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39화 (239/250)

< 86장 - 인간 정창영 (2) >

<선비 : 폭풍전야>는 개봉하자마자 36개국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섰다.

아시아권과 유럽에서는 전작으로 세운 아시아영화 오프닝 기록을 전부 갈아치웠고, 한국에서도 전작이 기록했던 75만을 초과해 82만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리고 북미에서도 <트랜스포머>를 2위로 끌어내리며 일간 6915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진기록을 수립했다.

“정말 많이 올라왔어. 이 정도면 프랜차이즈 히어로들을 오히려 압도하는 수준이다. 이번엔 정말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10억 달러, 어쩌면 먼 미래가 아닐지도.”

그렇기에 조혁수마저 희망적인 관측을 입에 담는 상황.

그러나 이찬은 코웃음을 쳤다.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10억은 껌이에요.”

“······아니, 금요일 개봉이라서 관객 파이가 컸으니까 득을 본 거고, 당장 그렇게 자신하긴 힘든 노릇이다.”

“파이는 무슨. 평일 입소문도 없이 금요일 관객들을 사로잡았다는 건 이미 게임 끝이라는 거죠.”

“아······ 그러냐.”

“이대로 <트랜스포머> 누르고 롱런해서 <해리 포터>까지 눌러서, 올해의 두 번째 10억불 작품이자 2011년 최고의 흥행작이 될 거예요. 미리 알고 계시라고 하는 말입니다.”

“아, 그러냐.”

같은 대답 반복하는 대화상대를 버려두고, 이찬은 송유리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박스오피스 1위 작품의 진짜 주인공이 된 기분이 어떠냐?”

“응? 이번 영화까지는 혁수 삼촌이 더 주인공이잖아요?”

“어쨌든. 공동주연한 작품이 개봉 다음날까지 IMDb 레이팅 9.3을 유지하고 있잖아. 평범한 소녀로서 감상이 어때?”

“헤헤. 좋아요. 전 평범하니까 다 감독님이랑 다른 선배님들 덕분이지만요.”

IMDb의 유저 리뷰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8점만 넘겨도 명작 반열이라고 할 수 있으며, 9점을 넘으면 세계대전 속에서도 보존돼야 마땅한 희대의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그 면면은 <쇼생크 탈출>과 <대부>와 <대부2>와 <다크나이트> 단 네 작품뿐.

재평가가 불필요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그 고금의 명작들만이 개봉 이후 백만 건의 리뷰가 등록될 때까지 9점대를 유지했다.

그런 세계 최대의 리뷰 사이트에서 9.3을 기록한 것이다.

비록 개봉 초기인지라 골수팬들의 리뷰가 많아서 과장된 수치지만, 1부가 9.1로 시작해 8.5를 유지했던 걸 생각해보면 이번에는 8점대 후반을 기록할 수 있을 듯했다.

“그게 다가 아니라 미디어의 평가도 독보적이야. 희대의 망작이 지배하던 박스오피스를 구원할 진짜 히어로가 왔다, 외국어영화라는 이유로 조와 송의 연기를 외면한다면 당신은 문화적 맹아나 다름없다, 두 한국인의 연기를 보면 히스 레저와 크리스찬 베일이 비 헐리웃 영화의 조연으로 참여하고자 애썼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 널 향한 찬사야.”

“에이, 립서비스겠죠. 솔직히 지금 미디어는 배트맨 등장 하나로 잉크가 모자란 상황일 텐데요? 트랜딩 토픽도 히스 삼촌 고무줄 삼촌 혁수 삼촌이 제일 많고요.”

“그야 뭐. 그런데 난 왜 빼냐?”

“규격외니까요. 오빠는 평소에도 이슈메이커라 영화 때문이라고 보기가 좀 그래요. 그쵸?”

송유리의 판단들 역시 틀린 것은 아니었다.

미국인들이 슈퍼맨만큼이나 사랑하는 희대의 히어로가, 그것도 크리스토퍼 놀란과 크리스찬 베일이 합작한 위대한 <다크나이트>의 그 배트맨이, 워너 브라더스가 배급하지 않은 영화에 출연했다.

잠시 까메오로서 얼굴을 비춘 것도 아니고 아예 배트수트를 차려입은 채로.

작품 본연의 내용보다도 DC의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한 기대감으로 불타오르는 게 당연했다.

