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18화 (218/250)

< 78장 - 찰떡 이채진 (3.) >

기자들의 무수한 관심 속에서 이찬이 귀국한 날, 송유리는 마치 스승처럼 뻐기면서 조사결과를 브리핑했다.

“채진 언니는요,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게 배역 해석에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그런 멍청한 설명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사랑이 많은 사람 같아요.”

“그야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라는 건 나도 봐서 알아.”

“아니 그니까요, 그게 아니라요, 자기가 넓다니까요?”

이찬은 그 말에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견 뭐 하나 연결되는 부분이 없는 소리들 같지만,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이찬에겐 송유리의 말에서 도출되는 논지가 하나 있었다.

“설마······ 미러링 현상?”

“응? 미러링 현상이 뭐예요?”

“좋아하는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따라하게 된다는 거. 예를 들면 팔짱을 자주 끼는 친구와 가까워진 뒤로 자기도 팔짱을 자주 낀다거나.”

“아, 맞아! 그거예요. 채진 언니는요, 자기 어렸을 때 꿈이 많아서 연기를 늦게 시작했다고 아쉬워했는데요, 그러면서도 되게 행복한 표정을 지었어요. 그게 너무 행복한 기억이라서 후회하지 않는 거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엄마아빠랑 친구들이랑 선생님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대요.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기도 많아진 것 같아요. 그렇게 ‘유화’까지 좋아하시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미러링 현상이란,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게 하는 거울세포가 좋아하는 대상의 행동을 무의식 수준에서 따라하게 만든다는 심리학 이론.

그를 토대로 생각하자 송유리의 말이 금세 이해됐다.

약간은 편협한 방식이긴 했지만.

‘그러니까 인류 최강의 금사빠라서 실체 없는 배역조차 쉽게 좋아하게 된다는 거로군. 나와는 완전히 대척점이야. 완벽하게 이성적으로 대상을 해체하는 나와 달리, 무의식적인 애정을 느껴서 자기도 모르게 행동이 배역을 닮아간다는 거. 그거야말로 메소드 연기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배역 그 자체가 되려고 노력하는 메소드 연기의 한계는, 지나친 몰입으로 인해 인지체계에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위험성이다.

말하자면 진짜 자아와 가짜 배역 사이의 괴리로 인한 혼돈.

강정후의 인격을 괴롭히던 문제가 그것일 터였다.

그러나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미러링 현상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기 자신의 의식을 온존하는 상태에서 본능에 의해 배역을 닮아가게 되기에, 거기에는 어떠한 부작용도 생길 수 없다.

악인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 스스로가 악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건 정말 흥미로운 발견이야. 의식 타입을 왼쪽에 두고 무의식 타입을 오른쪽에 둔다고 치면, 내가 왼쪽 끝에 있고, 그 오른쪽에 조혁수 선배랑 히스 레저가 있고, 좀 더 오른쪽에 강정후 선배랑 메소드 연기자들이 있고, 맨 오른쪽에 이채진 누나가 있는 셈. 정말 흥미로워. 연기라는 건 이렇게나 방법이 다양한 거구나.’

의식을 극한까지 단련한 이찬 역시 이미 한유일을 재현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 캐릭터는 분기점을 통해 갈라진 평행세계의 존재인지라, 이찬의 자리를 비우지 않는 한 쉽게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반면 이채진은 그저 자기 자신을 물들임으로써 모든 배역을 ‘인생배역’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저쪽은 아주 한계투성이지. 무의식적이라는 수식어 자체가 사실 통제불능이란 의미니까. 만약 내가 한유일을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했다면, 유화를 닮은 이채진 누나가 나한테 반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야. 그러면 말짱 황인 거지. 말하자면, 가장 뛰어난 배우들과 함께해야만 빛을 볼 수 있는 반쪽짜리 배우인 셈이야.’

그게 배우 이채진의 한계.

