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44화 (244/250)

< 88장 - 거장 오덕환 (1) >

<선비> 3부에 대한 세계의 관심은 열광적이다.

이미 1부에서 압도적인 리얼 액션으로 눈을 사로잡았고, 2부에서는 영화 자체의 재미로도 헐리웃 대작들 이상이라는 평을 들은 시리즈인 까닭.

특히 한국에서는 그 반응이 열광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문화산업 사상 최고의 해외 매출액은 그저 시작일 뿐.

이제는 <선비>의 한국이란 이미지가 세계 속에서 국가의 브랜드가치를 한없이 향상시키고 있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작품이 잘되길 응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기존에 한국의 이미지는, 동양에서조차 선진국이냐고 물어보면 고개를 갸웃거리던 수준.

특히 서구에서는 남한과 북한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것이, 14억 달러 매출의 영화가 본격적으로 조명한 한국 도시들의 이미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선비들의 본부는 한옥마을과 드높은 빌딩이 공존하는 문화의 복합체 한복판.

범죄자 사냥꾼인 댄서는 지나치게 높은 치안수준 때문에 타겟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런 시퀀스가 흥미로운 스토리와 어우러지며, 신기루 같던 한국의 이미지가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관광객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향으로 영화 로케이션의 대부분이 CG가 아닌 실제 이용 가능한 건물들로 제작됐기에, 세트장 인근의 도시는 전에 없는 특수를 누리고 있는 중.

주변국의 영화팬들이 생소한 동양의 신비를 구경하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도 않은 일이 돼 있었다.

충무로의 사계 프로덕션 앞은 LA의 헐리웃 사인 같은 명소로 취급되고 있고.

그리고 그 1부와 2부에서 활약했던 배우들은, 이제 헐리웃 배우들과도 비견될 만한 스타가 되어 팬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수십 개 국적의 팬들이 모인 팬미팅조차 그저 자연스러운 일.

한국에서만 판매되는 한정판 피규어를 사려는 발길이 월계 시네마 오픈 시간에 기나긴 줄로 나타났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 작품에 참여하지 못한 남태형과 만난 신수영의 태도가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오빠, 요즘 어때요? 새 작품 잡았어?”

“아니, 아직. 좀 고민 중이야.”

“어떤 면에서? 어떤 거 하고 싶은데요?”

“좀 깊이 있는 배역을 맡아보고 싶은데, 안 들어오네.”

“그야 오빠는 좀······.”

“그렇지? 내 연기력으로는 무리겠지.”

“아, 무슨 소리야? 오빠는 너무 잘생겨서 안 되는 거라고!”

“······그런 거야? 별일이네.”

얼굴이 빨갛게 된 신수영을 보고서도 남태형은 그녀의 감정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찬과 같은 관찰력을 갖지 못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이후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형아.]

“아, 오 감독님. 안녕하셨습니까.”

[어, 그래. 너 작품 하나 해볼래? 좀 깊은 캐릭턴데.]

“아, 감독님 작품이라면 뭐든 좋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이게 좀 심하게 깊은데.]

“예? 어떤······?”

[길어질 것 같은데, 안 바쁘면 프로덕션으로 좀 올래?]

“예,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마주앉은 신수영에게 사과하려던 남태형은, 이후 그녀의 핸드폰도 울리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이내 통화를 마친 신수영 역시 복잡한 표정이었다.

“어······ 나도 오 감독님 전환데? 미팅하러 오래요.”

“너도? 넌 곧 <선비> 촬영 들어가잖아?”

“그러게요? 간단한 배역인가? 일단 가봐요, 우리.”

*

마침내 여러 번의 통화를 마친 오덕환은, 이찬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바로 오겠다고 하네. 바쁘지도 않나.”

“거장 오덕환 감독님이 부르는데 바쁘다고 안 오겠어요?”

“허허. 하긴, 사실 네가 제일 바쁘겠지만.”

“해외 로케이션이 먼저라 괜찮아요. 곧 바빠지겠지만요.”

<선비> 3부는 댄서가 마침내 선비들을 내분에 빠뜨리는 데 성공해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게 핵심 갈등구조.

