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장 - 기우 이찬 >
2009년 7월 1일, 마침내 <선비 : 영웅의 탄생>이 세계 56개국에 동시개봉했다.
개봉일 스크린은 북미 3800개, 중국 2400개, 한국 1020개 등 세계 8230개.
이제는 정말 세계를 무대로 하는 배급사 ‘세계’가 천문학적인 마케팅비용을 지출한 성과로, 헐리웃 대작에 버금가는 수준의 파급력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가 아시아 12개국의 박스오피스에서 개봉일 1위에 올랐다.
그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아시아 최초의 히어로무비라는 점과, 이소룡의 재림이라 불리는 이찬의 야심작이라는 점, 그리고 개봉 전의 성공적인 프로모션이 주효한 덕분.
더불어 북미 박스오피스 2위, 유럽에서도 2~5위의 순위를 기록하는 등 기대 이상의 호응이 나왔다.
물론 이찬에게는 그것조차 기대 이하였다.
“개봉일에는 전부 1위 먹었어야 했는데. 송유리 너 홍보 제대로 한 거 맞냐? 왜 이렇게 호응이 떨어져?”
“아시아영화 중에 최고기록이라는데요? 왜 나쁜 말 해요?”
“아시아 최고 같은 걸로 만족하는 거냐? 나처럼 확실하게 1위 꿰차게 해놨어야지.”
“오빠 나빠요! 유럽에선 한국영화가 안 먹히는 걸 어떡해요? 삼촌들이랑 진짜 열심히 홍보했단 말이에요.”
“솔직히 말해. 너 거기 언어들 제대로 안 했지?”
“프랑스어는 열심히 했어요. 근데 다른 나라는 그냥 영어로 했어요.”
“그러니까 효과가 없는 거지. 너 유럽 보낼 때 언어신동 이슈 나오길 기대했는데, 그게 안 됐잖아. 작품 외적인 이슈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걸 놓쳐?”
“아, 나빠요! 진아 언니, 오빠 혼내주세요.”
“찬아. 유리 그만 괴롭히면 안 될까?”
“흠······ 뭐 봐줬다. 앞으론 실수하지 마.”
그런 개인적인 불만족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흥행성적은 그야말로 기록적이었다.
개봉일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5252만 달러.
북미에서도 하루 만에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인 <고수>의 2512만 달러를 초과했다는 점이 특히 고무적이었다.
물론 그 수치에도 이찬은 만족하지 않았다.
‘<다크나이트>는 개봉 첫날 북미에서만 6717만 달러를 벌어들였어. 거기에 비하면 2713만은 너무 초라해. 중국 쪽 반응이 뒷심을 발휘할 것 같긴 하지만, 6억불을 넘기려면 지금보다 더 입소문이 나야 할 거야. 첫 주말까지 충분한 상승세가 안 보이면 타이거한테 전화를 걸어봐야 되겠어.’
다행히도 스윙폼 제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북미 개봉 이틀째에 오히려 전날의 흥행실적을 초과해, 3000만 달러로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줬던 것.
그 핵심 요인은 물론 인트로 시퀀스였다.
4월의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이찬에게 패배한 이후,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우승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타이거 우즈.
그가 등장한 <선비>의 인트로 시퀀스가 세계 전역에서 어마어마한 이슈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타이거! 그가 해냈습니다! 그가 해냈어요! 부상에서 복귀하자마자 곧바로 PGA 우승 트로피를 손에 쥡니다. 20언더파, 신기록입니다. 새로운 스윙폼이 그야말로 완벽하군요. 다시 한 번 타이거의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습니다!]
[우승의 순간을 곱씹고 있는 건가?]
[아······ 자네로군. 오랜만이야, 가면의 사내.]
[오랜만이지. 어때, 만족스러운 대회였나?]
