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17화 (217/250)

< 78장 - 찰떡 이채진 (2) >

“테라포밍?”

황당하다는 투의 이찬에게, 송유리는 더욱 격정적으로 설명했다.

“응! 진짜 무서웠어요. 배역이 생각하는 걸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어. 그거 진짜 이상하지 않아요?”

“흠······ 흥미롭네.”

대충 답하며, 이찬은 3년 전을 떠올렸다.

그가 이채진을 처음으로 만났던 건 2006년의 가을. 안정록의 장례식장에 초대된 무수한 배우들 중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여배우는, 강정후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고인의 유언 비디오를 받아든 제자였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대할 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이번 영화에 캐스팅한 거지만······ 설마 테라포밍- 그러니까 무시무시한 메소드 연기자일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

메소드 연기. 다른 말로는 스타니슬랍스키 연기.

그건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가 주창한 연기 방법론으로, 배우 자신의 자아를 지우고 배역의 감정에 몰입해 실물과 같은 결과물을 지향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다크나이트>의 크리스찬 베일이나 마이클 케인이 이러한 배우의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큰 틀에서 보자면 조혁수와 히스 레저도 그에 속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배역의 인격을 하나하나 해체해 자신에게 입히는 반면, 메소드 연기자들은 정서적 회상과 감정 기억 연습법으로 배역과 동화하는 것.

그렇게 분석보다 내적인 방향성에 치중하는 까닭에 메소드 연기자들은 때때로 정서적인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안정록 아저씨가 그 한계를 극복할 만한 길을 찾아내셨던 걸까? 그래서 그걸 이채진이라는 메소드 연기법의 기대주에게 전수하셨던 걸까?’

당시 유언의 전달 역을 맡은 건 이찬이었지만, 수행한 건 강정후.

그렇기에 이채진에게 전달된 비디오를 볼 수는 없었다.

문상객들을 상주에게 맡겨두고 유족 방에서 맥주나 홀짝거렸던 과거가 살짝 후회되기 시작했다.

‘나라엔터 배우들 중에 그냥저냥 기대할 만한 재목 정도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이채진 누나의 연기법은 말하자면 강정후 선배랑 비슷한 방식. 그러니까 안정록 아저씨 입장에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을 거야.’

강정후가 가진 재능은 조혁수와 동일한 관찰의 눈.

그렇지만 데뷔 시기가 한참 빨랐던 조혁수에 비해서도 강정후의 성장은 눈부셨고, 그가 만든 가면은 이찬마저 속일 정도였다.

이찬은 이제 그 이유를 대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분석이 아닌 흡수.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재현하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배역 그 자체가 되는 메소드 연기야말로 강정후 선배의 본질이야. 그런 식이니까 나랑 처음 만났을 때는 거의 인격파탄자였던 거. 그렇지만 이채진 누나는······ 전혀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그건 그 누나가 강 선배보다 훨씬 더 정신이 굳건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방법 면에서 차이가 있는 까닭인 걸까?’

그렇게 고민을 지속하길 30초.

안정록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찬은 키득거렸다.

“하하핫. 하여튼 재밌는 분이야. 하나뿐인 제자를 위해 안배해놓은 안전장치가 무려 셋이나 됐던 거야.”

“어······ 그게 무슨 얘기예요? 무슨 안전장치요?”

“이채진 누나가 안전장치였어. 정확하게는 강정후의 지향점. 재능 면에서는 한참 모자란 후배지만, 방법이란 측면에서 배울 점이 많은 선구자. 자기 제자가 다시 연기 때문에 고통받지 않길 바라셔서 이상향을 마련해둔 거야. 그런 배우니까 유언까지 남기면서 중용하셨던 거······ 그런데 메커니즘을 모르겠네. 어떻게 하면 무능하고 어린 여자가 아무 부작용도 없이 배역을 흡수할 수 있는 걸까?”

“······무능하다고 말하는 건 나빠요!”

“그렇지만 그게 사실인걸 어떡하냐? 이건 좀 생각해봐야 되겠어. 벌써부터 촬영이 기다려지는데?”

손을 꼼지락대던 이찬은, 잠시 뒤에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 스승이 나설 순 없지.”

“으, 응?”

“제자, 그 누나는 네가 좀 알아봐라. 테라포밍 같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어떤 마음으로 대본을 읽고 어떤 방식으로 배역을 분석하는지 파악해봐.”

“아, 왜 나한테 시켜요? 오빠는 맨날 그런 식이야.”

“바쁜걸 어떡하냐? 당장 LA 가야 되는데.”

“아······ 그건 그래요.”

“돌아올 때까지 잘 살펴봐. 너한테도 도움이 될 테니까.”

“응? 저요? 왜요?”

“왜는 왜야, 네가 임시방편으로 쓰기 좋은 연기론이니까 그러지. 내가 자유자재로 배역 꺼내는 방법 발견할 때까지는 그쪽 스타일을 배워서 써. 이쪽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는 이찬의 뒷모습을 보다가, 송유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무책임한 동반자라고 생각하면서.

