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장 - 초선 명진아 (3.) >
영화의 시퀀스가 진행될수록 명진아는 점차 초조해졌다.
그 원인제공자는, 다름 아닌 각본 번안을 맡은 이찬.
“찬아? 우리 마지막 씬 대사는 언제 쓸 거야? 지금 연기도 중요한 거 알긴 하지만, 나도 미리 연습해야 되는데······?”
“그건 안 쓸 거야. 누나는 그냥 네 마디만 하면 돼.”
“네 마디? 어, 그게 뭔데?”
“그때는 그랬죠. 맞아요. 그 말씀은 설마? 네, 좋아요. 그렇게 네 개야. 따로 안 써줘도 되겠지?”
“대사는 쉬운데······ 그래도 감정이 중요한 장면이잖아? 로맨스기도 하고. 그러니까, 같이 맞춰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흠. 하긴, 키스 씬은 미리 맞춰보는 게 좋으려나?”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장난스레 웃은 이찬이 다시 말에 오르는 걸 보며, 명진아는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그야 키스 씬도 연습하고 싶긴 하지만, 그런 얘기가 아닌데. 찬이는 바보야. 꼭 잘 만들어야 되는 영화라고 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연기 해내고 싶었던 건데······.’
이찬의 기마술은 <어사> 때에 비해서도 몇 배는 더 발전해 있었다.
말을 끌고 온 마주들이 정말 어렸을 적부터 흉노족과 함께 말을 달리던 사람 같다고 떠들었을 정도.
커다란 말을 타고 한 바퀴를 돌고 온 뒤에 발판도 밟지 않고 뛰어내리는 모습 역시, 마치 그림처럼 멋지기만 했다.
“확실히 혈통이 좋긴 하네요. 뭐 이렇게 힘이 넘치나 몰라.”
“그렇지? 하루에 150km씩 달리는 놈들이라고 하니까. 뭐랬지? 아탈 헤케?”
“아할 테케(Akhal-Teke)요. 편하게 한혈마라고 불러요.”
“아, 한혈마 좋지. 우리 적토, 털 참 예쁘구나. 어쩜 이렇게 빨갛고 탐스러운지······.”
감탄을 참지 못하고 연신 붉은 털을 쓰다듬는 이용빈 감독처럼, 이찬 역시 만족한 듯 웃었다.
“비싼 돈 주고 섭외하길 잘했네요. 여포 하면 역시 적토마니까. 멸종 위기라는 게 참 안타깝단 말이죠. 한 마리 데려가고 싶었는데.”
“어우. 야, 넌 뭐 타는 걸 그렇게 좋아하냐? 전용기도 산다고 그러더니, 이젠 한혈마도 집 앞에서 타고 싶냐?”
“하하.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요? 내 마음이 타고 있잖아요?”
T.O.P 심요셉이 드라마 <피닉스>에서 남긴 주옥같은 명대사를 떠벌린 이찬은, 이내 본 촬영을 위해 다시 말에 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염수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진짜 기분 좋은가 보네. 저런 이상한 개그까지 하고.”
“언니, 찬이 지금 기분 좋은 거예요?”
“그럼 그럼. 애가 요새 좀 왔다 갔다 하긴 했는데, 저렇게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단 말이야. 요새 영 이상해.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이것저것 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뭐 했는데요?”
“쟤 진짜로 전용기 샀잖아. 무슨 수송기로도 쓸 수 있는 모델이라던데, 스카이다이빙도 할 수 있대. 그게 300억짜리. 아마 할부로 끊은 것 같단 말이지.”
“아······ 언니한테도 말 안 하고 산 거예요?”
“쟤 원래 나한테 말 잘 안 해. 이번엔 우리 돌아갈 비행기편 알아보는데 전용기 탈 거니까 필요 없다고 말해줘서 알았지. 놀라는 표정 보고 싶으니까 감독님한텐 미리 말하지 말라고도 했······ 아, 이거 너한테도 비밀이었을까? 어머나?”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인 명진아는, 참 멀리도 가버린 월드스타가 말을 모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하여튼 대단해. 나하고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느낌이야. 일편단심 저 아이만 생각하는 나랑은······ 참 많이 달라.’