[그래. 최고였어. 그리고······ 기괴해. 지난 몇 달 내내 생각했지. 어쩌면 나는 골프의 신을 만났던 게 아닐까? 그가 나를 아껴서 자신의 사도를 보내줬던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토록 내 몸에 완전히 맞는 스윙폼을 전수해줄 수 있었을까······ 그렇지만 이렇게 내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됐으니, 아무래도 당신은 평범한 인간인 것 같군.]
[인간이지. 평범하지는 않지만.]
[내 곁에 있어줄 수 없겠나? 향후 수익의 절반을 지불하지. 나와 당신이 함께라면 못할 일이 없을 거야!]
[모쪼록 선한 일에 매진하길 바라네, 타이거.]
[······가는 건가? 이름이 뭐지? 그거라도 알려줘.]
[이름은 없어. 댄서, 그렇게 부르면 돼.]
[댄서······ 고맙네.]
타이거 본인의 인터뷰를 통해 이찬과 처음 만난 시점에 촬영한 분량임이 알려진 시퀀스.
그런데 그 내용이 마치 미래를 예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현실에서 황제의 귀환을 일궈낸 타이거의 새로운 스윙폼을 만들어낸 것이 이찬이라고 암시하는 듯했다.
그 흥미로운 비하인드스토리는 입소문이 되기에 충분한 것.
거기에 영화 전체를 휘감고 흐르는 강렬한 한국적 색채와 초월적 액션에 6천만 달러의 CG까지 더해지고 나니, 어떤 관객이든 자신의 SNS에 화제의 히어로무비를 거론할 수밖에 없게 됐다.
바로 그런 상황 덕분에 <선비>의 1부는 단 이틀 만에 월드와이드 1억불 매출을 달성했다.
그리고 개봉 주말까지 5일 동안의 오프닝스코어가 2억불에 육박했다.
그때에 이르러서도 이찬은 만족하지 못했다.
간식을 챙겨주는 염수진에게 투덜댈 정도로.
“IMDb 9.1이라니······ 형편없네요. 다들 눈이 썩었어.”
“어? 왜 그러는 거야? 이거 엄청 높은 점수 아냐? 막 세계적인 명작들이랑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점수라고 했는데?”
“전혀 아니에요. 팬들 위주로 관람하는 초기에 점수가 치솟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요. 제대로 평가가 이뤄지는 건 3주차쯤에 이른 시점이죠. 지금 언론이 쏟아내는 ‘찬뽕’ 기사들은 설레발 왜곡이라고밖에 할 수 없어요.”
“아······ 그런 거야?”
“그래요. 개봉빨 이슈 빠지면 점차 객수도 줄어들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네요.”
“넌 참······ 세상이 다 이찬 신드롬인데 혼자 그러니? 걱정하지 마, 점점 더 이슈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볼 테니까.”
이찬은 코웃음을 쳤지만, 염수진의 말은 며칠 지나지도 않아 현실이 됐다.
헐리웃의 슈퍼스타 크리스찬 베일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정말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가장 주목받는 건 액션의 유려함이지만, 그 이상으로 인간 내면의 감정을 다룬 부분이 눈에 띄어요. 분명히 말하는데 는 인종적인 문제로 저평가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저 역시 비슷했습니다. 리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죠. 예전 촬영장에서 그와 이 작품에 대해 얘기했었거든요. 서로의 작품을 보고 나서 더 멋진 쪽의 작품에 출연해주자고 말이죠. 저는 절대 질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졌습니다. 배우로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어요. 똑같이 가면 속에서 촬영한 씬들을 비교해보면, 제 배트맨은 댄서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오직 몸으로만 보여주는 그 격렬한 감정들이 정말······. 아무래도 곧 한국에 가야 될 것 같군요. 이찬이 자랑한 춘무러에 들러봐야 해요.]
그 이야기가 퍼져나가며, <선비> 1부는 다시 한 번 탄력을 받아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굳혔다.
동시에 한국에서도 다시 한 번 ‘찬뽕’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게 됐고.
그렇게 2주차 만에 한국에서 1000만 관객을 기록하고 월드와이드 4억불을 달성.
영화 개봉 후 10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하고 수익을 내기 시작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이찬은 여전히 근심투성이였다.
