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장 - 초선 명진아 (1) >
최종전 씬의 촬영에는 나흘가량이 소요되었다.
비록 배우들의 연기는 만전이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긴 러닝타임에 박진감 넘치는 장면들이 가득한 메인이벤트인지라 테이크를 반복해야만 했던 것.
그 과정을 관찰하며 계진행은 종종 아득해졌다.
여러 사람의 손을 타며 구르고 구른 눈덩이가 최초 예상보다 한참 더 거대해진 프로젝트로 완성되는 현장이었기에.
“정말······ 참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왜 없어요? 감탄하며 기립박수를 치셔야죠. 역시 이찬이 최고야 외치시면서요.”
모니터를 보다가 툭 내뱉은 이찬의 자화자찬 덕분에 간신히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너는, 요새 좀 어른스러워졌다 했더니, 다시 돌아왔구나?”
“이찬 is back입니다.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죠?”
“그래, 그래라. 나도 이젠 그쪽이 더 편해.”
“사적인 얘긴 됐고, 해외 반응은 좀 어때요?”
“야, 장난 아니지. <고수>가 월드와이드 1억불 달성한 것도 있어서 벌써 여기저기서 배급 문의하고 있어. 직배로 뚫은 곳만 22개국이지만, 50개국 동시개봉까지 노릴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작품만 잘 나오면 돼.”
“그거야 뭐 보시다시피. 어쨌든 덕분에 좋은 작품 만들었어요, 우리 물주님.”
물주님이라는 표현에, 충무로의 군주 계진행의 머릿속에는 그간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넌 모를 거다. 쉽게도 4천만 달러 계약 따내는 외계인 같은 녀석은 절대 몰라.”
“예. 저야 몰라도 되죠. 배우는 연기로 말하는 법이니까.”
“어이고, 말은 잘한다. 하여튼 진짜······ 감개가 무량하네. 천억을 넣은 작품이 완성에 가까워진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한국인 중에 이런 경험 해본 사람은 나뿐이겠지. 이게 실패한다면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거고. 이놈의 히어로무비, 정말 징글징글하단 말이야.”
히어로무비의 제작에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간다.
기본이 천억. 때로는 그 몇 배 이상.
보편적인 순제작비는 일반 블록버스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나리오 작가에게 수십억, 프로듀서 및 감독에게 수백억, 작품을 이끌어갈 배우들에게 수십억.
거기에 세트 제작 및 로케이션 촬영 등 전반적인 제작 활동에 또 수백억이 들어가야 한다.
작품의 특성상 기존 곡을 사용하기 어렵기에 작곡가 계약에도 수십억 정도는 예삿일이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압도적인 비용인데, 추가로 판권과 영상효과 비용이 투입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2004년작 <스파이더맨 2>의 경우 판권이 200억이고 영상효과 비용이 650억.
적어도 그 반 정도는 들여야 비로소 제대로 된 히어로무비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거대한 프로젝트가, 계진행이 운영하는 투자배급사 ‘세계’의 자본으로 추진됐던 것이다.
도중에 이찬의 추가 투자를 받았다곤 해도 천억이 초기투자.
그런 거금을 확보하기 위해 계진행은 회장 체면이 말이 아닐 정도로 뛰어다녀야만 했다.
물론 이찬은 그의 그런 고생을 높이 사고 있었다.
그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이렇게 단시간에 인프라를 구축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저 이찬다웠다.
“그나마 많이 아낀 겁니다. 요즘 관객들 눈높이에 맞추려면 원래 해외 로케이션도 더 많이 넣어야 했어요. 게다가 <다크나이트> 생각해보세요. 거긴 배트모빌 실제로 만들어서 운행하고 건물도 아예 사들여서 무너뜨렸잖아요? 그거 얼마나 멋졌습니까? 저도 하고 싶었는데, 봐드린 거예요.”
“그래······ 봐준 거구나······.”
“무엇보다 작품 외적인 비용을 많이 아꼈잖아요? 들인 돈에 비해 훨씬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거죠.”
“물론, 그야 그렇지.”
상술한 카테고리로 따져볼 때, <선비>는 다른 영화들에 비해 조건이 유리한 편이었다.
