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장 - 야인 이군영 (1) >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이군영은 낯선 길을 걸었다.
5년 만에 마주한 일상의 공간이란 기묘한 느낌이었다.
신문을 통해 어렴풋이 접한 2009년의 현실 역시.
‘한국 스튜디오에서 한국 스탭과 한국 배우들이 찍은 <선비>가, 월드와이드 6억 7천만 달러······. 하하. 어마어마하군. 정말 어마어마해.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스케일이야.’
한때 그는 기획사 시대의 초창기를 선도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기획사를 이룩했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라엔터도 헐리웃 앞에선 그저 구멍가게.
지금처럼 한국에서 찍은 영화로 세계 최고의 히트작과 경쟁하는 상황이란 꿈에서도 그려보지 못했다.
‘그릇의 차이란 걸까. 난 딱 거기까지였던 걸지도. 배우로서 최고가 되지 못했기에 경영자로서라도 입지를 이루고 싶었지만, 결국 남긴 건 범죄자란 꼬리표뿐이었어. 과욕이 만들어낸 추악한 자화상이라는 거지.’
이후 택시를 잡아탄 이군영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선비>의 빌런 더 댄서- 이찬에 대해서.
나라엔터의 조혁수가 주연으로 나선 작품이지만, 실질적으로 그 영화의 모든 제작과 홍보 과정을 통솔해 세계에 한국영화의 기념비를 세운 건, 약관의 청년이었다.
‘정록이보다도 뛰어난 천재 연기자에, 이 이군영보다도 뛰어난 사업가. 그런 놈이 이제 성인이 됐다는 거지. 무서운 일이고, 우스운 일이야. 한때 내가 그 대붕을 품으려 했다니.’
그가 이찬을 처음 본 건 2000년의 한국예술대학에서.
당시 회사 간판배우인 강정후의 안정록 타령에 질려 있던 이군영은, 스스로에게 최고의 명예를 안겨주기 위해 천재소년을 회사로 끌어들였다.
이후 그를 조카로 입적하고 제자로 홍보하며 조만간 안정록의 명성을 능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한여름 밤의 꿈.
이찬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두뇌로 스스로의 길을 개척했고, 그 끝에 이군영의 삶을 망쳐놨다.
‘······욕심부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가질 수 없는 걸 가지려 해선 안 됐어. 이찬의 스승이란 타이틀도 정록이 이상의 명성도,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어······.’
복잡한 생각 속에서 당도한 곳은 묘지.
안정록이 안장되어 있다는 분당의 한 납골묘였다.
이군영은 10분쯤 걸어 다닌 끝에 오랜 벗이자 라이벌이었던 인물의 이름자를 찾아냈다.
“안정록······ 여기 있었군. 오랜만이야. 거긴 좀 어떤가? 보니까 제자가 계속 챙겨주고 있는 것 같구만. 이렇게 생화가 놓여있는 걸 보면 말이야······ 아니, 아니지. 그 녀석은 영국에서 영화 찍고 있지 않나? 아마 깡패새끼들한테 관리를 맡겨놓고 간 모양이군. 아니, 그것도 아닌가. 사실 그 녀석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누구나가 널 좋아했지. 그래서 지금도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모양이야. 그렇잖아? 나 빼곤 전부 널 좋아했었단 말이야.”
수감 중에 쉰을 넘긴 이군영의 목소리는 고즈넉했다.
그 나이를 넘기지 못하고 떠나간 벗에 대한 정이, 평생 표현되지 못했던 마음들이 그 음성에 묻어났다.
“네가 미웠어. 빌어먹을 연기 귀신 녀석. 극단에서부터 너한테 매일 쫓기는 기분이었지. 시작은 내가 더 나았는데 말이야. 그랬잖아? 네가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더니 모든 걸 바꿔버렸어. 브라운관으로 진출해서도, 스크린으로 나와서도, 너는 언제나 날 순식간에 앞질렀어. 이유는 뭐 단순하겠지. 언제나 연기 연기······ 머릿속에 연기밖에는 없는 인간이어서 그랬을 거야. 너한텐······ 살리에리 따위 보이지도 않았겠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극단 안팎에서 불린 별명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이군영 입장에서는 특히 그랬다.