“그렇긴 한데, 넌 역시 아직 어려.”

“응? 왜요?”

“그렇게 영화 외적인 이슈가 발생하게 된 기점을 생각해봐라. 배트맨으로 등장한 크리스찬 베일은······ 충분한 장비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나한테 몇 대 맞고 강바닥에 가라앉아서 히스한테 구조됐어. 그러는 사이에 그 댄서를 어린 선비가 물리쳤고. 그 상황에서 나와야 할 반응이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한 기대일까?”

“어······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지. 욕이 나와야 정상이지. 이 잡것들이 어디 감히 우리 배트맨을 놔두고 지들끼리 싸움질이야 하면서 영화를 깎아내렸어야 정상이야. 그런데 그런 반응이 전혀 없었지. 그게 왜였을까?”

송유리는 그제야 이찬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

“영화의 스토리에 푹 빠져서······ 동경하던 히어로가 소외되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몰입했다?”

“정답이야. 조 선배랑 네가 후반부 되기 전에 이미 그 배우들을 잊게 만들 정도로 정교하게 연기했고, 그래서 영화의 파격조차 만족스러웠던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인터넷에서 DC에서 <선비> 퇴출하자는 말이 나왔을 거다. 이후의 크로스오버에 대한 기대감으로 점철된 이 반응이야말로 영화 주연들의 연기가 제대로 평가받고 있음을 입증하는 거야.”

“음······ 그러네요. 역시 혁수 삼촌은 대단해!”

“하하. 그래, 지금은 그래도 조 선배가 좀 낫지. 히스랑 크리스찬도 네가 비벼보기엔 강적이었고. 그렇지만 3부에선 다를 거다. 이찬과 그 제자가 세계를 집어삼킬 거야.”

이미 세계 최고의 배우들 가운데 손꼽히는 세 사람을 누르겠다는 오만방자한 말.

심지어 주체는 그 자신조차 아니었다.

“그 길에 네가 앞장서야 돼. 나야 어디까지나 빌런이니까, 히어로로서 제대로 보여줘라. 이번에야말로 <다크나이트>가 지워질 정도로 압도적인 히어로무비를 만들어.”

“으······ 그건 좀 무리 아닐까요?”

“전혀. 넌 할 수 있어. 이미 완성됐거든. 만렙이라는 거지. 이찬이 배출한 다음 세대 최고의 여배우다.”

제자를 게임 캐릭터처럼 평가하는 스승을 보며, 송유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세대는 아니고요?”

“그건 아니지. 진아 누나가 있잖아.”

“······오빠, 프린세스메이커라고 해봤어요?”

“뭐? 공주를 만드는 거냐? 그게 뭐야?”

“아니에요. 혹시나 해서요.”

이후 차량으로 향하며, 송유리는 공주 만들기라는 이름의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을 생각했다.

‘컴퓨터학원에서 애들이랑 해본 것 중에 그게 제일 재밌었어. 확률에 좌우되는 게임이라 마음 놓고 해도 평범해 보였으니까. 거기서 주인공이랑 연결돼서 결혼 엔딩으로 가는 게 제일 재밌었는데. 하지만 난 그 엔딩은 불가능할 거고······.’

이찬은 이제 명진아와 딱 붙어 서서는 파파라치들의 촬영을 즐기고 있다.

그 명진아도 새로운 선비 군단의 한 명으로서 명성을 높여가고 있는 만큼, 북미를 포함해 세계의 팬들이 세기의 커플처럼 대우해주는 상황.

‘나도 저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친구들은 벌써 연애도 해보고 그러던데······ 난 솔직히 잘 모르겠어. 세상에서 제일 멋진 배우들이랑 촬영하면서도 두근거린 적은 없는걸. 그건 아마······ 그 사람들보다도 더 멋있는 오빠가 스승이라서 그런 걸까?’

복잡한 마음으로 입술을 삐죽이며, 송유리는 거리의 시민들이 외치는 ‘지윤’에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LA에서도 그녀는 이미 유명인사.

그리고 그 유명세가 이내 수치로 드러났다.

*

“월드와이드 1억 달러라고요? 하루 만에요?”

