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43화 (243/250)

< 87장 - 별빛 유호진 (3.) >

“불가능해.”

강정후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마주앉은 임희재의 미간이 찌푸려진 건 당연한 일.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러시네요? 왜요? 왜 불가능해요?”

“비교가 안 되니까.”

“아니······ <다크나이트 라이즈> 진짜 잘 뽑혔다면서요?”

“그건 그래. 전작의 성공에 비길 법한 작품이 나왔다고들 자평하더군. 촬영 과정에서 나도 제 역할 이상을 해냈고.”

“그러면, 그럼 진짜 걸작의 빌런인 거잖아요? 찬이한테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게 안 된다는 거야. 촬영 진행하는 동안 그놈 영화를 봤다. 임희재 너도 출연했던 <선비 : 폭풍전야> 말이야. 그걸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모르고 싶은 임희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나 자연스레 이어지는 자문자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경쟁이 안 되겠구나······ 그걸 느꼈다. 고작 20분 남짓한 씬만으로도 그 전체가 이찬의 영화가 돼버리더라. 아까 송유리가 천재냐고 물었지? 맞아. 그 꼬맹이도 이찬 못잖은 천재지. 하지만 유리가 스승 수준에 도달할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확답할 수 없어. 이찬 그놈은······ 이미 연기의 신이다. <선비>는 그걸 세계에 알리는 과정일 뿐이야.”

“······인생캐릭터! 그런 거 아니에요? 다른 작품에선 또 다른 챌린지가 있을 거고, 그러면 찬이도 재미가 있을-”

“없어. 그놈은 이미 순식간에 배역을 꺼내들 수 있다. 커피차 보내줬던 날 그걸 느꼈어. 그리고 작품 속으로 들어간 이찬의 연기는······ 헐리웃의 거장들조차 감당 못할 수준이야.”

울상을 짓는 임희재를 보며, 강정후가 피식 웃었다.

“감 없는 녀석 같으니. 이미 답이 나왔잖아? 그게 아니라면 <폭풍전야>의 성공을 뭘로 설명할 수 있겠냐? 한국어 영화야. 영어라곤 베일 레저 등장하는 30분 정도밖에 안 나온 영화라고. 그런 게 월드와이드 14억 달러 매출을 달성했어.”

“그건······ 다른 배우들도 열연을 했으니까······”

“넌 뭐 헐리웃 말고는 잔챙이들만 있는 줄 아냐? 나나 조 선배 수준의 배우라면 프랑스에도 인도에도 널리고 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어영화 최고의 성과는 이제껏 2억 달러 수준이었던 거야. 그걸 무려 7배로 신장시킨 게 ‘열연’ 하나로 설명될 일이겠냐? 아냐. 연기의 신이다. 완성된 신의 연기만이 그걸 설명할 수 있어.”

이후로도 듣기 싫은 소리만 잔뜩 들었기에, 임희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대표실을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 강정후의 심경도 복잡해졌다.

‘꼴이 우습구만. 이찬을 저지해달라는 이찬맘에게 불가능하다는 소리밖에 해줄 게 없다니. 불만스런 노릇이야.’

대표실의 창밖으로는 이제 땅거미가 지고 있다.

그 다가오는 어둠을 보며, 강정후는 이찬의 얼굴을 그렸다.

‘네가 없는 한국영화계는 어떤 모습일까? 나와 조 선배와 송유리가 힘을 합친다면, 어느 정도 현상유지는 가능하겠지. 10년 정도는 헐리웃과 양강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이제까지처럼 충격적인 수준으로 발전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찬······ 넌 어쩔 셈이냐? 임희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은퇴라는 형태는 아니겠지만, 네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건 빤히 보여. 정말 갈 거냐? 영원불멸할 하나의 레퀴엠을 완성하기 위해, 정말 네 동료들을 아쉬움 속에 빠뜨리고 떠나버릴 셈이냐?’

*

“때 되면 빠져야죠 뭐. 그거 말곤 다른 목표 없으니까.”

