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45화 (245/250)

< 88장 - 거장 오덕환 (2) >

“아······ 내년부터 제작할 영화 캐스팅을 벌써부터 진행한 게 이거 때문이었구나. 뮤지컬 필름이라······ 죽어나겠는데.”

이찬과 오덕환이 떠나고 난 회의실.

홍주석의 투덜거리는 말에, 함께 ‘쌍룡’이라 불리는 친구 임호준이 킥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이거 참 힘들겠는데? 이 1년 동안 가수 수준이 돼야 한다 이 말이지? 심요셉이 너는 좋겠다. 너는 원래 가수라서 잘할 거 아냐? 야, 네가 레슨 해주면 되겠다.”

“아이고! 선배님, 저 래퍼예요. 노래는 별로 자신 없어서 뮤지컬 쪽으론 관심도 둔 적 없고요. 제가 제일 걱정입니다.”

“그래? 그럼 이찬 이놈, 희한하네? 어쩌자고 뮤지컬 경력도 없는 배우들만 이렇게 불러 모은 거야?”

그 의문에 대답한 건, 남태형.

과거 <꼬마신부>에서 밴드 씬을 촬영하며 이찬의 보컬 레슨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는 그만이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찬이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려는 것 같습니다.”

“뭐? 새로운 장르? 그게 뭔 말이야?”

“기존의 뮤지컬은 장르적인 특성이 명확합니다. 발성법이나 음악성향도 굳어져 있어서, 상류층의 문화일 뿐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뮤지컬 경력이 있는 배우들이 오히려 새 영화의 질을 낮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노래를 못하는 게 새 장르가 될 순 없잖아?”

“못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이찬이 가르칠 테니까요.”

“에이, 그런다고 별 수 있겠어? 부르는 거랑 가르치는 건 다른데.”

“같습니다. 걔한테는 같아요.”

이찬의 교습법이라면 누구나 기준치 이상의 노래실력을 함양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남태형은 잘 알았다.

연기 면에서 천치나 다름없던 그조차 명배우로 키워냈으니.

‘그리고 그렇게 완성할 영화는······ 그간 우리가 봐왔던 어떤 뮤지컬 필름과도 다를 터. 이미 스크린 연기에 도가 튼 진짜배기 배우들만 불러 모은 거다. 이들이 그 연기 위에 노래를 얹는 데 성공한다면, 그 작품은 정말······ 정말 멋질 거야.’

뮤지컬 필름의 역사는 유성영화와 그 궤를 함께한다.

유성영화의 시초인 <재즈 싱어>가 뮤지컬 필름인 까닭.

이후 <오페라의 유령>을 비롯한 브로드웨이의 여러 명작들이 영화화되어 흥행에 성공했고, 역으로 뮤지컬 필름인 <페임> 등이 명작 뮤지컬로 각색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뮤지컬과 뮤지컬 필름의 언어가 같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 영화에는 영화에 맞는 언어가 있어. 그 간극을 좁히지 못했기에 한국의 뮤지컬 필름이 그간 정체되어 있었던 거다. 한국 뮤지컬 필름에 신기원을 제시하는 건, 역시 찬이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다른 측면에서도 이찬이란 네임밸류는 필수적이었다.

기본적으로 뮤지컬 필름은 여성을 위한 영화이기에, 커플 관객을 제외하면 남성 관객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여성층이란 대저 트렌드에 민감한 대중.

헐리웃 스타들을 압도할 정도로 유명한 트렌드세터 이찬이 아니라면, 국산 뮤지컬 필름으로 그들을 설득할 순 없으리라.

‘거기에 음악성과 작품성까지 어우러지면 성공은 당연지사라는 거지. 하지만······ 좀 상상이 안 되는걸.’

머릿속을 채운 의문을, 남태형은 신수영에게 토로했다.

“정말 괜찮을까? 뮤지컬 필름은 여성층을 겨냥하는 반면에, 형사물이라고 하면 남성의 전유물이야. 그 두 속성을 버무려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렇죠? 그게 문제죠? 난 또, 나만 걱정하는 줄 알았어.”

“다들 뮤지컬을 즐기는 분들은 아니니까.”

“아, 그래서 다들 맹하시구나? 오빠, 고맙다고 복창해요. 나랑 같이 뮤지컬 데이트 자주 하니까 얼마나 좋아?”