땅이 좁은 대한민국에선 재벌 회장급이나 되어야 전용기를 타고 종종 해외에 나다닌다.
스포츠스타나 연예인들 중에선 전세기를 타는 사람조차 드문 게 실상.
그렇지만 무용과 골프의 황태자이며 국보급 배우인 동시에 성공만 거듭하는 영화투자자로서, 이찬은 남들이 평생 걸려도 사지 못하는 전용기를 나이 스물하나에 장만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을 일.
중간중간 희망고문 같은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더라면, 명진아라고 해도 그토록 오래 그를 좋아할 수 없었을 터였다.
‘이번 단편영화로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고, 그래서 정말로 <선비>가 월드와이드 5억 달러 매출을 달성한다면, 찬이는 지금보다도 더 멀리 가버릴 거야. 그 영화 제작비 중에 3천만 달러가 찬이 돈이니까. 그게 몇 배가 돼서 돌아오면 300억 전용기도 이젠 우스운 일이 되겠지. 그런 찬이한테······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일까?’
자신을 돈으로 환산하는 일은 배우들에게 그리 낯선 행위가 아니다.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동안엔 개인이 아닌 회사의 상품으로 존재하기에, 업계에서 매긴 개런티가 곧 그들의 가치가 되곤 했다.
그런 관점에서 명진아는 연간 30억 가치의 배우로 추산되고 있다.
광고계의 사랑을 듬뿍 받는 톱스타가 된 지금의 가치가 딱 그 정도.
300억도 우습게 벌어들이는 이찬에게는, 동등한 배우로 보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내가 별로 대단치 않은 배우라서, 히스 레저처럼 찬이를 놀라게 할 수 없는 배우라서, 대사도 안 알려주고 연기하라고 한 걸까? 찬이는 날 참 소중하게 생각해주지만······ 그런 마음을 아니까 행복하게 기다릴 수 있었던 거지만······ 그게 조금쯤 내려다보는 마음일까 봐 겁나. 가끔은 내가 너무 부족하게 느껴져.’
복잡한 생각 속에서 초원을 달리는 붉은 말이 도드라졌다.
이찬에게 있어서 저 한혈마와 자신의 가치가 어느 정도로 비교될까 생각해보다가, 명진아는 울적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
마지막 시퀀스의 촬영은 사흘 뒤였다.
그 빠른 속도는 러닝타임 30분짜리 단편영화인 까닭이기도 했지만, 사전작업과 연기 양쪽 측면에서 이찬이 대단히 활약한 덕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맞이한 마지막 씬의 촬영장은 고풍스러운 장원.
분명하게 삼국시대의 건축물은 아니지만 대충 그 비슷하게 꾸며진 부호의 별장을 빌려, 이찬은 갑옷을 걸쳤다.
그 모습을 보며 명진아가 안쓰러운 듯 물었다.
“찬아, 갑옷 무겁지 않아?”
“별로. 누나 몸무게보다 한참 가벼운데?”
“아, 야아······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바보야. 내 몸무게, 모르면서.”
“누나가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긴 하지만, 설마 갑옷보다 가볍진 않을 거 아냐?”
“치. 바지 갑옷은 벗고 있으면 안 돼? 바스트샷인데.”
“저기 메이킹도 찍고 있잖아. 저건 풀샷이야. 아무튼 대사는 잘 기억하고 있지?”
“어? 응······. 그때는 그랬죠. 맞아요. 그 말씀은 설마? 네, 좋아요.”
“좋아. 리허설 없이 바로 갈 거니까 잘해줘.”
작중의 가장 중요한 씬을 리허설도 없이 간다는 말에 명진아의 심정이 복잡해졌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그만큼 나를 믿는다는 걸까? 그렇지만 난 자신 없는데. 충분히 정황을 이해해야 자연스럽게 키스 씬까지 갈 수 있을 텐데······ 아, 초선이란 인물을 좀 더 공부했어야 했어.’
