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장 - 아들 구진철 (3.) >
1990년대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한류는, 2000년대 후반까지도 주로 중국과 일본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시장성과 공감대.
아시아 최대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이나 문화적으로 유사한 일본이 가장 적절한 수출처로 각광받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찬과 구진철의 프로모션 활동 역시 두 국가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전용기를 타고 중국의 대도시를 순회해 각 지역의 방송에서 새 영화를 홍보했으며, 일본으로 가서는 한국과 유사한 쇼프로그램에서 활약하며 센세이셔널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이찬의 활약은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골프나 격투기, 무용 등을 선보이며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한어와 일본어는 물론 각지의 방언과 소수민족 언어까지 섭렵해 아시아인의 동질감을 과시했던 것.
그게 구진철의 평정심을 여러 차례 무너뜨렸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아무리 여행하면서 여기저기 가봤다고 해도, 어떻게 방언까지 따라할 수 있는 거야?”
“유창하게 말한 것도 아니고 쇼프로에서 잠깐 따라한 것뿐입니다. 그게 뭐 대수라고.”
“그래도······ 그래도 그건 너무······.”
“벌써 놀라시면 곤란한데. 베트남어 말레이어 타이어까지 하고 나면 까무러치시겠네. 후배님도 좀 배워보실래요?”
“······살려줘. 난 너 같은 천재가 아니란 말이야.”
이찬 같은 천재는 아니지만, 구진철 역시 방송에서 공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건 춤.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K팝 뮤지션들의 댄스를 연습해 개인기로 써먹었는데, 훈훈한 비주얼에 충분한 연습량이 더해져 꽤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었다.
바로 그 K팝 덕분에 동남아에서도 수요가 생겨났다.
2000년대 초반 <겨울바다> <서장금> 등 드라마의 인기를 토대로 지갑을 열기 시작한 동남아 시장은, 이제는 K팝을 통해서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중.
특히 대만,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선 한국문화 전용 샵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을 거친 전용기의 다음 목적지가 바로 그 나라들이었다.
“동남아는 자국 영화계가 헐리웃에 잠식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죠. 차라리 중국 쪽이 사정이 나아 보일 정도로. 그러니까 집중적으로 공략할 필요가 있어요. 지금이야 작아 보이지만, 제대로 장악만 하면 대단한 지원군이 될 테니까. 헐리웃의 압제로부터 아시아를 구원할 문화 맹주의 입지를 어필해야 하는 겁니다.”
“하하. 너랑 같이 왔으니까 충분히 가능할 거야. <친절한 살인자>랑 <고등형사>로 칸 휩쓸면서 아시아의 아이콘이 됐잖아?”
“이슈는 됐지만 개봉도 못 했어요. 중국 다오반이 순식간에 건너가서 이미 안 본 사람이 없었다나. 아무튼 지금은 동시개봉이 가능해진 곳들이니까, 잘 공략해 봐요.”
홍콩 문화가 몰락하고 일본 문화는 식상해진 2000년대 후반.
거의 서양의 문화식민지로 전락할 뻔한 동남아시아에서, 유교문화권을 공유하면서도 세계 수준의 기술을 갖춘 한국 미디어란 신선하면서도 세련된 유행의 첨병이었다.
특히 <가을하늘> <어사> 등으로 얼굴을 알리고 국제영화제에서 세계적인 위상을 과시한 이찬에겐 관심이 매우 컸다.
동시에 <어사>에서 함께 활약했던 명진아 역시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공식 스케줄에 참석하지 않고 식당이나 길거리 등지에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지만, 그때마다 팬들의 환호성을 들었다.
오히려 공식 스케줄을 진행 중인 구진철이 소외됐다.
그가 활약했던 <684>와 <아저씨>는 한국에만 통용되는 관념과 끔찍한 스토리로 인해 한일 양국에만 개봉했던 작품.
