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12화 (212/250)

< 76장 - 작가 양진원 (3.) >

양진원에게 있어서 이찬이란 배우는, 외계인 같은 존재였다.

처음 만난 건 두 번째 찬 영화제에 당선돼 <아저씨> 촬영을 준비하던 때.

당시 무수한 천만영화에 더해 한 편의 독립영화를 상업영화 이상의 흥행으로 마무리하며 별 중의 별이 돼 있던 이찬은, 경력도 없는 양진원의 연출을 전적으로 믿겠다 선언하며 웃었다.

그렇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액션이 주축이 되는 영화인 관계로, 액션감독까지 겸하기로 된 이찬이 그의 콘티 전반에 관여했던 것이다.

감정이 얽히는 장면들을 제외하면 그 대부분이 이찬 스타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평단과 대중의 격찬을 끌어내며 양진원을 일약 스타 감독으로 만들었다.

‘사실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냥 이찬의 영화였다고 말해도 무방해. 그리고 이번 영화 역시 핵심적인 설정들은 그 녀석이 생각해냈다고 볼 수 있어. 난 그저 <다크나이트> 촬영 견학하면서 놀란 감독에게서 배운 헐리웃 스타일로 소재를 재가공했을 뿐이야. 그랬는데 그걸 보고 놀란 감독이 날 극찬했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세공사인 나보다는 원석인 찬이가 크게 기여한 게 분명해.’

물론 아이디어를 내는 것과 그걸 구성해서 시나리오로 만드는 건 전혀 다른 분야. 아이디어라면 꼬마라도 낼 수 있다.

그 정황이 이찬에게 작가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추론으로 이어질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지만 양진원에게 경외감을 심어주기엔 충분했다.

‘겨우 스무 살인데. 남들은 연기 하나만 파기도 벅차서 매일 고민하고 방황할 시기에, 이미 작품 전반에 관여하고 있는 거야. 그게 괜한 간섭이 아니라 매번 확실한 결과물을 냈어. 그렇지만 이찬은 그걸 자랑거리라고 생각지도 않아서, 나한테는 무조건 혼자 떠올린 아이디어라고 말하라 했지. 정말 희한한 녀석이야.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80%.’

<아저씨> 때 50%였던 게 대폭 상승한 수치.

정말로 외계인을 믿는 것도 아니면서, 양진원은 장난스레 그 확률을 메모해놓곤 했다.

조혁수와 오래 함께하며 기록하는 습관이 전염된 탓이었다.

미국에 도착하고 한 달 가량이 지나 이찬이 첫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는, 그 확률이 85%로 상향됐다.

‘로케이션 선정에 현지 배우들 캐스팅까지 따라다니느라 연습할 시간은 겨우 2주 정도밖에 없었을 텐데, 곧바로 우승이라니? 이게 일반적으로 가능한 일인 건가?’

그에 대해 조혁수에게 푸념처럼 의혹을 털어놨지만, 이찬과 관련된 일에 상식을 들이대면 곤란하다는 답변만 들었다.

그렇지만 이찬은 짧은 기간에 세 개의 대회에서 연달아 우승을 따내고 프로 계약을 따냈다.

그건 비상식의 영역에서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천재 타이거 우즈조차 프로에 발을 디딘 건 만 20세.

이제 갓 19세가 되어 겨우 세 차례 출전한 이찬이 나이키와의 계약을 따냈다는 건 코믹스에도 나오기 힘든 판타지였다.

거기에 그 계약금이 우즈의 계약금과 동일한 4천만 달러에 계약기간이 단 8개월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불가해했다.

굳이 대자면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아마추어 대회이기에 용인되었던 독특한 탈의 착용 덕분에, 3포인트 덩크의 더 댄서가 골프대회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세계적인 화제.

거기에 초창기 타이거 우즈의 경기를 그대로 재현한 플레이가 스포츠지의 관심을 샀다. 그는 이제 골프계를 뒤흔드는 폭풍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그 아마추어 시절의 기록들이 대단했다.

마지막 대회의 파72홀에서 15언더파 57타라는 믿기지 않는 성적까지 냈으니 관심이 쏠리는 것도 당연했다.

