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장 - 제자 송유리 (3.) >
이찬이 처음으로 촬영장에 방문한 날, 구진철은 긴장했고, 이채진은 들떴다.
경험의 차이 때문이었다.
<684>와 <아저씨>에서 이찬과 함께하며 그의 집요한 연기 결벽증을 경험한 구진철에겐 또 어떤 지적을 받을지가 걱정이었고, 그에 비해 미디어를 통해 드러난 이찬만을 봐왔던 이채진은 별 중의 별인 그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 설레었다.
그중에서 예상이 충족된 건 이채진 쪽이었다.
이찬은 배우들에게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연기를 보며 종종 웃고 종종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이채진이 기대하던 황태자 이찬 그 자체였다.
그녀가 자기 씬의 촬영을 마치고 슬금슬금 이찬의 곁으로 다가와 조언을 구했을 때조차 그랬다.
“기대했던 대로 훌륭하시네요. 역시 이사님의 제자다워요.”
“아······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저, 선생님께 이찬 씨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격이 다른 경지에 있는 배우라고······.”
“과찬을 해주셨네요. 전혀 아닙니다. 그저 완성된 연기를 향해 걸어가는 많은 순례자 중 한 명일 뿐이죠.”
“와······ 이찬 씨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멋진 것 같아요.”
“하하, 별 말씀을.”
그 곁을 쭉 따른 김도철이야 이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오랜만에 만난 구진철 입장에선 전혀 달랐다.
도대체 눈앞에 있는 게 이찬인지 그를 흉내 내는 도플갱어인지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저기, 찬아? 너 혹시 미국에서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러시죠, 구진철 후배님?”
“아니 좀······ 전에 알던 이찬이 아닌 것 같아서.”
“별 일 없었습니다. 그저 생각해본 거예요. 세상에 한유일이 태어나려면 어떤 조건들이 갖춰져야 할지에 대해서.”
지난겨울 내내 자신의 안에 천착해서 찾아낸 빌런의 조각.
그게 변신의 출발점이었다.
작중의 ‘한유일-더 댄서’는 이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이찬을 모델로 만들어진 빌런인지라 신체조건 면에서 특히 유사한 점이 많아, 이찬 역시 마음만 먹는다면 코믹스의 댄서처럼 빌런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방아쇠가 격발되는 소리를 듣고 총을 피할 수 있다. 총구를 보고 그 진로를 mm 단위의 오차도 없이 예측할 수 있으며, 수 미터의 암벽을 단숨에 기어오를 수 있고, 지구상의 어떤 무술가라도 단박에 쓰러뜨릴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이찬과 더 댄서의 힘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셈이었다.
다만 다른 것은 두 인물의 마음이었다.
한유일은 본디 결코 악하지 않았던 인물.
그러나 범죄자들의 횡포에 가족을 잃은 뒤로 타락해, 그 뒤로 모든 범죄의 싹을 자르겠다 마음먹고 세계를 떠돌았다.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구현해낼 수 있는 재능에 그 간절함이 보태져 마침내 세계 최강의 빌런이 완성됐다.
어린 날의 이찬은, 그런 한유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사악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버린 부모와 특이성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을 경멸해 그들을 모두 배척하려 했으니.
적당한 계기가 주어졌다면 자신의 재능을 다른 쪽으로 개화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열한 살의 겨울에 윤대흥을 만났다.
그 형사와 만나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됐고, 그를 잃음으로써 좋은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으며, 이후 연기라는 경험을 통해 텅 빈 마음의 기저를 조금씩 채워나갔다.
‘형이 없었다면, 난 이미 현실의 빌런이었을 거야. 이 말도 안 되는 재능으로 세상에서 못 할 일이 없었을 테니까. 불가능한 일을 실현할 수 있는 신체에 완전범죄를 꾸밀 수 있는 두뇌까지 있어. 돈을 원했다면 은행강도가 됐을 거고, 인간을 미워했다면 연쇄살인범이 됐겠지. 단지 살육을 원했다면 용병으로 내전 중인 국가에 가 있었을지도······.’
