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28화 (228/250)

< 82장 - 엄마 임희재 (3.) >

“와, 진짜 대박이에요. 이건 진짜 대박이에요.”

이기자의 들뜬 음성에, 임희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거 지금 열네 번째 들었거든? 차분히 좀 읽자?”

“아, 누나. 나 진짜 너무 흥분돼서 그래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우리가 배트맨과 함꼐 영화를 찍는다니, 감동이야.”

“야, 그 배트맨이 한국까지 오게 만든 이찬이랑 같이 찍는 데서 느껴지는 감동은 없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집중해. 제대로 연기 못 하면 이거 다 날아가는 거니까.”

이찬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한 으름장에 이기자도 조금쯤 겁을 집어먹었다.

그렇지만 잠시 뒤에는 또 소리 높여 외쳤다.

“찬쌤은 정말 대단해! 세계가 열광하는 히어로무비를 만들고 그 차기작에 우릴 불러주다니. 이렇게 희생적이고 멋진 녀석은 제가 본 적이 없어요. 전생에 천사였을 거야.”

“뭐래? 그게 아니라 우리가 연기를 잘하니까 불러준 거죠.”

정신혜의 콧대 높은 대꾸는, 그러나 헛소리가 아니었다.

홍주석, 신수영, 남태형, 임희재, 이기자, 명진아, 정신혜.

이찬이 해외를 도는 동안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며 각자 500만 이상의 흥행을 기록한 연기자들이다.

한 기획사의 간판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을 명배우들이 한꺼번에 <선비> 2부의 신규 배역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에, 이미 대중의 기대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 모두가 하늘기획 소속이라는 점은 분명 특기사항.

그러나 이기자의 말처럼 이찬이 희생적으로 후배들을 끌어주려 했다고 보기엔, 그들의 네임밸류 역시 작지 않았다.

그렇기에 정신혜의 말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홍주석이 피식 웃었다.

“야, 신혜야. 이찬이 진짜 우리 실력을 믿고 불러줬다고 생각하는 거냐?”

“어······ 그런 거 아니에요?”

“어유, 귀여운 것. 너희도 동의하냐? 이것들아, 이찬이 왜 촬영기간 1년 넘게 잡았는지 잘 생각해봐라.”

이번에는 신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참전했다.

“한국의 4계절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런 것도 있지만, 너희 굴리려고 그러는 거겠지. 마음에 드는 씬 못 찍으면 몇 번이고 다시 따려는 거야. 그렇게 굴려먹기에 제일 좋은 게 회사 식구들이니까 너희를 부른 거 아니겠냐. 지금 몸값의 몇 배씩 개런티 책정해준 게 그래서다. 일종의 추가수당이지.”

“에이, 설마요? 마이 찬이 얼마나 착한데.”

“허허, 참나. 그래 뭐 넌 좋을 대로 생각해라. 네 연기야 욕먹을 수준은 아니지.”

홍주석이 더 할 말 없다는 듯 각본으로 눈길을 돌릴 무렵, 임희재가 마음속으로 그 말을 긍정했다.

‘맞는 말이야. 이번 작품은 절대로 실패해선 안 되는 차기작. 배트맨까지 불러들여놓고 좋은 평을 못 받는다면, 워너 브라더스랑 협의한 모든 계획이 어그러질 거야. 그런 의미에서 가장 다루기 편한 동료들을 불러들인 게 맞겠지. 우리가 한국에서 천상계 배우들이라고 불리며 명성을 쌓았다지만, 그건 정말 허명에 불과해. 히스 레저에 크리스찬 베일까지 조연으로 들어오는 영화야. 방심해선 안 돼. 죽을힘을 다해서 준비해야 찬이의 발목을 잡지 않을 수 있어.’

신규 캐릭터들의 역할은 조혁수의 조력자.

<선비> 1부에서 괴멸된 선비 본부를 재건한 ‘크리스 조’가 모은 새 시대의 선비로서, 향후 3부까지 활약해야 하는 배역들이다.

마찬가지로 새 선비 중 하나가 될 ‘데이브’ 역의 히스나 선비들을 테스트하기 위해 방문할 ‘브루스 웨인’ 역의 크리스찬 베일과 마주할 준비를 마쳐야만 했다.

