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장 - 별빛 유호진 (1) >
평일의 대학로는 한산했다.
한겨울의 한파 속에서 김순재의 수다를 듣는 유호진의 마음 역시, 그저 한가롭고 한가로운 느낌이었다.
“이찬 그놈이 진짜 난놈은 난놈이지.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니까. 형도 그렇지 않아? 아니, 우리랑 같이 <떠돌이의 죽음> 무대 올렸던 꼬맹이가 이제는 영화 하나로 14억 달러를 벌어들였다니 말이야. 하여튼 대단해. 그야 그때도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 연기 같은 거 생전 처음이라는 애가 단숨에 관객들을 휘어잡고 팬클럽까지 생겼으니. 어마어마해. 어마어마한 녀석이야.”
“그렇지. 그런 애를 네가 엄청 괴롭혔었지?”
“응? 에이, 형은 뭔 그런 무서운 소릴. 내가 언제? 나야 선배로서 따뜻하게 감싸줬지.”
방송통신대 쪽에서 마로니에 공원 방면으로 걸어가다 보면, 2009년 실개천 복원사업으로 형성된 홍덕지가 나온다.
그 아름다운 풍광 앞에서 유호진이 잠깐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아, 물 좀 보다 가게?”
“흐흐. 순재야, 너 그때 명진아 놀러왔던 날 기억 나냐?”
“응? 아, 그때! 맞어, 그랬지. 그런 적도 있었지. 그때 이찬 명진아 데리고 나가서 형이 소고기 사줬댔지?”
“이찬이 샀지. 고기만 내가 굽고. 그 가게가 저쪽 골목이었어. 그때······ 명진아가 자기 언니랑 잠깐 화장실에 갔었단 말이야? 그래서 이찬한테 슬쩍 물어봤지. 야 넌 유망주 선배 배우가 저렇게 존경할 정도니까 참 기분이 좋겠다, 앞으로 연기자로서 미래가 창창하구나, 그랬는데 고개를 젓더라고. 연기 별로 오래 할 생각 없고 적당히 돈 벌면 그만둘 거랬나.”
“······진짜로? 이 자식이 적당히를 모르는데?”
이미 전용기까지 보유하고 있는 이찬의 부는 대한민국 배우들 중 단연 최고. 그런 상황에서도 계속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적당히’를 모르는 욕심쟁이처럼도 보일 법했다.
그렇지만 유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이제는 생각이 바뀐 거야.”
“아, 그런 거야? 짜식이, 이제는 연기를 제대로 마주하게 된 모양이네. 그렇지. 연기의 길 앞에서 돈 따위는 무의미하지.”
“조연출 맡자마자 차부터 샀던 놈이 말은 잘해요.”
“어험. 거 뭐 대중교통은 좀 힘드니까. 아내가 휴가 때마다 차 좀 사자고 닦달을 하는데 그럼 어떡해.”
이후 마로니에 공원에 들어서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을 셌다.
파란 길 위로 세월이 흘러가는 모습이 보일 듯도 했다.
“······형, 나 말이요. 캐스팅이 하나 들어왔는데.”
“어, 축하한다.”
“그래서······ 이제 이쪽 일은 접을까 하고.”
“어, 그래라.”
“······뭐야? 놀라지도 않네.”
“태식이한테 계속 연출 일 가르치는 거 보면서 짐작하고 있었어. 쌍둥이 들어섰으면 벌이가 늘어야겠지.”
“거, 알고 있었으면 월급이나 올려주지는.”
“그럴 수야 있나. 이 기금이 어디 내 돈이냐? 대학로 극장들 먹여 살리려면 너한테 월급 올려줄 돈 없다.”
또 잠깐의 시간이 지나, 김순재가 조심스레 물었다.
“형은, 생각 없어? 벌써 대학로에서만 몇 년이야? 어쩌다가 아는 감독들이 꾸벅 사정할 때 아니면 소극장을 벗어나질 않는 게 벌써······ 20년은 됐겠네. 안 지겹수? 풋내기들 가르치지 말고 좀 이렇게 확 확 날아보고 싶지 않아?”
“별로. 난 여기가 편하다.”
“······진짜 이해가 안 돼. 형이랑 십 몇 년을 같이 했지만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어.”
“허허. 연작안지홍곡지지(燕雀安知鴻鵠之志)로다.”
“아이고 그러십니까. 봉황의 뜻을 참새는 모르지요 네 네. 아무튼 그래서······ 올해까지만 열심히 할게. 미안해, 형.”
“됐다. 너보다 태식이가 더 잘하는데 뭘.”