어떤 배역이든 찰떡같이 소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은 환경에서는 평범 이하의 연기력만 보여줄 터였다.

데뷔작에서 이찬을 비롯한 최고의 연기자들과 함께하게 된 건 그녀에겐 일생일대의 행운인 셈이었다.

‘이제 대충 이해가 돼. 이채진 누나의 저런 특성을 알아봤을 때 안정록 아저씨는 무척 기뻤을 거야. 연약한 강정후 선배가 저걸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셨겠지. 하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야. 애초에 강정후 그 인간은 누굴 쉽게 좋아하는 성격이 못 되니까. 그렇게 거리감을 두는 성격 때문에 특히 자아와 배역 사이의 괴리감을 더 많이 느낀 거 아닐까 싶어. 그런 점을 고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으니까 유언에서도 천세영 누나를 언급한 거겠지.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배역을 사랑하는 일에도 도움이 될 테니.’

그런 한편으로 이찬은 송유리의 발언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됐다.

“좋아. 잘 조사했어, 제자. 딱 하나만 빼고 만족스러워.”

“아, 헤헤. 딱 하나가 뭐예요?”

“‘자기가 넓다’고 말한 거. 그건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어.”

“응? 왜요? 그렇게 다양하게 좋아할 수 있다는 건 되게 넓은 사람인 거 아니에요?”

“좁은 사람이라고 볼 순 없겠지만, 넓어지는 과정일 뿐이지. 그 수식어를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거든.”

“따로요? 누군데요? 어, 아, 혹시?”

“그래. 그 채진 누나가 나중에야 이르게 될 경지를 너도 나도 계속 봐왔잖아? 아쉽게도 또 800만에서 그쳤지만.”

지난겨울에 개봉한 <속도위반>은, 명진아에게 다시 한 번 800만이라는 기록을 안겨줬다.

그렇지만 그건 전체관람가 영화의 태생적 한계.

시사적으로 민감한 <폭동>에서 800만을 한 차례 달성했던 명진아는, 이제 천만배우들 이상의 입지를 구축한 셈이었다.

‘이젠 정말 열애설 터지더라도 아무 피해가 없을 필모지. 소녀 이미지를 탈피해서 최고의 연기자로 자리매김했으니까. 누나는 내가 말한 요구를 현실로 만들었어. 남은 문제는 나뿐인 거지. 이번 영화 개봉하기 전에는 반드시 배역과 자아를 공존시킨다. 그 뒤에 그 누나한테 제대로 고백할 거야.’

그렇게 생각한 이찬은,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자에게 씩 웃어 보였다.

“좋아, 답을 잘 찾아왔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 일단 진아 누나는 금사빠가 아니거든.”

“오빠 좋아하는 거 보면 금사빠 같아요.”

“이게 혼날라고. 무려 9년이다, 꼬맹아. 그 긴 시간 동안 나만 바라본 사람이야. 메커니즘 면에서 이채진 누나보다 한 단계 진보해 있을 거야. 그걸 연구해. 그래서 이찬과 명진아의 딸이 돼라. 그래야 <선비> 2부에서 이채진 누나한테 밀리지 않을 테니까.”

“음······ 그러면요, 오빠보다도 더 연기 잘할 수 있겠죠? 제가 더 댄서를 물리치고 최고의 주연이 되는 거예요.”

“되겠냐? 허황된 꿈은 접어두고 시킨 일이나 잘해.”

“응! 잘할게요, 오빠. 그러면 저, 이제 오빠 동반자 맞죠?”

동반자라는 단어의 울림을 이찬은 3초쯤 멍하니 되새겼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동반자는 무슨. 딸이라니까.”

“아······ 딸이라니, 너무해요.”

“그것만 해도 잘 쳐준 거야. 명심해라, 2부에선 절대로 밀리면 안 돼.”

입술을 삐죽거린 송유리는, 가족을 포기한 이찬의 입에 담긴 딸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아직은 잘 알지 못했다.

