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장 - 작가 양진원 (2) >
미국 동부의 이민2세로서 한국계 미국인인 크리스 조(조혁수 분).
그의 부모는 대학에 다니던 아들을 남겨둔 채 한국으로 떠나갔고, 그 이후로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
그에 배신감을 느낀 크리스는 미국인으로 살리라 다짐하고 물리학자로서 연구소에 취직하게 된다.
그러나 폐쇄적인 시스템 속에서 자행되는 인종차별로 인해 얼마 지나지 못하고 퇴사하고 만다.
그런 크리스를 아끼는 유일한 친구 데이브 토마스(히스 레저 분)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휴양 겸 한국에 가보자고 권한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는 크리스는 그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런 나날의 와중, 새 직장을 찾으며 파트타임으로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던 크리스는 우연히 자신의 초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감자튀김을 꺼낼 집게가 없어 곤란해지자 오른손이 순간적으로 집게의 형상이 된 것.
그날 이후 크리스는 파트타임 잡마저 그만두고 아파트에 틀어박혀 공포에 떨기 시작한다.
“물리학자라는 설정 때문인 거죠? 해석할 수 없는 물리현상에 논리적으로 당황해버렸다는.”
스토리보드 체크 중 나온 이찬의 질문에, 양진원은 당황해서 뒤통수를 긁었다.
“어, 그렇게 느껴져? 그런 것도 있긴 한데, 그보다는 본능적인 공포인데. 내가 인간이 아닌 뭔가가 돼버렸다는 그런······. 혹시 NASA에서 날 가지고 실험을 했나? 아니면 내가 나도 모르는 새에 감마선에 노출됐나? 이런 거.”
“그런 거예요?”
“어. 그렇게 느껴져야 되는데······ 혁수 형은 어때?”
“나도 그 정도로 생각했어. 쟤 반응은 신경 쓰지 마. 대중과 한참 괴리돼 있는 녀석이니까.”
그 비난에 코웃음을 치며, 이찬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절친 역으로 히스 레저가 들어오면서 미국 파트에 볼륨이 생겼어. 다시 말해 영어로 진행되는 시퀀스가 더 많아졌다는 거. 거기에 더해서 물리학을 공부했으면서 도술을 사용한다는 아이러니가 흥미진진하게 느껴질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대중을 잘 아는 내가 뭔 괴리가 돼 있다는 건지 원.’
그 뒤에 등장하는 인물도 영어 사용자.
‘선비’의 해외파견부 팀장인 신옥균(구진철 분)이 잠겨 있던 크리스의 방문을 자연스레 열고 들어온다.
그를 통해서 마침내 크리스는 세상에 꽤 많은 수의 초능력자가 존재하며, 그중 다수가 부모님의 모국인 한국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 호기심을 느껴 데이브와 함께 한국을 찾은 크리스는 친구가 잠든 사이에 선비 멤버들과 접촉한다.
‘이때부터는 한국어가 주로 사용되는 시퀀스지만, 크리스가 아직 한국어에 미숙하다는 설정이라 옥균이 통역으로 나서면서 그 생소함을 중화하게 됐어. 그리고 선비 지부의 외부 디자인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한국 가옥이니 북미 관객들의 오리엔탈 판타지도 만족시킬 수 있을 거고. 거기에 여기부터 진행될 시퀀스는 그야말로 히어로무비의 전형.’
선비 서울지부의 2인자인 성유화(이채진 분)와의 면담을 통해, 크리스는 자신이 강력한 도사의 환생이며 양친이 아들의 초능력을 감춰주려 연락을 끊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부모님이 선비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라는 것도.
가족과 재회해 오해를 풀고 오래 쌓였던 앙금을 해소한 크리스는, 그때부터 심적으로 선비에 반발하게 된다.
겉으로는 유화의 교육을 받으면서도 데이브와 비밀리에 연락하며 지부를 탈출할 계획을 세우는 크리스.
그렇지만 결행의 날에 트러블이 발생한다.
한국 내 범죄집단인 백호파의 습격이 바로 그것.
‘한국엔 총 쓰는 조폭이 거의 없으니 핍진성 면에서 비판을 받을 포인트지만, 어차피 판타지니까 상관없겠지. 초능력자들의 위기를 보여주려면 총기가 필수야. 그리고 북미 관객들은 갱이 총기를 안 쓰면 그걸 더 이상하게 생각할 거고.’