그렇기에 곳곳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하며 조혁수가 홀로 고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이건 참······ 흥미로운 기획이야. 아주 재밌어.”

“감독님 마음에 드셔서 참 다행이에요.”

“내가 1순위였던 거야? 다음은 누구였어?”

“없어요. 감독님이 안 해주시면 제가 연출하려고 했죠.”

“아이고. 내가 천재 감독의 등장을 막은 셈인가.”

“그러셨네요. 당분간 연기에 전념하라는 신의 계시인가.”

흰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청년을 보며, 오덕환은 흐뭇하게 웃었다.

“너, 수영이, 태형이. 전체적으로 미화가 심각한 것 같다.”

“영화가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외적인 차이는 어쩔 수 없죠. 내용만 완벽하면 돼요.”

“그 내용은······ 현실 그대로 가겠다는 거지?”

“네. 스토리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요. 영화의 재미를 위한 어떤 조미료도 치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이 즐길 만한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해요. 감독님이 아니면 하실 수 없는 일이죠.”

<미스 스캔들>로 처음 마주했던 오덕환은 극적인 반전과 흥미진진한 소재의 시나리오로 유명한 인물.

그러나 그건 사실 오덕환의 진면모라고 보기 힘들었다.

그 반전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게끔 인물 하나하나의 캐릭터를 살리고 호소력 있는 구성을 짜는 능력이야말로, 거장이라 불리는 그의 진짜 재능이었다.

“첫 작품 때부터 느꼈어요. 남태형 선배 분량 확대하는 과정이 거의 눈 깜빡할 사이에 이뤄졌잖아요? 내적으로 침잠해 이야기 전부를 머릿속에 놓고 조율하실 줄 아는 분이라서, 이 작품을 맡길 수 있는 거예요.”

“하하하. 내가 좀 그런 끼가 있나 보구나.”

“그걸 <칠월칠석> 보면서 확신했죠. 이야기만 보면 흔하디흔한 청춘멜로······ 그것도 해피엔딩조차 아닌 이야기. 그렇게 무미건조한 소재를 수백만 관객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게끔 만드셨잖아요? 그건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래? 그런 거야?”

“요즘 말로 하면 약간 오덕 기질이랄까······ 앗. 실례였죠?”

“응? 아니, 내 이름이잖아? 오덕환, 내 이름.”

인터넷 유행어를 알아듣지 못한 감독에게 이찬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이 오덕오덕한 아저씨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구성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견줄 자가 없으니까. 뭐 대사 쪽으로는 수진 누나가 옆에서 좀 보조해줄 필요가 있겠지만. 그리고 나도 액션이랑······ 다른 측면에서도 도와드릴 테니, 작품성은 염려할 이유가 없어.’

무술감독 이찬과 총감독 오덕환의 케미는 이미 <고등형사> 때 입증됐던 것. 그렇기에 이찬의 머릿속에서 오덕환은 0순위였다.

단 하나의 문제만을 제외하면.

“근데 감독님······ 진짜 아프시면 안 돼요. 무병장수하셔야 돼요. 두 달에 한 번씩 꼭 건강검진 받으세요.”

“어이고. 뭘 노인네 보듯이 하는 거야? 나 건강해.”

“이제 쉰이시잖아요. 연작 끝마칠 때까지 건강하셔야 돼요.”

“허허허, 참 긴 세월을 얘기하- 아이고, 누가 왔구나.”

가장 먼저 도착한 건 남태형과 신수영.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혜와 심대범과 이기자와 심요셉과 최정하와 구진철과 나지은과 황상태와 현우정과 소해진과 임호준과 홍주석과 조연식이 차례차례 합류했다.

그들이 서로의 면면에 놀란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아니······ 이건 뭐 한국영화계 톱스타들이 전부 모였구만. 도대체 무슨 대작을 만들려는 거야, 오 감독?”

내내 과묵하던 오덕환은, 몇 살 연상의 조연식이 묻는 말을 듣고서야 조심스레 입을 뗐다.