“부러웠다. 미치도록 부러웠어. 너처럼 되고 싶었어. 사람한테는 관심도 없는 제멋대로인 놈인데도, 늘 사랑만 받았잖아? 네 연기를 본 사람들은 이후로 언제나 네 편이었지. 정말 부러운 노릇이잖아. 난 평생을 노력해도 그렇게는 되지 못할 거니까. 그래서 너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연구했지. 마침 내 동향 선배님이 문광부 일을 맡으셨더라고? 이거구나 했지. 기획사를 차려서 연예계의 정점에 서면, 내 아래에 있는 배우들만은 너보다 날 좋아하게 되리라 믿었어. 그런데 아니었던 거야. 빌어먹을 강정후 놈. 아무리 애지중지 잘해줘도 네 이름만 불렀단 말이야. 촬영 대기 중에 잠꼬대로도 널 찾았다더라. 이거야 원, 삼각관계의 최약자가 된 것 같았다니까?”
낄낄거리며, 이군영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뭉게구름이 젊은 시절의 안정록을 닮은 것처럼도 보였다.
“빌어먹을 놈······ 뭐가 그리 급하다고 가버려. 나쁜 자식. 한번쯤은······ 딱 한번쯤은 너랑 허심탄회하게 술 한 잔 하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도 안 주고 가버리면 어떡하냐. 미안하단 말 한마디 할 기회도 안 주면 어떡하냐. 넌 진짜 끝까지 마이페이스야. 이찬 그 빌어먹을 놈이랑 똑같아.”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니 사실과는 좀 다른 듯했다.
“아니지. 다르지. 넌 이찬하곤 다르지. 날 파멸시킨 그놈은 말이야, 정말 대단해. 연기 말곤 관심도 없다는 듯 굴다가도 어느새 사람들 심리를 다 파악하고 어른들을 갖고 논다니까? 무서운 녀석이야. 그놈이 나보다 널 먼저 만나서 참 다행이지. 그렇잖아? 자칫했으면 말이야, 나 같은 놈한테 이상한 수를 먼저 배웠으면, 진짜 대악당이 됐을지도 몰라. 지금은 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잘 사는 거 같더라. 강정후도 그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하고 영화를 찍고 있다는 거야. 네 제자가 헐리웃까지 접수하러 갔다는 거야. 대단하다, 대단해. 안정록, 네 유산들은 진짜 나로선 감당이 안 된다. 죽어서도 나한테 엿을 먹이는, 세계 최고의 연기 귀신아······.”
이군영은 문득 눈물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거부했다. 스스로에게 그런 인간적인 마음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하! 우습다, 우스워. 나이 먹고 이게 웬 청승인지. 그만 가볼란다. 나중에······ 나도 그쪽으로 가면, 그때 술 한 잔 다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안 그러냐, 이 귀신아?”
“안 그래요.”
뜻밖의 목소리는 마치 환청 같았다.
눈을 들어 그 주인공을 본 뒤에야, 이군영은 자신이 감정에 몰입해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찬. 언제부터 보고 있었냐?”
“처음부터요. 손까지 흔들고 있었는데, 묘석만 보시느라 알아채질 못하시데요?”
“이런, 개자식이. 말을 걸 것이지.”
“안녕하세요 삼촌! 이렇게 불렀어야 했나?”
터무니없이 느긋한 목소리.
호적상 그의 삼촌이 되는 이군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미친 새끼. 너 때문에 인생 말아먹은 사람을 앞에 두고, 그렇게 장난을 치고 싶냐?”
“그러는 아저씨는요? 당신 때문에 인생 말아먹은 사람들 앞에 두고 어떤 기분이 드셨는데요?”
“······뭐 그냥 그랬어. 어차피 나한테 당하지 않았어도 어디서 눈탱이 맞았을 놈들이라 생각했지. 나라는 놈이 세상을 바꿀 그릇은 아니니, 그저 순응하고 적응해서 빌어먹을 세상의 선구자가 되고 싶었다.”