“데이트······? 자리도 따로 잡았는데, 무슨.”

“그거야 열애설 터지면 안 되니까죠. 오빠는 뭐, 괜찮나?”

“안 되지. 루머는 곤란해.”

그걸 루머라고 단정 짓는 게 짜증나- 속으로 그렇게 욕하면서도 신수영은 씩 웃었다.

“아무튼, 선배님들은 다른 생각으로 복잡하신 것 같네요.”

“응? 어떤 생각?”

“다른 작품 출연할 수 없다는 조건요. 15년 동안 하나만 찍는다는 게 아무래도 리스크로 느껴지시겠죠. 저 봐, 임호준 선배님 계속 손 흔드시는 거.”

“어······ 저건 좀 다를 거다.”

“달라요? 어떻게요?”

그 대화 중에 마침 임호준이 입을 열었다.

시선은 홍주석을 향한 상태였다.

“이게, 내가 아까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좋다고 박수를 쳐버렸는데······ 갑자기 좀 걱정이 되네. 우리 선배님도 그렇고 주석이 너도 그렇고, 상태 우정이 태형이 수영이도 그렇고, 각자가 명작 주인공으로 부족하지 않은 친구들이잖아? 이렇게나 한꺼번에 빠져나가서 공백을 만들면······ 한국영화계가 괜찮을까, 그런 생각이 좀 드는데?”

신수영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 법한 이야기였다.

“오······ 역시 선배님들은 다르시네요. 자기 일만 생각하시는 게 아니라 영화계 전체를 생각하시는구나.”

“좋은 분들이시지. 안정록 선생님과도 친하셨던······.”

“아······ 그렇죠. 안 선생님도 늘 그러셨어. 자기 작품은 나중 문제고 후배 배우들을 위한 생각만 많이 하셨어요.”

“그래. 그러니까, 저 우려도 금세 해소될 거야. 봐라.”

너털웃음을 웃은 홍주석이 그의 말을 입증해줬다.

“하하······ 호준이 너도 참 구식이야. 나는 그 반대라고 본다. 우리 같은 윗물들이 꾸역꾸역 섭외리스트 상단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신인들이 올라오지 못한 거지. 한국 배우들, 네 생각 이상으로 탄탄해. 너도 극단 나와 보면 알 거다. 이찬 그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배우가 되려고 땀 흘리고 있는지. 당장 그 아역 서바이벌인가 뭔가 하는 것도 시청률이 대박이 났다고 하잖냐? 우리 빠진 자리도 금방 채워질 거야. 뭐······ 남태형 저놈 같은 미남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뜬금없이 지목받은 남태형이 얼빠진 표정을 짓고, 그를 대신해 심요셉이 낄낄 웃었다.

“우리 형 같은 배우는 또 안 나오죠! 강정후 선배님이 막상막하였지만 이젠 나이가 있으시니까. 아무튼 저도 선배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희 회장님이 저번에 하늘기획 가셨다가 귀신 본 듯한 표정으로 돌아오시더라고요. 아니 저기엔 뭐 괴물들밖에 없냐, 어떻게 이름도 모르는 신인들이 하나같이 연기 귀신들이냐 그러시면서. 금방 채워질 겁니다, 호준 선배.”

“에잉······ 그렇게 들으니까 좀 서운한데. 뭐 좋다 좋아. 그러면 열심히 해보자고. 이찬 그놈이 그렇게 절실하게 말하는 건 처음 봤으니까 말이야. 내 배우인생, 한번 걸어보지 뭐.”

마침내 모두가 한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황상태가 탄식했다.

“아······! 이거 한 방 먹었는데요? 스포일러 당했네.”

“뭐? 뭔 스포일러?”

“아유, 이거 모르시는 게 나을 텐데.”

“야, 궁금하게 왜 이래? 빨리 말해봐.”

“그냥······ <선비> 3부에서 누가 죽게 될지 알겠다고요.”

그 말을 듣고 조연식이 기함했다.

“아, 아이고! 그렇구나! 이런, 젠장. 그 작품도 3부로 안 끝낼 거라고 했는데, 여기 있는 배우들은 거기 참가를 못한다? 이게 알고 보니까 살생부였구만!”