“아, 거참. 그래 좋겠수다. 난 태식이 갈구러 먼저 가요.”
김순재가 떠난 뒤로도 유호진은 20분을 더 멍하니 있었다.
그때쯤에 뜬금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찬이냐? 웬일이야?”
[아저씨, 뭐 하십니까?]
“뭐 하긴. 한량답게 놀고 있지.”
[공연 준비 좀 열심히 하시죠? 별빛 요즘 예전 같지 않다고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흐흐, 지랄하네. 뻥치지 마. 요즘 얼마나 인재가 많은데.”
[그럼 다행이고요. 기금 좀 더 보냈어요.]
“아 그래? 고맙습니다, 후원자님. 거 얼마나 쓰셨습니까?”
[50억이요.]
막힌 말문은 5초쯤 뒤에야 트였다.
“이런 미친? 설마 탈세하려고 나한테 딜 하는 거라면-”
[아 뭐래. 이번에 너무 많이 벌어서 그래요. 전용기 바꾸고도 돈이 한참 남더라고요.]
“그럼 또 투자를 하든가 할 것이지.”
[하고 있잖아요, 투자. 다른 건 말고 대학로 젊은 연기자들 중에 우수한 친구들 뽑아서 장려금 좀 나눠주세요. 포기하지 않고 연기에 열중할 수 있게요.]
“······오호. 이찬 장학금이라 이거냐?”
[내 이름 내세울 생각은 없고요.]
거기까지 들은 뒤에야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새끼, 착하네. 그래 알았다. 선배님이 좋아하시겠어.”
[피안(彼岸)까지 닿을 이슈일지는 모르겠네요. 아무튼 그렇게 해주시고, 조연출 좀 빡세게 가르쳐두세요. 다음 작품에 아저씨도 모시고 싶으니까.]
“난 싫은데? 야, 너 순재 기억나지? 걔나 데려다 써라.”
[에이, 그 아저씬 좀 싫은데.]
“그럼 태식이는 어때?”
[유태식 아저씨 정도면 뭐. 근데 왜요? 다른 섭외 잡으신 거 있어요? 도대체 뭔 기대작을 잡으셨길래 <선비> 캐스팅을 까시나?]
유호진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하하하, 그런 게 있겠냐? 그냥 작품은 별로 할 생각 없어서. 야, 너 돈만 달랑 보내지 말고 극장이나 한번 와라.”
[50억을 ‘달랑’이라고 표현하시네. 참 대단도 하십니다.]
“새해에 신인들 위주로 <떠돌이의 죽음> 올릴 거야. 다 너 보고 들어온 애들이니까 와서 격려 좀 해줘.”
[귀찮은데요. 진아 누나랑 데이트 해야 돼요.]
“진아랑 같이 오면 될 거 아니냐? 소극장 데이트 해.”
[퍽이나 재미있겠네요. 새 전용기 타고 해외 갈 겁니다.]
이런 재수 없는 놈- 생각하며 유호진은 또 웃었다.
*
이찬의 여행은 단지 데이트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홍콩에 도착했을 때 공항까지 나와 그를 맞이한 왕가위 감독이 그 방증.
오랫동안 아시아 최고의 감독이라 불렸던 그 인물은, 환하게 웃으며 홍콩식 영어로 인사말을 건넸다.
“어서 와요. 리, 명, 정말 반갑습니다.”
인사에 답례한 연인은 자연스레 동행인에게 시선을 줬다.
이찬에겐 데뷔작의 여주인공이며 명진아에겐 출세작의 성인 역 배우가 되는, 이소연이었다.
“오랜만이야, 우리 꼬마들.”
“꼬마라고 부르시면 저도 아줌마라고 부를 겁니다.”
“아, 진짜 말로는 못 당한다니까. 아무튼 정말 반가워. 이렇게 홍콩에서 너흴 만나니까······ 참 격세지감이 든다.”
KBC2의 <가을하늘>에서 처음 만났을 때, 두 아역은 그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무명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관계가 역전된 지도 오래.
세계적인 스타인 이찬과 명진아는 왕가위 감독조차 자진해서 공항으로 나오게 만드는 귀빈이 돼 있었다.
“너희가 까메오 받아줬다고 해서 되게 놀랐어. 이쪽에서도 <선비>가 정말 잘됐거든. 3부 준비하느라 바쁠 줄 알았는데, 아직 좀 시간이 있는 모양이야?”
“프로덕션은 바쁘죠. 저희야 잠깐 휴가인 거고. 어쨌든 아시아 최고의 감독님께서 6년째 만들고 계신 대작인데 거절할 수야 있나요.”
