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장 - 제자 송유리 (1) >
<다크나이트>가 11억불의 흥행을 기록한 건, 영화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이벤트였다.
그것이 최초나 최고의 기록이었던 건 아니다.
두 타이틀이 97년에 세계 최초로 18억불을 기록한 <타이타닉>에 묶여 있어, 2008년작 <다크나이트>는 10억 달러를 돌파한 네 번째 작품이자 세 번째로 많은 매출을 낸 영화에 불과했다.
그러나 10억불 매출작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타이타닉>은 시대극.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과 <캐리비안의 해적 : 망자의 함>은 판타지.
<다크나이트>는 10억 달러라는 상징을 이룩한 세계 최초의 히어로무비였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코믹스를 바탕으로 한 히어로무비는 영미권을 위한 영화.
기존 팬이 아닌 이상 관심을 갖기 어려워, 상대적으로 북미나 영국 외에는 약세를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아이언 맨> 같은 걸작도 6억불에 달하는 매출의 절반 이상이 북미에서 나왔다.
<다크나이트>의 북미 5억 4천만 달러 매출이 <타이타닉>의 6억 6천만 달러에 이은 2위인 건 그런 까닭이었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는 월드와이드 11억불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거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한국에서 1613만 관객이 만든 약 1억 달러 매출이 비슷한 문화권인 영국의 9천만 달러마저 제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수익을 안겨줬던 것이다.
4순위인 호주가 4천만 달러 수준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히어로무비 3대시장의 한 축이 된 셈.
거기엔 물론 세 악역 중 한 명으로 등장한 한국인 조혁수의 공이 컸다.
그가 <다크나이트>에 출연한다는 기사 이후로 전작인 <배트맨 비긴즈>의 DVD 판매량이 급속도로 신장됐던 것.
그 과정을 통해서 배트맨 세계관을 학습하고 시리즈의 팬이 된 사람이 많지 않았다면, 1600만이라는 충격적인 수치는 나올 수 없었을 터였다.
한편으로 조혁수의 모국이기에 최고의 배우들이 내한해 진행했던 월드프리미어 이벤트도 이슈가 됐다.
그때 보여준 골수팬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배우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그로 인해 영화 개봉 이후의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모션 국가로 손꼽혔던 것.
세계 영화인들의 뇌리에 한국이란 나라가 각인되기에 충분한 에피소드였다.
그렇게 한국시장이 각광받게 된 한편으로 조혁수 역시 원하던 것을 얻었다.
단지 1막에 나왔다가 사망하는 비중 낮은 악역이지만, 짧은 분량 속에서 보여준 몇몇 연기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것.
특히 홍콩 시퀀스에서 브루스 웨인과 심리전을 치른 눈빛 연기나 조커와 몸싸움을 벌인 중반부 시퀀스 등이 세계 최대의 영화정보 사이트 IMDb의 메시지보드에 자주 언급되었다.
하지만 그 영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조커 역의 히스 레저.
추산하면 세계적으로 1억에 달하는 관객이 관람한 영화에서, 그는 전설적인 잭 니콜슨의 조커를 지워버렸다.
평론가들은 그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연기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웃음기도 없이 내뱉곤 했다.
그렇게 나날이 네임밸류를 높여가고 있는 히스 레저를 보며, 양진원 감독은 종종 죄책감 섞인 말을 건네기도 했다.
“네게 고작 그 정도 계약을 제시해선 안 됐던 건데. 정말 미안할 따름이야.”
“하하. 양, 그렇게 미안하시면 2부에서 중요한 역할 좀 주세요.”
“뭐······? 2부에도 출연해주겠다는 거야?”
“그야 물론. 저 여기서 죽는 거 아니잖아요?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가 갑자기 안 나오는 것도 이상할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 헐리웃 거장들이 히스 레저를 잡아야만 한다고 난리들이라던데?”
“그러니까요. 절 꽉 잡으셔야 돼요, 양.”
그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양진원이 머릿속에서 2부의 컨셉을 조금씩 수정하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타이거 우즈가 까메오로 나선 마지막 씬까지 촬영을 마친 <선비 : 영웅의 탄생> 팀은, 길었던 해외 로케이션 일정을 마무리하고 귀국길을 준비했다.