“범죄자의 가장 전형적인 변명이네요. 거의 클리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찬은 의외로 씩 웃었다.
“아저씨. 벌써 알지도 모르겠지만, 나 독심술 합니다.”
“······놀랍지도 않다.”
“그래서 알아보겠어요. 마음이 많이 바뀌셨네요. 교도소가 교화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모양이에요.”
“웃기고 있네.”
“따라와요. 보여줄 게 있으니까.”
“싫다. 뭔 복싱까지 했다는 놈이라 무서워서 못 덤비는 거야. 아니었으면 넌 벌써 칼 맞았어.”
“총이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구해보시죠?”
“싫다고, 이 새끼야. 좀······ 사람 약 올리지 말고 꺼져라.”
“그래요? 아쉽게 됐네요. 이게 마지막 유언인데.”
이찬은 누가 봐도 아쉬움이 넘쳐나는 얼굴로 테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이군영 입장에선 당황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유언이라고? 정록이가, 나한테 유언을 남겼다고?”
“예. 빈소에서 전달하지 못한 두 개 중에서, 조혁수 선배 건 제가 미국 가서 전해줬죠. 그래서 이게 마지막 하나예요.”
“······나한테 왜? 그 자식은······ 날 미워했을 텐데.”
“미움 받을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네요?”
“흥. 내놔. 내놓고 꺼져.”
“나랑 같이 보는 게 좋을 텐데? 내용을 보진 않았지만, 아마 생각했던 모든 걸 담지는 못하셨을 거거든요. 아픈 몸으로 수십 개 유언 촬영하시기가 쉬웠겠냐고요. 그렇지만 나한테는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셨어요. 되게 궁금하시죠?”
이군영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지만 메이웨더를 꺾은 복서의 스승에게 감히 덤벼들지는 못하고, 3초쯤 뒤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이찬의 차에 올라탄 뒤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다들을 듣게 됐다.
“잘하신 거예요. 묘역부터 오신 거요. 안 그랬으면 그냥 두지 않았을 거거든요. 유언이 다 뭐야? 그간 조사한 것들 폭로해서 다시는 한국에 발 못 붙이게 했을 겁니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기다리고 있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일반우편이 아니라 등기니까. 제 입장에선 반드시 전달해야 했거든요.”
“방금은 묘역에 안 왔으면 안 줬을 거랬잖아?”
“주긴 줬겠죠. 언젠가 아저씨가 참회한 뒤에.”
“참회 같은 거 안 한다.”
“예 예, 안 하셨나 봅니다.”
정말로 독심술을 하는 건가- 잠깐 생각하다가, 이군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뒤에 또 이찬이 이상한 소릴 했다.
“똥구녕이라는 별명 혹시 알아요?”
“······알긴 알지. 면전에서 말한 새끼는 네가 처음이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뭐라는 거냐?”
“개그 프로그램 유행어예요. 밤 프로라서 못 보셨겠네.”
“넌 참······ 싸가지 없는 새끼야.”
“알긴 알죠. 면전에서 말한 새끼는 아저씨가 처음이지만.”
“······그래 그래. 내가 할 말은 아니구나.”
그렇게 괴상한 대화 속에서 도착한 곳은 나라엔터 신사옥.
금양-프로-나라 3강 체제가 무너지고 ‘하늘나라’ 두 회사가 배우 업계의 톱이 된 지도 오래인지라, 그 건물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위풍당당했다.
“저게 나라엔터라니······ 멋지군.”
“원래 짓고 싶었던 건물과는 좀 다르죠? 아저씨를 파국에 이르게 만든 그 신사옥 계획은, 전부 다 폐기했대요. 똥구녕 마인드의 건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강정후가? 그 새끼도 참······. 근데 여긴 왜? 저 건물 보여주려고 데려온 거냐?”
“그럴 리가. 여기에 사과해야 할 사람이 한 명 있잖아요?”
“뭐? 아, 강정후? 차 돌려라. 그놈 꼴도 보기 싫어.”