*

2007년까지 한국영화는 북미에서 매니아층만의 관심사였다.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거둔 최고의 수확이라고 해봐야 <드래곤 워>가 달성했던 천만 달러.

<와호장룡>에 비하면 10%에도 못 미치는 그 초라한 성적이 한국영화계 최고의 아웃풋이었다.

그조차 감독과 제작사 대표가 한국인이었을 뿐 실질적인 촬영은 미국인들의 손으로 이뤄졌으니, 한국영화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노릇이었고.

그 영화를 제외하고 실질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사정은 더욱 곤궁했다.

이찬의 활약으로 칸을 휩쓸었던 <친절한 살인자>나 <고등형사>조차, 매니아들의 찬사는 받았을지언정 박스오피스에서는 300만 달러 선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북미 3억불은커녕 천만 달러만 해도 꿈같은 일로 치부되던 2008년.

이찬이 PGA 투어 중이던 10월에 북미에 개봉한 <고수>가,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박스오피스를 기록했다.

무려 2500만 달러에 달하는 흥행실적이었다.

그 기현상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우선 <와호장룡> 이후 최고의 동양 액션이라는 홍보가, 연초 메이웨더를 꺾은 정용태 이슈 속에서 완벽 이상으로 먹혀들었다는 점.

그리고 단독 주연인 이찬이 그 해 내내 북미를 떠들썩하게 만든 현실판 빌런이라는 점이었다.

새로운 복싱 스탠스를 개발해 세계챔피언을 타도한 걸로도 모자라 3점 덩크와 PGA 타이기록 행진을 써내려간 기인.

타임지 표지까지 장식한 그 배우에 대한 호기심이 영화에 대환 관심을 극단적으로 높였다.

그렇기에 교섭력이 약한 배급사 ‘세계’의 직접배급임에도 500개의 스크린을 따낼 수 있었고, 5주의 상영 내내 화제의 작품으로 주목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100만 달러로 제작된 독립영화.

압도적인 액션 씬의 입소문으로 꾸준히 관객을 끌었지만, 대중의 높은 기대치를 전반적으로 충족시키진 못했다.

그렇기에 액션에 관심 있는 청년층만이 호응할 뿐이었다.

다만, 그 적은 예산과 높은 화제성의 아이러니가 AMPAS(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그야말로 제약 속에서 완성된 인간승리 같은 실전 액션.

전 세계 액션배우들에게 충격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준 작품을 아카데미영화상의 외국어영화상 최종후보로 올리는 데에는, 이견이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성진만과 이찬은 2월 22일에 LA를 방문했다.

<다크나이트>의 조커 역으로 남우조연상의 유력한 후보에 오른 히스 레저와 함께.

그 상황에 가장 현실적으로 반응한 건, 한국의 이름 없는 무술감독이었던 성진만 쪽이었다.

“신이시여······ 천지신명이시여······”

“감독님, 그만 좀 중얼거려요.”

“아······ 찬아······ 나는······ 참······”

“말바보 되셨네. 앉아서 좀 쉬고 계시든가요.”

혀를 차며 일어선 이찬은, 이후 그를 알아보고 이야기를 나누려 다가온 영화인들과 환담을 나눴다. 그들에게 하나하나 <선비>를 홍보하는 일에 그는 민망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 뒤에는 복잡한 표정으로 회장을 거닐던 히스 레저가 이찬의 관심을 샀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데요, 히스?”

“응? 아, 하하. 옛날 생각 중이었어. 2006년에도 후보로 한번 왔었거든.”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었죠? 아깝게 떨어졌다고 들었는데.”

“아깝긴 무슨. 그냥 좋은 경험이었지. 이곳의 별과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 내가 이름이라도 불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아, 저 사람.”

히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별과 같은 배우들 중에서도 유독 특별하게 반짝이는 배우가 막 레드카펫을 지나 입장하고 있었다.

<아이언 맨>의 성공적인 주연인 동시에 <트로픽 썬더>의 조연으로 활약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였다.

그는 히스 레저와 연결되는 점이 많은 배우였다.

아카데미에서 아깝게 남우주연상을 놓친 적이 있으며, 이후 히어로무비를 통해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이번 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나란히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저쪽은 돌아온 탕아고 이쪽은 위대한 천재로 불리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

“어때요? 저쪽 밀어내고 수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안 될 거야. <아이언 맨>이 히어로무비라서 평가절하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쪽 작품의 실적이 전반적으로 가점이 될 거거든.”

“그렇지만 골든글로브에선 밀어냈잖아요?”

“하하하. 양쪽이 좀 수상기준이 다를지도 몰라. 이쪽은 히어로무비 연기상 수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곳이니까.”

“그렇지만 안 되리라는 법은 없죠. 아무튼 수상하게 되면 꼭 우리 영화 홍보해줘요. 그 영화는 500개 스크린 정도로 그치면 안 되니까.”

“하하······ 난 안 될 거라니까.”