다만 그 항공편 명단에 이찬은 없었다.
그가 촬영할 분량은 후반부 절반뿐. 다른 배우들이 씬을 모두 마무리한 뒤에 귀국해도 무방하니, 당장은 취미생활을 지속하겠다는 이유였다.
“곧 아시아 투어가 시작돼요. 그때 타이거랑 같이 싱가폴로 갈 거예요. 이번 계약금으로 CG 비용은 충당됐지만, 개인적으로 돈 좀 더 벌어두려고요. 최고의 스타로서 전용기 하나쯤은 있었으면 싶거든요.”
“어······ 전용기라니······ 스케일 참 거대하네.”
“1억 3천만 달러짜리 영화 만드시는 감독님이 하실 말씀인가? 아무튼 한국에서도 촬영 잘 진행해주세요. 배우들 연기 쪽으로는 조혁수 선배님 의견에 따라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촬영분 보니까 믿고 맡겨도 되겠더라고요.”
“어,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예를 들면 정용태 그분은 아직 좀 감정연기가 미숙하지 않을까 싶은데. 네가 도와줘야 되지 않을까?”
“그럴까 싶어서 숙제 내드리고 왔어요. 액션스쿨에서 무투파 부하들 데리고 감정연기 리허설 진행하고 계시죠. 종종 화상통화로 봐드리고 있는데, 현장에서 조혁수 선배가 리드해주면 그럭저럭 자기 몫 하실 것 같아요.”
그 일방적인 통보로 촬영의 총책임자를 돌려세운 뒤, 이찬은 송유리의 방문을 받았다.
이쪽은 떨쳐내기가 좀 더 까다로운 코스였다.
“나빠요 진짜. 제자는 방학 내내 촬영장에서 뺑이 치게 하고 들로 산으로 쏘다니더니, 또 혼자 미국에 남겠다고요?”
“들로 산으로 쏘다닌 게 아니라 제작비 벌었던 거잖아. 소년가장 같은 활약에 감동하진 못할망정 따지냐? 그리고 뺑이 그딴 말은 누구한테 배운 거야?”
“히스 삼촌한테요. 혁수 삼촌한테 배웠다면서 알려줬어요.”
“금발 외국인한테서 비속어 배우지 마라. 다른 걸 배워. 완벽에 가까운 연기라든지.”
“그 삼촌 연기 잘한다고 인정하는 거예요?”
“인정 안 하면 어쩌겠냐? 이미 세계 평론가들이 쌍으로 엄지 치켜들고 있는데.”
솔직한 심경을 말하자면, 이찬은 히스 레저의 연기에 압도되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미국에 남기로 한 데에는 그 감정 역시 일부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었다.
‘저쪽도 그렇고 조 선배도 그렇고, 명품 영화 찍으면서 연기에 물이 올랐어. 이제는 정말 흠 잡기 힘들 정도의 직선이야. 미친놈들이지 진짜. 희대의 천재인 나도 완성하기 힘든 걸 그저 미친 열정만으로 이뤄내고 있으니까. 영화에서 저 배트맨 빌런들한테 지지 않으려면 나도 좀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어. 댄서가 조커한테 밀려선 안 된단 말이야.’
그렇지만 그것까지 입에 담기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에, 이후로도 이찬은 송유리에게 한참 시달렸다.
“어차피 아시아 올 거면서 왜 한국은 안 가요? 진짜 이해 안 돼. 오빠 안 가면 나도 안 갈래요.”
“뭐? 이게 미쳤나. 야, 유급 당할래? 벌써 한 달 넘게 빠졌는데 이젠 돌아가야지.”
“영화 때문이라고 하면 돼요. 저학년 때 계속 개근상 탔으니까 한 학기 정도 통째로 날려도 진학시켜줄 거예요. 세상에 어떤 바보 선생님이 슈퍼스타 학생을 유급시키겠어요?”
“······너 요새 왜 이렇게 반항이야? 사춘기냐?”
