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장 - 야인 이군영 (3.) >
“요샌 보조출연으로 밑바닥 구르고 있대. 보러 갈래?”
빙긋 웃는 이찬의 말에, 천세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나쁜 짓 안 하고 살고 있다면 그걸로 된 거잖아?”
“희한하네. 나 같으면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다 끌고 가서 놀려댈 텐데. 하여튼 누나는 너무 찌질하단 말이야.”
“어휴. 넌 그런 점에서 좀 못됐어.”
“나야 못된 사람한테만 못되게 구는 스타일이지.”
“그 사람 참회했다면서? 그럼 못되게 안 굴어도 되잖아?”
“그렇긴 한데······ 보지도 않고 그냥 믿는 거야?”
“내가 보면 아나? 눈치 없어서 맨날 속기만 하는데. 네가 훨씬 더 사람 잘 보니까, 그냥 믿을게.”
이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는 원한도 남지 않았다는 듯 편안한 표정이 우습긴 했지만, 그 정도 한심함은 용인할 만한 사이인 까닭.
친누나와의 짧은 만남을 핀잔으로 채우고 싶진 않았다.
“이제 곧 촬영 들어가면 한동안 시간 내기 힘들 거야. 누나도 바로 작품 들어가는 거지?”
“응······ 정후 오빠 돌아오기 전에 내 분량 먼저 찍어둘 거래. 그래서 내년 봄에 개봉하는 게 목표래.”
“내용이 어떤 거랬지?”
“청불 멜로야. 음······ 넌 보지 마.”
“강 선배랑 세영 누나 멜로라. 별로 보고 싶진 않네.”
민망한 듯 웃는 천세영을 보다가, 이찬은 넌지시 물었다.
“그 인간 얼굴은 봤어?”
“어······? 정후 오빠 한국 들어왔어? 언제?”
“······아냐.”
“뭐가 아냐? 한국 들어왔으니까 물어본 거잖아?”
“어흠. 멜로영화도 요즘은 소재가 중요한데. 500만 이상 가려면 뭔가 독특하면서도 공감이 될 만한 캐릭터가 필요할 거야. 각본 보면서 잘 분석해봐.”
말을 돌리려고 애쓴다는 걸 눈치 없는 천세영도 알 법했다.
“너······ 있지 찬아. 그 오빠는 나 별로 안 좋아하게 됐을까?”
“글쎄.”
“아니, 진짜 웃기지 않아? 나 좋다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이제는 연락도 잘 안 받고. 그러면서 영화 섭외는 별 말 없이 받았더라고. 이상해. 속을 모르겠어.”
그녀와 달리 이찬은 강정후의 속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직접 설명해주는 건 마뜩치 않아서, 즉답하기보다는 다시 한 번 말을 돌렸다.
“아, 곧 촬영이네. 우리 영화에 못 불러서 미안해. 같이 작품 하나 해보고 싶긴 한데, 이쪽에 들어오기엔 누나 캐릭터가 마땅한 게 없었어. 하나 있는 건 진아 누나 줘야 했거든.”
“그래. 누나보단 여친이 더 중요하겠지.”
“어흠. 그런 건 아니고, 상황이 좀 그랬어.”
“알았어 알았어. 그나저나 <인셉션>은 어떻게 될까? 정후 오빠 분량 많이 나올까?”
“그럴 거야. 주인공의 고용주이자 작중의 비밀을 쥐고 있는 핵심 인물이라서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을 것 같아.”
“정말? 그런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크리스한테 들었어. 아, 놀란 감독 말이야.”
세계적인 거장과 통화하는 사이라는 말을 담담하게 내뱉는 친동생에게, 천세영은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질문을 이어갔다.
“그 영화는 잘될까? 그······ 내용이 너무 어려울 것 같던데.”
“머리 나쁜 인간들 속이려고 이런저런 맥거핀도 넣을 것 같긴 하던데,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재미가 있을 거야. 적어도 월드와이드 5억불은 되겠지.”
“그렇구나······. 그 앨런 페이지, 엄청 예쁘던데.”
“누나만큼은 아냐. 근데 자꾸 그런 것만 물어볼 거야? 동생보단 꽃미남 쪽이 더 중요한가?”
“아, 하하. 찬아, 나 궁금한 게 하나 있긴 했는데.”
“뭔데.”
“널 납치했던 사람은······ 아직도 잡히지 않은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넌 어쩌다 고아원에 가게 됐던 걸까?”
“그야 돈 받고 나서 버렸겠지.”
“으, 끔찍해. 진짜 끔찍한 인간이야. 혼쭐을 내줘야 돼.”
