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장 - 인간 윤대흥 (2) >
이찬이 김정구를 마주한 건 그 며칠 뒤.
구태여 따로 약속을 잡을 필요도 없이, 매달 열리는 대학로 후원의 밤 행사에 얼굴을 드러내는 걸로 충분했다.
윤대흥의 오랜 친구는 그토록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 사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고! 이찬 배우님, 반가워요. 이렇게 뵙게 되네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하하하······ 그럴까? 어쩜 이렇게 마음씨도 고운지 원. 유호진 단장 말이 벌써 몇 년 동안 꾸준히 후원을 해왔다고 하던데. 정말 보기 좋네, 좋아. 아주 훌륭해요.”
이찬과 윤대흥의 관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듯한 태도.
소년과 형사가 만난 그 무렵이, 오랜 친구와도 연락하지 못할 만큼 처지가 가장 곤궁한 시절이었던 까닭이다.
‘장례식장에도 오래 머물지 않으셨다고 했으니, 이 아저씨가 날 먼 곳의 스타로만 생각했던 것도 당연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 보시게 하는 것도 꽤 재밌겠는데?’
장난스런 생각을 곧 기각한 이찬은, 유서를 건넸다.
김정구는 오래지 않아 친구의 필적을 알아봤다.
그때부터 왈칵 솟은 눈물이 오래도록 마르지 않았다.
“흐······ 이게 무슨 일이니. 이게 무슨······ 흐흐. 대흥이가, 아니, 내 친구 대흥이가, 어떻게 여기 있나? 허허. 대흥이가 여기서······ 날 찾아올 줄은 몰랐네. 어허허허.”
“저도 몰랐어요. 가까운 곳에 형 친구가 계실 줄은.”
“형······ 허허허. 당연한 일이지. 당연한 일이야. 이찬 군? 내가 어쩌다 여기 와 있는지 모르지? 내가 대흥이 그렇게 가고 나서, 노가다판 전전하면서도 밤에는 형사 피규어를 만들어서 팔았단 말이야. 그랬는데 그 완성품을 보고 계진행 회장님이 연락을 주신 거야. 마감이 참 좋은데 이 솜씨로 <고등형사> 피규어를 만들어줄 수 없겠냐면서······ 그게 정구산업의 시작이었지. 처음으로 만든 게 이찬 군 자네 피규어였던 거야. 인연이란 게 참 무섭도록 신비해······ 그렇지?”
윤대흥은 이찬의 삶을 구원했고, 이찬은 김정구의 미래를 보전했다. 말 그대로 신비한 인연이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떠나간 인연에 대해 얘기했다.
그 과정 속에서, 이찬은 비로소 윤대흥의 유일한 연인이자 떠나간 처에 대해서 듣게 됐다.
“그 얘기는 해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제수씨는······ 순희는, 사건을 통해서 만나게 된 친구였어.”
“사건이라고요? 그럴 리가. 형사님들은 전혀 모르시던데요?”
“정확한 경과가 어떻게 됐던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게 85년이었나. 납치를 당해서 몸을 팔던 고아 순희를 구해내고, 그 아이를 남모르게 도와줬던 거야. 걔가 마음이 참 여린 애였지. 그때 겨우 열아홉인 꽃다운 나이였고. 그래서 자길 구해준 형사에게 어느새 사랑을 품게 됐다더라.”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비화(祕話).
윤대흥은 이찬이 태어나기도 한참 전부터 그렇게 누군가를 구원해온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축복받을 만한 사이는 아니었어. 순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쪽에 있던 아이라, 구출된 뒤로도 다른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경찰서에 들락거렸거든. 그래서 형사들한테도 부모님한테도 차마 소개를 할 수 없었던 거야. 결국은 두 사람만 조촐하게 식을 올리고 함께 지내게 됐는데······ 순희는 한 가정의 엄마가 됐다는 현실을 견디지 못했어. 이미 마음이 망가져버린 채여서, 자기 아들조차도 사랑스럽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 그래서 집을 나서 누구도 찾지 못할 곳으로 떠나갔던 거야. 그게 이유였어. 대흥이는, 아들과 단둘이 남겨졌어.”
모든 걸 베풀려 했지만,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주진 못했던 처. 윤대흥에게 그 인연은 필시 슬픈 색깔이었을 터였다.
‘어쩌면 그랬기에 내 마음을 지켜주려 그토록 애쓰셨던 걸지도. 내가 그 여자처럼 집을 나가버릴까 봐 걱정이 많이 됐을 거야. 그래서 비번인 형사들한테 매번 날 돌봐달라고 부탁했던 거고, 이렇게 바보 같은 유서까지······.’