‘그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배우들이지. 조연으로 있기엔 지나치게 빛나는 배우들이야. 특히 해외 관객들 입장에선, 익숙지 않은 한국 배우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등장만을 기다릴 수도 있어. 그게 문제인 거야. 비등한 수준의 연기를 펼치더라도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는 입장. 자칫하면, 왜 레저와 베일 분량을 깎아가며 연기 못 하는 한국 배우들 조명했냐는 비판을 받을지도 몰라. 자국 배우 키우려는 협잡질이라고 욕먹을 수도 있어.’

그것만큼은 있어선 안 될 일이라고, 임희재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가늘게 뜬 눈으로 주변 배우들을 관찰했다.

‘······홍 선배님은 이미 완성된 배우시지. 목숨을 걸고 비리를 추적하던 검사로서 가장 먼저 영입될 선비 캐릭터랑, 스타일도 딱 맞아. 그래서 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수영 언니도 이 연기여신만큼은 아니지만 꽤 하는 편이지. 거기에 태형 선배랑 진아는 좀 무섭게 잘하는 편이고. 남은 건 기자랑 신혜······ 쟤들을 내가 지도해서 한층 성장시켜야 하는 거야.’

그 책임감의 원천은, 며칠 전의 특집 기사.

차기작에 투입될 배우들을 소개하는 씨네맥과의 인터뷰에서 이찬이 마침내 폭탄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번에 참여할 배우들 중 임희재가 자신의 연기스승이라고. 그녀와 오랜만에 함께 연기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고.

사실 그 발언보다는 크리스찬 베일의 참전이나 히스 레저의 커진 비중, 그리고 연인 사이임을 공표한 명진아와의 케미 쪽이 더 대중의 관심을 끌긴 했다.

하지만 임희재 입장에선 얘기가 달랐던 것이다.

무려 월드와이드 6억 달러 흥행의 핵심 빌런이 그녀를 스승이라고 명시해버린 상황이기에.

‘그 인터뷰가 번안돼서 해외 유수의 잡지에도 소개됐다고 했어. <흡혈귀>를 제외하면 해외에 얼굴을 알린 적도 없는 날 두고 많은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거야. 대체 어떤 배우가 이찬을 키워냈겠냐며 고개를 젓겠지. 그들에게 보여줘야만 해. 내가 이찬의 스승이라는 사실을, 이 신규 배역들을 통해서 알려줘야 한다고. 하늘기획의 제2호 배우로서!’

하늘기획 설립이 논의될 당시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게 바로 그녀였다.

시기로만 따지자면 신수영이나 명진아도 창림멤버라 할 수 있겠지만, 서면상으로 보자면 최고참은 아닌 것.

임희재는 그렇기에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이기자! 너 앞으로 나랑 합숙 좀 하자.”

“앗······ 누나, 저 꼬시는 거예요? 어머나.”

“시끄러, 짜식아. 그리고 신혜 너도.”

“저도요? 뭐야, 왜 이래요? 합숙 같은 거 싫은데.”

“싫어? 이찬 스승님이 직접 연기를 지도해주시려는 건데?”

“······전 걔 라이벌이거든요? 동문수학할 생각 없는데요.”

“멍청한 소리 하네. 라이벌은 무슨 라이벌이야? 지금 네가 세계에서 이찬의 발가락 때만큼이라도 먹힐 거라고 생각해?”

“으잇······.”

“라이벌이 되고 싶으면 연기로 보여줘야지. 그런 의미에서 넌 아직 멀었어. 제대로 처음부터 배워야 돼. 내가 가르쳐줄게. 그러니까 내일부터 합숙하자. 얼른 짐 싸놔.”

“······아 뭐, 그래요 그래. 얼마나 잘 가르치시나 한번 봐야지.”

대화의 양상을 가만히 살피다가, 홍주석이 또 피식 웃었다.

“보기 좋네. 그 합숙 나도 하자. 서로 챙겨주면 더 좋겠지.”

“어, 선배님도요?”

“그럼 나도 할래! 태형 오빠, 같이 해요. 응?”

“좋아. 이렇게 된 김에 다 같이 하죠? 진아야, 어때?”

“헤헷, 저도 좋아요.”