이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강정후 역시 전염되듯 어깨를 흔들어 보였다.

“뭐 그러든지. 괴물 후배 없어지면 나도 편하지. <선비> 3부로 끝인 거냐?”

“예. 그걸로 월드와이드 20억불 찍을 겁니다. 그쯤 되면 이찬이란 이름이 전설로 자리매김하겠죠. 그때부턴 단 하나의 작품에 집중하고 싶어요.”

“그래. 그런 레퀴엠이라고 했었지······.”

“오래 걸릴 거예요. 어린 시절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연기할 거니까. <선비> 끝내는 대로 바로 촬영 들어가서 마흔 살이 될 때쯤 포스트프로덕션 들어가는 거죠. 꽤 흥미롭겠죠? 전설의 이찬이 무려 15년에 걸쳐 촬영한 영화라고 그러면.”

“······그러면 왕가위 감독조차 놀라겠지.”

배우들의 무술 숙달에 4년을 쓰고 촬영에 3년을 투자한 <일대종사>에도 분장은 필수적으로 들어갔다.

브라질 영화 <탄생>이 제작에 18년이 소요됐다고 하지만 그건 감독이 부업으로 제작하며 시간을 쏟지 못한 까닭일 뿐.

청년기에서 중년기까지를 의도적으로 세월 속에서 연기한다는 건, 이제껏 시도된 적 없는 신기원이었다.

거기에 그 주체가 이찬이라고 한다면?

그 영화는 완성되는 순간 세계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아, 굳이 마케팅에 열을 올리지 않더라도 모든 극장의 스크린을 점령할 터였다.

“딴은 알겠다만, 그 과정에서 종종 다른 영화를 찍어도 좋지 않겠냐? 그러면 명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고.”

“안 돼요. 그런 식으로 설렁설렁 찍고 싶은 영화가 아닌 겁니다. 오직 그거 하나에만 몰두해야 해요.”

“······참 대단한 정성이군.”

“선배는 하지 마요. 나 없는 충무로 지켜줘야지. 그래야 내가 돌아오는 날 빵 하고 대박 낼 거 아니겠어요?”

“난 생각도 없다. 안 선생님께서 그런 걸 원하실 리 없으니. 너는 어떠냐? 네 한 사람은, 정말 그걸 바라는 사람이야?”

“그딴 거 몰라요. 같이 몇 달 살지도 못했단 말이에요.”

타오르는 눈으로 하는 말에 덜컥 죄책감이 들어, 강정후는 더 이상 따질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입맛을 다시며 상영관으로 접어들었다.

상영 직전인 스크린에는 단 한 사람의 관객도 없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보곤 해. 골드클래스 상영관이 비싸긴 해도 의자가 편하거든. 그리고 돈으로 비교해도, 30석만 예매하면 돼서 오히려 싼 편이지.”

“참 별난 취미시네. 관객들이랑 같이 좀 보지, 왜 굳이 이렇게 혼자 봐요?”

“······세영이랑 종종 같이 봐. 오늘은 너지만.”

“와, 대영광이네요. 원래 연인끼리 보시는 전세관에 함께 들어올 수 있는 1인이 되다니.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

이찬이 무표정하게 중얼거린 직후, 상영이 시작됐다.

영화는 이군영의 캐스팅으로 국내에 화제가 됐던 <헝거 게임>이었다.

“<헝거 게임 : 판엠의 불꽃>이라······ 선배는 이거 원작 봤어요? 재밌나?”

“몰라. 집중할 거니까 닥쳐.”

“어차피 도입분데 뭐 집중할 게 있나? 그러지 말고 토크나 좀 더 하죠. 사전지식 하나도 없이 왔단 말이에요. 뭘 알아야 재밌을 거 아냐?”

“······씨발. 이래서 내가 혼자 보는 거다.”

“소음에 예민하신가? 적당한 화이트노이즈는 집중력에 오히려 도움이 돼요. ADHD가 아닌 이상에는 말이죠.”

