 어쩌면 나보다도 더 연기에 미친 것 같아. 그리고 히어로무비에 대해서는 거의······ 첫사랑에 빠진 소년을 보는 것 같아. 나하고도 좀 더 붙는 씬이 많았다면 좋았을 텐데. 여러모로 배우고 싶은 배우란 말이야······.’

그렇듯 반년의 여행으로 만들어진 유대감이 입 밖으로 표출되는 일은 없었다.

감정의 표현에 수줍은 두 사람은, 그저 경쟁자로서 연기론만을 부딪쳤고, 영화의 촬영이 끝나는 즉시 헤어졌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분명히 있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촬영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뉴욕의 자택에서 약물 오남용으로 요절했을 한 배우의 운명은, 뜨거운 밤샘토론 속에서 역사의 직선 바깥으로 비껴갔다.

인연이라는 힘이 만든 나비효과였다.

*

“이거야, 형. 한번 살펴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양진원이 두터운 문건을 건넨다.

그 표지에 적힌 문구가 조혁수의 눈을 커다랗게 만들었다.

“<선비 : 영웅의 탄생>······. 드디어 초고 써냈구나.”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형도 이찬도 바라는 게 워낙 많아서. 제임스랑 통화한 시간만 따져도 10시간은 넘을걸? 그러니까 부탁해. 제발 고치라는 말은 하지 말아줘.”

“그거야 보고 나서 생각할 일이지. 고칠 게 있다면 다 지적할 거다.”

“아, 좀! 이찬이나 형이나 똑같아. 둘 사이에 껴서 내가 얼마나 머리 아팠을지는 짐작도 안 되지? 됐고, 나 잔다!”

토라진 듯 돌아서서 침대로 가는 양진원을 보며 씩 웃은 뒤에야 조혁수가 초고를 펼쳤다.

그리고 20분쯤 지난 뒤에 그걸 덮었다.

“마음에 들어.”

들어줄 사람이 잠들어버린 뒤에 나온 진심이었다.

‘소심하고 무기력한 청년이 초능력을 얻게 되며 마침내 선한 세계를 위한 책임감을 깨닫는 이야기······. 세계인들 모두가 공감할 만한 에피소드 속에서, 인간이 영웅으로 변해야만 하는 그 모든 마음들이 드러나고 있어. 이건 우리 모두의 이야기. 단지 적과 싸워 이기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각박한 세상 속에서 일그러졌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에 대한 염원을 일깨우는 이야기가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한 조혁수와 달리, 한국에서 맥주와 함께 초고를 확인한 이찬은 쩝쩝대며 입맛을 다셨다.

‘대립각도 좋고 인물 묘사도 좋고 전체적으로 괜찮긴 한데······ 이거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트릴로지라니. 한 편에 천억씩 쓰면 3천억인데. 너무 일이 커지는 느낌인걸.’

<다크나이트>와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촬영장을 바쁘게 따라다니며 양진원이 구상해낸 건 영화 한 편이 아니었다.

3부작을 통해 전개되는 영웅과 인간의 이야기.

그게 누구 머리에서 나온 발상일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 선배구만. 자글자글 풍선처럼 소심한 양 감독님이 말도 없이 이런 짓을 꾸밀 리 없으니, 그 선배가 바람 불어넣은 게 분명해. 안 할 것처럼 굴다가 갑자기 꼭 하겠다고 해서 왜 그러나 했었는데······ 미국에서 뭔가 느낀 게 많은 모양이지? 아마 그 히스 레저라는 배우 때문일 거야. 별로 특별한 점이 느껴지지 않는 배우였는데······ 내가 못 본 게 있었던 걸까.’

PC를 끄고 창가로 다가가, 이찬은 여의도를 내려다봤다.

이후 무수한 액션 씬이 촬영될 <선비>의 무대를.

‘선비의 수장이자 최초의 초능력자로서 무수한 부담감에 짓눌려 있는 태군. 무투파의 자존심으로서 자식이나 다름없는 제자들만을 생각하는 대한.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선비 역시 전략을 다각화해야 한다고 믿는 옥균. 예술을 이해하는 이들만이 선비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유화. 그리고······ 평범한 인간에서 영웅이 되길 강요당한 두 사람과, 위대한 뜻을 품고 거대한 빌런이 된 인류 최강의 남자. 뭐 좋아. 이 정도 볼륨이면 트릴로지도 나쁠 건 없지. 그걸 해내려면······ 1부에 무진장 공을 들여야 되겠는걸.’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찬은 미래를 그렸다.

아이언맨과 배트맨을 누르고 선비가 비상하는 그림을.

< 75장 - 영웅 조혁수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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