“좋다 좋아. <선비> 2부를 견인할 멤버들 전부 모여보자. 헐리웃 배우들한테 지지 말잔 말이야.”

홍주석의 결의까지 들은 뒤에, 임희재는 뒤통수를 한참 긁적였다.

“저기······ 일곱 명 모이면 제 집 터지겠는데요?”

“아, 그래? 그러면 늙은이는 빠져줘야 되나.”

“아뇨, 그러지 말고 장소를 바꾸죠. 좋은 데가 있어요.”

*

이찬은 일곱 명의 배우들을 빤히 바라봤다.

홍주석이 가장 먼저 헛기침을 했다.

“거 뭐, 불편하면 어쩔 수 없고. 그냥 한 잔 하고 가마.”

“아뇨, 불편한 건 아니고요. 어차피 넓은 집인데.”

“그러면 합숙 시작하고.”

“······그래요 그럼. 방 안내해드릴게요.”

이후 일곱 명의 배우가 머물 공간을 지정해준 뒤, 이찬은 임희재를 베란다로 불러냈다.

강변에 저무는 햇살 속에서 오랜 스승이 몸을 배배 꼰다.

“헤헷. 많이 놀랐어?”

“그렇죠. 대체 뭔 상황이에요? 갑자기 합숙훈련이라니.”

“아니 왜······ 그렇잖아? 물 건너온 조연들한테 우리가 밀려버리면 영화에 좋지 않을 건데, 연기도 서로 봐주고 팀웍도 강화할 겸, 이렇게 한번 추진을 해봤지.”

“그 합숙이 왜 제 집에서 열리는 건데요?”

“넓으니까?”

“이유가 너무 단순하지 않아요?”

“음······ 뭐 어떠냐? 나도 너 재워줬는데. 쌤쌤 아냐?”

9년도 더 지난 과거의 빚을 들먹이는 연기스승의 발언.

성공한 배우가 된 지금과 달리 자취방도 아닌 하숙을 살고 있던 스무 살의 임희재는, 친하지도 않은 이찬을 집으로 불러들여 꼭 끌어안은 채 잠들었다.

‘그때의 온기는······ 녹아버릴 것처럼 부드러웠지.’

이찬은 결국 키득거리며 웃고 말았다.

“아, 참나. 그게 어떻게 쌤쌤이 됩니까? 인원수가 다른데. 하여튼 이상한 아줌마야.”

“아아아줌마? 야, 이 나쁜 꼬맹이, 방금 뭐라 그랬어? 엄마라고 제대로 불러야지?”

“엄마는 무리라니까요.”

베란다의 통유리 문을 통해 북적거리는 거실을 보는 건 꽤나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건 이찬이 평생 가져보지 못했던 따뜻한 풍경.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이 몰려들어 새 작품에 대한 토의로 소란스러운 그 모습은, 부모와도 같이 살아본 적 없는 스타에게 복잡한 감흥을 줬다.

“예전에······ 수영 누나랑 이렇게 합숙을 했었죠. 정창영 사장님이 그때 제 실장으로 계셔서, 수진 누나까지 넷이서 약간 가족 느낌이 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하. 그때부터 저 언니가 마이 찬 어쩌고 했던 거지? 여우 같으니. 이찬맘은 세상에 나뿐인데 말이야.”

“나 사실 최근에 가족을 찾았어요.”

“허억.”

“······뭐야, 놀라는 척하는 거예요? 연기 되게 못하네.”

“으, 음. 창졸간이라 좀······.”

“언제부터 알았어요?”

“아니······ 극단에서 처음 봤을 때도 그런 생각은 했거든. 좀 복잡한 가정일 것 같다고.”

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흔의 형사를 형이라 부르는 열두 살 소년이 평범해 보였을 리는 만무하다.

이후 <어사>의 촬영을 제외하고도 사적인 시간을 많이 공유한 사람이니, 그 9년의 시간 동안 의심을 품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계속 이찬맘 어쩌고 했던 거구나? 속이 빤하네요. 아무튼 찾았는데, 기분이 묘했어요. 딱 보니까 엄마가 맞는 것 같았단 말이죠.”

“아하, 가족끼리 척 보면 안다는 그런 거구나?”