“아시아 최고 감독은 이제 양진원 감독님 아니야?”
“그 아저씨야 이제 세 편 찍었을 뿐인데요. 홍콩의 일대종사인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에 비길 수는 없는 거죠.”
겸허하게 대답했지만, 그게 이찬의 진심은 아니었다.
실제의 목적은 언제나 압도적인 영상미를 구현하는 왕가위의 연출법을 훔치려는 것.
리무진에 오른 뒤로는 그 감독이 대화를 주도했다.
“기억하고 있겠지만, 두 사람의 배역은 식민지에서 탈출하고서도 독립군 자금을 조달하던 이들이에요. 그 모습이 엽문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그런 부분을 생각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예. 까메오라고 해서 가볍게 생각했는데, 대본을 읽어봤더니 상당히 진하던데요? 작중에서 드러내시려는 의도가 느껴졌습니다. 혹시 홍콩 독립의 꿈에 관한 은유는 아닌지······.”
“하하하. 그거야 해석하기 나름이지요. 대놓고 말한다면 누군가는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편집 과정에서 그걸 잘 살릴 수 있다, 이렇게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미 홍콩은······ 그런 상황이니까요.”
97년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은 최소 50년간 체제를 유지할 것이 약속되어 있었으나, 2000년대 이후 중국 공산당의 개입이 본격화된 상황.
왕가위 감독이 자신의 마지막 홍콩영화인 <일대종사>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그와 무관할 리 없었다.
“잘 살릴 수 있게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준다면 고마운 일이죠.”
며칠의 휴식 뒤 촬영장에 나갔을 때는, 엽문 역을 맡은 양조위가 조심스레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안정록 형님은 내 좋은 친구였어요. 영화제에서 만난 날이면 항상 함께 차를 마시곤 했죠. 언젠가 그 형님의 영화에 직접 출연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그걸 기다려주시지 않고 먼저 떠나버리셨지요.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그러실 겁니다. 유지를 이어가는 후배들이 많아서요.”
“하하하. 그야, 당신 같은 후배가 있다면 여한이 있지는 않으시겠군요. 다행한 일입니다.”
중화권 최고의 스타가 하는 말에 거짓의 징후는 없었다.
이미 세계 최고의 스타들 사이에 이름을 올린 이찬이기에, 30년 가까운 나이차에도 진심으로 경외를 품고 있는 것.
물론 그 역으로도 존경의 감정이 형성되어 있었다.
중화권 스타인 양조위와 유가령은 이찬이 태어날 무렵인 89년부터 열애를 시작해 19년 만에 결혼에 성공한 커플.
그 사이에 무수한 고난과 슬픔이 있었지만, 양조위는 언제나 유가령 한 사람만을 일편단심 사랑하며 기다렸다.
‘참 대단한 아저씨란 말이지. 최고의 스타이자 미남 배우로서 유혹도 많았을 텐데 말이야. 나도 저렇게 돼야 해. 평생 동안 진아 누나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거야.’
이소룡의 스승인 엽문과 가상의 무술가들이 불산과 홍콩 등지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그린 <일대종사>.
그 안에서 이찬과 명진아는 자금을 조달하는 임시정부의 독립군으로서 엽문과 한 차례 스쳐 지나는 까메오였다.
그러나 그 임팩트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었다.
“일제는 내선일체라고 해서 우리와 자신들이 한 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디 일본으로 건너간 많은 문화가 조선 땅을 거쳤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열강들에 맞서기 위해 하나의 세력권을 이루자는 뜻 또한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민중의 뜻이 아닌 가진 자들만의 협의로 이뤄졌다면, 그로써 이룬 합방에 어떠한 정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독립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침략 없는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군요, 선생.”
그 자체로는 일제와 대한제국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지만, 중국 공산당의 강제로 문화를 잃어가는 홍콩 시민들에겐 조금 다르게 들릴 법했다.
‘까메오인 동시에 감독의 페르소나인 셈이지. 좋은 작품이 나온다면 좋겠어.’
싱긋 웃으며 엽문과 헤어진 직후의 씬에서, 두 독립군은 일제 군인들에게 발각돼 쫓긴다.
그리고 혈투 끝에 서로를 끌어안고 말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연락책이 드러나선 안 되지. 알고 있지요?”
“······그래선 안 되죠. 준비되셨나요?”
“······사랑하오.”
“저 역시.”
은장도로 서로의 목을 찌른 두 사람이 그대로 포개진다. 눈도 감지 못한 채로, 죽은 뒤에도 헤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그들을 뒤쫓다 허탈하게 바라보는 엽문의 모습까지 찍힌 뒤에야 까메오 씬의 촬영이 끝났다.