*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걸 사람들이 알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낮에 만나는 거죠. 오해를 좀 덜 사게끔.”

느긋하게 웃는 세계 최고의 무용수를 보며, 유화는 볼이 새빨갛게 되고 말았다.

그 제멋대로인 이야기에도 진심으로 설레고 말았다는 듯이.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당신은, 선량한 사람이잖아요?”

“가장 선량한 사람도 때때로 나빠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나한테는 당신이 그래요. 날 자꾸 미치게 만들어.”

“마, 말도 안 돼. 저 같은 게 무슨······.”

“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중에 당신처럼 매력적인 여자는 한 명뿐이고요.”

그건 겉보기처럼 로맨틱한 씬은 아니었다.

댄서로서 정부기관에 잠입해 알아낸 ‘선비’의 명단 중 가장 이용하기 쉬워 보인 유화를 유혹하는 과정이기에.

그리고 그 씬에서 한유일을 연기하는 이찬 역시, 마주선 배우를 바라보며 속으로 딴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해하고 바라보니 참 특이한 사람이야. 날 좋아한다는 감정이 선명한 동시에 색달라. 정말로 깊은 사랑을 느낀다기보다는 그저 꿈꾸는 듯한 풋사랑에 빠져 있는 느낌. 평생 남자와 가까워진 적 없는 소녀나 느낄 만한 감정이지. 유화가 바로 그런 캐릭터라는 점이 핵심이야. 이걸 이성적인 연기로 구현하려면 정말 무수한 반복숙달이 필요할 텐데, 평범하게 성장한 스물셋 현대인이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그걸 체현해낸 거니까. 이런 것도 재능이라면 정말 매력적인 재능이긴 해.’

그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연기자인 이찬이 오히려 꿈조차 꿀 수 없는 재능.

한 점의 거리낌도 없이 타인을 선망할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순백의 눈길과도 같은 연기였다.

‘그래서 난 형사 역을 맡는다 해도 이런 연기를 할 수 없어. 형을 정말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한다는 감정마저도 타자화해서 지켜보는 게 이찬의 의식이니까. 그런 점에선 좀 부럽기까지 한걸.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연기라. 나도 언젠가는 그런 연기까지 섭렵할 수 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찬은 어디까지나 이찬이었다.

‘뭐 됐어. 나야 내 길을 걸어가면 돼. 미러링 현상이고 자시고 난 의식을 통해 완성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저렇게 순수한 애정을 가질 수도 없는걸. 내가 세상의 한심한 군상들한테 일일이 애정을 품는다는 게 말이나 돼?’

미러링 현상은 역으로도 성립한다.

호의를 가진 사람을 흉내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비슷한 양식을 가진 사람에게 호의를 느끼게 되는 것.

그렇게 타인을 따라해 호감을 사는 것을 경영학에선 따로 미러링 효과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미러링 효과가 이찬에게는 불가능했다.

송유리를 제외하면 그 어떤 인간과도 유사점을 찾아낼 수 없는 괴인이라서, 무의식적 호감을 느낀 경험이 전무.

고작 배역 따위를 사랑하게 될 리 없었다.

“컷, 오케이! 뒤집자!”

두 배우의 완벽한 연기에 신이 난 양진원 감독이 쾌재를 부르는 동안, 이찬은 조심스레 이채진에게 물었다.

“누나. 누나는 좋아하는 남자 있어요?”

“어머, 어머, 뭐야? 나한테 작업 거는 거야?”

“그럴 생각은 1%도 없으니까 안심하시고요.”

“아······ 슬퍼졌어. 좋아하는 남자? 음······ 이상형이라면 조혁수 선배님인데.”

“이상형이라. 금사빠 아니셨어요?”

“금사빠? 야, 너무한다. 그런 거 아니거든?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내 사랑은 한 명 거야.”

“그게 조혁수 선배님?”