명진아가 초선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건,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초선이란 캐릭터 자체가 실존인물이 아닌 까닭.
정사에 실린 그녀의 기록은 단 한 줄로, ‘여포가 동탁의 시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들킬까 두려워했다’는 것뿐이다.
그걸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로 각색하며 복잡한 이미지를 보탠 것.
그 연의에서 초선은 연환계의 주인공이자 일종의 지사(志士)다.
정권을 틀어쥔 동탁의 횡포에도 그 수족인 여포의 무용 때문에 누구 하나 저항하는 자가 없자, 스스로를 바쳐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던 여인.
여포가 동탁을 참살하는 정사에 초선의 미인계가 중대한 동기로 그려진 것이다.
다만 그 뒤의 등장은 무척 적어, 이용빈의 단편영화에서는 이후의 행적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야만 했다.
‘계략을 위해 이용했던 대상이지만, 여포가 그녀에게 푹 빠진 것처럼 초선 역시 그 장부를 사모하게 돼. 그건 아마도 여포가 생각했던 것처럼 악한 이가 아니라고 느낀 까닭. 그리고 그가 그녀를 지키기 위해 한없이 희생했기 때문일 거야. 그러니까 여포를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내조했는데, 오히려 자신의 미모 때문에 자꾸만 그를 힘들게 만들게 돼. 그때의 마음은······ 그걸 잘 모르겠어. 난 초선처럼 예쁘지 않으니까. 찬이한테 내가 그만큼 절대적인 미녀는 아닐 거야······.’
이찬이 들으면 혀를 찰 생각을 하며 다시금 울적해졌다.
그러나 이내 카메라 세팅이 끝나고 촬영이 임박해, 명진아는 갑옷을 입은 이찬 앞에 서야 했다.
그 광경에 메이킹필름 캠코더를 쥐고 있던 김도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림 졸라 좋네. 안 그래, 염?”
“야, 너 그 목소리 들어가잖아?”
“지우겠지 뭐. 여기선 삐쥐엠 깔겠지.”
“아, 그런가? 진짜 그림 좋긴 하다 야. 진짜 여포랑 초선이 저런 모습이었을까?”
“글쎄. 나랑 염 느낌은 절대 아니었겠지?”
“이 씨. 야, 말 그따위로 할래? 아무튼 진아 참 보기 좋다. 어렸을 때부터 봐서 그런가 적응이 안 돼. 언제 저렇게 예뻐진 거야? 거기다 마음씨도 착해, 연기도 잘해, 뭐 하나 안 가진 게 없다니까.”
“거기다 이찬까지 가지면 대박이겠는데.”
“야 야! 그런 소리는 진짜 들어가면 안 되거든?”
코웃음을 치는 김도철과 걱정돼서 미칠 지경인 염수진의 대화를, 그러나 명진아는 듣지 못했다.
그녀는 눈앞에 선 남자의 얼굴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찬이······ 언제 이렇게 컸을까. 처음엔 쌈밥도 나보고 싸달라고 하는 응석받이였는데. 그때는 정말 귀여운 동생이었는데, 이제는 너무나 커. 내가 얘 옆에 있어도 정말 괜찮은 걸까? 데이비드 베컴 그런 스타들처럼 엄청 아름다운 금발의 미녀들이랑 요트 타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와중에 마침내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말을 달려 관부에 당도한 여포가, 마중 나온 초선을 보며 서글프게 웃기 시작한다.
“초선, 기억하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궁궐을 말이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나는 칼을 든 필부였고, 그대는 죽음을 각오한 충신이었소. 그때는 우리 모두 어렸지.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 어렸던 거요. 내게 그대는 스승이었고, 친구였고, 연인이었소. 그때의 내가 얼마나 어수룩했는지, 그대는 기억하시오?”
“그때는······ 그랬죠.”