그 외에 시트콤이 하나 있긴 했지만 널리 전파된 적이 없어서, 구진철의 인지도는 아직도 바닥이나 다름없었다.
“후배님,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세요.”
“부럽지 않다, 괜찮아, 버리자 버리자.”
“뭐 그러시든가요. 어차피 이번 영화 개봉하면 다들 스타를 박대했다며 아쉬워할 겁니다. 마치 작년에 내한했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몰라봤던 한국 영화광들처럼 말이죠.”
“우와······ 에이,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그러나 그 나라들을 순회하고 말레이시아에 도착했을 때는 이찬조차 찬밥신세가 됐다.
동남아에서도 특히 한류가 늦게 전달된 나라인데다 이슬람 문화권인 까닭에, <서장금> 등이 히트해 한국문화가 전파된 뒤로도 이찬의 작품이 잘 소개되지 않았다.
덕분에 길거리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방송 섭외 역시 만족스럽지 않게 됐다.
“러브콜이 허접한 수준이네요. 당분간 머무르면서 루트를 뚫어보죠. 일주일쯤 자유시간 드릴게요.”
“어, 자유시간? 너는 뭐 할 건데?”
“달콤한 밀월여행을 즐길 거예요. 방해하지 마세요.”
“아, 응. 그, 그래야지.”
이찬도 명진아도 알아보는 사람 드문 곳에서 자유롭게 여행한다는 생각에 들떠 보였다.
구진철은 그들을 방해하는 대신 홀로 쿠알라룸푸르 시내를 걸어 다녔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가 묻어뒀던 생각들을 부유시켰다.
‘월드스타 이찬, 그리고 세기의 연인 명진아······ 참 부러운 친구들이야. 말레이시아에서는 좀 핫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것도 잠깐이겠지. 금세 세계가 이찬한테 열광할 거야. 언젠가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어딜 가더라도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가득한 날이 올까? 그래서······ 엄마를 만날 수 있게 될까?’
아마 불가능하리란 판단이 금세 도출됐다.
외국에서야 마스크 없이 걸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지만, 한국에선 전혀 다르다.
천만영화와 25% 시청률의 시트콤에서 활약하며 국민적인 스타가 된 그를, 모친이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을 리는 없었다.
‘TV에서 나 봤으면서도 연락하지 않으셨거나······ 아니면 좋지 않은 일을 당하셨을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건 슬픈 일이야. 더 빨리 유명해졌어야 했는데. 아,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배우로서 찬이를 돕는 일에 집중해야지. 한국 최초의 히어로무비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 거기에 집중하자. 여긴 영어도 많이 쓰는 나라니까, 다음 TV쇼에서는 찬이보다 더 활약을 하는 거야.’
*
“구진철 후배님은······ 좀 안쓰럽지. 아픈 손가락이랄까.”
팔을 벤 채로, 명진아는 이찬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즐겼다.
“처음부터 이기적으로 몰아붙였단 말이야. <684> 흥행시키려고 완전히 스파르타식으로 굴렸어. 그랬는데 잘 따라오더라고. 그게 대체 왜였나 궁금했는데······ 참 웃기지. 그게 엄마 보고 싶어서였다니.”
그간 잠자리에서 대여섯 번 정도 더 들었던 이야기.
구진철의 그 개인사가 이찬에게 무거운 번민을 안겨줬다는 걸, 명진아는 결코 모를 수 없었다.
“찬아. 너는 어때? 부모님 만나고 싶지 않아?”
“별로. 성인이 돼서야 처음으로 친부모를 만나게 된 배역의 기분 같은 건 굳이 알고 싶지 않아. 그런 류의 신파는 찍을 생각 없거든. 무엇보다 봐도 몇 마디 할 말도 없을 거잖아. 그냥 살아온 얘기나 듣게 될 건데, 뭐가 재밌겠어.”
“······그렇구나. 난 엄마아빠 다시 만나면 할 말이 많은데.”