하나 남은 아들마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뒤, 윤대흥은 범죄와의 전쟁 그 자체가 됐다고 했다.
근무 중일 때도 잠복 중일 때도 비번일 때도 언제나 범죄자들을 잡아넣는 일에 몰두했다.
자신의 슬픔을 오직 범죄를 없애는 일에 투사했다.
피해자를 한 명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서.
전처와 같이 마음이 일그러져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게 되는 아이가 나오지 않도록, 자신의 모든 걸 바쳤다.
그렇게 언제나 눈을 빛내고 살았기에, 윤대흥조차 중년에나 완성할 수 있었던 초인적인 관찰력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형은 너무나 슬픈 사람이야. 누구에게도 슬픔을 티내지 못한 채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루하루가 징역 같은 삶을 오직 의무감으로 버텨내는 나날이란······.’
자신에게 쏟았던 형사의 마음을 뒤늦게 이해하며, 이찬은 여러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긴 이야기의 끝에서 말했다.
“이번 영화 주인공이 그분이에요.”
“엇······? 아······ 그랬던 거구나. 한 형사의 이야기를 매년 발표할 거라고 했지? 당황스러운 시도라고 다들 놀라던데, 그게 대흥이를 생각하며 만드는 영화였구나······.”
“20대의 형부터 마흔이 된 형까지, 제가 전부 연기할 거예요. 지금은 20대 초반부터 시작하는 거죠. 그때 형이랑 비슷한지 한번 봐주실래요?”
이찬이 형사들과 노신사의 증언을 참조해 훔쳐낸 윤대흥의 젊은 시절을 보며, 김정구는 많이 웃고 많이 울었다.
첨언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는, 형을 고스란히 부활시킨 동생이 있었다.
*
주연배우인 동시에 각본의 원안과 음악감독과 무술감독까지 담당하고 있는 이찬의 일과는 빠듯했다.
등장 씬이 아닌 날에도 매일같이 촬영장에 나가야 했으며, 촬영이 아예 없는 날조차 오덕환 감독 휘하의 스탭들과 각종 미팅을 진행해야 했기에.
지나치게 헌신적인 태도에 정신혜가 의심을 품을 정도였다.
“야, 너 혹시 애정전선에 문제 있는 거 아니냐?”
“그게 뭔 개소리예요?”
“아니······ 보통 권태기 맞은 아저씨 배우들이 너처럼 촬영장에 죽치고 있고 그러더라고. 그런 거 아냐?”
“전혀 아니거든요? 난 원래 작품에 집중하는 스타일.”
“그게 정도가 심하잖아. 뭐 그렇게 열심인 거야? 어차피 15부작인데. 처음에 미진해도 나중에 잘 조율하면 되잖아?”
“멍청한 소리 하시네.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요. 한 순간이라도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란 말입니다. 한 작품 한 작품이 인생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연기하세요.”
“뭐라는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애정전선에 문제 생기면 말해라.”
“왜요? 다시 나 노리게?”
“미쳤냐? 정신 차리라고 막 때려주려고 그런다.”
그런 식으로 친한 배우들이 염려인지 장난인지 모를 소리들을 하고 난 뒤.
이제는 더 이상 외투를 걸치지 않아도 무방할 만큼 날이 따뜻해졌을 무렵에, 이찬이 그 촬영장에서 이탈했다.
이제 곧 한국영화의 독립기념일이 도래하는 까닭.
<선비>의 양진원 감독이 손뼉을 치며 그를 반겼다.
“어, 찬이 왔구나! 야 야, 어서 와라. 이게 얼마 만이냐? 요새 계속 다른 영화 찍느라 얼굴 보기도 힘드니 원. 야, 티저는 마음에 들었어?”
“계 회장님이랑 같이 뽑으신 거예요?”
“아니, 이번엔 나 혼자 해보라고 해서······ 열심히 만져봤는데, 어떻게 봤어?”
“최고였어요. 많이 느셨네요. 이젠 좀 안심이 됩니다.”
“하하하, 진짜야? 와, 힘이 되는데?”
“어린 배우한테 숙제검사 맡으시는 감독님, 안습······.”
송유리가 안구에 습기 찰 정도로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양진원은 작은 불쾌함조차 느끼지 않았다.