“상당히 어려운 말씀을 드리려고 이렇게 많은 분들을 모셨습니다. 전화로는 제대로 전달을 못할 것 같아서요.”

“하하하. 오 감독이 원래 언변은 좀 그렇잖아? 말하자면 영상의 마술사니까 말이지. 그렇지만 이렇게 남자배우들이 많은 걸 보면······ 조폭물이거나 형사물이거나 그렇겠군?”

“예, 형사물입니다.”

“이찬 쟤가 있는 걸 보면 주연은 쟤겠구만. 청년 형사물이라고 하면 꽤 신선하겠는데?”

“······그 이상으로 신선합니다. 황당하실지도 모릅니다.”

어지간해선 엄살떠는 법이 없는 오덕환의 그 말에 배우들이 슬슬 긴장하기 시작하는 순간.

느긋하게 기타나 뚱땅거리던 이찬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저는 여러분과 함께 2028년까지 한 영화를 찍고 싶습니다.”

“뭐?!”

순간적으로 크게 외친 정신혜가 입을 막았다. 모인 배우들의 면면이 목소리를 높이기에 적절치 않았기에.

그녀 대신 임호준이 어렵사리 웃으며 질문했다.

“하하! 야, 이찬이.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이 2012년인데, 16년 동안 영화를 찍겠다는 거야?”

“정확하게는 15년입니다. 올해는 제가 <선비>에 집중해야 돼서요.”

“야······ 이거 참 희한한데? 재밌긴 하지만, 매력적으로는 안 들리는데? 그렇게 띄엄띄엄 영화를 찍어서야 감정 연결이 제대로 되겠어? 도중에 배우들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말이야. 나쁜 일이 아니더라도 각자 훌륭한 배우들인데, 작품 스케줄이 꼬일 수도 있잖아? 이런 면면이면 차라리······ 그래, 수사반장 연속극을 찍는 게 더 낫겠다 야.”

“어? 정답입니다, 선배님.”

얼떨결에 답을 맞춘 임호준이 입을 떡 벌리고, 홍주석이 무릎을 쳤다.

“어허허! 야, 이놈 보게. 너 설마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걸 생각하고 있냐?”

“맞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너 지금, 15년 동안 시리즈물을 찍겠다는 거 아냐? 연속극처럼 내용이 이어지는 형사물을 해마다 한 편씩 내려는, 그런 거 아냐? 그래서 세계에서 제일 긴 시리즈물을 만들겠다는 거지?”

“세계에서 제일 긴 건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이후 이찬이 자리에서 일어서 단상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대부분의 배우들은 얼어붙어 있었다.

말이 안 되는 플랜을 타박하고 싶은 마음이야 넘쳤지만, 입이 채 떨어지지 않았다.

“다들 말씀들이 없으시네요? 그럼 바로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후로 이 작품, <형사>에 전속으로 참여해주셔야 됩니다. 그동안 다른 작품은 찍으실 수 없습니다. 도중에 내외적으로 문제를 겪으셔도 안 돼요. 살이 너무 찌거나 빠지셔도 안 되고, 일상에서 추문을 일으키실 경우엔 손해배상 엄청 청구할 겁니다. 물론 그 전에 막아드리려고 노력은 하겠지만요.”

“야, 찬아! 너무 일방적이잖아? 그런 걸 내가 왜 해?”

그렇게 외쳐 묻는 조연식의 입가는, 그러나 웃고 있었다.

“어······ 조 선배님은 벌써 마음 굳히신 것 같네요?”

“허허허. 들켰어? 황당해서 재밌을 것 같긴 하다. 그 안에 내가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무슨 그런 말씀을. 적어도 12부까지는 나와 주셔야 돼요. 그 이후에는 자유로워지실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거기까지 시나리오가 나와 있다고?”

“시나리오는 아니고······”

목이 메는 느낌에, 이찬은 한 차례 침을 삼켰다.