일단 코믹스 원안부터가 감독 겸 각본가인 양진원의 손에 의해 기획됐다. 그렇기에 DC코믹스와의 계약에서 영화 판권이 양진원에게 귀속시킬 수 있었던 것.
코믹스 <선비>의 최근 인기를 생각해보면, 판권에서 적어도 100억은 절약하고 들어간 셈이었다.
그리고 양진원이 거의 신인이나 다름없는 감독인 탓에 작가와 감독 개런티가 절감됐다.
그의 계약조건은 오직 1%의 러닝개런티.
만약 투자된 자금만큼의 수익이 나지 않는다면 단 한 푼도 수령하지 못하는 계약을, 그는 히어로무비를 만들 수만 있다면 돈이야 상관없다고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래서 기분이 어떠세요, 회장님? 들인 돈 회수하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회수할 수 있을 것 같냐고? 해야지. 안 하면 나 죽어. 잘못돼서 회사 휘청거리면 나 바로 잘릴 거다.”
“앓는 소리 하시긴. 세 회사 전부 최대주주시잖아요? 솔직히 사비로 천억 마련하실 수도 있었던 거 아녜요?”
“그야 할 순 있었지. 주식 다 팔고 야인 됐다면 말이야.”
“그러셨으면 대박 치셨을 텐데. 아마 이 작품으로 한국 갑부 순위에 오르셨을지도 몰라요.”
“하하하. 어휴, 이 자신감덩어리 같으니. 뭐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투자한 거긴 하다만, 개인적으로 돈 벌 생각은 없다. 번다면 회사가, 쓴다면 내가. 이거 잘못되면 내가 책임지고 빈 돈 메꿀 거야.”
그거 참 군주다운 생각인데- 생각하며 이찬이 웃었다.
“그런 마음가짐이시라면, 마케팅도 정말 열심히 해주시겠네요. 다행이에요.”
“다행은 무슨. 야, 나만 일 시키고 놀지 말고 너도 일해. 후반작업 진행하는 동안 할 일 없지? 너 다시 해외 나가라. 북미도 가고 유럽도 가고 동남아도 가서 TV쇼 매일 나가. 그래서 기대매출을 올리고 오란 말이야.”
“에이. 그거 너무 직무 방기 아닙니까? 투자자시면서.”
“너도 투자 많이 했잖아. 부담은 나누면 반이 된다.”
“기사를 너무 이용하시네요. 군주로서 모범을 좀 보이시죠?”
“어험. 나의 기사 이찬이여. 혈맹의 군주가 명하노니, 세계 각국에 <선비>를 알리고 오도록 하게.”
“······진지하게 그러시면 진짜 이상하다는 거 아시죠?”
“······멋있지 않았냐? 흠. 난 연기는 안 맞나 봐.”
연기와는 안 맞는 ‘린저씨’의 대사가 이찬에게 아무 감흥도 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그 방향에서 다양한 고민을 해왔던 게 바로 그 기사였다.
“TV쇼는 모르겠지만, 프로모션이 필요하긴 하죠. 아직도 제가 누군지 모르는 세계인들이 많으니까요. 북미 쪽에서야 코믹스판이 불티나게 팔린다니까 더 걱정할 게 없지만, 코믹스도 농구도 골프도 관심 없는 문화권에선 다를 겁니다.”
“어······ 그렇지? 그렇다니까. 그게 히어로무비의 한계 같은 거긴 한데, 정통성 측면에서 약한 우리 영화가 더 큰 성과를 내려면 한국과 북미에만 매달려서는 곤란해. 그래선 정통파 히어로들을 능가할 수 없으니까.”
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현재 목표는 한국 1억불과 북미 3억불.
그것만 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성공만 한다면 어마어마한 위업이 되겠지만, 이찬은 그쯤에서 멈출 의향이 없었다.
“월드와이드 5억불을 기본으로 잡고 있지만, 거기서 그쳐선 안 될 거예요. 적어도 3부에서는 10억불 매출을 내야 되니까. 그러려면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해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선비> 트릴로지에 관심을 갖게 만들려면······ 역시 중국을 노려야 된다는 거죠.”
중국.
적어도 14억 이상이라 추정되는 세계 최대의 인구 덕에, 성장가능성 면에서 북미보다도 더 파이가 큰 시장이다.
