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40화 (240/250)

< 86장 - 인간 정창영 (3.) >

2009년 7월은 <선비>와 <해리 포터>가 ‘마법의 여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시기.

서구에선 선비들의 각종 도술 역시 호그와트의 마법과 비슷한 느낌으로 받아들여진 까닭이었다.

관련해서 각종 미디어가 그 두 작품의 동일시기 대치를 동서양의 맞대결처럼 기술하기도 했다.

그 첫 대결의 결과는 <해리 포터> 쪽의 판정승.

총액 7억 4천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으니 6억 9천만 달러의 선비를 확실히 내리눌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좀 더 파고들면 얘기가 전혀 달라졌다.

<선비 : 영웅의 탄생>은 전반부 30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대화가 한국어로 이어지는 외화.

반면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는 전작이 9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한 헐리웃 흥행 시리즈의 후속작이었다.

실질적으로는 후자 쪽이 예상외의 일격으로 타격을 입었다고 봐야 옳았다.

그리고 두 시리즈가 재회한 2011년 7월 중순.

<죽음의 성물 2>는 개봉일 박스오피스에서 34개국 1위를 기록했다.

그렇지만 그 며칠 뒤에는, 비 헐리웃 영화 최초의 10억 달러 매출이라는 초유의 이슈로 <폭풍전야>가 역주행한 탓에 18개국 1위로 쪼그라들었다.

이찬이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일이었다.

“그래, 이래야지. 이제야 세상이 바로 돌아가네.”

“으, 난 좀 슬프다 야. 그 영화 정말 좋았는데······.”

명진아의 말대로, <죽음의 성물 2>의 흥행은 시리즈 사상 최고의 평점을 기록하며 대장정을 훌륭하게 마무리했다는 평가에 어울리지 않는 것.

그걸 극장에서 함께 관람한 <선비>의 두 배우 역시 아름다운 3D 영상미에 감탄한 바 있었다.

다만 이찬은 감상과 경쟁을 완전히 별개로 인식했다.

“그쪽도 오프닝 4억 1천만 달러 벌면서 순항했잖아. 우리가 주변국 좀 먹었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가 뭐 있겠어?”

“음······ 잘되고 있는 거야?”

“그렇지. 우리가 조금 더 잘되긴 했지만 작은 차이야. 그쪽도 금방 10억불까지 오르겠지. 그게 조금 늦어졌을 뿐인 거야. 무엇보다 엠마 왓슨보다 명진아 영화가 더 잘되는 건 세상의 이치란 말이야.”

“치. 나야 뭐 그냥 조연이었을 뿐인데?”

“이제는 달라질 거니까. 3부에서 완벽하게 보여줘. 2010년대의 진짜 여신이 누구인지 말이야.”

이후 키스라도 할 것처럼 달달하게 마주보는 스승과 스승의 연인을 보며, 송유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그런 이찬의 평가처럼, 사실 <죽음의 성물 2>는 선방하고 있는 편.

2012년 <어벤져스> 떡밥으로서 성수기를 노린 마블의 신작이야말로 고래 싸움에 낀 새우라고 할 수 있었다.

1960년대 DC의 저스티스에 대항하기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마블 코믹스의 크로스오버 <어벤져스>.

과거 <아이언맨>의 슬리퍼히트를 통해 그 영화화 가능성을 확인한 시리즈지만, 이후 <인크레더블 헐크>와 <토르 : 천둥의 신>이 혹평을 받으며 기세가 꺾여 있었다.

그 와중에 7월 22일 개봉한 <퍼스트 어벤져>마저 <선비>와 <해리 포터>의 각축전 속에 박스오피스 1위조차 기록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밀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래서야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제대로 시동이나 걸릴까 싶을 정도.

<해리 포터>의 배급사인 워너 브라더스 측이 의외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잃지 않은 건 그런 까닭이었다.

시작은 마블보다 조금 늦었지만 <선비>를 통해서 크로스오버의 우려를 완전히 씻어내는 데 성공한 상황이다.

이후 2012년에 개봉할 <다크나이트 라이즈>까지 성공한다면, 마블과의 맞대결에서 승리할 게 자명해 보였다.