그게 두 인격의 유일한 차이.
단 하나의 전환점이 이찬을 사랑받는 배우로 만들었다.
오랜 연구의 나날을 통해서, 이찬은 자신이 한유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했다.
윤대흥의 유지를 가장 존경받는 댄서가 되라는 내용으로 뒤바꾸고, 그의 목숨을 앗아간 김도철이 선의의 가해자가 아니었다는 가정을 더해, 10년을 넘는 그 세월을 머릿속에서 ‘겪었다.’
배역의 일대기를 써낸 히스 레저보다도 훨씬 더 정교한 체화.
마음만 먹으면 눈을 뜬 채로도 꿈을 꿀 수 있는 이찬이기에 해낼 수 있는 기행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그는 분명 한유일.
낮에는 인격자인 무용수를 연기하면서도 밤이면 범죄자를 찾아 헤매는 최강의 빌런으로 탈바꿈한다.
과거처럼 표면의 색깔을 훔쳐낸 형형색색의 직선이 아니라, 더 댄서 그 본인이 되어 완벽한 직선을 이룰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이 직선은 아직 사상누각이야. 자칫하면 원래의 이찬이 섞일지 모르니, 마음을 열고 지냈던 사람들은 최대한 피해야 해. 특히 진아 누나가 곤란하지. 내 마음대로 한유일을 넣었다 뺐다 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피해야 돼.’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본 현장에선 조혁수와 히스 레저가 감정을 가다듬는 중.
이찬은 그 둘을 바라보며 스스로와 비교해봤다.
‘저 둘은······ 동서양을 대표할 만한 미친 연기자들. 이미 캐릭터를 체화해서 완전히 균일한 색깔을 내고 있어. 하지만 아직은 완벽이 아냐. 그 캐릭터가 정확히 어떤 행동양식을 가질지에 대해서는 그저 머리로 상상하는 게 한계일 테니까. 수십 년의 삶을 정말로 체험하는 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그러니 1부와 2부는 내 독무대야. 그게 3부까지 가서 시간이 길어지면 또 모르겠지만······ 응?’
생각 중에, 이찬은 누군가가 소매를 건드렸음을 깨달았다.
돌아본 곳에는 얼떨떨한 표정을 한 송유리가 있었다.
“왜 그래?”
“아, 그, 그냥 스쳤어요.”
“방금 일부러 만졌잖아?”
“아니······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진 없고.”
“그럼······ 그러면······ 왜 그렇게 보신 거예요?”
“내가 어떻게 봤는데?”
“방금 막······ 살인자 같은 눈빛이었는데.”
“지금도 그래?”
“지금은 아닌데요······.”
거기까지 듣고, 이찬은 밝게 웃었다.
무의식적인 반응만으로 송유리를 속일 수 있을 정도로 한유일이 진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물론 바라보는 송유리는 웃을 수 없었다.
“오빠가 이상한 행성이 됐어요······.”
“행성이라고? 그것도 괜찮은 비유네. 이게 한유일이야. 만나본 소감이 어때?”
“신기해요. 되게 무서운데, 되게 매력적이기도 해요. 어떻게 한 거예요? 오빠는······ 우주비행사가 됐어요?”
“우주비행사라는 건 뭔데?”
“혁수 삼촌이나 히스 삼촌처럼, 다른 행성으로 여행을 떠나는 연기자요.”
“흠. 비슷하긴 한데, 좀 달라. 난 저 사람들하고는 출발점이 다르니까. 저쪽이 로켓을 탄다고 하면 난······ SF에 나오는 워프를 할 수 있는 거야.”
“그럼, 나도 할 수 있어요? 오빠 제자니까, 나도 지윤이네 행성으로 워프할 수 있어요?”
몹시 설렌다는 표정으로 묻는 송유리를 보며, 이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한텐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데.”