“자! 찬이도 왔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 틀어볼게요. 다들 작은 의문점이나 아쉬움까지 다 메모를 해서 저한테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번 마지막······ 아, 이젠 마지막은 아니게 됐지만, 어쨌든 이 3부는 최고의 작품이 돼야 합니다. 댄서가 없는 4부 5부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제대로 기대감을 줘야만 한다는 거죠. 메모장에 연표도 들어가 있으니까, <다크나이트 라이즈> 내용이랑도 비교를 하시면서 옥의 티를 찾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12년에 개봉한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2011년 <선비 : 폭풍전야>의 배트맨 크로스오버에 이어 마침내 DC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청사진을 제대로 보여준 작품.
그 영화가 평단과 관객을 모두 휘어잡으며 16억 달러의 흥행을 기록한 것이다.
2013년의 신작에서 오류가 발생한다면, 그 시리즈 팬들 사이의 입소문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기술시사 뒤에 회수한 메모장 중에서 제대로 된 지적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아니, 뭐야? 다들 왜 이렇게 깨끗해요?”
“이상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감독님, 최고였어요!”
“아니, 근데······ 찬이는 이것저것 참 많이도······.”
하나의 메모장만이 글씨로 범벅돼있는 걸 본 배우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거기엔 이찬조차 퍽 민망해졌다.
“크흠. 이번 영화는 저도 좋게 봤어요. 근데 다음 시놉시스를 고려하면서 감상할 때는 좀 염려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쪽에서 참고하시라고 이것저것 적어본 거예요.”
“그래? 이번 영화는 좋은 거 맞아?”
“20억불 충분히 나올 것 같네요. 굿입니다.”
“어, 어······ 어허허. 찬이가 참, 립서비스가 많이 늘었는데?”
양진원은 머쓱해했지만, 이찬은 진심이었다.
‘자기 작품이라서 좋게 보게 되는 배우들하곤 달리, 영화 스탭들은 누구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갖게 마련. 특히 직접 참여한 시퀀스에선 냉소적일 정도로 몰입을 못하는 감이 있지. 그런데 중반부터 종반까지 눈물을 안 흘린 사람이 없었어. 히어로무비 주제에, 그만큼 감성을 건드린 거. 이거면 됐어. 댄서의 퇴장에 최고의 마침표가 될 거야.’
그렇게 기술시사를 마친 뒤로도 이찬은 <형사> 촬영장에 복귀하지 못했다.
기술시사야말로 마케팅의 시작. 이찬 역시 조혁수 송유리 등과 함께 월드와이드 영화 홍보 일정에 참여해야 했다.
그 길에, 배우들이 마침내 이찬의 새 전용기와 마주했다.
“와······ 저게 진짜 네 거라고? 거의 여객긴데?”
“그 정돈 아니죠, 저가항공이면 몰라. 그냥저냥 50명 정도 탈 수 있는 수준이에요. 타보면 하품 나올 겁니다.”
그렇지만 막상 탑승하고 나자 하품 대신 탄성이 터졌다.
“채, 채진아! 여기 봐봐! 식당, 식당이 있어!”
“진철 오빠, 여기부터 와봐요! 여긴 아예 호텔인데요?”
“여기 내 방이에요? 오빠, 오빠, 제자 방 어디에요?”
“너 사치가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귀를 후비던 이찬은, 조혁수의 핀잔을 듣고서야 입을 뗐다.
“그나마 싼 거 산 건데.”
“얼만데?”
“6천만 달러요.”
“음······ 비싼데.”
“아. 나 전에 쓰던 거 아직 안 팔렸는데, 선배가 살래요?”
“얼만데?”
“3천만인데, 중고니까 2천만······? 뭐야, 2천만도 없어요?”
이찬은 빈궁한 월드스타에게 질렸다는 듯 멀어져갔다.
자괴감에 몸부림치는 조혁수를 위로해준 건 송유리였다.
“삼촌은 돈 없어도 괜찮아요. 왜냐면 마음이 부자니까!”
“하하. 네 스승도 이젠 안 가난하다.”
“아니거든요? 우리 오빠는 완전 밴댕이 소갈딱지야. 못돼가지고 나한테 배역도 하나 안 주고. 삼촌이 훨씬 나아요!”
그 얘기도 무심하게 들어 넘긴 이찬은, 명진아와 함께 레스토랑 칸으로 이동해 그녀를 창가 테이블로 안내했다.
“여긴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돼. 진짜 ‘스카이’ 라운지잖아?”
“창문이 좀 작다는 걸 제외하면 괜찮지. 누나는 이번 영화 어떻게 될 것 같아?”
“후후. 잘될 거야. 난 찬이 네 눈 믿어.”
“내가 대중 반응 짐작하는 눈이 꽤 괜찮지. 누나는 2세 계획 어떻게 하고 있어?”