“······얼굴도 기억 안 난다면서?”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많이 궁금하실 거야. 학교는 잘 다녔는지, 공부는 잘했는지, 친구들은 잘 사귀었는지, 얼마나 좋은 남자를 만나고 있는지.”
“내가 좀 좋은 남자긴 하지.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이불을 걷으려는 이찬의 손을 명진아의 손이 붙잡았다.
그리고 두 손이 이불 안쪽에서 포개졌다.
“바보야, 너 말 돌리는 거 티 나거든? 찬아. 난 있잖아? 너한테 소중한 사람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
“유일한 사람인 게 더 좋지 않아? 소유욕 충족시켜주잖아.”
“다른 여자들만 멀리해주면 돼. 그냥······ 있잖아? 나도 시집살이 같은 거 해보고 싶단 말이야.”
“누나도 거짓말하는 거 티 나. 세상에 시집살이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냐?”
“왜? 찬이 넌, 나한테 부모님 계셨으면 불편했을 것 같아?”
“······그렇진 않지. 예쁜 딸 낳아주셔서 고마웠을걸.”
“나도 그래. 찬이네 엄마, 찬이네 아빠, 만나보고 싶어.”
“······아쉽게도 그런 사람들 없어. 있다고 해도 찾을 방법도 없고.”
거짓말을 입에 담으며, 이찬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보고 싶지도 않아. 낳기만 하고 키우지 않은 부모를 내가 왜? 어이없어. 나한테는 진아 누나만 있으면 충분해. 우리 둘이 평생 행복하게 살면 돼.’
그렇지만 그 생각의 빛깔이 예전처럼 명징하지는 않았다.
이찬은 문득 생각했다.
꼭 부모라서가 아니라, 윤대흥과 명진아를 만나게 해준 신의 축복을 물려준 사람들이니, 얼굴 한번쯤은 보고 싶기도 하다고.
*
“오늘의 게스트를 소개합니다. 코리아의 스타들이에요.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이찬 씨! 그리고 미남 스타 구진철 씨!”
미남 스타라는 밋밋한 수식어를 들으며 스튜디오에 입장한 구진철은, 그렇지만 진심으로 밝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그간 부단히 연마한 말레이시아 고전무용 조겟 가멜란을 선보여 큰 박수를 받았다.
이찬과 합을 맞춰 선보인 액션 씬 역시 호응을 받아, 생방송이 끝난 뒤 TV3 제작진이 연신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들은 몇 마디가 구진철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거, 진짤까? 시청률 40%가 나온댔잖아? 과장이겠지? 다민족 국가라 그렇게 점유를 할 수가 없는 곳이잖아?”
“자금력이 빵빵한 외자 회사라 그래요. 시장점유율이 46%쯤 된다고 하더라고요. 전 국민이 보는 수준은 아니지만 어지간하면 본다는 거죠. 당분간은 말레이시아에서도 유명인 되신 겁니다.”
“야······ 이런 프로그램은 어떻게 잡은 거야?”
“이민 와 있는 한국인 사업가들이랑 미팅을 좀 했죠. 교민이면 나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그 사람들 통해서 제작진 대접하고 좋은 인상 좀 준 거예요. 말레이어로 인사해주니까 금세 헤벌쭉 웃던데요.”
“와······ 그러면 나도 부르지 그랬어?”
“뭘 굳이. 백짓장도 안 되는 걸 굳이 맞들 이유가 있나요.”
백짓장처럼 질릴 것 같은 수완이라 생각하며, 구진철은 여섯 살 연하의 스타와의 인연에 다시금 감사했다.
“참 넌 대단도 하다. 너랑 <684> 같이 출연한 게 내 생애 제일 잘한 일 같아. 세상에 너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송유리가 저랑 비슷한 부류죠. 너무 깊이 생각하진 마요. 뱁새가 따라오다간 다리 찢어지니까.”
“찬아?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앗. 잔소리꾼한테 들켰다.”