이번에는 춘무러의 군주가 그 푸념의 피해자가 됐다.
“진짜 골치 아프네요. 중국인들은 대체 왜 이러는 거죠? 어떻게 아직까지도 5천만불 매출밖에 안 나왔냐는 거예요. 이러면 안 되는데. 중국내 1억불을 기록해서 3국 5억불을 완성해야 되는데 말이죠.”
“왜 그렇게 1억불에 집착하는 거야? 충분히 잘되고 있잖아? 세계적으로 충분히 5억불 나올 만한 상황인데.”
“충분하지 않아요. 지금이야 기록적인 매출이라고 하고 있지만, 북미도 한국도 딱 이 정도 페이스가 한계란 말이죠. 그걸 뛰어넘어서 3부에서 10억불을 달성하려면, 그때는 반드시 중국에서 2억불 이상이 나와줘야 해요. 그쪽에 충성스런 팬층을 만들어놔야 된다는 거죠.”
“그게 참, 하하하. 틀린 말은 아닌데······ 아, 난 모르겠다. 축배 한 잔 들자고 왔는데 반응 하고는.”
“안 되겠어. 중국에 한번 가봐야 되겠습니다. CCTV에 TV쇼 하나 잡아주세요.”
“그래, 그러자. 말리면 뭐 하겠니.”
그러나 이찬의 중국행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 직후부터 갑작스레 중국 내 <선비> 예매율이 치솟기 시작해, 굳이 시간을 쓰지 않아도 무방하게 된 것.
그건 당시 제작 논의 중이던 중국 드라마 <삼국> 때문이었다.
그 사극의 여포와 초선 역에 이찬과 명진아가 거론되고 있다는 기사를 통해, 중국 내에서 다시 한 번 이찬의 이름이 화제가 됐던 것.
대만이나 홍콩 배우도 아닌 완전한 타국의 배우들을 초 기대작의 주요 배역에 캐스팅하려 한다는 얘기다.
중국의 문화적 자긍심 때문에라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흥분해서 SNS에서 설전을 벌일 만했다.
거기에 이찬과 명진아의 무료 영화 <원문사극>이 캐스팅의 주요한 근거라는 제작진의 말이 퍼지자, 3천만 수준에서 그쳤던 그 영상의 조회수가 1억뷰에 가깝게 치솟았다.
그때부터 <선비>의 예매율이 하늘을 찌르게 됐다.
이찬이란 배우가 모르면 대화가 안 통하는 화젯거리가 되어 대도시의 청년들이 앞을 다퉈 극장을 찾은 덕분이었다.
갑작스레 향상된 중국 내 인기의 원인을 뒤늦게 알게 된 이찬은, 정창영과 떨떠름한 대화를 나눴다.
“대체 뭔 전개예요? 그 드라마 안 한다고 했잖아요?”
“음······ 내가 그걸 살짝 애매하게 대답을 했거든.”
“저한텐 말도 없이요?”
“너 들으면 싫어할 것 같아서······ 아니 왜, 지금 상황만 봐도 정말 괜찮은 노이즈마케팅이 되고 있잖냐? 이걸 놓쳤으면 얼마나 아까웠겠어? 나한테 고마워해야 된다니까?”
“하여튼 욕심도 참 많으세요. 대머리 된 게 당연해.”
“야, 대머리 아니고 삭발이거든? 그리고 그거 편견이야.”
“뭐 그런 걸로 해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감히 간판배우를 속이고 써먹으신 거긴 하지만,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어요.”
개봉 3주차에 이미 중국 1억불 매출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미 1300만을 돌파한 국내 객수와 북미 2억 5천만 달러의 흥행까지 생각해보면, 3국 5억불의 계는 이미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이찬은 마침내 모든 시름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참 다사다난했지만, 결국 모든 걸 이뤘어. 이제는 일차적인 성공을 즐겨도 되겠지. 그리고 다음 작품을 준비하기에 앞서 사적인 일을 마무리해야 할 때······.’