“유언 보기 싫으신가?”
“이런, 씨벌놈······.”
12층의 집무실에서 강정후를 마주했을 때, 이군영은 삶의 기묘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대표였고 배우였던 우리가, 전과 6범과 대표로 만났군. 재밌는 세상이야 참. 예전 건물이었다면 더 드라마틱했겠는데.’
그건 배우들의 직업병 같은 사고방식.
이제는 배우도 기획자도 아닌 이군영이지만, 어떤 영화에서도 보기 힘들 세월의 드라마에서 묘한 감흥을 받고 말았다.
그래서였다. 그는 강정후를 보며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미안하다, 정후야.”
“······뭐야. 달랑 미안하다로 끝입니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니.”
“하. 참 웃기는 인간이시군.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변명할 것도 없다. 아비 같은 스승에게 미움 받게 만든 나를 네가 용서할 수 있을 리 없지.”
“······미치겠군. 야, 이찬. 네가 보기에도 진심 같냐?”
“뭘 또 확인까지 한대? 이 아저씨 싸구려 연기력으로 선배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요? 터무니없지.”
말을 꼭 그딴 식으로 해야 되는 거냐며 화를 내보려다가, 이군영은 고개를 흔들며 침묵했다.
그리고 강정후가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용서는 하겠습니다. 언젠가 당신을 내 손으로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젠 풀렸으니까.”
“거, 별일이네.”
“꺼지세요. 꼴도 보기 싫습니다.”
말이 앞뒤가 다르지 않냐는 반박은 입에 담지 못했다.
대표실을 나선 이군영은 이찬에게나 조심히 한마디 물었다.
“쟤는 언제 들어왔냐? 귀국했단 기사는 없던데.”
“아저씨 보러 잠깐 들어온 거예요. 내 전용기로 몰래 와서 기사는 안 나갔죠.”
“아······ 그랬구만. 그 꽃은 정후가 놓은 게 맞았던 거야.”
이후 다시 차에 탑승한 뒤, 이군영은 한탄처럼 말했다.
“저 녀석을 내 제자로 만들면, 즐거울 줄 알았는데.”
“그 실력으로요? 대단한 야망이신데.”
“······씨벌놈. 그냥 좀 그랬어. 안정록한테서 제자를 빼앗는다면 그게 참 행복할 것 같았단 말이야. 예를 들면 제발 좀 돌려달라고 사정하는 그 녀석 얼굴을 본다거나······. 너도 아냐? 정록이가 그런 인간적인 모습이 좀 없거든.”
“댁한테나 안 보여줬겠죠. 쓰레기 같은 인간이니까.”
“······그래서였나. 그래서 나만 미워했던 건가.”
가타부타 답하지 않고 이찬은 그를 하늘기획으로 인도했다.
그곳에선 정창영이 오랜 보스를 맞이했다.
“음, 흠. 거, 오랜만입니다.”
“창영이······ 오랜만이다. 신수가 좋구나.”
“대머리 됐는데 신수가 좋긴. 아무튼 참······ 묘하네요. 참 오랫동안 대표님 뒤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말입니다.”
“그래. 네가 창업공신이었지.”
“똥구녕이라고 속으로 욕도 많이 했지만, 많이 배웠습니다. 그 점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해요.”
93년도 나라엔터 창업 당시부터 거의 만 11년 동안.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한 그 세월 동안, 이군영은 무수한 직원들을 거느린 기업의 수장이었다.
그렇지만 고맙다는 말을 들은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 번창하길 기원한다.”
이후 이찬은 그를 개인 연습실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마침내 안정록의 유언이 재생됐다.
[······군영아. 참, 이 이름을 오랜만에 불러보는 것 같다. 너한테는 해야 할 얘기가 정말 많은데······ 내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가 않아 안타깝다. 그냥, 미안하다. 미안해, 참.]
예상치 못했던 벗의 한마디에, 이군영은 웃었다.
그러다가 테이프가 꺼지고 나니 왈칵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그는 잠깐 웃고, 오래 울었다.
< 83장 - 야인 이군영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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