외치듯 묻는 정창영에게, 계진행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답니다. 당장 집계 가능한 국가에서만 그렇게 나온 거니까 실제로는 더 많겠죠. 곧 기사로 도배될 겁니다.”

“아니······ 그러면······ 내일 국내 예매율도 80% 넘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첫 주말에 3억 이상이 나오겠는데요?”

“물론 그렇겠죠. 개인적으로는 4억 이상 보고 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신기록 아니에요?”

“흠. 북미에선 <다크나이트>의 1억 6천만 달러가 오프닝 최고기록이고 월드와이드로 보면 2007년작 <스파이더맨 3>가 3억 8천만 달러로 여전히 1위고. 잘하면 깰 수 있겠네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정창영은 입을 딱 닫았다.

북미 집계 결과까지 전달된 현재, 한국은 저녁.

7월의 첫 토요일을 맞은 시민들이 월계 시네마 앞으로 구름처럼 모여드는 게 분식집 유리문을 통해 훤히 보였다.

그들의 목적지가 전날 개봉한 <선비 : 폭풍전야>의 스크린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유럽에서도 프랑스 같은 나라들은 역대 오프닝 1위입니다. 호평으로 가득한 만큼 기세가 늦춰질 일도 없겠죠.”

“평이 좋긴 하더군요. 토마토미터 98%에 메타크리틱 89점이니······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그렇죠.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10억 달러- 아니지. 15억 달러까지도 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헉. 그렇게야 되겠습니까? <해리 포터>도 곧 나올 텐데.”

계진행은 어깨를 으쓱이며 김밥을 입에 넣었다.

지난 송유리 1인시위 사건 이후로 검소한 이미지를 강요받게 된 충무로의 군주는, 그게 별로 아쉽지도 않다는 듯 흥겹게 목젖을 꿀떡거렸다.

“흐, 맛있다. 글쎄요. 그 영화도 이번에 금요일 개봉인 걸 보면 워너 쪽에서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 기대작들은 수요일에 내보내잖아요, 그 회사가.”

“하지만 월드와이드 개봉은 수요일이잖습니까? 북미에서만 <선비> 좀 피해간 거 아니었습니까? 2주차 주말에 유럽 등지에서 타격이 클 것 같은데요.”

“하하. 유럽은 이미 이찬앓이 중이라 별 타격 없을 겁니다. 북미도 이젠 <선비>의 골수팬들이라 할 수 있고요. 우리 슈퍼스타 배우의 파급력을 믿어보자고요.”

거기까지 듣고 머쓱하게 웃다가, 정창영은 호기심을 느꼈다.

“문득 궁금한데, 보통은 수요일이나 목요일 개봉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죠. 주5일제 전까진 금요일 개봉이 많았고, 요즘은 목요일이 제일 많고. 헐리웃 추세를 따라 수요일까지 앞당기는 경우도 많아졌죠. 다 오프닝스코어를 위해섭니다. 평일에 극장을 찾은 광팬들이 많아야 그만큼 입소문이 나고, 그래야 주말 스코어가 잘 나와 홍보가 되니까요. 뭐 작품성에 자신이 없다면 금요일에 하는 게 차라리 유리하겠지만요.”

“예, 그렇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선비 : 폭풍전야>는 또 7월 1일······ 금요일 개봉이잖습니까? 그건 왜 그렇게 정하신 겁니까?”

그 질문에 계진행의 손짓이 좀 어색해졌다.

답하기 굉장히 곤란한 질문인 듯 말도 어눌해졌다.

“음······ 그거 찬이한테 듣지 않으셨습니까?”

“예? 아뇨, 지금까진 그냥 그런가보다 했죠.”

“음. 흠. 그게······ 걔 선택입니다. 저야 6월말 개봉이 낫겠다고 했는데······ 굳이 그렇게 하자고 하더라고요.”

“아니 왜요? 흥행에도 관심 많고 작품성에도 자신 넘치던 녀석이 왜 굳이?”

“그게······ 7월 1일이 독립기념이라고 하더군요.”

“예? 독립기념일은 7월 4일이잖습니까? 그래서 1부 때는 금토일이 연휴가 돼서 초반 스코어에 힘이 잘 실렸고요.”

“아이고.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 월계 시네마가 한국영화 전용관으로 전환된 7월 1일이 충무로가 헐리웃으로부터 독립한 독립기념일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비>는 무조건 7월 1일에만 개봉할 셈이었다고요.”