무시무시한 수준의 화망에 의해 외부가 뚫리는 와중에 백호파의 초능력자들까지 전선으로 나온다.
크리스가 부모님을 지키기 위해 그들에 맞서 싸우지만 역부족.
결국 괴력의 초능력자에게 당해 일가족이 몰살당할 상황에 이르는데, 그때 서울지부 팀장인 이광렬(까메오, 소해진 분)이 염력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대신 치명상을 입는다.
멋대로 연금하더니 이제는 목숨 바쳐 구하냐고 외치는 크리스에게 이광렬이 전하는 이야기가 1막의 클라이막스.
초능력자들이 세상에 방치되는 상황의 위험성은 저 백호파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라며, 그렇기에 강제적인 수단으로라도 크리스를 찾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죽어가며 크리스에게 부디 서울의 선비가 되어 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달라 부탁한다.
그 말에 각성한 크리스가 각종 둔갑술로 백호파를 밀어붙이기 시작하지만 이미 세가 기운 상황.
마침내 최후를 직감하고 부모님께 사죄하는 크리스의 뒤로, 옥균이 불러온 본부의 최강자들이 도착한다.
그게 바로 태군(조연식 분)과 대한(정용태 분).
태군이 손짓으로 광풍을 일으켜 총기를 무력화하고 정용태가 괴력의 초능력자를 쓰러뜨린 뒤, 옥균과 유화가 그 잔당을 포박한다.
이후 태군은 자신의 제자인 이광렬의 시체를 풍장한다.
마치 시간을 빠르게 돌린 것처럼 조금씩 재가 되어 사라지는 신체. 그를 보며 태군의 눈시울이 붉게 물든다.
초능력자란 시신조차 각국이 노리는 전략병기이기에 매장을 할 수 없다는 옥균의 설명을 들으며, 크리스는 몸조차 온전히 남길 수 없는 선비들의 희생에 경외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 이후 태군과 마주섰을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한참 늦게 출동한 경찰들이 백호파를 압송해가는 모습은 미국인 크리스에게 낯설어 보인다. 그렇기에 소중한 제자들을 몰살시킨 자들을 왜 살려 보내냐고 태군에게 따진다.
태군은 그 말에 그저 슬픈 미소를 보일 뿐, 이렇다 할 훈계 없이 그 자리를 벗어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파벌이 갈리는 거지. 무투파의 거두인 대한 역시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온 인물이고, 그렇기에 패기 있는 크리스에게 직접 무술을 가르쳐서 중책을 맡기려 해. 이게 또 히어로무비다운 전개이자 동양적 가르침을 통해 신비감을 주는 시퀀스가 될 거야. 메이웨더를 꺾은 정용태 선배님의 임팩트에 북미의 청년들이 꽤 흥미를 느끼겠지.’
목숨으로 부모님을 지켜준 이광렬의 풍장을 보며 초능력자로서의 의무에 눈을 뜬 크리스는, 가족과 힘없는 시민들을 지키고자 열성적으로 대한의 훈련에 임한다.
그 끝에 역대 최고의 성적으로 훈련소를 졸업해 선비들을 이끌 차세대 리더로 인정받는다.
한편 그동안 비어 있는 서울지부를 관리한 건 옥균과 유화.
옥균은 강력범들이 변사체로 발견되는 일이 잦아짐을 알고 그 배후를 추적해 태군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유화는 동료들을 모두 잃은 슬픔을 달래려 예술에 탐닉하고, 그 과정에서 아시아 최고의 무용수로 손꼽히는 한유일(이찬 분)과 교류하게 된다.
그 즈음에 서울지부의 신임 팀장으로 부임한 크리스는 곧바로 초능력자 범죄조직 7인회의 소탕에 나선다.
뛰어난 지휘력으로 옥균, 유화의 능력을 활용하며 적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크리스.
그렇지만 그들을 막 포박하려는 찰나에 고민이 시작된다.
저들을 살려서 경찰에 인도해도 괜찮은 건가?
이광렬을 비롯한 선비의 초능력자들은 자신의 육신까지 포기하고 죽음으로 질서를 수호하고 있는데, 교화가 가능하다 믿고 저 불법자들을 감옥에 보내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그 고민의 와중에 더 댄서(이찬 분)가 등장하는 것이다.