“왜요? 전 못 해요?”
“할 순 있을 텐데, 하면 안 돼.”
“아 왜 또! 제잔데 왜 안 가르쳐줘요?”
“넌 아직 너무 어려.”
“어린 게 뭐가 문젠데요?”
“감당하지 못할 거야. 미쳐버릴지도 몰라. 나도 좀 힘들 정도거든. 말했다시피 난 지금 한유일이란 말이야. 길에서 우연히 연쇄살인범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까?”
“아······ 무서워요. 근데, 지윤이는 빌런이 아닌데요?”
“그쪽이 더 위험하지. 너, 부모님이 없다고 믿게 될지도 몰라. 아직 자아가 약하니까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 있어. 그런 걸 제자한테 어떻게 시키겠냐?”
분명 애정이 담긴 염려의 이야기.
그러나 그 목소리가 기품 있는 빌런의 발성이었던 탓에, 송유리는 울먹이며 도망쳐야만 했다.
*
이찬의 첫 씬은 예술의 전당 로케이션에서 촬영됐다.
과거 <떠돌이의 죽음>을 공연했던 300석 규모 소극장이 아닌, 2300석 규모의 오페라극장.
금세기 최고의 무용수인 한유일이 세계 유수의 예술가들을 초청해 여는 자선 행사였다.
작중의 설정일 뿐이긴 하지만 현실과도 맞닿은 부분이었다.
영화의 촬영은 촬영이고 공연은 공연. 이찬은 실제로도 국립현대무용단과 협업해 한 시간 분량의 자선공연을 준비했다.
이미 세계 최고의 무용 콩쿨을 두 군데나 제패한 이찬의 춤이 예술계의 화제 중 하나이기에, 실제로 해외 유수의 예술가들이 그 초청을 받아들였다.
개중에 유화 역의 이채진이 포함되었다.
비밀 히어로 집단의 주축인 동시에 예술을 사랑하는 화가인 유화는, 이찬의 공연을 보는 내내 실제로 그 유화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사람의 몸이,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해. 저 완벽한 비율과 군살 하나 없는 몸이 음악을 지배하면서 날아오를 수 있다니. 유화가 공연 한 편 보고 한유일에게 반한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은걸······.’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이후의 시퀀스가 자연스러웠다.
이채진은 진심을 가득 담아 이찬의 공연에 기립박수를 헌사했고, 이후 꽃다발을 건넬 때는 실제로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 공연, 잘 봤어요. 정말 멋졌어요, 한유일 무용수님.”
“감사합니다. 편하게 유일 씨라고 부르세요.”
“그, 그래도 괜찮을까요? 유일 씨······.”
보는 이들마저 어딘가 간지러워질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
감탄하는 스탭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며, 송유리는 속으로만 투덜댔다.
‘뭐야 진짜. 저렇게 또 여자 하나 후리네. 진아 언니가 알면 참 좋다고 하겠다. 아주 못됐어. 나한테는 연기 잘하는 법 알려주지도 않고, 혼자 완전 한유일 돼버렸어.’
송유리에게 있어서 이찬의 경고는 좀 황당한 이야기였다.
평범을 자처하며 살아왔지만, 사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부터 확고한 자아를 품고 살아온 천재.
고작 연기 때문에 자신이 무너질 리 없다고 믿었다.
‘나도 할 수 있어. 오히려 찬이 오빠보다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난 저 오빠보다 더 따뜻한 울타리를 가졌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나쁜 거겠지만······ 나한테 엄마아빠는 절대적이란 말이야. 그런 내 자아가 흔들릴 리 없어. 나도 오빠처럼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오빠랑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
그런 생각 속에서, 송유리는 워프 게이트를 탐사했다.
이찬의 제자로서 그녀 역시 그 길을 알아야만 하니까. 그래야 스승의 동반자로서 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순조롭게 진행됐다.