그때에, 이찬은 비로소 천세영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
“아하. 강 선배가 연락을 안 받는다고요.”
“그래! 진짜 너무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어떻게 제자 전화를 한 번도 안 받을 수 있지? 진짜 나쁜 사람이야!”
맥주캔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천세영을 보며, 이찬은 황당함에 고개를 흔들었다.
‘이 누나 술버릇 참 고약하네. 그나저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은데······ 아, 송유리가 종종 그랬지. 하여튼 제자들 마음이란 다들 밴댕이 소갈딱지란 말이지. 스승이 거사를 치르고 있으면 겸허하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건데.’
장난스레 하는 생각일 뿐 이해하지 못할 마음은 아니었다.
이찬은 천세영이 이미 강정후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을 몰라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누나, 강 선배랑 결혼하고 싶어?”
“뭐 무먼 소리야?! 아, 진짜······ 갑자기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은. 도와줄 생각이 있어서 물어보는 거지.”
“어······? 어, 저······ 아······ 좋긴······ 한데······ 결혼은 아니지! 아직 그런 식으로 만나본 적 한 번도 없는데. 그냥······ 맨날 연기 얘기밖에 안 했단 말이야.”
“어쨌든 좋아하긴 하는 거네. 참 갈대 같은 마음이야. 나 좋다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아, 아니······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진짜······.”
“이제 나는 안 좋지?”
“당연하지! 진아랑 잘 사귀고 있는 거 흐뭇하게 보고 있거든? 질투 하나도 안 했거든?”
고작 맥주 두 캔에 마음이 풀어져 별별 대답을 하는 게 우스웠지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말하기 어려운 주제를 끌어내야 하는 게 이찬의 입장이었으니.
“누나. 진지하게 하나 물어볼 게 있어. 친척 중에 영유아 때 애 버린 집 하나 있지 않아?”
그렇지만 막상 중요한 질문을 건넨 순간, 천세영의 표정이 듣지 말아야 할 걸 들은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왜 그래? 뭘 그렇게 죽일 듯이 봐?”
“뭐야······? 대체 뭐야? 그거, 정후 오빠도 물어봤던 건데.”
“어? 아, 그 인간 참 이상한 데서 입이 싸단 말이지. <주룩주룩> 찍을 때 얘기지? 아마 나 때문에 물어봤을 거야. 그러니까 괜히 놀랄 것 없어. 아무튼 그땐 뭐라고 대답했는데?”
“아니······ 없다고 했지. 없으니까.”
“그래? 그런데 표정은 좀 다른데?”
이찬의 눈에 보인 천세영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강정후의 첫 질문은 아무렇지 않게 넘긴 모양이지만, 아마도 그 이후에 뭔가 변동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들은 게 있구나? 가족들한테 물어봤지?”
“아······ 그러니까 그걸 왜 물어보는 건데? 왜 그래?”
“그냥 궁금해서. 천만영화 주연이 되도록 이끌어준 첫 번째 스승님한테 그것도 대답 안 해주진 않겠지?”
“아니 난······ 진짜 모르겠어. 왜 그러는 거야? 물어보긴 했어. 그랬는데, 엄마가 너무 슬퍼하셨어······.”
“엄마가? 어? 에이 설마. 그렇게 가까웠다고?”
“뭐야! 왜 그러는 건데! 왜······ 물어보는 거야? 난 기억도 안 나. 너무 어렸을 때고,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영유아 납치 사건이 있었대. 나랑 다섯 살 차이 나는 동생이었대. 신고도 안 하고 달라는 대로 돈 다 줬는데, 그래도 동생은 못 돌려받았대. 그래서 집에서는 잊어버리려고 애썼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너무 슬퍼서······ 그래서······ 어? 다섯 살 차이······? 어?”
“와. 충격적인데. 정말 놀라운 일이야. 배우가 드라마 따라간다더니.”
이찬은 말한 것과 동일하게 생각했다.
