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장 - 빌런 강정후 (2) >
거장 오덕환의 신작 <비겁한 사랑>의 촬영현장에서, 천세영은 오랜만에 이찬의 전화를 받았다.
“어? 웬일이야? 찬아, 촬영 때문에 바쁘지 않아?”
[일단 한시름 돌렸어. 크리스찬 베일 내한해서 그 사람 분량부터 찍을 거라 한동안 쉬는 거. 강 선배는 좀 어때?]
“정후 오빠, 잘하지. 찬이 너도 긴장 좀 해야 될 것 같아.”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닌데. 그 선배야 내 연기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게 돼 있어. 내가 물어본 건 누나한테 좀 잘하냐는 질문이야.]
“어······ 찬아? 중우정치가 왜 가능한지 요즘 알 것 같아.”
[뭐? 갑자기 뭔 소리야?]
“너처럼 함부로 말하는 애를, 대중은 세상 다시없을 천사 배우로 알고 있으니까.”
[하하. 꽤 늘었네? 꼬아서 독설 날릴 줄도 알고.]
그건 진심은 아닌 캐릭터 숙련의 일환.
이번 멜로영화에서 그녀가 맡은 배역이 나쁜 여자 캐릭터인지라, 평소에도 거기에 몰입해서 사고하는 중이었다.
다만 천세영의 천성이 그 배역에 잘 맞진 않았다.
“음······ 근데 찬아? 농담인 거 알지? 난 네가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마음씨 고운 애인 거 아니까.”
[그런 건 목소리만 들어도 아니까 해명할 거 없어. 아무튼 잘하고 있다니 다행이네. <다크나이트 라이즈> 배역에 빠져서 이번 영화는 대충 찍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강정후는 신규 빌런 프로메테우스로 낙점되었다.
그 소식에 한국 전체가 달아오른 게 1주일 전.
캐스팅의 장본인이라면 1달 전에는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 그 배역 준비 때문에 <비겁한 사랑>에 소홀했을까 조금 염려했던 게 사실이었다.
[정확히 어떤 구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셉션>에서의 비중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핵심적인 역할을 할 거야. 크리스가 원래 자기 작품들 연결시키는 걸 좋아하거든. 그런데도 그 선배가 내수 영화에 몰입하고 있다는 건······ 벌써 충분히 준비를 한 걸까, 아니면 별로 의욕이 없는 탓일까.]
“의욕이 없는 건 아닐 것 같아.”
[그래? 그렇다면 정말로 두 작품 모두 잘해낼 셈인 모양이네. 한국에서 찍는 마지막 영화라서 의미를 부여한 걸까.]
“응······ 그런 거겠지? 그 오빠도 곧 너처럼 월드스타가 되겠지. 이게 정말 마지막 작품이 되려나······.”
고즈넉한 그 목소리에 이찬의 숨소리가 잠깐 멎었다.
잠시 뒤에야 월드스타가 차갑고 따뜻한 말을 건넸다.
[우리 영화 3부에 불러줄게. 그거 나가면 누나도 월드스타야. 강정후 그 개자식한테 안 밀리게 해줄게.]
“하하하. 야, 어른한테 개자식이라고 하면 안 되거든? 그리고 난 괜찮아, 찬아. 동생 덕 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
[음······ 그럼 <라이즈> 잘 안 되게 확 눌러줄게.]
“그럴 필요 없다니까? 앗, 정후 오빠 왔다. 찬아, 끊을게.”
이찬은 더 뭐라 말할 게 있는 듯했다.
그러나 황급히 전화기를 덮은 천세영은,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강정후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요?”
“인터뷰가 좀 길어졌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오늘 씬은 다 확인했어요? 같이 맞춰볼까요?”
“아니······ 키스 씬이잖아.”
“정확하게는 베드 씬이에요. 자신 있어요?”
“이따 리허설 한 번 하면 충분해.”
천세영은 그 대답에 썩 만족하지 못했지만, 강정후는 스스로 말한 대로 한 번의 리허설 뒤에 오덕환을 감탄시켰다.