살생부에 오른 <선비>파 배우들의 머쓱한 웃음 속에서, 회의실이 다시 한 번 탄식으로 뒤덮였다.

*

“나도 죽었으면 좋았을걸.”

송유리의 말에, 이찬은 코웃음을 쳤다.

“죽든 살든 꼬맹이 들어올 배역은 없어.”

“아 왜 나쁜 말 해요? 나도 오빠랑 15년 대작 하고 싶어요.”

“나중에 다 크면 생각해보자. 배역이 있어야 들어오지.”

“치. 수영 언니 신혜 언니는 좋겠다. 3부에서 죽어서 바로 이찬 사단 들어가고. 아, 2부에서 죽은 태형 오빠가 제일 좋겠지만요.”

“멍청한 소리 좀 하지 마. <선비>는 한국영화사상 최고 히트작이야. 거기 계속 출연할 수 있는 게 행운인 거지.”

“그래봤자죠 뭐. 댄서 퇴장하고 나면 그 선비가 그 선비겠냐고요. 안 될 거야. 다 망해버릴 거야.”

입조심도 안 하고 저주를 일삼는 말에 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양진원 감독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 녀석아······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라. 내가 지금 부담감이 얼마나 큰 줄이나 알아? 이찬 없는 <선비>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빠개질 것 같단 말이야. 그냥 트릴로지로 끝내고 다른 거나 기획할걸······.”

“감독님은 또 왜 그러세요? 댄서 없어도, 조혁수 살아나고 송유리 활약하니까 인기 계속 이어질 겁니다. 액션은 정용태 선배······ 관장님한테 맡기시면 되고요. 썩어도 준치라고, 적어도 10억불은 될 거예요.”

“에휴. 그래, 내가 배가 불렀지. 너랑 같이 일하면서 편안한 거에 아주 길들여져버렸다. 혹시 유리 너는 그런 거 못하니? 찬이처럼 촬영 때마다 영화 얼개 고려해서 쇼트랑 씬 조율하는 그런 거.”

“전 너무 평범해서 그런 거 전혀 못 하거든요?”

고민도 없이 즉답한 송유리의 머리를 누르며, 이찬이 대신 진실을 고했다.

“얘도 잘합니다. 저 믿으셨던 것처럼 믿으세요.”

“오, 정말이야? 그래도 되겠어?”

“아직 조금 미숙한 데가 있긴 한데, 이번 촬영에서 가르쳐놓을게요. 이찬의 <형사>, 송유리의 <선비>, 그렇게 둘이 한국 영화의 기둥이 될 수 있게요.”

“아이고,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야.”

“아니 나 나 <형사> 하고 싶다니까요? 아 왜 나만 없어! 왜 다 하는데 나만 없어요!”

이후로도 계속해서 칭얼대는 송유리를 피해, 이찬은 송유리와는 다른 이유로 <형사>에서 배제된 배우에게 다가갔다.

“아, 송유리 시끄러워 죽겠네. 저 녀석 요즘 아주 귀찮아 죽겠어. 누굴 닮아서 저렇게 바락바락 대드는 건지.”

“음······ 누굴 닮았는지는, 되게 쉬운 문제 아닐까?”

“뭐, 나랑 닮았다고?”

“그럼 제자가 스승 닮지 누굴 닮아?”

아이처럼 씩 웃으며 명진아는 그렇게 말했다.

<가을하늘> ‘지혜’의 대사에서 몇 단어를 치환한 장난에, 이찬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 예뻐. 말하는 내용은 별론데, 누나는 너무 좋아.”

“아이······ 찬아······ 다들 보는데······.”

“보라고 해. 이제 세계적인 충무로가 됐는데, 스타일도 월드와이드로 바뀌어야지. 사귀는 거 다 아는데 누가 뭐라겠어?”

“야아! 염장 지르는 소리 좀 안 나게 하라!”

절박하게 외치는 신수영의 말에 이찬이 고개를 저었다.

“노처녀 히스테리로군. 충무로의 개화는 아직 이른가.”

“히히. 찬아, 이제 놔줘. 리허설 들어가자.”

“음······ 근데, 누나는 안 물어봐? 왜 <형사> 안 불렀는지?”

“응? 에이, 됐어. 섭외 안 해줬다고 질투하고 안 그런다 뭐. 그냥······ 베드씬만 없으면 돼. 키스 씬까진 허락해줄게.”