기억도 없을 시절에 헤어진 친남매와 우연히 조우해 연기를 가르친다는 건 과연 얼마만큼 낮은 확률의 시행일까-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그는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반가워, 누나.”
“······말도 안 돼. 거짓말이지? 장난치는 거지? 몰카지······?”
“내가 그 정도로 인격파탄자는 아냐. 아무래도 우리 남매인가 봐. 나도 좀 놀랐어. 먼 친척 정도라고 생각했거든.”
“거짓말······!”
“진짜야. 나 고아. 누나랑 다섯 살 차이. 그리고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끌렸어. 얼굴 봤던 기억은 없지만, 나 감 좋다는 거 알잖아? 뭔가 비슷하다는 느낌은 받았던 거지. 물론 내가 누나처럼 엄청난 미모는 아니라서 믿기 힘들겠지만-”
이찬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어찌할 줄 모르고 덜덜 떨다가 와락 끌어안아버린 천세영 때문이었다.
“······진짜야······? 진짜, 너, 우리 엄마 아들이야?”
“누나가 거짓말한 게 아니라면 맞을걸. 아무튼 이건 비밀이야. 나 고아라고 광고하고 다닐 생각 없어. 누나네 부모님은······ 어머니만 계시다고 했었나?”
“······응. 아빠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
“그렇구나. 어머니는 손을 잃으셨댔지. 다음에 한번 뵈러 가자. 시간 좀 내볼게.”
“너······ 만약에······ 아니면 안 되는데······.”
“정말이면 알아보시겠지. 아무튼 이거 좀 놔, 답답해 죽겠어. 오늘은 늦었으니까 일단 돌아가고, 다시 얘기하자.”
별 감흥도 없다는 듯한 말에 당황한 천세영이 나가지 않으려고 발악했지만, 이내 덩치 큰 동생의 손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를 내보내고 한숨을 쉰 뒤에야 방문이 열렸다.
“아, 누나. 얘기 대충 들었지?”
“으, 응. 저, 세영 언니가, 그······ 생각도 못했어.”
“그 생각을 했으면 이상한 사람이지. 나도 좀 놀랐어. 설마 그런 스토리였을 줄은 몰랐는데.”
“표정이, 밝지 않은 것 같아.”
“그럼, 당연하지. 돌아버릴 것 같아. 저런 스토리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잖아? 버려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미워해야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거야. 그거 알아? 천세영 누나 어머니는 손이 없으시대. 그 누나가 바보같이 사기를 당해서, 그 돈 돌려받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거야. 고작 삼천만 원 때문에! 그런 사람이 내 모친이라는 거야. 삼천만 달러도 우스운 내 입장에서 그게 어떻게 들리겠어? 정말 황당하고 한심하단 말이야.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 있겠어?”
명진아는 흔들리는 이찬의 몸을 감싸 안았다.
“잘됐다. 잘됐어, 찬아. 이제라도 만날 수 있게 돼서, 걱정했던 것처럼 나쁜 분들이 아니라서, 정말 잘됐어.”
“······하하. 기나라 사람의 어리석음(杞憂)이라는 거지. 더 빨리 찾아봤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그런 일은 막아줄 수 있었을 텐데. 난 참······ 잃고 나서 후회하는 게 참 많아.”
“바보야. 그게 아냐. 찬이 넌, 더 많은 걸 지켰어. 봐, 내가 있잖아? 세영 언니랑 어머니가 계시잖아? 그러니까······ 걱정해도 괜찮은 거야. 그리고 다행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아. 넌 잘했어. 많이 두려웠지만, 이렇게 용기를 냈잖아?”
“그런 건가?”
“······응.”
“목소리가 왜 그래? 누나도 무슨 고민 있어?”
“응······ 그러면, 저기······ 이름이······.”
“이름이?”
“천찬······인가 해서. 조금, 어감이 조금······.”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괴로워하던 이찬이 마침내 밝게 웃을 수 있게 됐다.
<선비 : 영웅의 탄생>이 5억불 매출을 달성하던 날의 일이었다.
< 81장 - 기우 이찬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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