어떤 쇼트도 재촬영을 필요로 하진 않았다.
“훌륭해! 훌륭했어요. 리, 명, 여러분은 정말 극도로 단련한 배우들이군요. 내가 때로는 배우들에게서 욕도 들을 정도로 까다로운 감독이지만, 이번 씬은 정말 좋았습니다. 연기라는 공부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두 사람은, 일대종사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겠어요. 아, 물론 리는 실제로 유명한 찬권의 종사(宗師)이기도 하지요?”
머쓱하게 웃은 뒤, 이찬과 명진아가 두 손을 모아 답했다.
*
“어?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중국에 북권과 남권이 있다면 한국에는 찬권이 있다고 말씀하신 분 아니신가?”
유호진의 장난스런 말에, 정용태는 면구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거 철 지난 얘기를 왜 하십니까. 오늘은 관객으로 온 건데, 불편하게 구시면 그냥 갑니다?”
“에이, 공감하니까 하는 말이지. 아무튼 잘 왔어. 요즘은 체육관 운영하느라 바쁘시다고?”
“좀 그렇습니다. 연기보다는 이쪽이 적성에 맞아요. 제자들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죠. 연기는 아주 가끔씩만 하려고요. 제가 다양한 캐릭터를 잘 연기하는 편도 아닌지라.”
“좀 그런 편이긴 하지? 연극판에서 좀 구르면 나아질 텐데.”
“하하하. 복싱 씬 있는 연극 나오면 불러주시든지요.”
가능성 낮은 이야기를 나눈 뒤, 두 스승은 서로의 제자들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저희 체육관에 새로 들어온 애가 이번에 신인왕 타이틀을 딸 것 같습니다. 얼마 배우지도 않았는데 참 대단하죠. 나중에는 세계챔피언에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극단에 새로 들어온 애는 말이야, 벌써부터 이찬의 재림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어. 사실 나이는 몇 살 차이도 안 나지만 어쨌든 대단한 거지. 아마 몇 년 안에 연기대상도 타고 그럴 거라고.”
“······선배님들, 그런 소리들이나 하실 거면 좀 빠져주시죠? 애들 준비하는 데 방해됩니다.”
조연출 유태식의 핀잔을 듣고서야 키득거리며 객석에 가서 앉았다.
“아무튼 참······ 재밌지? 이찬 한 명이 벌인 변화가 너무 많아. 이거 이러다 그 녀석 은퇴하면 난리 나겠다 싶어.”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찬이가 무슨 은퇴예요?”
“그럴 나이는 아니긴 한데, 슬슬 고갈되지 않았을까 싶어서.”
“고갈이요? 그게 무슨······?”
“이쪽에서는 흔한 얘기야. 연기는 감정노동이거든. 그 감정이란 건 몸보다 훨씬 쉽게 피로해지고. 수십 년 넘게 다작하는 배우들이 드문 게 그저 연기를 못해서 도태되는 치들 때문만은 아니란 말이야. 어쩌면······ 이번 <선비>가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나지막이 읊조리는 그 말에, 정용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선배는 모르시겠지만 찬이 걔가 맥주 한 잔 걸칠 때마다 말했다고요. 언젠가 최고의 작품을 찍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한 과정으로써 명성을 만들고 있다고요. 그런 애가 은퇴를 하겠습니까?”
“그 최고의 작품 말인데, 난 뭔지 알 것 같아.”
“예? 어······ 뭔데요?”
“말은 안 해줄 거야.”
“아, 궁금하게만 만들고 입 씻으시깁니까?”
입을 싹 씻고 콧노래만 흥얼거리며, 유호진은 먼 과거를 떠올렸다.
열두 살의 동생과 마흔 살의 형이 처음으로 극단을 찾아왔던 날을.
‘그 형사 형님이 순직한 이후로 찬이가 참 많이 바뀌었지. 이제는 예전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됐어. 그나마 나한테 툴툴거리며 장난치는 게 외려 반가울 정도로. 그 녀석은······ 이미 권법과 연기 양쪽에서 최고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이찬은, 그 레퀴엠에 과연 몇 년 정도를 잡고 있을까?’
이후 공연 시간이 다가와 객석이 가득 차고, 제2의 이찬을 꿈꾸는 신인들이 저마다 뛰어난 연기로 무대를 채웠지만, 유호진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명의 소년만이 뛰어다녔다.
무대 위에 그 소년을 그려보며 유호진은 생각했다.
역시 ‘철수’ 역은 이찬이 최고였다고.
< 87장 - 별빛 유호진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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