거기에, 마침 프로 데뷔 무대가 그 타이거 우즈와 동일했다.

그레이트 밀워키 오픈.

전설의 ‘타이거’가 처음 잡았던 프로무대에 동양의 기인 역시 출전한다는 사실에 팬들이 기대와 우려를 함께 표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또 다른 전설.

프로에 나와 탈을 벗은 19세의 신인은 전성기의 타이거를 그대로 복사한 폼으로 무려 25언더파 264타의 신기록을 쓰며 첫 PGA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때는 북미 전역의 저명한 일간지들도 이찬의 기묘한 평행이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타블로이드 가십지에서 자극적인 표현이 도배된 기사들로 그의 등장을 반겼다.

「 골퍼 이찬 - 신의 등장인가, 악마의 강림인가?

그레이트 밀워키로 데뷔한 신예 골퍼의 활약이 충격적이다.

기괴한 탈을 쓰고 ‘한’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던 한국의 배우 이찬은 탈을 벗고 참여한 생애 첫 PGA투어에서 무려 25언더파를 완성하며 기록적인 우승을 일궈냈다.

유달리 강한 바람 속에서도 이 신인은 주눅 들지 않았고, 결국 나흘 연속 선두를 유지하며 앞으로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대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이하지만, 이를 그가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한 지난 8월까지 소급하면 충격이 더해진다. 리는 이제껏 출전한 네 개의 대회에서 전부 2위와 15타차이로 우승했다.

세계적으로도 좀처럼 보기 힘든 기록이며 PGA에서는 오직 타이거만이 이룩했던 일.

타이거의 폼을 재현한 신인이 그가 세운 전설을 매번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올 8월 이전에 그 어떤 대회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며,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이전까지 아이언을 잡아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리는 신이나 악마의 화신인 게 분명하다.

이미 NBA의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3포인트 덩크슛을 성공시키며 세계를 의문에 빠뜨렸던 19세가 PGA에서도 신화를 쓰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지만 리는 그 어떤 인터뷰도 받지 않고 있으며, 대회를 마친 직후 트로피만 챙긴 채 모습을 감췄다.

나이키 역시 그와의 계약이 1년 미만이라는 사실 외에는 어떤 정보도 공개하지 않고 있어 의문이다.

그는 과연 인간이 맞을까?

어쩌면 신이나 악마는 아닐까?

혹은 최첨단 기술로 완성된 유전자 조작 신인류일지도. 」

“별 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은.”

신문을 대충 구석에 던지는 이찬을 보며, 양진원은 그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야, 찬아.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뭐가요?”

“15타차 말이야. 너, 마음만 먹으면 무조건 15타차를 만들 수 있는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게 되면 진짜 신이나 악마겠죠. 전 인간이에요. 바람이나 잔디의 세세한 상태까지 다 읽어낼 순 없다고요. 매번 이글 치는 건 불가능한 거죠.”

“그렇지만 무지하게 쳤잖아? 너 거의 이글맨······.”

“······그 지루한 걸 보고 계셨어요? 이해가 안 되네. 그럴 시간에 스토리보드나 검토하세요.”

그 말 그대로 이찬의 타이기록은 상당히 아슬아슬했다.

완벽하게 신체를 통제할 수 있으며 400야드 이상 공을 날릴 수 있는 힘까지 갖췄기에 매 타 홀인원도 가능한 그지만, 그거야 이론적인 얘기일 뿐.

바람의 방향을 고려하고 잔디 상태를 파악하는 측면에선 말 그대로 신인이었기에 이글조차 쉽지 않았다.

그레이트 밀워키 오픈 때는 특히 바람이 거세 10타차까지 쫓기기도 했다.

2위 선수가 역전이 불가능한 차이에 심적으로 흔들리지 않았다면, 결코 15타 차이를 완성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지만 그건 고백할 필요 없는 사실.

이찬은 거기까지만 이야기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양진원 역시 연하의 스포츠스타에게 꾸지람을 들은 일에 서운함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 대신 조혁수의 방에 찾아갔다.