끔찍했던 기억 속의 교회를 떠올려 그 사람들의 증오가 양친에게 표출되었다고 가정하자, 그 이후의 삶이 순식간에 머리를 가득 채웠다.
‘엄마아빠가 없는 나는, 너무 약해. 무서워. 괴로워.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다는 건 끔찍해. 고아원에 맡겨질 거야. 그곳에서 이상한 시선들을 받겠지. 그 전까지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눈빛들. 그 감정이 보여. 연민, 경원, 환멸······. 내가 아니라 내 배경을 향하는 감정들이 너무 많아. 견딜 수 없을 거야. 도망친다. 산기슭. 아무도 없는 오두막. 얻어들은 얘기들을 기반으로 밭농사를 짓는 거야. 하늘은 푸르고, 숲은 파래. 가끔씩 고라니나 멧돼지가 나타나겠지. 그것들과 싸우면서 홀로 살아가. 그러면서 조금씩 엄마아빠를 잊는 거야. 나는······ 지윤이는······ 싫어. 싫어. 싫어······ 다 싫어! 이게 뭐야! 나밖에 없잖아! 세상에 나밖에 없잖아! 이렇게 살기 싫어!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송유리의 신형이 무너지듯 쓰러지기 시작한 순간, 이찬은 마치 축지법을 쓴 것처럼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가 단상의 계단에 부딪치기 직전에 손으로 붙잡을 수 있었다.
‘······큰일 날 뻔했네. 나 없었으면 머리에서 피 좀 났겠는데. 그런데 얘는 대체 왜 또······? 전처럼 사람이 많아서? 아냐, 그 트라우마는 극복했다는 걸 확인했어. 그렇지만 그쪽이 아니라면 대체 왜······? 아니, 잠깐만. 얘 설마······?’
*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건, 스승의 촉촉한 눈동자였다.
“······넌 왜 자꾸 쓰러지고 그러냐, 걱정되게.”
“으······ 어디예요? 병원이에요?”
“그래. 하여튼 말 안 듣는 건 나랑 똑같다니까.”
“내가, 뭘요. 오빠처럼 망나니 아니거든요?”
“나도 망나니 아니거든? 어디 스승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잠깐 고개를 흔든 뒤에 송유리가 크게 외쳤다.
“엄마! 아빠!”
“연락 안 드렸어. 다행이네? 잊어버리진 않아서.”
“아······ 으······ 나, 잊어버릴 뻔한 거예요?”
“그런 것 같은데. 그러게 하지 말랬잖아. 너나 나나 두뇌가 신체를 지배하는 타입이야. 그래서 남들은 못 하는 짓들을 이성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 인간들이 과몰입을 해버리면, 그때는 진짜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붕괴돼. 큰일 난다.”
이찬의 이야기를 들으며, 송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는, 했으면서······.”
“나도 한참 고생했다니까. 아니었으면 바로 한국 왔지. 지금도 완성된 건 아니라서 언제 확 뒤섞일지 몰라.”
“그럼 나한테도 노하우를 알려주면 좋잖아요······.”
“노하우 같은 게 아냐, 이 꼬맹아. 난 그냥, 딱 하나로 막고 있는 거야. 인격이 바뀌더라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규범으로 이찬이란 아이덴티티를 지키고 있는 거야.”
“그게, 뭔데요?”
“좋은 사람. 난 좋은 사람이 돼야 해. 그렇게 약속했어. 그래서 범죄자를 만나도 죽일 일은 없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이찬은 무척 슬퍼 보였다.
한유일을 이미 깔끔하게 갈무리한 듯, 그전까지 자주 봐왔던 이찬의 서글픈 미소 그대로였다.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예요?”
“한 사람 때문에. 누워서 그 애기나 좀 들어라. 지윤 역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럼 또 이상한 짓 안 하겠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찬의 개인사를 들으며.
송유리는 자신이 비로소 그의 동반자가 됐음을 깨달았다.
< 77장 - 제자 송유리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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