“사춘기? 오빠가 사춘기 아니에요? 목표했던 거 다 이뤘으면 같이 한국 가야죠.”
“나한테 필요한 건 이뤘지만 나이키 쪽은 아니잖아.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거래를 그렇게 치사하게 하면 안 돼.”
“치사? 치사하면 안 된다고요? 그러면서 왜 나는 삼촌들한테 맡겨놓고 혼자 놀러 다녀요? 그게 더 치사한 거 아니에요? 완전 밥맛이야.”
그렇게 한참 이어진 승강이는, 이후 비행기 시간이 임박해 조혁수가 송유리를 달랜 뒤에야 끝을 맺었다.
소녀를 내보낸 조혁수는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멍청한 놈.”
“아 뭐래. 비행기 놓치기 싫으면 빨리 가시죠?”
“좀 성장했나 했더니 여전히 그대로구나. 사람의 마음도 읽지 못하는 놈이 무슨 연기자냐? 그러니까 넌 안 되는 거다.”
“에이 씨. 누가 몰라서 그래요? 안다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모른 척하는 거지.”
“평생 그따위로 살아라. 넌 그 구렁텅이에서 절대 못 벗어나. 주저앉은 채로 잘 지켜봐라, 네 오만한 친절이 나라는 배우를 어디까지 성장시킬지 말이야. 높은 곳에 올라가서 비웃어주마, 꼬맹아.”
얼이 빠져서 대답도 못 하는 이찬을 남겨두고 후발대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 뒤 염수진과 김도철이 다가와 왜 그러냐고 물었을 때에야, 이찬은 조혁수의 본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하. 저 인간이 내 대적자 포지션에 서기로 작정한 거구나.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도록 빌런을 자처해 속 긁으려는 거야. 아마 안정록 아저씨 유언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인데······ 근데 진짜 연기 많이 늘었네. 이젠 단숨에 표정을 읽기가 힘들어. 이래서야 원, 송유리가 문제가 아닌걸······.’
*
「 싱가포르 오픈의 리틀 타이거, 포효하다
이찬은 골프황제의 제자인가? 외신 열광
2008 바클레이스 싱가포르 오픈의 우승자가 결정됐다. 이찬이 다시 한 번 2위와 15타차를 기록하며 PGA 아시아 투어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그의 마지막 라운드 캐디로는 ‘재활의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가 깜짝 등장해 환호성을 받았다.
지난 9월부터 골프계에 나선 한국의 국보급 배우 이찬은, 이후 아마추어 3연승을 달리며 나이키 골프와 계약을 체결, 프로 선수로서 미국 투어 2연승을 기록하며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의 재림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그리고 PGA 소속으로 싱가포르 오픈에 참가했다.
그 싱가포르 오픈 마지막 날 타이거 우즈가 이찬의 깜짝 캐디로 나타났다. 아직 재활 중이기에 무릎에는 보호대를 차고 있었으나, 그는 장난스레 스윙 모션을 취하는 등 건재한 모습을 보였다. 이찬이 샷을 칠 때마다 골프황제가 함께 기뻐하는 장면이 매 순간 세계 각국으로 송출됐다.
타이거 우즈의 곁에서 그가 이뤘던 기록과 세 번째 타이를 달성한 이찬을 향한 외신의 관심이 뜨겁다. 이찬과 타이거 우즈가 어떤 인터뷰도 수행하지 않은 까닭에, 한국 취재진을 향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캐묻는 웃지 못 할 촌극도 벌어졌다.
PGA 3승을 챙기고 타이거 우즈와의 돈독한 우정까지 과시한 이찬은, 지난 2월에는 세계적 권위의 프랑스 파리 무용 콩쿨에서 컨템포러리 그랑프리를 석권하며 무용의 재능을 다시금 뽐내기도 했고, 6월에는 전설적인 3점 덩크를 성공시키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다.