특히 자국영화의 성장이 더뎌 외화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기대할 수 있는 곳.
그 중국을 노리겠다는 이찬의 말에, 그렇지만 계진행은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어······ 찬아. 중국은 기대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드라마나 가요면 몰라도 영화는 좀 어려워. 지금까지 여러 편 수출했지만 천만 위안 달성한 작품도 없단 말이야. 분장제(외국 영화사가 수출한 작품의 수익을 나눠받는 제도) 들어가는 것부터가 쉽지 않기도 하고.”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제한이 있는 분장제에 넣으려면 작품 자체를 떠나서 배우의 인지도가 필요하죠.”
“어, 그야 그렇지. 네가 중국에서도 유명해지면 협상이 유리해질 수 있겠지. 그렇지만 또 그쪽은 검열이 까다로운데? <다크나이트>는 아예 개봉도 못 했잖아?”
“그 까다로운 검열까지 생각해서 제가 미리 스토리보드 검열한 거예요. 저쪽 당국에서 절대로 거부하지 못하도록.”
“어······ 그래. 검열까지 잘 넘어간다고 치자. 결정적으로 흥행이 문제야. 그쪽은 다오반(해적판)이 워낙 판을 쳐서 한국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사람들이 없단 말이야. 차라리 중국은 포기하고 다른 시장을 노리는 게 낫지 않을까?”
거기까지 들은 뒤, 이찬은 씩 웃었다.
“작년에 베이징 올림픽이 있었죠.”
“응? 어, 그랬지.”
“여자양궁 개인전에서 중국 선수가 우승했더라고요.”
“아, 그거! 야, 그거 짜증났지. 우리 선수들 쏠 때마다 관중들이 미친 듯이 방해했잖아. 아,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그래서 다시는 그딴 짓 못 하게 해주려고요.”
“응······? 어, 너, 설마 양궁까지 하게?”
“양궁은 아니고, 대륙의 기상을 품은 영화를 하나 찍을 겁니다. 이용빈 감독님하고 진아 누나를 데려가서, 멋진 기마술과 활솜씨를 선보이는 거죠. 이것은 CG인가 실제인가 헷갈릴 정도로 멋진 걸 찍어서 지동망(激动网)에 무료로 업로드하면, 꽤 많이들 보지 않겠어요?”
“어······ 넌 다 계획이 있었구나? 세계적인 스타가 중국에서 찍은 단편영화를 무료로 푼다고 하면, 파급력이 있기도 하겠네. 그렇지만 대체 뭘 찍을 건데? 시나리오는 나왔어?”
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나먼 과거를 말했다.
“시나리오야 뭐, 거의 2000년 전에 나왔죠.”
“으, 응?”
“삼국지연의의 한 장면이 적절하지 않겠습니까? 제 체격이면 딱 캐릭터 잡히잖아요? 포사(布射)라고 해서 천자문에도 이름 올린 유명인인데.”
“포사······? 아, 여포! 야, 너, 진짜 어울린다! 넌 진짜 월드와이드 여포지, 그렇지. 아, 진아를 데려간다는 건 그럼?”
“여포 옆에 초선이 없어선 안 되겠죠.”
“야······ 이거 좀 기대되는데? 그거 나도 빨리 보고 싶다!”
“어휴. 그러니까 저한테 뭐 시킬 생각 말고 배급 준비나 잘하세요. 한국 1억불. 북미 3억불. 거기에 중국 1억불을 더할 겁니다. 그렇게 3국 5억불의 계를 실현하는 거예요.”
거기까지야 가능하겠나 싶었지만, 계진행은 이제 딴지를 걸지 않았다.
이찬이 연기한다는 여포가 보고 싶어서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게 된 탓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다음 말로 인해 넋을 놓아야 했다.
“그러니 군주시여, 대의를 위해 백만 위안만 투자해주시죠.”
“백만 위안······? 2억? 야, 뭔 단편영화에 2억을 써! 그리고 인마, 수익성도 없는 걸 내가 왜 투자하냐? 너도 돈 많잖아!”
“전 긴축재정입니다. 조만간 전용기 사야 되거든요.”
“이······ 이······ 여포야!”
*
이찬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이용빈은 외쳤다.