그 말에 이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인에게 험한 꼴을 강요했던 이군영 놀리는 건 싫다고 했으면서, 먼 과거의 납치범한테는 몹시 분개하는 꼴이기에.
반면에 이찬은 오히려 그쪽에 별반 나쁜 감정이 없었다.
“내가 그 집안에 있었으면 오히려 안 좋았을걸.”
“응······? 야, 왜 그런 말을 해?”
“보통 나 같은 인간들은 유년기가 별로거든. 그 기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다행일지도 몰라.”
“치. 엄마한테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았으면서.”
“다 잊고 사는 분한테 굳이 왜? 누나가 잘해줘. 의수는 잘 맞으시대?”
“······응. 비싼 거라 그런지 정말 편하신 모양이야.”
고개를 주억거린 뒤, 이찬은 납치범과 이군영을 생각했다.
두 명의 범죄자를 생각하는 마음의 빛깔이 약간 다르다는 것이 어쩐지 묘하게 느껴졌다.
‘흠······ 이게 혹시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란 걸까? 나 자신이 당한 일이야 별로 신경을 안 쓰는데, 오히려 가족이 당한 일이면 본인보다도 더 분개하게 되는 거야. 무리생활을 계속해온 인류의 DNA가 충동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네. 그렇지만······ 좀 따뜻하긴 한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강정후 그 인간은 좀 싫긴 해. 개자식이 감히 세영 누나를 무시하다니. 좋아하는 마음이 커져서 오히려 두려움이 생겼으리란 건 알겠지만, 그래도 한심해.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이야.’
*
<인셉션>의 한국 씬 촬영을 위해 귀국한 강정후에게 국내의 관심은 지대했다.
세계적인 거장과 최고의 배우들이 만드는 대작의 배우인 동시에, 그 모국을 핵심 로케이션으로 이용하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가 된 인물이기에.
애초 인셉션의 동양인 배역은 일본인이었으며, 일본 로케이션 촬영으로 오리엔탈 판타지를 극대화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일본 배우 와타나베 켄이 그 배역에 거의 내정돼 있었다.
그러나 강정후는 오디션을 통해서 당당히 그를 밀어냈고, ‘관광객’ 역할을 한국인으로 수정하게 만들었으며, 그 촬영지로 한국의 오픈세트장을 소개했다.
그렇기에 크리스토퍼 놀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조셉 고든 레빗 등이 총출동해 내한하게 된 것이다.
그 입국 과정에선, 홍보를 위한 방문이 아니기에 따로 인터뷰 없이 가벼운 촬영과 인사만을 진행했다.
다만 조셉이 좀 독특한 인사말로 기자들을 흥분시켰다.
“히스가 이 나라에서 <선비>를 찍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보다 더 멋진 연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캉과 함께 최고의 장면을 찍고 돌아가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인터뷰를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가는 동안, 그 조셉이 강정후에게 접근해 툴툴댔다.
“이봐, 캉. 한국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지?”
“아직은. <500일의 썸머>가 개봉하면 좀 달라지겠지.”
“흠······ 히스랑 라이벌리가 형성된다면 좋겠는데.”
“그래서 굳이 그 배우 이름 거론한 거야?”
“그래. 내가 그저 걔랑 이미지가 비슷해서 캐스팅된 대타라니, 억울하잖아? 히스가 이 걸작을 걷어찬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그리고 크리스가 날 캐스팅하게 된 걸 기뻐하게 만들겠어.”
사실 그의 ‘포인트맨’ 배역 역시 배우가 변경된 배역.
켄과 강정후의 ‘관광객’과는 반대로, 내정되어 있던 이가 다른 작품을 찍기 위해 고사하게 된 케이스였다.
그 기존의 내정자가 바로 히스 레저였으며, 그가 <인셉션> 대신 집중하고 있는 작품이 한국의 <선비>.
늘 의욕 넘치는 조셉이 그 관계 때문에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렇게 된다면 좋겠군.”
“그럼 그럼. 이번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10 Things I Hate About You> 이후로 자주 보지 못해서 좀 소원해졌는데. 캉, 그 영화 봤어? 거기서 히스가 말이야-”
“아, 미안. 나 잠깐 급한 전화 좀.”
그건 그저 귀찮은 비글을 떼어내기 위해 한 말.
하지만 막상 핸드폰을 들고 생각해보니 전화를 걸어야 할 사람이 한 명 있긴 했다.
“이찬. 나 도착했다.”
[알아요. 생중계됐거든요. 세영 누나한테는 연락했어요?]
“······아니. 하루 쉬고 문경으로 갈 건데, 올 거냐?”
