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장 - 찰떡 이채진 (1) >
<선비 : 영웅의 탄생>의 핵심적인 화두는, 물론 선비 그 자체였다.
특수가공된 유서를 품고 다니며 시신조차 풍장을 각오한 인류의 수호자들.
수년에 달하는 기나긴 훈련의 시간을 지나 막상 선비가 된들 부와 명예는 남의 일이고, 오히려 평균 경력이 2년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기대수명이 짧다.
그 특징이 작중에서 하루살이로 상징됐다.
수년간 유충으로 성장하지만 성충이 되면 단 몇 시간 동안 하늘을 날아 죽음으로 향하는 날벌레, 하루살이.
오직 종의 번영을 위해 개체의 삶을 포기한 듯한 그 생태가 선비들의 희생과 맞닿아 있다.
하루살이는 선비가 추구하는 길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크리스’가 처음 한국으로 오게 되는 시점은 초여름.
백호파의 습격으로 선비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모습과 풍장되어 산화하는 시신이, 하루살이들의 한 번뿐인 비상과 시각적으로 병치될 예정이었다.
2006년 ‘호롤롤로’ 인터뷰로 한국에서 컬트적인 유명세를 떨친 종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으로도 지표생물로 연구되는 만큼 공감대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게 양진원의 설명이었다.
그 지점에서 이찬이 작은 우려를 입에 담았다.
“그래도 여름 개봉에 문제는 없는 거죠?”
“그럼 그럼. 3월까지 주요 시퀀스 모두 찍고 바로 CG 입히기 시작할 거니까. 초여름 하루살이 시퀀스 빼고는 전부 완성해놔야지.”
“다행이네요. 대목을 놓치면 안 되죠.”
“그래. 해외도 중요하지만 국내에서도 천만영화가 돼야 하니까.”
“천만 정도로는 곤란합니다. 2천만은 들어야 해요.”
“하, 하하······. 그야 혁수 <다크나이트>가 1600만 기록했으니 가능성은 있지 싶지만······ 결국은 작품성이 문제겠구나.”
“예. 촬영도 편집도 죽을힘을 다해주십쇼. 저도 그럴 테니까요.”
“알았어, 알았어. 어른스럽게 쪼니까 더 빡빡하다 야.”
‘한유일’스러운 당부에 부담이 커진 감독이 스토리보드를 재점검하는 동안, 이찬은 그 하루살이 배역들을 살폈다.
‘우리 영화가 다른 히어로무비와 다른 점은, 히어로들이 균형 잡힌 집단이라는 점. 단일 히어로가 개인의 파워로 활약하는 헐리웃 작품들과 달리 군상극의 특징을 띠게 될 거야. 그렇기에 개개인의 연기력이 무척 중요한데······ 크게 염려하진 않아도 될 것 같네.’
가장 돋보이는 건 물론 <다크나이트> 이후 히스 레저와 어울리며 자신의 껍질을 깨뜨린 조혁수.
그렇지만 그 외의 배우들 역시 무게감이 작지 않았다.
존경받는 도사 ‘태군’의 조연식은 이미 칸에서 자신을 입증한 바 있는 한국영화계의 거목.
러닝타임이 가장 긴 ‘옥균’ 역의 구진철 역시 이찬과 두 작품을 함께하며 성장한 완성형 조연.
그리고 이찬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지난 반년간 ‘대한’으로 살아온 정용태 역시, 충실히 자기 몫을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이 나라엔터의 기대주로서 안정록과 강정후의 손에 키워진 24세의 여배우 이채진.
이지적이며 몽환적인 매력을 갖춘 마스크의 뉴페이스라는 점에서 낙점한 인물이지만, 촬영 전까지는 우려가 있었다.
후반부 시퀀스에서 거의 주인공만큼이나 중요한 감정연기를 펼칠 배역인 까닭이었다.
‘여의치 않을 경우엔 내가 직접 교습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겠어. 이미 배역과 혼연일체니까.’
이찬의 안목은 빗나가지 않는 화살.
그 생각 그대로, 이채진은 자신의 배역인 ‘유화’와 완벽하게 동일한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다.
빌런 한유일이 완벽한 모습으로 촬영장에 나타난 덕분이었다.