“이놈의 자식! 내가 삼국지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어······ 그건 몰랐는데요? 그냥 서부극 좋아하시니까 스타일리시하게 연출하면 재밌지 않을까 싶었던 건데.”
“아, 그랬냐? 괜히 감동했네. 아무튼 한 달 일정이라 이거지? 그 정도라면 나도 딱 시간이 나긴 하겠다.”
“다행이네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예산은 많이 드릴 수 없어요. 시일이 촉박해서 배우들도 그쪽 신인들로 쓸 거고요. 예술혼을 불태우시긴 힘들 겁니다.”
“단편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너니까 들어주는 거다? 다른 배우가 하는 말이었으면 콧방귀 뀌었을 거야. 아, 그런데 음성은 어떻게 할 거냐? 더빙?”
“아뇨, 동시녹음 따야죠. 저 중국어 잘해요. 진아 누나도 직접 가르칠 거예요.”
“에이. 중국 몇 년 산 배우들도 다 더빙 쓰는데?”
“你听起来很自然.这并不困难.”
“······어······ 와, 진짜 같은데? 뭐라고 한 거야?”
이찬은 조롱조의 중국어를 구태여 해석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웃으며 시나리오를 설명했다.
“건안 원년의 사건을 재해석할 겁니다. 서주에서 재기할 때 기령과 유비 사이에서 활을 쏴서 중재하는 씬이 핵심이죠. 거기서 좀 더 스펙터클한 그림을 만들고 싶어요.”
“활 쏘는 게 뭐 스펙터클해봤자 아니냐?”
“백 발 쏘려고요.”
“어······ 그게 극의 소지 부분 맞추는 거지? 야, 그러면 한 발에 맞춰야지?”
“백 발을 맞춰서 창을 부수려고요. 그걸 롱테이크로 딸 겁니다. 어떤 CG도 없이 시퀄로 백 발. 그러니까 카메라 성능 좋은 걸로 챙겨주세요. 그런데 몇 걸음이나 떨어져야 될지 모르겠네요. 고증을 철저히 하려면 활 성능 때문에 너무 멀리 갈 수 없을 텐데 말이죠. 그래도 100미터는 떨어져야겠죠?”
양궁으로도 정확한 사격이 쉽지 않은 거리에서 구형 활로 100발의 화살을 모조리 맞추겠다고 말하는 이찬에게, 이용빈은 뭐라고 반박해야 할까 오래 고민했다.
그렇지만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박 형 말씀 틀린 게 하나 없어.”
“박무열 감독님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네가 하는 일에 상식을 대는 건 불필요한 정신력 소모라고 하더라. 그냥 무조건 믿으면 된다던데.”
“맞는 말씀 하셨네요.”
“아, 됐다 됐어. 가서 찍어보면 알겠지. 아무튼 클라이막스는 그렇게 간다고 치고, 다른 건? 활만 쏘고 끝은 아닐 거 아냐?”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고 싶어요. 활을 쏴서 전쟁을 막은 뒤에는 처소로 돌아가서 사랑을 고백하는 거죠.”
“그래서 진아가 초선 역이라 그거지? 걔는 설득했고?”
“설득이야 쉬워요. 그 다음이 어렵지.”
뭐가 쉽고 뭐가 어렵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채, 이용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연애 쪽으로는 대사가 자신이 없는데.”
“그건 걱정 마세요. 제 매니저 누나가 사랑놀음의 강자라, 그 누나 의견 반영해서 제가 대사 쓸 테니까.”
“아주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구나. 뭐 재미는 있겠다. 아주 신선한 도전이 될 것 같아.”
한국 감독이 연출하고 한국 배우들이 주연하는 여포와 초선의 이야기가 신선한 도전이란 건 명약관화한 일.
그리고 그건 사실 이찬에게 있어서도 도전이었다.
‘잘 통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단편영화에서 캐릭터의 입을 빌어서 고백한다는 게 정말 로맨틱한 일 맞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 같은데. 하지만 염수진 누나가 나보다는 여자 마음을 잘 알 테니까, 한번 믿어봐야지.’
상업영화 홍보를 위해 제작되는 단편영화라는 명목의 사랑고백 프로젝트에, 마침내 박차가 가해졌다.
< 79장 - 초선 명진아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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