몸을 겹치고 연기한 상대역 역시 그랬다.
촬영을 마치고 정리할 무렵, 천세영은 그에 대해 물었다.
“오빠, 오늘 되게 능숙하던데요? <인셉션> 찍으면서 여자 좀 많이 만나셨나? 혹시 앨렌 페이지?”
“그런 거 아냐. 비디오 보면서 연구했어.”
“아, 야동? 긴 타지생활이 많이 외로우셨나 보네요?”
“그렇게 몰아가지 마라. 그러는 너야말로 능숙하게 잘하던데. 요새 남자 좀 만나본 모양이지?”
천세영은 즉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한참을 더듬거린 뒤에야 이야기했다.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아직도 어려운 거냐?”
“네. 남자는 무서워요. 오늘 연기도, 오빠가 상대역 아니었으면 제대로 하기 어려웠을 거야. 사실 그래서 강정후 못 잡으면 이 영화도 안 하겠다고 했죠. 세상에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남자가 딱 둘뿐인데, 하나는 친동생이라서.”
이찬에게 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며, 강정후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요즘 그 자식이 나한테 쌍욕을 지껄여대는 게 그런 까닭이겠지. 그걸 아니까 개새끼 소릴 들어도 뭐라고 맞받기 힘들었던 건데······ 이런 얘기 역시 대답하기가 힘드네.’
과거 허성윤의 계략으로 성상납의 피해자가 될 뻔했던 천세영은, 이후 모든 남자를 두려워하게 됐다.
그 위기에 난입했던 두 사람의 구원자를 제외하면.
‘그중 한 명이 친동생이란 게 밝혀진 지금, 이 아이에게 남자란 오직 나뿐이겠지. 내게도 마찬가지야. 안정록 선생님께서 인정하신 내 짝은 오직 천세영뿐. 그러니······ 이 아이를 향한 진심을 숨기지 않는 게 옳겠지만······.’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강정후는 천세영이라는 한국 최고의 미녀 스타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를 꺼낼 수 없었다.
이찬에게 듣는 개새끼 소리까지 감수하고자 했다.
스스로가 그녀의 행복이 될 수 있으리라 믿을 수 없었기에.
‘내게는 인간의 감정이란 게 멀고도 멀어. 그토록 사랑했던 안정록 선생님께도 늘 실망만 안겨드린 모자란 놈이야. 내가 정말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가망 없는 일이지. 이 나이 먹도록 연애경험 한 번조차 없는 내게 세영이 역시 실망하게 될 거야. 그런 상황은······ 초래하고 싶지 않아.’
그건 마음 편히 사랑해본 적 없는 이의 본질적 두려움.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배역을 어려움도 없이 준비할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범죄자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기에 비뚤어졌지. 부모를 죽인 공권력을 혐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아냐. 그저 모든 인간을 질투하기에 질서를 파괴하려 드는 악 중의 악. 나 역시 그래. 순수한 감정 따위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보야. 그러니까 이찬 놈의 말이 하나 틀린 게 없는 거지. 난······ 개자식인 거야.’
복잡한 생각 속에서 차 문고리를 쥘 무렵, 천세영이 물었다.
“오빠. 크리스마스엔 뭐 해요?”
“······가족과 함께 보낼 거다.”
“아······ 물론 저도 그럴 거예요. 엄마한텐 나밖에 없으니까.”
“······이찬 그놈도 있잖아? 같이 안 보내?”
“음, 찬이는, 여자친구랑 같이 지내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 하긴, 좋을 때지.”
대충 대답하며 강정후는 과거의 착각을 회상했다.
‘그놈도 나처럼 연애 같은 건 절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선생님 말씀대로 완벽한 배우라서 나와는 다른 거야. 참 부러운 녀석이지. 그야말로 화이트나이트. 어둠 속에 숨어 살아야 하는 나와는 달라.’
자조적인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세영은 담담하게 동생 커플의 크리스마스 전망을 털어놨다.