“······예, 시나리오는 아니고, 실화입니다. 한 청년이 경찰이 되고 형사로서 살아간 모든 나날을 기록하려고 합니다. 임관하기 전부터, 사망하는 순간까지요. 그래서 주변인물들의 등장 시점과 퇴장 시점도 정해져 있는 거죠. 영화의 작품성은 제가 보장합니다. 워낙 격변기를 살아오신 분이라서 조미료 하나 없이도 흥미진진할 거예요. 적어도 매 편이 천만 관객 이상을 불러들일 작품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야, 네임밸류가 있으니까.”

정신혜의 투정 같은 말에 이찬이 고개를 젓는다.

“그 뜻이 아니라, 작품성만으로요. 오덕환 감독님, 저, 제 매니저 수진 누나, 이렇게 셋이 힘을 모을 거예요. 영화 자체만으로 천만 관객 충분히 됩니다. 거기에 매 작품마다 월드와이드 1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낼 거고요.”

“뭐? 야, 그건 안 되지. 아니, 그게 될까? 아니, 안 돼 안 돼. 야, 찬아. 아무리 너라도 안 되지. 실화 바탕이라고 하면은 뭐 딱히 스펙터클하지도 않을 건데, 한국 형사 성장기를 외국 관객들이 뭐 한다고 열심히 보겠냐? 안 그러냐?”

임호준의 정론에 배우들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찬 역시 속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그래서 시리즈 같은 건 생각도 안 했던 거지. 한 편에 밀도 있게 이야기를 다 담지 않는다면 세계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힘을 모을 거라고요. 지금까지 감추고 있었는데, 제가 음악 쪽으로도 재능이 있어요.”

“어······? 그야 영화음악도 중요한 요소긴 한데······”

“그게 아니라 뮤지컬 필름입니다. 제가 만든 장엄한 음악들로 영화를 꽉 채울 테니 흥행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 그게······ 뭔······?”

“으하하하핫!”

냅다 웃어버린 오덕환은, 돌아보는 배우들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진짜 좋더라고.”

“아니······ 그래도 그렇지, 뮤지컬 필름은 한국에선 불가능한 건데? 그런 게 될 리가 없는데?”

“그런데 되겠더라고. 이찬이 나 설득한다고 5분 만에 작곡해서 가져온 노래가 있는데, 무반주로 그거 듣다가 울 뻔했어요. 찬아, 지금 불러주면 안 될까? 갑자기 또 듣고 싶네.”

“그야 물론이죠. 그래서 기타 들고 온 거예요.”

통기타 선율 속에서 2분쯤 노래한 뒤.

이찬은 배우들의 눈빛 속에서 선명한 경외감을 느꼈다.

‘이거라면 가능하다는 거지. 내 예민한 청각과 압도적인 성량과 초인적인 지능을 총동원하면, 세계에 먹히는 음악들을 무수히 만들어낼 수 있다. 발리우드의 마살라 필름도 올해 개봉한다는 <레미제라블>도 비교가 안 될 거야. 거기에 오덕환 감독님 특유의 짜임새 있는 구성과 내 리얼 액션이 더해진다면, 월드와이드 10억불도 어렵지 않아.’

그것이 극단장 유호진과의 대화 속에서 떠올린 타개책.

카페에 울려 퍼지는 <오페라의 유령> OST 속에서 문득 떠올린 뮤지컬이라는 소재는, 오직 그만이 해낼 수 있는 과제처럼 느껴졌다.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선배님들. 제가 해내겠습니다. 반드시 모든 곡들에 웅장하고 처절한 형사들의 이야기를 녹여내서, 영화를 본 이들이 그 노래를 흥얼거릴 수밖에 없게 만들겠습니다. 국경도 언어도 뛰어넘어 매 작품마다 세계를 열광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러니까 따라와 주세요. 충무로의 새로운 시대를, 저와 함께 만들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순간, 정신혜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표정은 부루퉁하지만 눈가는 이미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리고 손뼉이 회의실 전체로 전염됐다.

배우들의 기립박수 속에서, 이찬은 멋쩍게 웃었다.

‘비유로 말했던 레퀴엠이 진짜 장송곡이 될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이걸로 안정록 아저씨까지 안심하실 수 있다면, 좋은 일이야. 나는 또 형 덕분에 좋은 사람으로 나아가게 됐어.’

< 88장 - 거장 오덕환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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