이후 한동안 지속된 이찬과 명진아의 시시덕거림 속에서, 구진철은 자신의 부족함을 여실하게 깨달았다.
‘연기만 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녀석인데, 다른 부분에선 더하네. 그러니까 집중해야 되는 거겠지. 그나마 해볼 수 있는 게 연기밖에 없으니까. 이젠 엄마랑 만나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이런 배우와 동시대에 같은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다시없을 행운인걸. 흐트러지지 말자. 세상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연기를 해내자. 그래서, 언젠가는 찬이한테 인정받는 배우가 되자.’
숙소 앞에 도착했을 때 구진철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너 <684> 때 그랬잖아? 그 영화 흥행에 내가 1% 정도는 지분이 있다고.”
“와, 그 옛날 일을 기억해요?”
“어, 어. 나한테는 인상 깊은 기억이어서. 난 네가 기억해주는 게 더 기쁜데? 하하하.”
“전 원래 기억력이 좋은 거고요.”
“아······ 그런 거구나. 아니 그냥, 혹시나 싶어서. 내 지분 조금은 올라갔을까? 지금은······ 2% 정도는 되려나?”
“이 후배님 이상하시네. 스타배우들 즐비한 <선비>에서 2%를 바라시는 거예요? 꿈이 해괴하신데.”
“아······ 역시 아직 멀었구나.”
“당연하죠. 그땐 조연이셨고, 지금은 당당히 그 스타배우들 중 한 명이 되셨잖아요. 5%쯤은 된다고요.”
그 말에 구진철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반응을 보려고 기다려봤지만 10초가 넘도록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왜 이러시나. 진아 누나, 내가 잘못 말한 거야? 딱 객관적으로 평가해준 건데.”
“후후. 잘했어, 찬아. 그렇게 솔직하니까 얼마나 좋아?”
“뭐래. 난 항상 솔직해. 그러니까 솔직하게 빨리 올라가자.”
“앗······ 진철 오빠, 오늘 고생하셨어요. 내일 봐요.”
두 사람의 모습이 계단 위로 사라진 뒤에야, 구진철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그렇게 감동적인 말은 살면서 다시 듣기 힘들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이, 이튿날 아침이 됐을 때 깨졌다.
호텔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구진철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뒤집어, 그를 과거로 돌려놓았다.
*
“······참 황당하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발코니에 선 채 내려다보는 이찬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런 그를 보는 명진아의 마음 역시.
“요즘 각광받는 이민지라고 듣긴 했는데······. 무역 하시던 노신사 분이랑 재혼하셔서 같이 이주하셨다고 했으니까, 그간 진철 오빠 연예인 된 거 모르셨던 것도 당연해.”
“그래도 그렇지, 인터넷도 안 하셨나.”
“후후. 저 나이 어르신들은 원래 잘 못하셔. 업계 사람들이나 대중들 반응 체크하려고 억지로 배우는 거지.”
“뭐가 어렵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뭐가 좋다고 저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두 사람의 시선 끝에는, 8년 만에 재회해 서로 껴안고 눈물 짓는 구진철과 그의 생모가 있었다.
그 얼굴에 어린 무수한 감정들이 이찬의 마음을 괴롭혔다.
‘저런 환희······ 처음 봐. 본 적 없는 감정들이 넘쳐나. 이성으로 해석할 수 없는 거대하고 본능적인 것들······ 가족은 저렇게나 강렬한 존재인 걸까. 차라리 알아볼 수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한텐 그런 거 없단 말이야······.’
그런 이찬의 옆얼굴을 빤히 보다가, 명진아가 말했다.
“찬아. 가족은, 핏줄이란 건, 뭔가 다른 것 같아. 나는 찬이 널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 그리고 그 아이가 우리를 많이 좋아해줬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찬이 너도, 네 가족을 많이 좋아했으면 좋겠어. 찾을 수 있다면, 찾았으면 해.”
이찬은 별 소릴 다 듣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날, 그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80장 - 아들 구진철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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