다만 이찬은 그들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퍼스트 어벤저>의 북미 평은 결코 나쁘지 않아. 애초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 자체가 그쪽에서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란 말이지. 게다가 독립영화들 줄줄이 내며 마구 내던진 떡밥들이 상당히 매력적이야. 그것들 때문에 떡밥 영화라는 비판은 받았지만, 적어도 각 영화를 본 팬들은 <어벤져스>를 보지 않을 수 없겠지. 2012년도 꽤 치열하겠는걸.’

그런 생각 중에 이군영이 떠오른 건 어쩔 수 없었다.

‘촬영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고 했으니, <헝거게임>은 그 <어벤져스>에 앞서서 개봉할 거야. 그건 성적이 어떻게 되려나. 충분히 잘돼서 마블을 저지해준다면 좋을 텐데.’

*

한국으로 돌아온 날, 이군영은 거대한 물결을 보았다.

유행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시각화된 듯한 흐름이 서울 곳곳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쿠아앙! 내 소환술을 받아라!”

“댄서 킥이 더 세거든!”

“아닌데? 영화에서 댄서 처발렸는데?”

“뭐래, 븅아. 8:1로 싸우니까 졌지, 1:1은 떡바르거든?”

아이들은 누구든 <선비> 피규어를 하나씩은 들고 있었다.

성인들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진 않아, 청년층의 가방이나 옷 위에서 쉽게 <선비>의 패치나 뱃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작중의 선비들이 입었음직한 도포를 패션 아이템처럼 걸치고 있는 대학생들마저 눈에 띌 정도였다.

그에 더해 <선비>의 원작 코믹스는 지하철에서 핸드폰보다도 더 자주 보이는 물건.

다들 그 작품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안달이 나 있었고, 심지어 친구들 사이에서 실제로 토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댄서 솔직히 슈퍼맨도 갖고 놀 것 같어.”

“그게 되겠냐? 까놓고 무술만 잘하는 인간인데.”

“누가 개소리를 내었는가? 야, 인류의 최종진화형이잖냐. 무술 잘하는 것도 머리가 존나 똑똑해서 한번 보면 각 잡히니까 그런 거거든? 괴력 초능력자들도 갖고 놀았는데, 클립토나이트만 있으면 슈퍼맨도 껌이지.”

“그럼 지윤이가 세계최강이냐? 댄서 쫓아냈는데?”

“······아 그러네? 진짜 그러겠는데? 솔직히 신장 하나만 뽑아도 나라 하나 쉽게 먹겠지 않냐? 시간제한만 아니면 외계인이고 뭐고 그냥 까겠다. 이거 밸붕(밸런스 붕괴) 아닌가?”

‘밸런스 붕괴가 맞지. 그래서 3부에서 둘 다 죽지 않을까 싶은데······ 저 팬들한테 그렇게 말하면 한 대 맞으려나.’

키득거리며 이군영은 모자를 눌러썼다.

8월에 이르러 더욱 더워진 날씨지만 주변의 불편을 부르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

<인셉션>에서는 잔뜩 분장하고 출연했던 만큼, 그렇게만 해도 청년들의 시선에서 자신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월계시네마 강남점에서는 상황이 좀 달라졌다.

계진행의 면접 정책 때문에 직원들 대부분이 영화광이라고 할 만한 정규직들인지라, 티켓 끊으려 매표소 앞에 서자마자 이름을 발각당하고 말았다.

“헐······ 이군영······ 이군영 아저씨 맞죠?”

“음, 예. 죄송합니다. 불편하시면 무인발권기로-”

“저, 싸인 하나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 싸인이요? 그걸 왜······.”

“아저씨 멋있으니까요!”

떨떠름한 심경으로 싸인과 티켓을 맞바꾼 뒤, 그는 상영시간을 기다리며 영화관 내부를 살폈다.

‘박스오피스 1위는 여전히 <선비>······. <해리 포터>도 내려가고 <퍼스트 어벤저>는 곧 다 내릴 판인데도 한 달 넘게 흥행세를 이어가고 있군. 하긴, 외국에서도 여전히 박스오피스 5위권에서 내려가지 않고 있었지. 그만큼 잘 만든 영화라는 방증이야.’