댄서의 폭풍 같은 무술에 서울지부 팀은 추풍낙엽처럼 밀려난다. 건물 밖에서 태세를 정비해 다시 그를 습격하지만, 7인회 간부들의 시체와 쪽지 하나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땅에서 범죄의 씨앗을 제거하려 하니 그 앞을 막지 말라는 내용.
이제는 익숙해진 한글을 영어로 해석해 입에 담으며 크리스의 두 눈이 흔들린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주인공의 고뇌가 격화되는 거지. 더 댄서는 인간을 자의적으로 학살하는 악당이다. 그렇지만 그가 죽이는 건 오직 범죄자뿐. 그렇다면 그는 잡아야 할 적인가 아닌가. 세상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건 희생하는 선비가 아니라 단죄하는 댄서 쪽인 게 아닌가.’
그의 보고를 들은 태군은 댄서를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한다.
학살자라 해도 회개할 수 있다고 말하는 태군을 보며 크리스는 그가 댄서의 정체를 알고 있으리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후 자기 제자들이 한 명에게 패퇴했음을 알게 된 대한이 직접 댄서를 추적하고, 며칠 뒤에 두 다리가 잘린 모습으로 실려 오게 된다.
그때는 태군도 분노해서 댄서에 대한 대응에 나선다.
그러나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댄서는 선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크리스가 스스로 살인범의 대역이 되어 그를 끌어내겠다는 계책을 낸다.
하지만 한발 앞서 대역으로 나선 건 태군.
서울지부에 데이브와 함께 억류된 상태에서, 크리스는 태군이 댄서의 손에 목숨을 잃었음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가 3막. 크리스는 태군을 직접 풍장하며 그의 유서를 발견하고, 거기서 최강의 초능력자에 대한 단서를 얻게 돼. 하지만 대한과 태군 두 거목을 잃은 선비 조직이 흔들리기 시작하지. 그런 어려움 속에서 간신히 발견한 건 10대 소녀에 불과하고. 그녀에게 기초적인 도술을 가르치면서 가망이 없다고 느낀 크리스가 결국 옥균, 유화와 함께 마지막 결전을 치르기 위해 나서는 거야.’
하지만 홀로 남은 지윤(송유리 분)은 자신을 떠나며 크리스가 남긴 따스한 미소에서 오래 전 세상을 뜬 부친을 떠올리고, 자신의 안에 숨겨진 강력한 힘을 깨닫는다.
그렇게 네 명의 결사대가 최강의 빌런과 맞서 싸우는 게 <선비> 1부의 대단원이었다.
큰 부상만 입고 모습을 감춘 댄서에 대비해 조직을 재건하는 크리스와 그 동료들의 모습이 에필로그.
‘거기에 쿠키영상으로는 DC 히어로가 등장하게 된다는 거지. 흐름이 나쁘지 않아. 대중과 절대 괴리되지 않은 내 눈에 이건 재밌겠다 싶어. 그리고······.’
이찬은 조혁수를 바라보며 결정적인 질문을 건넸다.
“선배. 선배는 어때요? 이거 재밌어요?”
“어. 무지하게 재밌다.”
“어······ 그럼 안 되는데? 흥행 못 한다는 거잖아요?”
“하. 멍청한 놈아, 언젯적 얘기냐? 히어로무비에 있어선 내 눈도 정확해. 내가 바라던 바로 그 작품이야. 양 감독이 내 꿈을 이뤄줬어.”
어깨를 토닥이는 조혁수에게 머쓱한 듯 웃는 양진원.
그들을 바라보며 이찬은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좋아요. 만족스럽네. 히스 레저가 들어온 덕분에 초반부 볼륨이 확장되면서 영어 시퀀스가 많아진 건 확실히 북미 관객들에게 어필이 될 거예요. 어떻게 보면 외국어영화가 아닌 것처럼도 보일 정도니까. 기승전결도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보면 어정쩡한 결말이긴 하지만 임팩트 있는 최종전이라 1부만으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줄 수 있을 것 같고. 그렇지만 딱 하나가 아쉬운데요. 후반부에 비해 도입부의 임팩트가 약해요. 거기에 뭔가 하나 들어가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느낌도 드네. 예를 들면 <다크나이트>에서 조커가 나타났던 그 인트로처럼?”