“서로 죽고 못 사니까 뭘 하더라도 행복하겠지만······ 아, 전에 전용기 타고 지구 한 바퀴 돌까 하는 말도 했어요.”
“거창한 크리스마스 여행이네. 참 대단해.”
“전용기는 아니더라도······ 난 오빠랑 있고 싶었는데.”
“가족이랑 보내. 그게 제일 좋아.”
“아, 네에. 댁이 뭐라고 하든 그럴 셈이었거든요?”
천세영은 배역처럼 퉁명스럽게 말했다.
강정후는 오른쪽 얼굴로만 웃었다. 자꾸 뒤돌아보는 천세영에게 보이지 않을 만큼만.
*
“우리 아들, 오랜만이야. 정말 어쩜 이렇게 멋진지.”
모친은 세월을 거스르는 미모로 웃었다.
여자보다 예쁜 강정후의 얼굴이 다 거기서 비롯됐으니, 쉰이 한참 넘은 나이로도 젊은 남자들조차 홀릴 만했다.
부친 역시 잘하면 30대로도 보일 만큼 매혹적인 신사의 모습이었다.
“네 덕분에 하루하루가 즐겁다. 세계적인 거장의 블록버스터에서 활약한 걸로도 모자라, 배트맨 영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니 말이야. 정말 국보급 배우라고 할 수 있어.”
“······그건 이찬이죠. 난 그놈에 비하면 멀었습니다.”
“허튼 소리! 너야말로 세계 최고의 미남 배우다. 날 닮았으니까 당연한 일이지.”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말하긴. 정후는 날 닮았어요. 내가 이 아이를 스타로 만들었고요.”
“에이, 그건 아니지. 얘가 나라엔터 들어가게 자리 주선한 게 나였어요. 그때부터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거고.”
“어머? 이군영 그 사람이랑 최종적으로 협상한 건 나거든요? 어딜 숟가락을 얹으시려고.”
최고급 프라이빗 다이닝룸에 어울리지 않는 저열한 대화들.
그 소리를 들으며 강정후는 입속으로만 웃었다.
‘빌어먹을 년놈들. 그 협잡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개고생을 해야 했는지 관심도 없겠지. 당신들 때문에 선생님께 슬픔을 안겨드렸어. 그나마 이찬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과오를 바로잡지도 못했을 터. 분명 평생 후회로 남았겠지.’
비난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일종의 장식물처럼 잘생긴 남자를 찾아 청혼한 모친. 젊은 여자들을 노리개로 부릴 수 있는 부유함만이 결혼생활의 만족이었던 부친.
양자 모두에게, 강정후라는 아이는 사랑의 결실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무리 울고불고 해본들 내 마음은 무의미한 외침이었지. 이군영에게 팔아넘겨 나를 유명한 배우로 만듦으로써, 그 거짓된 결혼생활을 진짜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을 뿐이야. 이런 인간들 밑에서 내가 어떻게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었겠어. 나는······ 태생부터가 가짜였는데.’
그런 생각 속에서도 강정후는 착한 아들을 연기했다.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삶이 터무니없이 비참할 것 같았기에.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새해에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영화 촬영 때문에 내내 바쁠 것 같거든요.”
“아, 그렇구나. 그래. 최고의 배우는 연기에 매진해야지.”
“정후 넌 우리 가족의 자랑이란다. 언제나 응원해.”
그에 웃음으로 답하며, 강정후는 자신의 눈을 저주했다.
부모의 거짓된 사랑을 단숨에 꿰뚫어볼 수 있는 비극적인 재능을.
바로 그 무렵에 핸드폰 위로 이찬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제야 진심으로 웃은 강정후는, 발코니로 나와 국보급 배우의 전화를 수신했다.
“뭐야? 데이트 중인 거 아니었냐?”
[아, 어디서 개가 짖나.]
“이 자식이······ 개 취급 좀 그만해라.”
[개자식 선배, 잠깐 나 좀 보죠.]
“뭐 어쩌게. 연말에 폭행사건 일으키고 싶은 거냐?”