“아, 시끄럽다고 이 새끼야!”

“야, 아깝다. 이걸 직원 중에 누가 봤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하고 킬킬거린 이찬이었지만, 이후로는 입을 닫고 영화에 집중해줬다.

‘나야 열심히 떠들면서도 내용 다 파악할 수 있지만 이 선배한텐 아니겠지. 여러 번 영화 같이 볼 사이도 아니니, 오늘 정도는 아량을 베풀어줄까.’

하지만 50분쯤 지난 뒤에는 스스로의 생각을 철회했다.

“아니, 이게 뭐야 진짜? 영화를 뭐 이따위로 불친절하게 만든 거죠? 원작 팬 아니면 제대로 이해도 못 하겠네.”

“씨발······ 그러니까 뭔 내용이냐 하면-”

“알아요 알아. 난 천재라서 딱 보면 알겠다고. 근데 일반 관객들은 아닐 거 아닙니까?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저런 걸 블록버스터랍시고 만들고 있으니 헐리웃이 한물갔다는 소리를 듣는 거죠. 이거야 원 한심해서 상대할 맛이 나겠나.”

“씨발놈이 진짜.”

“아, 그래도 똥구녕 연기는 좀 괜찮네요. 혼자 캐리하는 느낌이야. 앞으로 꽤 러브콜 들어오겠는데요? 그나저나 누나랑은 좀 어때요? 혼전순결은 지켜요. 안 그러면······ 아 뭐야! 이 인간이 벌써? 당신 딴 맘 먹기만 해, 죽여버릴 거니까.”

“······내가 너랑 다시 같이 영화 보나 봐라.”

*

<헝거 게임>이 한국에서 300만 관객을 끌고 세계적으로 7억 달러 매출을 달성한 것을 보며, 이찬은 꽤 낙담했다.

‘고작 저런 영화도 달성한 7억을 <선비 : 영웅의 탄생>이 넘기지 못했단 거지. 아, 진짜 우스운 일이야. 패러다임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해. 헐리웃 대작이라 그러면 일단은 보는 사람이 많단 말이지. 그에 비해 충무로 대작······은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거야. 이번에야말로 압도적인 걸 보여줘야지. 전 세계가 이찬의 충무로에 열광하게 만들겠어.’

그 시기에 촬영에 돌입한 <선비> 3부는, 이번에야말로 댄서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최종장. 카오틱 굿의 인류 최강 빌런이 등장하는 시점부터 시작하는 시나리오였다.

그렇기에 이찬은 2부가 완성된 직후부터 댄서의 아역을 담당할 소년 배우를 찾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사비 20억을 투입해 MSB 방송으로도 송출한 <하늘기획 아역 오디션>이 그 핵심 프로젝트.

6~14세 사이의 아역 지망생 100명을 모집해 그들에게 연기를 가르친다는 게 이찬의 플랜이었으며, 그를 위해 스스로 심사위원을 맡아 거의 1년 내내 지원자 모집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 성과는 마땅치 않았다.

무려 수만 명의 소년소녀가 이찬의 제자가 되기 위해(정확하게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경쟁의 장에 참여했으나, 그중 누구도 심사위원의 눈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덕분에 바람 빠진 풍선 같은 표정으로 동료 심사위원에게 투덜대곤 했다.

“형편 되는 애들은 모조리 몰려왔을 텐데도 괜찮은 놈이 하나 없으니 원. 송유리, 네가 여자라는 게 참 슬프다.”

“히히.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말이 있죠?”

“야, 남장하고 내 아역 뛸래?”

“음······ 1인2역은 못 해요. 나 ‘지윤’ 하나로 꽉 차서.”

“아니다. 벅찬 게 문제가 아니라 외양이 여성스러워서 안 되겠어. 넌 키는 작은데 벌써 가슴이 나오고 그러냐?”

“아, 뭐래, 나빠, 성희롱이야!”

“됐고, 하는 수 없다. 특기를 써먹을 수밖에.”