“아, 아니.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냥 이상형이라는 거야. 너 혹시 선배님한테 말하는 거 아니지? 괜히 이상하게 오해하실라.”

좋아하는 사람과 이상형이 구분될 수 있다는 것부터가 이찬에겐 희한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 변명이 어쩐지 조금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금사빠는 아닌 거지? 나지은 누나 같은 빠순이 기질이 있는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야. 진아 누나의 연기 계보를 이을 신인이 이런저런 염문이나 뿌리고 다닌다면 좀 기분 나쁠 테니까.’

이찬은 스스로 떠올린 그 생각에 살짝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굉장히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

‘만약 이 누나가 정말 아무나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면. 그래서 진아 누나도 살짝 금사빠 기질이 있는 거라고 한다면. 그럼 나는 기분이 많이 나빴을 거야. 이건······ 승부욕과는 전혀 다른 느낌. 이게 혹시 질투라는 감정일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존감 덕분에 느껴본 적 없는 감정.

자신의 작은 질투를 발견하고, 이찬은 환하게 웃었다.

*

3월이 되었을 때, <선비> 제작진은 마침내 최종 일정에 돌입했다.

그게 바로 작품의 대미를 장식할 액션 씬의 촬영.

양진원 감독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스토리보드를 들이밀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이유였다.

“제일 중요한 건 액션이 아냐. 그린스크린에는 신경 꺼! 우리 슈퍼빌런이 투자금 잔뜩 벌어온 덕분에 CG는 충분히 정교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 대신! 이 액션 속에서 완벽한 감정을 담아줘. 정의와 정의가 부딪치고 공리와 사욕이 충돌하는 지점이잖아? 거기서 충분한 에너지가 전달돼야 하는 거야. 이런 말이 있어. 베우는 등으로도 감정을 뿜어낸다!”

“와. 누가 한 말이에요?”

이채진의 즉각적인 질문에, 양진원은 살짝 머쓱해졌다.

“음, 있어. 엄청 연기 잘하는 사람.”

“하하하, 그러면 찬이 아니에요?”

“음······.”

“앗. 진짜로요? 아, 감독님 귀여워! 왜 민망해해요?”

“시, 시끄러워. 자, 리허설 들어가자! 대역들도 준비해요!”

CG 특수효과와 크리처를 상정하고 연기해야만 하는 그린스크린 촬영은 분명 초심자에겐 어려운 심화과정.

그렇지만 심상 속의 세계마저 압도적인 현실감으로 구현하는 이찬이 상대역이기에, 경력이 길지 않은 이채진조차도 몰입해서 현장감을 살려낼 수 있었다.

특히 조혁수와 송유리의 감정연기는 탈을 쓰고 있는 댄서를 압도할 정도.

‘배우는 등으로도 감정을 뿜어내는 법이지만······ 역시 얼굴을 못 쓰니까 밀리네. 하지만 이런 일에서는 질투 따위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지. 그냥 기분이 참 좋아.’

본 촬영에 들어서서도 이찬은 충족감만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연기하기에 민망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조혁수와 구진철과 이채진과 송유리가 그야말로 영웅적인 감정을 뿜으며 이찬을 막아선 까닭.

그 모습에 자꾸만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진짜 드림팀이라니까. 이 정도면 헐리웃도 부러울 게 없지. 거기에 2부부터 진아 누나까지 들어오면······ 정말로 최고의 영화를 만들 수 있겠어. 진화하는 히어로무비로 월드와이드 10억 달러까지 노릴 거야. 조혁수 선배 때문에 시작한 일이지만 이래저래 호재가 됐단 말이지······ 응?’

선비들의 협공에 탈이 깨질 무렵, 이찬은 자신을 관조했다.

‘나 지금 한유일인데. 그런데 생각이 참 편안한걸. 왜지?’

그가 마침내 무한한 의식의 연기를 완성한 순간이었다.

< 78장 - 찰떡 이채진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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