그렇게 각자의 생각을 견지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 건, 이찬 쪽이었다.

[81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은, 축하합니다. <고수>.]

이찬은 영어에 약한 성진만의 통역으로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눈물콧물범벅인 감독의 이찬 찬양을 의역을 곁들여 전달한 뒤에, 환하게 웃으며 몇 마디를 보탰다.

“<고수>는 아시다시피 어떤 영화를 예고하는 작품입니다. 올해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될 <선비>에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헐리웃이 동양에 전파한 히어로무비가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그렇죠?”

공식석상에서 하기엔 지나치게 사심 가득한 멘트.

그렇지만 이미 각종 센세이션으로 뒤덮인 이찬이다. 사소한 홍보가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었다.

유력한 외국어영화상 후보였던 <굿바이>의 감독 다키타 요지로 쪽을 흘끔 본 뒤, 이찬은 위쪽을 올려다봤다.

‘일단은 이 정돕니다, 안정록 아저씨. 첫 성과로 나쁘진 않죠? 한국영화가 아카데미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입증했어요. 이게 시작입니다. 당신이 사랑한 한국영화계의 걸작들이 이후 아카데미를 반복해서 휩쓸 거예요. 그 과정에서 강정후 선배한테 남우주연상 한 번쯤 따게 해줄게요. 그러려면 그 이채진 누나를 먼저 분석해야 되겠는데······.’

그 뒤로 또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 남우조연상 수상자가 호명됐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서 무대에 오른 히스 레저는, 아주 어색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쥐었다.

[어······ 감사합니다. 정말 예상치 못했던 상이라서 기분이 묘하네요. 가장 먼저 제 세상의 전부인 마틸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멋진 작품 함께할 수 있게 해주신 크리스와 최고의 연기를 선보여준 베일, 케인, 프리먼, 올드먼, 애런······ 모든 배우 스탭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게 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혁수 조에게도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조, 당신과 함께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내년에는 이 시상식에 함께 오자고. 그러려면 내가 더 열심히 연기를 해야 되겠지? 하하.]

박수를 치는 대신 뒤통수를 긁적이며, 이찬은 작은 패배감을 느꼈다.

‘대놓고 홍보하는 것보다 저런 식이 훨씬 좋았겠는걸. 하여튼 세상은 여전히 배울 것 천지란 말이지. 그래서 참 좋아. 이채진 누나도 그렇고 히스 레저도 그렇고 저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도 그렇고, 이놈의 연기판엔 참 재밌는 사람이 많아. 연기를 하길 참 잘했어. 하여튼 우리 형이 참······ 똑똑하단 말이야······.’

*

한국영화가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된 건, 그 자체로 역사적인 위업이었다.

그간 20편가량의 작품이 출품되었으나 단 한 번도 최종후보에 오른 적이 없었던 까닭.

그렇기에 그 시상식은 한국에도 생중계되었고, 일요일 새벽 시간대인 까닭에 9%에 달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송유리와 이채진 역시 그 시청자 중 한 명이었다.

소녀의 요청으로 가정방문해 공영방송의 특별편성 생중계를 시청하며, 이채진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 이찬······ 정말 멋있다. 어쩜 저렇게 하나도 안 떨고 여유롭게 현지인 같은 영어를 구사하는 걸까? 대단해 정말.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것 같아. 저런 찬이랑 러브 씬을 찍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최고의 행운이야.’

반면 송유리 쪽은 스승의 수상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아카데미마저 이찬의 앞에 무릎을 꿇을 거라고 믿고 있었기에, 그쪽보다는 곁에서 손을 모으고 있는 이채진에게 시선을 줬다.

그리고 히스 레저의 수상소감마저 끝난 뒤에야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채진 언니. 언니는요, 어쩌다 연기를 하게 됐어요?”

“응? 나 그냥 모델 하다가 나라엔터에 캐스팅됐지?”

“그럼 모델은 어쩌다 하게 됐어요?”

“어······ 그것도 길거리캐스팅이었어. 명동에서 딱 붙잡더니 프로필 한 번만 찍자고 하는 거야? 완전 웃기지?”

“네. 그럼요, 언니 원래 꿈은 뭐였어요?”

“음, 글쎄······. 근데 왜? 왜 궁금한데?”

눈을 말똥말똥 빛내는 이채진이 여전히 무섭다고 느끼며, 송유리는 급조한 변명을 늘어놨다.

“저 고민이 많아서요. 연기를 계속 할지 아니면 다른 쪽도 생각해볼지. 진로탐색의 중요한 시기잖아요?”

“아하하, 그런 거야? 아이 귀여워라. 근데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돼. 유리 너는 무려 찬이 제자잖아? 그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 행운을 내팽개치면 안 돼요. 나는 있잖아? 참 하고 싶은 게 많았어. 세상에 정말 재밌는 게 많잖아? 그래서 여기에 너무 늦게 왔어. 더 빨리 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송유리는 그때쯤에 이채진을 이해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78장 - 찰떡 이채진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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