서바이벌 본선에 오른 100인의 아역군단 중, 이찬은 가장 연기를 잘하는 소년 대신 가장 절박한 소년을 선택했다.

유치우라는 이름의 아홉 살 꼬마였다.

절박함 외에도 시선을 끄는 요소가 하나 더 있긴 했다.

“야. 너 유 단장님 아들이지?”

“네, 네네? 아, 아닌데요······.”

“아니긴 뭘 아니야. 단장님이 말하지 말라고 한 거지?”

“······그건 아니고 그냥 제가······.”

“그래? 거짓말 같진 않고. 신기한 꼬맹이네?”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얼굴이 판박인데 그럼 모르겠냐? 됐고, 따라와. 특훈이다. 아역 씬 뒤로 미뤄놓긴 했는데 시간이 많지는 않아. 적어도 반년 안에 내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 안 그러면 너도 네 아버지도 끝장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으······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소식에 ‘별빛’ 극단장 유호진은 크게 당황했다.

별 기대도 없이 내보냈던 아들이 최종 심사 직전에 <선비> 3부에 캐스팅돼버렸다는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이내 늘 그랬듯 피식 웃고 말았다.

*

“이젠 좀 아쉽다 싶죠? 대작에 부자가 함께 참여할 뻔했던 건데 말이야. 아들 연기 잘한다는 말은 왜 안 했어요?”

이찬의 핀잔에, 유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잘하지도 못하는데 뭘.”

“바탕이 깨끗해서 좋아요. 마인드도 좋고. 아빠가 돈을 못 버니까 자기라도 빨리 스타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눈치던데.”

“내가 뭘 돈을 못 번다고.”

“그러니까 말이에요. 기금으로 들어오는 것 중에 10%만 착복해도 3대가 부유하게 사실 텐데.”

“그런 짓은 안 해.”

“그게 아니더라도 1년에 작품 하나라도 하시죠? 그렇게만 해도 남부럽지 않게 사실 분이, 왜 이렇게 와룡 생활이래?”

“이거면 됐어. 대학로가 나한텐 전부야.”

몇 해 전 들어선 고층 빌딩의 카페에서 내려다보는 대학로.

IMF 때를 회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청년들이 가득 메운 그 위로, 20년간 대학로를 지켜온 배우가 미소를 띤다.

이찬으로선 절로 고개가 흔들어지는 일이었다.

“참 웃긴 분이라니까. 서바이벌 나가는 아들이 아빠 이름 언급도 안 할 만하네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래도 이해가 돼.”

“하하, 말을 해도 꼭. 야, 네가 뭐 남 말 할 처지냐? 너 <선비> 끝나고 영화 쉰다 그러면 사람들이 웃기다고 할 거다.”

“응? 저 쉬려는 건 또 어떻게 아셨대?”

“그냥 딱 보면 알아.”

“······있는 척하시긴. 근데 전 사정이 다르죠. 다음 작품만 성공하면 평생 써도 다 못 쓸 돈이 들어오니까.”

<선비> 3부에 재투자된 이찬의 자금은 1억 달러.

계획대로 2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이 나온다면, 그 배당과 개런티의 합이 5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다. 이찬에겐 그 외의 다른 영화를 찍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옛 단원 임희재의 우려가 커져갔던 거지만, 유호진은 그저 씩 웃기만 했다.

“그래, 그래라. 그것도 좋겠지.”

“앞으로는 후원 많이 못 할 텐데, 괜찮아요?”

“너 한 명한테 기대는 기금 아니다. 솔직히 잠깐 있다 나간 녀석한테 너무 많이 받아서 미안할 지경이었어. 그리고 여차하면 나라도 영화 몇 편 찍으면 돼.”

“아, 그게 문제였구나? 너무 풍요로워서 일을 안 하셨구만?”

“하하하. 그래,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네가 버팀목이 돼주고 있으니까 영화 쪽은 걱정이 없었던 거지.”

거기까지 들은 뒤, 이찬은 그가 안정록으로부터 받은 유언이 무엇일지 추론해낼 수 있었다.