[세영 누나 생각하면 그러고 싶은 마음도 좀 있는데, 오늘 용건은 좀 다른 거. 크리스마스이브를 남자랑 보내는 신선한 경험을 허락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가식적인 가족모임보단 개 취급하는 후배와의 면담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강정후는 친부모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차량에 올라타 수원으로 이동했다.
과거 터미널이 위치해 있었다던 건물의 옥상 위에서 이찬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런 날 이런 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하여튼 이해할 수 없는 놈이라니까. 조커보다 더 이상한 녀석이야.’
강정후는 그렇게 구시렁대며 옥상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옥상에 도착했을 때, 추위도 모른다는 듯 얇은 점퍼만 걸치고 있는 청년이 그에게 맥주를 건넸다.
“한 잔 하죠.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난 차 가져와서 못 마신다. 근데 정말 웬일이냐? 당연히 명진아랑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나는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지내기로 했어요. 요새 쉬는 날마다 항상 나랑 있어서 좀 미안했거든.”
“뭐 얼마나 달콤한 연애를 하길래······ 알다가도 모르겠다.”
“댁 같은 정신병자한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정신병자라는 말에 담긴 어조를 강정후는 쉬이 알아봤다.
“언제부터 알았냐.”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요.”
“그래······ 그러면 이해하겠구나. 내가 왜 세영이를 밀어내는 건지. 애초에 너 때문에 접근했던 애고, 이젠 놔줄 때야.”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런 씹······ 진지하게 말하면 좀 알아들어라. 내 옆에 있는 건 걔한테 상처만 남길 거야. 그 꼴은 보고 싶지 않아.”
“진지하게 말할 테니까 좀 알아들으세요. 댁은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겠지. 환경 탓에 많은 걸 잃었다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난 어땠을 것 같아요? 친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히피 범죄자처럼 살아가다가, 유일하게 날 이해해줬던 사람은 사과도 못 한 채 떠나보냈어요. 댁 챙겨준 나처럼 도와줄 사람 한 명이 없어서, 이찬의 유일한 선생님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셔야 했다고요.”
알코올 색이 짙은 그 말에 강정후가 눈을 크게 떴다.
“그······ 혹시, 장송곡의 주인공을 말하는 거냐?”
“용케 기억은 하고 있었네. 그래요. 내 하나뿐인 가족을 여기서 만났죠. 딱 10년 전 진눈깨비 흩날리던 겨울······ 오늘은 쓸데없이 날씨가 좋네요. 눈이나 왔으면 좋았을 텐데.”
이찬은 맥주를 시원하게 비웠다.
그리고 새 맥주캔을 쥐며 코웃음처럼 말했다.
“난 댁이 부러워요. 평생 다시 만날 수 없을 행운을 멍청하게 놓쳐버렸던 나와 달리, 결국은 그 사람이랑 화해할 수 있었잖아. 그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도 모르고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 선배가 정말로 한심하다는 겁니다. 아주 개자식이지.”
“······그렇지만, 세영이한테 좋은 사람이 될 순 없을 거다.”
“개소리 마세요. 그 누나는 댁이 완전해졌을 때에나 만나야 될 만큼 약한 사람 아닙니다. 내 누나예요. 한심한 강 선배를 오히려 끌어올려 완벽한 배우로 만들어줄 수 있는 존재. 나한테 진아 누나가 그랬던 것처럼, 보지 못했던 걸 보게 해주겠죠. 바보 같이 행운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한 뒤 이찬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강정후 역시 높은 코끝의 물기로 변화를 알아챘다.
“비······ 눈인가.”
“뭐가 됐든 좋네요. 마음에 들어. 그거 알아요? 하늘도 가끔 슬플 때가 있답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는 날에는 눈물을 비로 내리는 거라고 해요.”
“<가을하늘> 대사로군.”
“뭐야, 바로 아네? 관심도 없었을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있냐. 네가 출연한 작품들은 나한테도 중요해.”
이후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비인지 눈인지 모를 눈물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람을 그리며 가만히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2009년의 크리스마스가 깊어갔다.
< 84장 - 빌런 강정후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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