“그거랑은 좀 다르고요. 닮았거든요. 난 외탁이었던 거야. 되게 닮아서······ 진짜 웃겼다니까요? 그 집 딸은 대체 왜 날 못 알아봤는지 몰라. 하여튼 눈썰미 없는 인간들이란.”

“하하하, 눈썰미 없는 사람들이 좀 있지.”

“스승님도 포함인데요?”

“아, 난 왜? 아니, 베일 오빠는 솔직히 너무 살 뺐잖아? 그건 알아보는 쪽이 더 이상한 거거든?”

“그렇죠. 쉬운 일은 아니겠죠. 아무튼 난 쉽지 않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 바로 알겠더라고요. 딱 봐도 내 엄마였어. 그런데 그쪽은 그걸 모르시더라고요.”

“그쪽? 어, 어머니?”

이찬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돼서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임희재에게 한 차례 웃어줬다.

“하하. 너무 늦었던 거죠. 아무리 친모라고 해도 20년 만에 만난 아들을 알아볼 수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나왔어요. 엄마라고 불러보지도 못했죠.”

“······불러보지 그랬어.”

“멀쩡히 잘 사는 분한테 뭐 하러요. 그 집 딸이 되게 효도를 잘하더라고요. 제가 굳이 낄 필요 없을 정도로.”

“······그 집 딸이 뭐냐? 누나야 동생이야?”

“누나요. 좀 누나 같진 않지만.”

“나도 그래! 내가 전에 말했었나? 오빠가 많거든. 아빠 따라서 다들 군인 됐는데, 믿음직스러운 오빠가 하나도 없다니까? 하여튼 남자들은 애나 어른이나 철이 없어.”

9년 전을 떠올리며, 이찬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성차별적인 말을 하면 못써요.”

“응? 음······ 어······ 뭔가 기시감이 드는데?”

“누나가 내로남불이라 그런 거죠.”

“뭐지? 뭔가 떠오를 법도 한데······ 음······.”

“하하.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사람들 보니까 왠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내가 잃어버린 건 가족이 아니었던 거라고. 찾으려고 들었다면 찾을 수 있었을 거거든요. 검찰 빽도 있으니까.”

“너 검찰 빽도 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하여튼 이상한 스승님이야.”

돌아서서 바라본 창가엔 석양이 눈부셨다.

강물이 온통 빨갛게 돼서, 물 형태의 태양이 흐르는 듯했다.

“사실 잃어버렸던 건 마음 쪽이었던 거죠. 내 곁에 다가온 사람들도 품지 못할 정도로 상처받은 채로는, 가족을 찾았다 해도 행복해질 수 없었을 거예요.”

“아······ 뭔 말인지 알 것 같아. 나도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는 가족들 다 밉고 그래.”

“하하.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일상적으로 들리네요. 아무튼 그랬다고요.”

“음, 지금은 어때? 괜찮아? 엄마라고 안 불러도 괜찮아?”

“예. 이젠 괜찮아요. 가족이야 이쪽에도 많은데 뭐. 나만 몰랐을 뿐이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옆에 있잖아요? 그거면 된 거지.”

“아, 이 이쁜 자식! 언제 이렇게 많이 큰 거야? 엄마는 행복하다!”

그렇게 외치며 뒤에서 끌어안는 임희재는, 9년 전처럼 따뜻했다.

태양보다 포근한 온기를 느끼며 이찬은 중얼거렸다.

“엄마······.”

“그래, 엄마야. 엄마 여기 있어. 그러니까 외롭지 않아.”

“뭐 그런 셈 치죠. 근데 계속 그러고 있어도 되겠어요?”

“응? 왜? 아, 창밖에서 누가 찍을까봐? 뭐 어때, 어차피 너 여친 있는 거 세상이 다 아는데.”

“그렇죠. 그 여친이 지금 누나 쳐다보고 있고요.”

“허억?!”

놀라서 돌아본 임희재가 베란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동그랗게 바라보던 명진아에게 황급히 변명을 내뱉는다.

그 두 사람을 보며, 또 거실에서 뜨거운 논쟁으로 캐릭터를 해석하는 배우들을 보며, 이찬은 생각했다.

‘저 사람이 내 새 가족들. 형이 말한 대로, 난 좋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 점점 더 행복해지고 있어. 축복 속에서······.’

< 82장 - 엄마 임희재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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