‘의외로 단순한 사람이라서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이런저런 수단을 써야 했을 텐데, 한유일의 이미지를 잘 정제한 덕분에 이미 이찬과 그 캐릭터를 동일시하고 있어. 그래서 사랑에 빠진 여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문제는 그 다음. 그 마음이 배신당했을 때의 혼란이야말로 후반부를 관통하는 핵심이 될 텐데······.’
유화는 한유일과 더 댄서를 모두 만나본 유일한 선비.
마지막 결전에서 댄서의 탈이 반쯤 깨졌을 때, 오직 그녀만이 댄서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후 사랑하는 예술가와 죽여야만 하는 빌런 사이에서 괴로워하게 된다.
그것이 하루살이의 또 다른 딜레마.
오직 종을 위해 변태 시기를 맞춰야 하는 개체가 만약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종(異種)을 좇는다면, 그 독립적인 개체는 올바른가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야말로 이후 2부에서 선비라는 집단을 뒤흔들 위기의 씨앗이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장면보다도 인상적으로 표현해줘야 하는 건데, 고작 스물넷 누나가 잘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미리 데려다가 연습을 시켜야 하나? 아니면······.’
여러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이찬은, 그러나 이채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시야는 초점과 무관하게 정보를 받아들이는 모니터.
그렇기에 이채진은 이찬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짐작치 못한 채 그를 연신 흘끔거렸다.
‘이찬······ 진짜 멋있다. 어쩜 저렇게 사람이 어른스럽지? 무용계와 골프계의 스타가 돼서 돌아왔는데도, 촬영장에 있을 때는 신인배우처럼 진지해. 심지어 자기가 출연할 씬이 아닌데도 이렇게 나와서 현장 살펴보고······. 그게 혹시 내 씬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 그런 거라면 참 좋겠다······.’
한편으로 그런 이채진을 훔쳐보는 사람도 있었다.
계속 여배우의 표정에 주목하고 있던 송유리는, 이내 조혁수의 곁으로 다가가 그 소매를 붙잡았다.
“혁수 삼촌, 눈치 채셨죠?”
“뭘? 아, 채진이?”
“네. 채진 언니가 우리 오빠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 그런 것 같다. 그게 왜?”
“저 오빠가 상처 줄 거야. 그게 걱정돼요.”
“뭘 그런 걱정까지. 채진이랑 벌써 그렇게 친해졌냐?”
“그게 아니라, 불쌍한 언니한테 상처 주고 자기가 더 아파할 것 같아서요. 지금은 작품만 생각하느라 배우 개인의 마음까지는 신경을 못 쓰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겠네. 그렇지만 괜한 걱정이다. 쟤들이 너 같은 꼬맹인 줄 아냐? 쓸데없는 데 신경 끄고 촬영장 분위기나 잘 보고 배워. 그린스크린 촬영은 처음이잖냐.”
조혁수의 정론을 귓등으로 들으며, 송유리는 이찬의 마음을 염려했다.
‘우리 오빠는, 강해 보이지만 참 약한 사람. 정말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이지만, 지금은 시야에 하나밖에 안 들어오는 상태야. 북미에 먹힐 만한 히어로무비를 완성해서 세계에 자기 이름을 떨치겠다는 생각뿐. 그렇게 절대적인 스타가 돼서, 언젠가 만들 마지막 영화를 자기 이름값만으로 전 세계에 동시개봉 시키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슬픔이 생긴다면 나중에 많이 후회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내가 지켜줘야 해. 내가 오빠의 동반자니까.’
그 얼굴에 밀물처럼 스며드는 애수를 조혁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속내까지는 읽을 수 없어, 그저 조카를 아끼는 삼촌의 마음으로 머리만 몇 번 쓰다듬어줬다.
*
“그래서 한번 쭉 살펴봤는데······ 잘하고 있어. 만족스럽다.”
마침내 강정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채진은 그제야 안심해서 긴 한숨을 토했다.
“아, 진짜. 선배도 참 너무하세요. 제자가 잘하는지 궁금하시면 그냥 현장 와서 좀 살펴보시지, 굳이 또 메이킹을 받아서 살펴보시고 그래요?”