웰메이드 영화는 입소문으로 흥행을 재생산한다.

팬이 아니면 두 번 이상 관람하지 않으니 아무래도 초기의 흥행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선비>는 개봉 후 한 달이 지난 시점까지도 인기작.

한국에서는 적어도 몇 주 더 상위권을 지킬 듯했다.

‘지난번 계진행 독과점 논란으로 스크린을 상당히 줄였다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좌석점유율로 벌써 1600만을 넘어섰다. 올해 월드와이드 최고 매출에 더해 한국 관객 신기록까지 달성할 기세야. 아직까지도 안 본 관객들은 극히 드물겠지. 그야말로 이찬의 시대······.’

그 이군영이 아직까지도 안 본 관객들 중 하나였다.

세계 각지에서 <헝거 게임 : 판엠의 불꽃>을 촬영하느라 바빴던 탓.

단지 촬영만을 두고 말하자면 조연인 그가 잠깐의 여유조차 갖지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스스로의 연기력에 자신이 없는 노년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 촬영은 얼추 잘된 것 같았는데······ 그래도 저만큼 대단한 흥행이 나진 않겠지. 소설 기반의 헐리웃 대작이라 해도 이제는 이찬에게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어. 그 <해리 포터>의 완결판조차 흥행에서 밀릴 정도였으니.’

각각 개봉한 지 34일 22일이 지난 시점에서 두 영화의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는 13억 6천과 9억.

전자 쪽은 <해리 포터> 개봉으로 인해 보름 이후의 흥행세가 급격히 떨어졌고, 후자 쪽은 압도적인 경쟁자인 <선비>로 인해 소기의 성과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

다만 두 영화 모두 관객 만족도는 최고 수준이어서 세계의 여름 극장가가 전부 호황을 즐겼다.

입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관객몰이가 그치질 않았던 것이다.

영화를 관람하고 나오며, 이군영은 관객들의 입소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허허. 내가 뭘 보고 나온 건지 원. 도대체 저게 한국에서 만들 수 있는 영화란 말인가. 헐리웃 최고의 배우들이 오히려 가려질 정도의 배우들이라니. 거기에 그 전개는 잠깐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속도감의 절정······. 저걸 이찬 그놈이 만들어냈다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켜자, 부재중 메시지가 보였다.

정창영으로부터 온 문자들이었다.

「 대표님. SNS에서 영화 보신다고 들었는데 잠깐 뵙고 싶은데요. 그 영화 끝날 때쯤 극장 가 있겠습니다. 」

「 대표님. 앞에 저 있습니다. 잠깐 보시죠. 」

눈을 들어 매표소 부근을 보니 과거의 오른팔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든다.

이군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SNS란 게 무섭다는 말이 뭔 소리인가 했더니, 이렇게나 빠르군. 바쁜 와중에 늙은이한테 뭔 볼일이야?”

“영화는 재밌게 보셨습니까?”

“그래 그래. 아주 만족스럽게 잘 봤다.”

“하하하.”

“······비웃냐?”

“그게 아니라, 그 버릇 오랜만에 봐서요. 고개 끄덕거리면서 그래 그래 하시는 거. 웃긴 게 요새는 제가 그러고 있더랬습니다. 무의식중에 그랬던 모양인데, 찬이가 지적하더라고요. 똥구녕 닮아가냐고.”

코웃음을 치고 고개를 흔든 이군영은, 이후 정창영과 함께 극장 내 카페로 이동했다.

그러는 동안 이찬의 소속사 대표를 알아본 팬들이 인사를 건네고 사진을 찍는 일이 여러 번이었다.

“······너 이제 아주 스타구나. 배우 부럽지 않겠는걸.”