“균형의 수호자, 그런 거군요?”

“응? 어······ 그런 느낌인가? 뭐 그런 거겠지. 걱정이 많으신 분이셨잖냐. 활약하는 사람이 있으면 몰락에 대비하는 사람도 있어야지. 무분별하게 커지는 산업이란 위험한 물건이야.”

“제가 없으면 순식간에 무너질 버블이니까요?”

“그렇지. 과도한 쾌속선은 동력을 잃는 순간 전복된다는 거. 거기에 달려 있는 밧줄이 많다면 더욱 그렇지. 그래서 필요한 게 보조 엔진. 그저 머나먼 스크린 속의 별세계가 아니라 일상에서 연기를 접하는 시민들이 더욱 많아져야 해. 그래야 업계 사람들이 유동적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어.”

단적으로 비유하면 거품경제의 위험성이었다.

이찬의 활약 속에 비약적으로 발전해 헐리웃의 대항마로 떠오른 충무로는, 사실상 사상누각.

현재의 충무로는 월드스타가 진두지휘하는 거대 프로젝트 속에서 고용이 창출되고 자본이 순환되고 있을 뿐이다.

제2의 <선비>를 꿈꾸는 무수한 투자자본이 충무로 드림에 현혹되고, 제2의 양진원을 꿈꾸는 무수한 조연출들이 감독이란 직종에 현혹되고, 제2의 이찬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스타들의 세계에 현혹되어, 그로써 한국영화의 외연이라는 파이가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상황이었다.

그러나 파이 속의 효소가 고갈되는 순간 빵이 수축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때에 대비해 호두파이의 곁에 무수한 애플파이를 올려놓는 것이야말로 유호진이라는 극단장의 사명이었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공연문화를 지킴으로써, 빛나는 이찬 없이도 관계자들이 연기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대비했던 것이다.

“별빛 같은 거야. 거대한 블록버스터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달이 없는 밤에도 세상은 어둡지 않아. 여기에도 무수한 삶이 있거든. 이찬이 없어도 휴일을 우리에게 맡겨왔던 관객들이 있단 말이야. 그들이 있기에 배우가 찾아오고, 작가가 동참하고, 연출가가 뛰어들고, 무수한 산업이 그들의 생계를 일구지. 충무로의 뒤는 대학로가 받쳐줄 거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 이찬.”

그 말을 들으며, 이찬의 마음은 아득해졌다.

‘안정록 아저씨의 유언은, 내 부재까지도 대비하고 있었구나. 단장(斷腸)의 고통 속에서도 한국 영화산업의 저변까지 생각하셨던 거구나. 그리고 이 유호진 아저씨는, 자기 아들에게도 미움 받을 정도로 집도 팽개치고 돈 안 되는 일에만 매달리면서, 그분의 뜻을 위해 삶을 바치고 있는 거야. 정말이지 별빛 같은 마음······ 우리 형 같은 마음······.’

한참 동안 대학로를 내려다보던 이찬은, 1분쯤 시간이 지난 뒤에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요. 다른 작품은 못 찍겠지만, 걱정 안 하셔도 되게 할 테니까.”

“아니, 난 괜찮으니까 너 하고 싶은 거 하라니까? 안 선배님이 바란 게 그거였다고.”

“나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충무로까지 챙길 테니까, 괜한 걱정 말라고요. 내가 뭐 보통 천잰 줄 알아요? 전에 치우 폰 보니까 아빠가 아니라 유호진이라고 저장돼 있더만? 에휴, 이 화상아.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몰라요? 자식도 간수 못하면서 무슨 산업을 챙긴다고 그래요? 내 건, 내가 지킵니다.”

임희재도 강정후도 자극하지 못했던 이찬의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의 두뇌가 전에 없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별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의 설명을 듣던 유호진은,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웃음을 터뜨렸다.

부풀어오른 파이 같은 웃음이었다.

< 87장 - 별빛 유호진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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