“거기까지 갈 팔자는 못 된다, 내가. 굳이 메이킹 봐준 것만도 감사해. 어차피 못하고 있었으면 조 선배나 이찬이 어련히 괴롭혔겠지 싶긴 한데.”
“혁수 오빠야 그러셨겠지만, 찬이는 안 그래요. 얼마나 믿고 아껴주는데요?”
“걔가? 널? 하하하.”
강정후 입장에서야 개가 웃을 소리라고 생각하며 낄낄댄 거지만, 이채진은 그 시그널을 좀 다르게 받아들였다.
“선배 선배. 선배는 찬이랑 많이 친하시잖아요?”
“하하하. 그래, 그렇다고 하더라.”
“그럼 선배, 찬이 누구랑 사귀는지도 아시겠네요?”
“그건 모르겠는데, 넌 가망 없어. 일찌감치 포기해.”
“와······ 우와······.”
“왜 그렇게 봐?”
“아뇨, 방금 되게 혁수 오빠 같았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찬 같은 리액션이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강정후는 자신의 가면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너무해요. 선배는 제가 했던 얘기 다 까먹었죠?”
“뭐, 네가 이찬한테 반했다는 거?”
“헤헤, 기억하고 계셨네요?”
“몇 번을 들었는데 까먹었을까. 레슨 들어와서도 매번 이찬 이찬 그러는데 어떻게 잊겠어. 요즘 애들이 너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찬이마누라?”
“아니, 찬타쿠. 이찬에 오타쿠 합성한 표현이라더라.”
“에이, 기왕이면 찬이마누라라고 해주지.”
이채진이 처음 이찬을 접한 건 나라엔터에 들어오고 나서.
모델 활동 중에 캐스팅된 처지라 연기자들에 대해 별반 아는 게 없었기에, 당시 연습을 위해 안정록이 상영해준 <친절한 살인자>를 통해 이찬과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하게 됐다.
그렇지만 그때의 반응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 이채진은 네 살 연하의 소년에겐 거의 관심이 없다시피 했다.
“넌 참 마음이 빨리도 바뀐다. 전에는 조 선배가 좋아 죽겠다며?”
“지금도 좋은데요? 그렇지만 지금은 찬이가 좋은 거죠. 진짜 고마워요. 이렇게 스승님 덕분에 찬이랑 같은 작품도 하고.”
“······넌 내 제자 아니다. 안정록 선생님 제자지.”
“아······ 그렇죠. 선배도 참, 후배 마음을 몰라주시네요. 혹시 슬프실까봐 말을 요리조리 피해서 갔던 건데.”
“퍽이나. 아무튼 실수 없이 잘해. 넌 안 선생님께서 가장 기대하셨던 재목이야. 이찬 제자인 송유리한테 밀리는 꼴은 못 봐.”
“유리요? 흠. 유리는 무리.”
“뭔 말장난이야? 아직 걔 씬 들어가지도 않았다며?”
“그게 아니라, 이번에 <폭동> 봤거든요. 그 정도로 잘해낼 자신은 없어요. 걔는 거의 연기를 위해 태어난 애 같아요. 그러니까 무리.”
전체적인 관점에는 강정후도 동의했지만, 도출된 결론에는 고개를 저었다.
“넌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래서 내보낸 거야. 송유리만큼 못 할 거라고 생각했으면 내가 출연 막았어.”
“와, 폭군이다. 군대에서도 회사를 통제했다니, 충격! 근데 정말 할 수 있을까요? 제가 그렇게 대단한 천재예요?”
“그렇진 않은데, 넌 나랑 좀 비슷하거든.”
“앗, 정말요? 저 선배랑 같은 거예요?”
“똑같진 않고······ 멋대로 생각해.”
“멋대로 생각하라니. 그럼 선배, 선배는 잘돼가고 있어요? 세영 언니랑 어디까지 갔어요?”
“······그건 멋대로 생각하지 말고. 전혀 그런 사이 아니다.”
“아하하, 부끄러워하는 거 귀여우세요. 아무튼 찬이 여친 있는지 좀 알아봐주세요. 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멋져요. 찬이랑 같이 연기한다는 건 최고의 행복이야. 그것도 이번 한 편으로 끝이 아니고 2부에서 러브씬까지 갖게 된다니. 아, 최고예요.”