2006년 7월 1일.

당시 FTA의 일환으로 추진된 스크린쿼터제 축소에 대응해 월계 시네마가 한국영화전용관으로 전환했다.

이후 2009년 7월 1일에 개봉한 <선비 : 영웅의 탄생>은 충무로의 군주가 헐리웃과 맞서 싸운 기념비.

그렇듯 이번에도 요일과 무관하게 기념일 개봉을 추진했다는 이야기였다.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그 비하인드스토리를 듣고, 정창영은 대단히 감동했다.

‘한국영화전용관 전환은 이찬 하나만을 신뢰하고 모든 걸 내던진 계진행 회장의 희생. 그리고 흥행의 손해가 짐작됨에도 불구하고 7월 1일 개봉을 고집한 찬이의 마음은, 그 군주를 위한 진정한 기사도. 이렇게나 아름다운 관계가 또 있을까.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정말 신뢰로 점철돼 있-’

“어흠. 그건 그렇고, 정 대표님?”

“예? 아, 예.”

“거 언제까지 그렇게 말씀을 높이실 겁니까? 제가 한 살 아랜데 편하게 말씀을 하시지.”

“아······ 아뇨······ 그래도 회장님이신데.”

“제가 하늘그룹 회장은 아니잖아요. 에이, 안 되겠네. 나부터 호칭을 고쳐야 되겠네요. 형님.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어허허······ 아이고······ 그건 너무 좀······.”

“편하게 진행아 해보십쇼. 진행아 이대로 진행해라, 하고요.”

“어허허허······.”

역시 별종이라 생각하며 정창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날의 미팅 이후, 계진행과 이찬의 히어로무비는 기어코 오프닝 3일간 4억 달러를 돌파하고 말았다.

총액 4억 2천만 달러.

개중 1억 8천만 달러가 북미에서, 6천만 달러가 중국에서, 3천만 달러가 한국에서 나왔고, 현대의 다 빈치라는 별명이 아직까지도 화제인 유럽에서 1억 1천만 달러가 기록됐다.

그 결과를 확인한 뒤 정창영은 총괄팀장 소양근을 사무실로 불러냈다.

“야, 양근아. 너는 이 대기록 보면 뭐 느껴지는 거 없냐?”

“뭘 또 감상을 물어보고 그래? 너 벌써 갱년기냐?”

“뭐? 이 자식이 대표님한테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한번 동기는 평생 동기라고 누가 말했냐? 됐고, 보너스나 좀 주라. 요즘 애들 크면서 좀 쪼들려.”

“에라이, 썩을놈아.”

아무래도 그의 기사는 존경심이 좀 결여된 것 같았다.

소양근과는 다른 진정한 기사를 위시한 <선비> 출연진은, 1주일간 세계 곳곳에서 관객들을 만난 뒤에야 귀국했다.

무려 크리스찬 베일과 히스 레저를 대동한 채로.

그들이 각지의 월계 시네마를 돌며 뒤늦은 GV를 진행하자 다시 한 번 관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송유리와 이찬의 대화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윤이에 대한 감정이요? 저 어렸을 때 프린세스메이커란 게임을 해봤거든요? 그래서 이번 영화 찍으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지윤이가 제가 키우는 공주님처럼 느껴지고 그랬어요. 근데 해외에서는 공주님이 아니라 잔 다르크라고 하더라고요. 응······ 그래서 저 한국에서는 공주님 하고 싶어요.]

[야, 뭔 공주님이야. 배우가 연기로 평가를 받아야지 외모를 과시하려고 해? 여러분, 이건 신경 쓰지 마세요.]

[아 흥이다! 오빠는 진아 누나 손이나 잡고 있어요.]

깨알 같은 사제 간의 갈등이 한 주 내내 이슈가 된 뒤.

<선비 : 폭풍전야>는 3주차 상영을 마친 시점에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트랜스포머 : 달의 어둠>이 경쟁작의 폭풍 같은 흥행 속에서 간신히 9억 3천만 달러를 기록 중인 시기였다.

그러니 그건 2011년 두 번째이자 영화사상 아홉 번째 기록.

<아바타>보다도 이틀 빠른, 17일 만의 10억 달러였다.

< 86장 - 인간 정창영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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