[어이가 없네? 와주세요 부탁하신다면 또 몰라.]
“디카프리오가 너 한번 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 뭐래. 직접 전화해서 부탁한다면 또 몰라.]
“······전화번호 알려주랴?”
[응? 뭐래. 그래봐야 헛수고예요. 놀란 감독도 직접 우리 세트장 보러 오기로 한 마당에, 제깟 게 뭔데 오라가라야?]
“미친 새끼. 오만방자하기가 짝이 없어.”
[그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 아 잠깐만. 문경요?]
“그래. 문경 세트장으로 갈 거다. 사극 느낌의 배경이 필요하거든. 한국의 멋을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지.”
이찬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이내 될 대로 되라는 듯 말했다.
[그래요. 즐거운 촬영이 되길 바랍니다.]
“그럴 거다. 최고의 촬영이 될 거야.”
[세영 누나한테 전화하면 최고의 행운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건 모르겠고.”
[야 이 개새끼야! 아, 놀랐어요? 미안. 내가 요즘 개를 키우거든. 정후야, 짖어봐. 왈 왈!]
“······끊는다.”
있지도 않은 개새끼를 찾는 이찬과의 통화는 짧았다.
대신 강정후는 다시금 비글 같은 조셉에게 시달려야 했다.
*
흙먼지 속에서 진입하는 일단의 버스를 보며, 이군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씨. 어이, 이 씨!”
“음······ 어, 왜.”
“우리 촬영 들어갈 시간 된 거 같어. 거기서 뭐 혀?”
“다른 촬영팀 들어오는 걸 좀 보고 있었어.”
“응? 다른 촬영이 또 있대? 뭔디?”
“<인셉션>이라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작품이야.”
“감독이 놀란다고? 뭔 소리여? 얼른 오기나 하라고, 이 씨.”
함께 관료 역할을 맡은 보조출연자 황 씨와 함께 궁궐로 들어가던 길엔, 곱게 차려입고 달려오던 이소연과 마주쳤다.
“아! 아저씨, 여기 있었네! 정후 오빠 보러 가요.”
“······내가 왜.”
“왜는 왜야, 나 영어 못 하니까 그러죠. 통역 좀 해줘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게 한국 최고의 미를 과시할 거예요.”
여전히 소녀 같은 이소연을 보며, 그는 좀 울적해졌다.
‘처음부터 이런 아이였지. 티 하나 없이 해맑은, 평생을 아이처럼 살 것 같던 녀석. 이 순진한 애를 더러운 늙은이에게 바쳐서 간판배우로 키워낸 건······ 그건, 관행이라는 말로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나란 놈은 정말······ 끔찍하구나.’
길게 한숨을 내신 뒤, 끔찍한 보조출연자 이 씨는 놀란 토끼 눈으로 보는 보조출연자 황 씨에게 설명했다.
“주연이 이래서 촬영 밀릴 거야. 반장이랑 같이 쉬고 있어.”
“어, 어이, 이 씨! 뭐여? 뭐 이리 발이 넓은 겨?”
연예계엔 관심 없이 소일거리로만 일하는 동년배 노인에게 구태여 긴 설명을 해줄 필요는 없었다.
이군영은 과거의 소속 배우와 함께 흙길을 걸었다.
그리고 자신이 빼앗았던 친구의 제자와 재회했다.
“오빠! 정후 오빠! 나 왔어요. 하이 헬로! 와, 디카프리오!”
소란스레 배우들에게 인사하고 다니는 이소연을 따라다니며, 이군영은 종종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시선의 주인공인 강정후가 이내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당신, 여기서 뭐 합니까? 그 복장은 뭐고.”
“······뭐긴. 보조출연 알바 중이다.”
“이런 미친. 뭐 하는 개지랄이야?”
“······싸가지 없는 새끼. 어른한테 말버릇 하곤.”
“어른 같은 소리 하네.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을 해야지, 체면도 없이 여기서 이러고 있어? 노망났습니까?”
“그건 또 뭔 소리야? 보조출연이 부끄러운 일이냐? 이것도 다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업무다. 헛소리 말고 저리 꺼져.”
그 정론에는 강정후도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마음 쪽에 반박을 외쳤다.
‘뭔 멍청한 동정심이냐. 저 노인은 자기가 저지른 죄 때문에 커리어를 잃은 인간이야. 그래서 18등급도 모자란 긴 경력에도 불구하고 보조출연이나 하며 살게 된 거야. 그게 뭐 동정할 일이겠어? 제 말마따나 중요한 업무 하고 살라지.’
그러나 그날 촬영을 진행하며, 강정후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전개했다.