이와 같이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국보급 배우의 존재는 세계에서도 이미 최고의 화젯거리다. 현장의 한 기자는 “이찬이란 인물의 존재는 수 세기 이상 유지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며 그를 21세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미 서구에서는 이찬이란 이름이 곧 한국을 의미한다. 한국이 배출한 살아있는 전설이 어디까지 비상할 수 있을지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한편, 이찬은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자로서 영화 작업에도 소홀하지 않을 예정이다. 그가 처음으로 악역을 맡을 한국 히어로무비 <선비 : 영웅의 탄생>이 2009년 여름 개봉을 목표로 촬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
“뭐가 소홀하지 않은데! 한국엔 들어오지도 않는데.”
촬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후문의 송유리는, 스포츠신문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조혁수가 고개를 흔들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유리야. 스탭들이 본다.”
“흥, 보라고 해요. 망나니가 될 거야.”
“네가 망나니가 되면 이찬은 망나니 스승이 될 테니까?”
“아, 정답이에요.”
“그렇지만 요즘 분위기로 보면 그놈은 살인을 해도 별 욕을 안 먹을 것 같은데? 이제는 말로만 국보급 배우가 아니라 정말로 이찬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어. 농담기가 하나도 없더라. 이미 이찬이 대한민국인 상황이니까.”
“다들 미쳤어요······.”
“그게 대중인 거다. 어쨌든 네 행동으로 그 녀석 명성에 흠집을 낼 순 없으니까 포기해. 그리고 진심도 아니잖냐? 투정부리는 제자는 미움 산다.”
송유리는 결국 투덜대며 신문을 집어 들었다.
1면 위에서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몹시 밉지만, 조혁수의 말대로 그건 투정에 불과했다.
스타가 된 소녀는 날이 갈수록 절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이찬이 유일한 동류라는 것을.
‘처음에 날 찾고 집요하게 쫓아다닌 게 이해가 가. 그 오빠는 정말 외로웠을 거야. 엄마아빠도 없고, 자길 이해해주던 사람마저 잃어버리고, 자기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했으니까. 이젠 나도 알아. 찬이 오빠랑 나는 둘이서만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참 불쌍하고, 자꾸 보고 싶어. 오빠한테도 내가 그랬겠지?’
하지만 잠깐 따뜻해졌던 마음에 이내 모가 났다.
‘그렇지만 그래서 날 찾아냈으면 책임을 져야 되는 거잖아? 같이 영화 찍으면서 좀 좋아지려고 했는데, 멀리 가버려서 오지도 않고. 기껏 와서는 나 빼고 무술 영화 찍고. 드디어 같이 영화 할 수 있게 됐는데, 자기 분량 미루고 코빼기도 안 비추고. 진짜 이해가 안 돼. 아주 바보 똥개 말미잘-’
“유리야.”
조혁수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송유리는,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속으로 욕 안 했어요.”
“한 거 안다. 그렇지만 혼내려는 건 아니고, 중간에서 한마디쯤 해주고 싶어서 그래. 유리 넌 이찬 다른 제자들하고 같이 연기 해본 적이 없어. 그렇지?”
“어······ 구진철 삼촌은요?”
“그 녀석이야 2003년부터 봤으니 이미 졸업반이지. 다른 제자들은 촬영 때마다 죽어난다. 손동작 하나 눈동자 움직임 하나까지 체크하면서 가르치니까. 그래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온 것도 있고, 결과적으로 그놈한테 고마움을 느끼는 애들이 많지만, 그게 뭐 대단한 친절은 아냐. 이찬 놈은 그 제자들한테 귀찮음만 느낄 거다.”
“아, 그럴 것 같아. 오빠가 진짜 사람 귀찮아하죠.”
“그런데 넌 다른 거야. 이찬한테 송유리라는 배우만큼은 자기가 그 무엇도 가르칠 필요가 없는 존재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하나하나 터치하지 않는 거지. 하지만 아직까진 제가 더 낫다고 믿고 있어서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있을 거고.”
얼떨떨하게 눈만 깜빡거리는 소녀에게, 조혁수가 웃었다.
“그러니까 미워하지 말고 보여줘라. 네가 어디까지 왔는지 제대로 느끼게 해. 저기 히스 삼촌 정도의 임팩트를 선보인다면, 그때부터는 제자가 아니라 동반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동반자. 그 말이 왠지 무척 정겹게 느껴졌다.
< 77장 - 제자 송유리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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