“키스도 없어. 그래서 안 부른 거야.”

“응······?”

“다음에 키스 씬 들어가는 배역으로 부르려고. 누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키스하기 싫거든. 하하, 웃기는. 예뻐 죽겠네.”

“야아아아! 염장질 계속하면 때려버린다아아!”

*

그날 신수영이 분노해서 대본을 집어던졌던 이야기를 피해당사자의 실감나는 묘사로 들으며, 차를 몰던 조혁수는 끊임없이 키득거렸다.

“푸흐흐······ 이 사악한 놈 같으니. 넌 진짜 사탄도 고개 저을 놈이다. 신수영 걔가 남태형이랑 계속 엇갈리고 있는 거 알면서도 그렇게 대놓고 염장질을 했다고?”

“재밌잖아요. 이게 인간 사는 거지. 놀리고 놀림 받고.”

“너는 놀림 받으면 가만 안 있는 놈이잖아?”

“내가 세상을 놀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놀리게 하진 않겠다.”

“조조의 후예냐? 그럼 조찬이구만. 하하하.”

“재미없어요, 조 선배.”

재미없는 대화 끝에 도착한 곳은, 충무로의 명물인 명보극장. 2008년 폐관의 위기를 맞았으나 충무로의 군주인 계진행이 대대적으로 투자해 재단장한 곳이다.

그로써 세계 최고 수준의 영상과 음향을 자랑하게 된 명보극장에서 <어벤저스>를 관람하는 것이 두 사람의 휴일 일과였다.

“드디어 시작된 마블의 역습이라. 아주 걸작이 나왔다고들 하던데, 네 생각은 어떠냐?”

“봐야 알 일이긴 한데, 잘 뽑혔을 것 같긴 해요. 이미 영웅들 개별 영화로 캐릭터도 잘 잡고 떡밥도 잘 던져놨으니까. 그들이 협동한다는 단순한 포인트에만 충실해도 팬들을 열광하게 만들기엔 충분하겠죠.”

“흠. 그에 비해 <저스티스> 쪽은 이미 댄서를 잃은 상황. 아무래도 위기인 것 같은데.”

“원래 영웅은 위기 속에서 강해지는 법이죠. 선배도 그런 의미에서 집중해서 잘 봐요. 앞으로 몇 년 동안 숙적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거야 강정후한테 해야 될 말이지. 그 녀석이 <저스티스>의 빌런 군단을 이끌 테니까.”

“그 인간이야 뭐······. 근데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겁니까?”

“대표님 하고 불러야 되는 회사였으면 옮기지도 않았어.”

이후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스크린에 숨어들었다.

두 시간 반이 지나 영화가 끝난 뒤에야 대화가 이어졌다.

“이건······ 상당한데. 명배우들의 열연에 누구나가 좋아할 만한 스토리······. 평론가들에겐 혹평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대중에게는 올해 최고의 영화가 될 것 같다.”

“그러면 안 되죠. 여름엔 닼나라도 개봉할 텐데.”

“······닼나라가 뭐냐?”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줄여서, 닼나라. 팬들이 그래요.”

“별 걸 다 줄이는구만.”

“그것도 줄여서, 별다줄?”

말도 안 되는 축약에 조혁수가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 좀 그만해라. 아무튼 케빈 파이기가 정말 대단한 걸 만들었어. 지금껏 어정쩡한 영화들만 내놓는다 싶었는데······ 이걸로 대박을 터뜨리겠어. 성공적인 시네마틱 유니버스다.”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뭐라는 거냐.”

“흠. 유행어를 모르시는 선배랑은 대화가 노잼이군요.”

“노잼 정도는 알아.”

당당하게 어깨를 펴는 구세대에, 이번엔 이찬이 웃었다.

“하핫, 그것도 모르면 진짜 간첩이죠. 뭐 좋은 영화인 건 사실이에요. 다행이지 뭐. 저 정도는 돼야 경쟁할 맛이 나지. 우리 쪽 플랜은 잘 돌아가고 있죠?”

“물론. 2012년 다크······ 닼나라, 2013년 <선비> 3부, 곧바로 2014년에 <저스티스>가 시작될 거다. 본편은 트릴로지지만 개별 영화가 열 편 정도 제작될 거야. 개중에 <선비>가 두 편······ 아마 2016년과 2019년, 그렇게 들어가겠지.”