“크리스 형!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

“내가 왜 크리스냐? 이름 제대로 불러.”

“아······ 미안, 혁수 형.”

“그리고 이찬이 인간인 것 같지 않다는 말이라면 지겹다.”

“에이, 그 얘긴 이제 안 하지. 그게 아니라 우리 인트로 말이야. 찬이는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유리가 말한 픽션과 리얼리티의 혼재라는 건 어떤 씬을 말하는 걸까?”

“유리한테 물어보지 그래? 난 모르겠다.”

“걘 절대 말 안 해주던데. 모르겠다는 말만 하더라고.”

조혁수는 픽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그 녀석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지만······ 말해주기 싫은 모양이지. 이찬하고 동류로 취급받는 걸 이상하게 싫어한단 말이야.’

아마도 히스 레저와 카드게임을 하고 있을 송유리의 마음을 고찰해보다가,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 같은 위대한 작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냐.”

“아, 그런 말 좀 하지 마. 내가 무슨 위대한 작가라고.”

“충분히 위대하지. 이찬을 저만큼이나 끌어냈잖아.”

“응······?”

“저놈이라고 신이나 악마는 아냐. 안 될 일은 안 되는 거다. 그럼에도 죽을힘을 다해서 인트로를 준비하고 있어. 네 시나리오를 보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거지. 그래서 네가 만든 작품으로 DC의 히어로들을 엮으려는 거야. 그 노력에 보답하려면 너도 한가한 생각이나 하고 있어선 안 될 거다. 진원아. 너도 꿈이 있다고 했잖아? 내 꿈은 이미 이찬이랑 네가 이뤄준 셈이지만, 넌 딱 여기까지만 꿈꿨던 놈이 아니잖냐?”

그 말에 비로소 양진원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떠올렸다.

이미 그의 스토리보드는 워너 브라더스의 주요 제작자인 놀란 감독으로부터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제작 중인 영화는 화제성이 보장된 작품.

이찬의 괴물 같은 활약이 북미인들의 기억에서 몇 년 안에 잊힐 리 없으니, 그가 주역으로 활약할 영화는 적어도 3000개 이상의 스크린을 따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양진원은 이제 단 한 걸음만을 남겨뒀다.

자신이 구상한 히어로를 세계 모든 이들이 열광하는 최고의 영화로 선보이겠다는 어린 날의 꿈까지.

“······그러네. 내가 이찬 취미생활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지.”

“알았으면 좀 나가라. 안 그래도 대사 많아서 힘든데 방해하지 말고.”

“하하하. 형, 내일도 잘 부탁해. 또 멋진 시퀀스를 찍어보자. 우리도 이찬 녀석이 놀랄 만한 물건을 만들어보자고.”

*

<다크나이트>가 한국에서 마침내 1600만 관객을 달성하고, 그 월드와이드 흥행성적이 11억불을 돌파했다는 사실이 발표된 10월 초.

<선비>의 미국 로케이션 촬영이 거의 마무리되던 시점에 받은 문자가 양진원의 눈을 커지게 만들었다.

「 이찬님 : 오늘 타이거 만나요. 」

부연설명 없이 딱 그뿐인 문자.

뉴욕의 터닝스톤 리조트 챔피언십에서 두 번째 프로 게임을 진행 중일 그는, 이미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였다.

‘설마 이렇게 빠르게 성사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자기 폼으로 자기 신기록의 타이를 반복하고 있다는 괴물에게 그 전설적인 선수도 호기심이 커졌던 모양이지? 아마 나이키 쪽에서 다리를 놔준 게 더 컸겠지만.’

이찬과 프로 계약을 체결한 나이키골프 쪽의 사정은 양진원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세계 스포츠의 아이콘이었던 타이거 우즈의 재활로 인해 그의 위상을 이어갈 새로운 스타가 필요했고, 거기에 탈을 쓰고 나타나서 괴물 같은 실력을 보이는 이찬이 포착됐던 것.

그렇기에 검증되지 않은 선수와 1년도 안 되는 계약을 체결하는 데에 4천만 달러를 퍼부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를 통해서 나이키는 세계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를 발굴한다는 명성을 이어갔으며, 이찬은 상당한 계약금을 얻어내는 한편으로 타이거와 회사 동료라는 연결고리를 얻게 됐다.