“뭘요. 민망해 죽겠습니다. 미디어가 이찬을 만들어낸 빛나는 매니저, 11년 동안 천재를 뒷바라지한 언성 히어로라고 자꾸 띄우는데, 전 솔직히 곤란하단 말이죠. 그렇잖아요? 처음부터 최고의 배우였던 애를 그냥  지켜본 것밖에 한 게 없는데. 까놓고 빛나는 거라곤 대머리밖에 없는데······”

최근의 고민을 입에 담다가, 정창영이 갑자기 외쳤다.

“아, 대표님! 시간 되시면 저것도 보세요. 저 <레이니> 저기에 저희 신인배우들이 여럿 들어갔는데, 아주 작품이 잘 뽑혔습니다. 7공주 멤버들이 나중에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참 흥미진진해요. 입소문이 잘 나서 세 달 동안 안 내려지고 있죠. 아! 지금 나오는 저 <자애학원>, 저것도 개봉하면 보십쇼. 출연한 애들 말이 진짜 꼭 봐야 하는 영화랍니다.”

“시끄러워. 내가 볼 영화는 내가 정해.”

“에이. 대표님 영화 보는 눈은 별로셨던 거 기억합니다.”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그냥······ 선배라고 해.”

“선배요?”

“그래. 업계 선배. 그것 말고는······ 호칭이 애매하네.”

정창영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찬의 말을 상기했다.

‘과거의 이군영이랑 다른 사람이라더니, 정말 그러네. 예전 같았으면 지 높여주는 호칭을 굳이 마다하지 않았을 텐데. 인간이란 참 재밌어. 꼭 쥐고 있던 탐욕의 손을 놓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니.’

자신 역시 비슷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린 시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동경해 배우를 지망했던 그는, 이군영 아래에 들어가서도 출세에 목말라 있었다.

그러던 중 인간 같지 않은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성공에는 무심한 소년을 만나게 됐다.

그를 통해서 정창영은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됐다.

‘그 녀석은 달랐어. 뭔지 모를 하나의 목표를 향해 걸어가면서 드라마도 영화도 흥행시키려 애썼지만, 거기서 어떤 만족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 오직 멀고 먼 이상향을 추구하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갔어. 그리고 마침내 세계 정상의 배우 겸 감독이 됐다······.’

<선비 : 폭풍전야>의 흥행에 일조한 이슈 중 하나였다.

22세의 젊은 배우가 크레딧 속 디렉터 항목에 버젓이 이름을 올리는 건 독립영화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일.

그런데 헐리웃을 위협하는 2억 달러짜리 블록버스터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관객들이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호기심은 이내 경악으로 전환됐다.

1부와는 크게 달라진 컷 연출과 시퀀스의 연결 방식들이 하나하나 트렌디한 센스로 몰입감을 선사했다.

그 고평가에 양진원 감독이 직접 진실을 밝힌 것이다.

2부의 연출에서 조금이라도 발전한 점이 있다면 그건 전부 이찬의 공로라고.

‘물론 찬이는 크레딧부터 시작해서 그 인터뷰도 괜한 짓이었다고 투덜거렸지만, 좋은 일이야. 이제는 찬이의 꿈에 이르는 길이 선명해졌을 테니까. 그게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하여튼 참 미안한 일이야. 그 모든 일들을 찬이 혼자서 해냈는데, 멍청한 내가 스타메이커 취급을 받고 있다니.’

정창영이 생각을 잇는 동안 말없이 관객들을 관찰하던 이군영은, 잠시 후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찬이한테 너를 붙이길 잘한 것 같다.”

“예? 어······ 왜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너처럼 속 좋은 맹탕이니까 그런 대붕을 품을 수 있었던 거겠지. 난 절대 못 했을 거다. 질투도 많고 욕심도 많은 나 같은 놈한테는······ 정후도 찬이도 어울리지 않아. 그래서······ 네가 자랑스럽다. 나 같은 놈한테 이런 말 들어봐야 기쁠 것도 없겠지만.”

2003년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메이커라 불렸던 이군영의 말에, 2011년의 스타메이커 정창영은 많이 당황했다.

그래서 그가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날 때에도 잡지 못했다.

그는 그저 오랫동안 앉아서 생각했다.

스타메이커 메이커인 이찬의 고마움에 대해서.

< 86장 - 인간 정창영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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