“흠. 저쪽이 몇 년 단위일진 모르겠지만, 아마 <선비>랑 맞붙는 해도 있겠네요. 절대 지지 마세요. 잘해요.”

“······나만 잘한다고 될 일이냐. 유리나 잘 가르쳐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던 이찬이,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선배는 해외 순방하고 오느라 유리 연기하는 거 못 보셨지. 걔 장난 아닙니다. 솔직히 선배보다 나아요.”

“······벌써? 벌써 그 정도라고?”

“예. 노력하십쇼, 선배. 안 그러면 잡아먹힙니다. 내 <선비>를 망치지 말라고요. 아, 근데 좀 고민되는 게 있는데.”

“뭐가? 잘하고 있는 거면 고민할 거 없잖냐?”

“아니, 연기 계속하면서 점점 성격이 나빠지는 것 같아서. 옛날에는 애가 귀엽고 싹싹했는데 말이죠. 왜 그럴까요?”

“······너 때문이잖냐. 아까운 애 하나 망쳤네.”

“응? 아 뭐래. 나 정도면 솔직히 완전 착한 거 아닌가?”

억울하다는 듯 칭얼거리는 표정은, 사실 그저 연기.

조혁수에게는 그 사실이 잘 들여다보였다.

송유리에 관한 투정도 자신에 대한 오만도 진심은 아니다. <가을하늘>의 ‘조혁수 아역 걔’에서 <선비>의 모든 것이 된 이찬은, 이제 그때와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그래, 착하게 잘 컸다. 잘 커줘서 고맙다.”

“······아, 왜 이래? 갑자기 오글거리게 그러지 마시죠?”

“사실 널 처음 본 건 소극장에서였다. 이상한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 죽은 눈을 살려주고 싶었어.”

“알아요. 얼굴 감추고 오셨길래 모른 척해드렸던 거죠.”

“하, 그랬겠지. 어쨌든······ 고맙다. 내 아역이 불행한 청년으로 자라나지 않게 해줘서. 누구보다 행복한 눈으로 연기를 말할 수 있게 해줘서.”

“아 진짜. 또 그 표정. 별로라고 했죠? 어딜 감히 아빠처럼 보는 거야?”

“하하. 나 같은 아빠는 좀 싫겠지.”

이제는 관객들이 모두 떠난 객석.

세기의 경쟁작이 될 <어벤져스>의 첫 관람을 마친 자리에서, 이찬은 <저스티스>의 주인공이 될 인물에게 고백했다.

“나한테 아빠 같은 사람은 한 명뿐이거든요. 형이라고 부르랬지만, 아무튼. 근데······ 그 형이 선배를 좋아하긴 했죠.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적도 있다고 했었는데, 기억하려나?”

“······글쎄, 나야 어떤 분인지를 모르니까.”

“뭐 됐어요. 아무튼 내가 따라하는 걸 참 잘하잖아? 그래서 가끔 선배 연기한 거 훔쳐서 그대로 보여드리면, 되게 좋아하셨어요. 박수를 막 치면서 멋지다 멋지다 그러셨죠.”

“음, 그래.”

“나도 고마워요. <가을하늘> 때 잘 이끌어줘서. 선배 덕분에 먼 길의 첫걸음을 잘 잡을 수 있었어요.”

“흠. 그럼 나도 <형사> 불러주든가. 오 감독님이랑은 꼭 한번쯤 작품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영 없었어. 시네마틱 유니버스랑 <선비> 시리즈까지 끝나면 들어가도 괜찮잖냐?”

“아 뭐래. 청탁은 안 들어드립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끄덕거리고 있으면서도 말은 꼭 저렇게 하지- 후배의 표정을 읽으며 조혁수는 씩 웃었다.

“그러냐. <형사> 안 불러줄 거면 형이라고 불러주든가.”

“······싫네요, 이 아저씨야. 자, 나갑시다. 나 <형사> 노래 레슨도 해야 된다고요. 선배랑 놀아주는 건 여기까집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조혁수는 이찬의 마음을 읽었다.

그 얼굴 어디에서도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형이라는 부름이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 88장 - 거장 오덕환 (2) > 끝

ⓒ 비벗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