‘거기까지도 미리 짐작했다는 점이 특히 무서운 거지. 아무래도 이 녀석은 인간이 아닌 것 같아. 이제 99% 확신했어.’

그러나 감탄은 길지 않았다.

괴물 같은 빌런 이찬의 도움에 보답하며 그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양진원은 잡념을 지우고 히스 레저와 조혁수의 연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히스는 정말 대단한 배우야. <다크나이트> 때와도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때와도 전혀 다른 캐릭터고 작중의 비중도 절대 높지 않은 인물인데, 그걸 너무나 완벽하게 소화한 탓에 모니터 밖으로 생명력이 넘실거려. 내가 날림으로 만들어낸 사소한 배역에 대한 애정으로 책 한 권 분량의 일대기까지 써냈다고 했지······.’

그건 사실 조혁수의 영향.

캐릭터의 모든 것을 분석하고 메모를 작성하던 동양인에게서 영감을 얻어 실행한 기행이 최고의 스타배우를 한 단계 더 진화시킨 셈이었다.

마찬가지로 조혁수 역시 히스 레저를 통해 변화해 있었다.

‘혁수 형은······ <다크나이트> 때랑 뭔가가 달라졌어.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혁수 형이라고 부르는 게 오히려 어색해서 무심코 크리스라고 부를 정도로. 저걸 뭐라고 해야 할까? 혹시 아우라라는 게 아닐까?’

이찬이 봤다면 벌써 직선을 완성했냐며 놀랐을 두 사람의 연기를 모니터링하며, 양진원은 조금씩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저토록 대단한 배우들이 자신의 디렉팅을 따르고 있다.

그의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를 신뢰하며, 사소한 애드립조차 먼저 상의하면서 씬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러니 그 역시 이미 인간은 아닌 셈이었다.

‘이찬이 신이든 악마든 뭐 어때?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은 나 역시 마찬가지야. 작가인 나는 이 세계의 신이야. 내가 만든 세계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서 세계에 보여줄 거야. 그거야말로 두 세계의 만남인 거지. 헬로 월드!’

처음 프로 계약을 발표하던 타이거 우즈의 전설적인 한마디로 생각을 마무리한 양진원은, 이후 촬영을 마무리할 즈음에 이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어, 찬아! 우리 촬영 방금 끝났다. 경기는 어떻게 됐어?”

[뉴스도 안 보고 집중하셨나 보네요? 잘하셨어요. 15타차 우승이고 이번엔 홀인원도 하나 했네요. 아무튼 다음 촬영 준비해주세요. 타이거랑 같이 그린에서 찍을 거예요.]

“어······ 어? 바, 바로? 오늘 처음 본 거 아니었어?”

[그렇죠. 지금 같이 있어요. 저한테 새로운 스윙 하나 배웠죠. 무릎에 가는 부담을 최소화한 스타일이라, 재활 조금만 더 하면 복귀해서 우승할 거예요.]

“새로운 스윙을······ 가르쳤다고? 골프황제한테?”

[황제고 황제의 관료들이고 사람 몸은 잘 모르더라고요. 새 스윙 해보고 무릎이 훨씬 편하다며 신났어요. 아무튼 그 복귀 우승 타이밍이랑 영화 개봉일을 가깝게 붙일 거예요. 대충 이런 흐름이에요. 타이거가 복귀하자마자 우승한다-영화에 댄서가 타이거 스윙 폼 가르쳐서 우승시키는 씬이 들어간다. 마치 미래를 예견한 것 같은 시퀀스니까 이래저래 임팩트 있지 않겠어요?]

그날, 양진원은 자신의 확률 메모를 모두 찢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이찬은 작가다.

나처럼 영화를 만드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의 삶 자체를 직접 기획하고 스토리보드로 만들어나가는, 삶의 작가.

픽션과 리얼리티를 혼재시켜버리는 트루찬 쇼의 작가.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는 신이다.

100%다. 」

< 76장 - 작가 양진원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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