“예. 처음부터 확 몰입하게 해줘야 좀 더······ 어?”
말하던 와중에 이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쪽으로는 재밌는 게 하나 나올 것 같기도 한데요.”
“재밌는 거? 어떤 거?”
“댄서가 나오면 어떨까요? 임팩트 있게.”
“어? 그렇지만 댄서 과거사는 2부에서 조명할 건데? 그쪽을 미리 보여주면 주인공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질 거라고 했잖아?”
“과거사 말고요. 우리 미국 촬영이 먼저라고 했죠?”
“어, 그렇지. 세트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하니까, 우선은 미국 건너가서 초반부 로케이션 시퀀스부터 찍고 있는 거지.”
“그럼 그동안 전 스케줄 없는 거죠?”
“그, 그렇지? 예능 같은 데 나가서 홍보해주면 좋겠다 싶긴 한데.”
“안 해요. 그냥 같이 미국 가죠. 거기서 촬영하시는 동안 전 스포츠나 좀 해보려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발언에 양진원의 얼굴이 굳었다.
“스포츠······ 전에 말한 이벤트매치? 너 다치면 안 되는데.”
“안 다치겠지만, 그건 안 하려고요. 솔직히 복싱이 꽤 인기 스포츠라곤 하지만 최고는 아니죠. 개인이 할 수 있는 스포츠 중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 뭐죠, 양 감독님?”
“어, 글쎄? 개인이면······ 골프?”
“그거죠. 인기도 있고 돈도 되고. 겸사겸사 영화에 쓸 시퀀스 마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엔 조혁수가 고개를 흔들며 나섰다.
“뭔 헛소린지 원. 이찬, 네가 골프대회 우승까지 할 수 있는 괴물이라는 건 잘 알지만, 그런 걸 액션영화에 어떻게 쓰냐? 처음부터 졸릴 거다.”
“그런가? 아닐걸요? 잠이 확 깰 텐데?”
“이유나 들어보자. 왜?”
“프로 데뷔하자마자 메이저 3개 대회를 섭렵한 천재. 부상투혼 속에서 통산 14회의 메이저 우승 기록을 완성한 골퍼. 포브스 셀러브리티 100의 단골 2위. 누구게요?”
“누군데?”
“타이거 우즈요. 감동의 US오픈 우승 뒤에 재활을 위해서 휴식기 들어가신 그분을 재현하려고요. 급속해동으로.”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메이저대회 우승해서 영화 제작비도 벌고, 영화 인트로에 쓸 감동적인 장면에 임팩트도 더하고. 그런 거예요. 양 감독님, 회장님한테 얘기해서 미국행 티켓 네 장 더 잡아주세요. 유리 너도 같이 가자. 괜찮지?”
송유리는 몹시 불만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 방학숙제 해야 되거든요?”
“그깟 거 맘먹으면 한 시간 안에 하잖아? 너도 이참에 미주에 얼굴 좀 알려야지. 그럼 그렇게들 알고 계세요.”
자기 할 말 마친 이찬이 회의실을 나선 뒤, 양진원이 허탈해져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메이저대회 우승······ 흐아. 세계 골퍼들의 꿈을 떼놓은 당상처럼 말하는 거야 그렇다 치고. 대체 타이거 우즈랑 임팩트 있는 인트로가 뭔 상관인 거지?”
그보다 이찬과 오래 알아온 조혁수 역시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만 가장 어린 송유리가 해답을 이야기했다.
“탈을 쓴 댄서가 타이거 우즈의 폼을 재현해서 우승하면 화제가 될 거예요. 마침 그가 부상으로 재활 중인 상황이니까 특히 대단한 이슈가 되겠죠. 그러면 우즈 본인과도 만날 기회가 있을 거고, 그때 출연을 종용할 수도 있을 거고. 그래서 댄서와 우즈가 영화에 삽입되면······ 픽션과 리얼리티가 혼재되는 거죠. 모든 관객들이 넋을 놓고 보게 될 거예요.”
“······너, 진짜 천재구나?”
“······아, 아닌데요? 그냥, 찬이 오빠가 해준 말인데요?”
황급히 평범한 척 연기하지만,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 76장 - 작가 양진원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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