이후 몇 마디 더 조잘거린 이채진이 대표실을 나선 뒤, 강정후는 다시금 메이킹필름 영상을 재생했다.
그 안의 이채진은 그리 돋보이는 존재는 아니었다.
워낙 쟁쟁한 명배우들이 집결한 면면인지라, 그저 튀지 않게 잘 묻어났다는 표현 정도가 어울리는 연기였다.
‘그렇지만 그게 이 녀석의 무서운 점이지. 다이아몬드는 아니지만 그만큼이나 빛날 수 있는 큐빅. 배역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면에서는 오히려 날 능가해. 한참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송유리 그 꼬마보다 더 뛰어나다. 이번 대리전에서는 패배하지 않아.’
과거, 안정록-강정후의 는 이찬-송유리의 <아저씨>를 크게 누르며 사상 최고의 객수를 기록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 흥행은 작품 외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
강정후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승리의 기회가 왔다고 믿었다.
‘조 선배는 과거와 달라. 히스 레저와 비교해도 오히려 강점이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디테일을 보여주고 있어. 거기에 이채진은,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이상한 녀석. 그 둘의 조합이라면 이찬-송유리를 누를 수 있다. 이건 하늘-나라의 싸움. 내가 끼지 못했다고 해서 지는 일은 없어야 해.’
그런 생각 중에 천세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잠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한 끝에, 강정후는 그 수신을 거절했다.
*
이채진은 영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눈치가 없다 싶을 정도로 순진무구해서 주변 사람들의 선을 쉽게 넘는 인물.
그렇기에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의 진심을 곡해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바로 그런 사례 중 하나로, 은근슬쩍 말을 거는 송유리를 그녀는 몹시 반겼다.
“언니, 있잖아요?”
“와, 언니래. 언니라고 불러줄 거야? 내가 후밴데.”
“아, 네. 그래도 한참 언닌데요?”
“난 너가 나 이모라고 부르지 않을까 겁났는데. 우리 띠동갑이잖아? 그러면 언니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게 나쁜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또 언니 소리가 듣고 싶고 그랬어.”
“아, 네······. 아무튼 언니. 언니 남친 있어요?”
“언니 남친? 없는데? 왜, 언니 소개해줄 남자 있어?”
“아,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그랬어? 유리가 언니한테 관심이 많았구나? 언니 오늘 촬영 일찍 끝나는데 같이 빙수 먹으러 갈래?”
“빙수요? 이 추운 날······.”
“빙수 원래 추울 때 먹는 거야. 우리 애기, 몰랐구나?”
이미 애인이 있는 이찬에게 호감을 품은 후배 배우를 떼어내려 접근했던 송유리는, 그 반응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굳은 결의로 자신을 다잡고 마침내 말했다.
“언니. 찬이 오빠 여친 있어요.”
“아······.”
“그러니까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상처받아요.”
“와, 우리 유리가 언니 걱정해줬구나? 진짜 영광이야.”
“······어······ 반응이 이상해요. 언니, 왜 이렇게 괜찮아요?”
“왜 이렇게 괜찮냐고? 어, 글쎄? 유화랑 비슷한 거 아닐까? 한유일도 공식적으로 사귀는 여자가 있잖아? 사회적 이미지를 위한 계약관계긴 하지만 유화는 그걸 몰라. 여친이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거 아닐까? 위대한 명화는 꼭 내가 가져야만 가치가 있는 게 아니야.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한 그런 존재인 거지. 소유욕보다는 탐미 쪽인 것 같아.”
별반 당황한 것 같지도 않은 장황한 설명을 들으며,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들을 읽으며, 송유리는 경악했다.
‘지, 진심이야, 이 언니. 와······ 진짜 무서워. 뭐지? 뭐야? 이채진인지 유화인지 구분이 안 돼. 이건······ 찬이 오빠를 좋아하는 게 아냐. 그냥 유화가 돼있는 거야. 아니 뭐 이런 이상한 언니가 다 있어? 이런 사람은 처음 봐. 이건 찬이 오빠보다 더해. 워프 게이트가 아니라, 테라포밍······.’
이찬의 제자가 강정후의 제자를 알아본 순간이었다.
< 78장 - 찰떡 이채진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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