‘안정록 선생님은······ 그 선한 사람은, 저 꼴을 보고 싶지 않으실 거야. 저건 좀 아니잖아. 그래도 선생님과 함께 대학로의 쌍벽이었던 사람인데. 저건 너무 꼴불견이란 말이야.’
이후 강정후는 드라마 제작진을 통해 이군영을 호출했다.
그리고 놀란 감독과 함께 고풍스러운 궁궐에서 그를 맞았다.
“······왜 불렀냐?”
“당신, 연기력 녹슬지는 않았죠?”
“녹슬었지. 제대로 해본 지 20년이니까. 그건 왜?”
“감옥에서 한참 썩은 인간이 맡을 만한 배역이 있어서요.”
“······무슨 개소리야?”
“내가 수십 년간 꿈속을 헤맨 뒤에 이르게 될 노인 역입니다. 그걸 당신이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감독님한테는 이미 얘기했습니다. 제가 실력 보증하는 사람이라고 했죠.”
“이런 미친 새끼가! 내가 영화에 얼굴 내밀 처지냐! 그것도 이런 헐리웃 대작에, 어떻게 나 같은 놈이 출연하냐!”
한국어로 이뤄진 대화가 고성으로 이어지자 놀란 놀란 감독이 끼어들었다.
“미스터 리? 진정해요. 지금 그 이미지, 아주 마음에 듭니다. 원래 배우도 괜찮았지만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에요. 나와 함께하시죠.”
“······이봐요. 난 전과자입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죗값은 치렀다고 들었는데.”
“······대중은, 날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그래요? 하지만 강의 말은 좀 다르던데.”
돌아보자, 강정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했다.
“프로모션 때 내가 인터뷰 진행할 겁니다. 죄를 짓긴 했지만 그래도 내 스승님의 하나뿐인 친구였으니, 여생이나마 배우로서 좋은 작품 찍을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고요.”
“이런 미친놈이······.”
“미친놈은 당신이지. 안정록 선생님의 친구 주제에 보조출연이나 하며 소일거리 하겠다고? 말이 되나. 한국에 발붙이기 힘들 것 같으면 해외나 다니십쇼. 놀란 감독 영화에서 인상적인 모습 보여서 앞으로는 외국에서 영화 찍으란 말입니다. 해외 투자자들 만난답시고 배운 영어회화 써먹으며, 죽을 때까지 배우로 살란 말입니다.”
그 말까지 듣고 나서, 이군영은 열린 창호지문 너머로 하늘을 바라봤다.
그날도 뭉게구름이 안정록의 얼굴과 몹시 겹쳐졌다.
‘이 녀석이 이런 성격이었구나. 겉으로만 예의 지키는 연기 천재가 아니라, 사실은 속이 더 따뜻한 아이였어. 너는······ 넌 아직도 날 보살펴주고 있구나. 네 제자를 통해서 지금도 내게 친구의 정을 베풀고 있어. 너희들은 참······ 참 포근하구나.’
*
[그렇게 됐다. 너하고는 악연이라고 하던데, 좀 미안하다.]
놀란 감독의 말에, 이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악연이라. 악연이라면 악연인데, 별로 상관은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연기는 어때요? 허접하지 않았어요?”
[아니, 전혀. 솔직히 말해서 좀 놀랐다. 이 정도로 담백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는 오랜만에 봤어. 클래식한 발성도 빛을 잃어버린 과거의 지배자와 잘 어울렸고.]
그야 뭐 딱 자기 처지랑 맞는 배역이긴 하겠네- 이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강 말대로 그게 한국 흥행에 지장을 주진 않을 거예요. 미스터 리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들 대부분이 강을 무지하게 좋아하거든요. 사실은 그 본인이 아니라 그 스승을 좋아하는 거지만.”
[강의 스승이라. 강에게 얘기는 몇 차례 들었는데, 더 궁금해지는구나. 직접 만날 수 없다는 게 아쉬워.]
“······차 한 잔 하는 씬이 있으면 좋을 것 같네요. 그분이 차를 굉장히 좋아하셨거든요.”
[차? 아, 그래. 그거 꽤 지역색이 살 것 같다.]
통화를 마치고, 이찬은 오랜만에 안정록의 다기를 꺼냈다.
고인이 아꼈던 차가 무척 달게 느껴졌다.
‘차는 목으로 넘어가 마음에 담긴다고 했던가. 그래, 제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쓴 차가 이렇게 맛있을 정도라면, 이제는 나도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죠, 형?’
석양에 물든 하늘은, 차의 온도처럼 따뜻해 보였다.
< 83장 - 야인 이군영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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