명진아는 이찬의 연기가 초능력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주선 사람의 감정마저 끌어내서 씬의 순간에 몰입하게 만드는 그의 재능은, 세상에 비견될 사람이 없을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대를 통해 변화했소. 그 뜨거운 의기와 따뜻한 사랑이 나를 변화시켰소. 그 누가 알았겠소? 이 여포 봉선이 다른 누군가를 구하고자 말을 달려, 일기필마로 전장의 가운데에 뛰어들 거라고 말이오. 그런 일은 천기를 읽는다는 도사들이라 해도 짐작치 못했을 거요. 그러나 나는 이제 목숨을 걸고 달려가 천자를 참칭하는 원술로부터 유비를 구하고 돌아오는 길이오. 이 모든 일이 어찌 쉬웠겠소? 오직 그대가 아니고서는 나를 이토록 변화시킬 수 없었을 것이오. 나는 변했소. 그대와 처음 만났던 그 시절의 어린아이가 아니라오. 그렇지 않소?”
“······맞아요.”
대답하며, 명진아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여포를 자칭하며 적토마에서 내리는 이찬의 모습이 어째선지 여포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간의 촬영에서 보여주지 않던 진한 감정들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에서 내려 천천히 명진아의 앞에 이른 이찬은, 그녀를 바라보며 방금보다도 한참 더 따뜻한 목소리를 냈다.
“그대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받았으면서, 이제껏 무엇 하나 해준 적이 없구려. 그저 서에서 동으로, 남에서 북으로 주유하게만 했소. 늘 마음속으로 연모하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표현할 줄 몰랐소. 때로는 무예를 연마한답시고 그대와 함께 있기를 거부하기도 했고, 때로는 전장에 나가 한참 얼굴을 보지 못했소. 그 모든 일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는 하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민망하다오. 어째서 나는 그대의 곁에 있지 못했을까.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나는 이제야 모든 준비를 마쳤소. 전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되어서, 그대의 곁에 있어도 부족하지 않겠다 믿게 되었소.”
명진아는 혼란스러웠다.
이용빈 감독의 각본에 충실하게 의거한 말임에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와 그녀의 이야기였다.
그건 명진아가 그에게서 듣기를 간절히 바랐던 바로 그 말들이었다.
“그, 그 말씀은 설마?”
순간 말을 더듬었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한 명진아는, 이미 자신이 초선이라는 설정까지 잊어버렸다.
작중의 배역을 지우고 그저 순간에 몰입했다.
초선이 사라지고 명진아가 드러나, 그 얼굴에 걷잡을 수 없는 행복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해주시오. 지금처럼 어정쩡한 사이가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든 당당히 밝힐 수 있는 나의 한 사람이 되어주시오. 다시는 내 필요를 이유로 그대를 힘들게 하지 않겠소. 다시는 내 부족을 이유로 그대를 혼자 두지 않겠소. 그대에게 천하를 안겨주고, 그 안에서 행복하게 해주겠소. 내게 그대만을 사랑할 수 있는 행운을 안겨주겠소? 그래줄 수 있겠소?”
“네······ 좋아요. 정말, 좋아요!”
“······컷! 오케이! 최고야 최고!”
작품성을 위해서 몇 차례고 되풀이할 생각으로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던 이용빈이, 단숨에 오케이를 외친 뒤.
이찬은 명진아의 입술에서 입술을 떼고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봐. 선물이야.”
“어······?”
하늘 위에서 비행기 한 대가 다가오고 있다.
잠시 뒤에 그 해치가 열리더니, 사람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들이 곧 대형을 이뤄 동시에 낙하산을 펼치자, 그 형태가 일그러진 글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명진······찬······?”
“아. 저거 연습 좀 더 하라니깐. NG. 테이크2가 없어서 안타깝네. 원래는 명진아 하트 이찬. 저거 시키려고 이자 손해 보면서 일찌감치 산 건데, 뭐 저렇게 도움이 안 되는지 몰라. 미안해. 그래도 노력이 가상하니까 봐읍-”
김도철의 캠코더가 그 모습을 깔끔하게 담아냈다.
여포와 초선의 그것보다도 더 아름다운, 키스 씬이었다.
< 79장 - 초선 명진아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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