“푸읍······ 가, 갑자기?”
명진아는 퍽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이찬의 얼굴에 음흉한 빛은 담겨 있지 않았다.
“갑작스럽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으아······ 나는, 많이 낳고 싶은데.”
“그래? 많이?”
“응. 나는······ 언니가 있어서 참 안 외롭고 좋았거든. 그래서 형제자매는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게 된 거야.”
“흠. 그렇군. 오케이.”
“뭐, 뭐가 오케이야? 바보······ 음료수나, 좀 줘.”
이후 영화의 홍보 일정은 아시아와 유럼과 남미를 지나서 북미를 관통해 헐리웃의 LA로 이어졌다.
그곳에서 명진아가 오랜만에 아쉬운 소리를 했다.
“아······ 그리피스 천문대 가보고 싶었는데, 내부 수리 중이래. 이번에도 못 보고 가겠네.”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네. 밤에 잠깐 데이트나 하자.”
현지 차량을 빌려 명진아를 태운 이찬은, 어째선지 그 그리피스 천문대 쪽으로 차를 몰아갔다.
“어? 찬아, 산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저긴, 천문대야.”
“어, 그러게. 길을 잘못 들었네.”
하지만 차를 돌리는 일 없이 직진이 이어졌다. 이스트 옵저버토리 로드에 내부 수리를 알리는 통제선이 있었지만, 어째선지 이찬이 창문을 열자 그대로 통과됐다.
그렇게 두 사람만의 천문대가 개관했다.
“너어는 진짜······ 여기에 또 얼마나 쓴 거야?”
“엄청 썼지. 거의 로비를 해서, 이제 빈털터리야.”
“이, 바보.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봐도 되는데, 왜 그랬어? 이렇게 막, 시민들한테 불편을 주면 안 되는 건데.”
“누나. 나 아들 낳고 싶어.”
“어, 아들? 그, 그래라? 아들을 낳든지 딸을 낳든지.”
“2017년에 아들 낳고 싶어.”
“어? 어······ 어? 그게, 어?”
“그래서 그 아들도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어. 그래도 될까? 갓난애한테 동의도 안 받고 내 영화에 출연시켜도······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베이비로 만들어도 괜찮은 걸까? 확신이 안 서서, 누나한테 제일 먼저 물어보는 거야.”
명진아는 몇 차례고 고개를 갸웃거린 뒤에 대답했다.
“그건······ 어······ 아주 어릴 땐,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아빠가 아역배우 출신이니까······ 잘 케어해줄 수 있겠네.”
“엄마도 아역배우 출신일 거야.”
“으아.”
“누나. 내 아들을 낳아줘.”
“으아. 어떻게 이렇게 무드도 없이 프로포즈를······.”
“앗. 아냐, 무드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들어가자.”
그리피스 플라네타리움 쇼는 그 명성에 걸맞게 창대했다. 뜬금없는 고백에 억울해졌던 명진아도 이내 푹 빠져들 만큼.
그리고 무수한 별들이 두 사람 머리위로 떨어질 때쯤, 이찬이 객석에서 일어서서 은하수 앞에 섰다.
“부부. 나도 부인 없고 누나도 남편 없으니까, 우리 둘이 부부 해. 자, 새끼손가락 걸고, 결 혼 하 자.”
“으아.”
“······이것도 좀 그런가? 아, 이런 게 좀 어렵단 말이지.”
“으아······ 너, 이거,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던 주문.
그걸 곧바로 알아본 명진아에게 오히려 이찬이 당황했다.
“아니, 어떻게 기억해? 나야 천재라서 안 까먹은 건데.”
“야 이 바보야! 그걸 어떻게 잊어버려? 좋아하는 사람이 해준 얘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거야······.”
새끼손가락이 이어지고, 13년 전과 현재가 이어진 뒤.
두 사람은 별들 아래에서 키스했다.
“음······ 아······ 히히. 무드, 있네.”
“그렇지? 열심히 생각한 거야. 결혼식은 한국에서 성대하게 올릴 테니까, 프로포즈 정도는 해외에서 하고 싶었어.”
“그런다고 이렇게 천문대를 통째로 빌려? 참, 바보야.”
“아니, 그래야 될 이유가 있었지. 이제 나가보자.”
긴 쇼를 관람한 두 사람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 푸코의 진자 주위에는 <선비>의 모든 배우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이 부르는 축하의 넘버야말로 이찬의 진짜 프로포즈.
“태어나 지금까지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한 두 사람-”
“오직 서로만을 바라보며 아껴왔던 이 연인을-”
“영원한 사랑의 시작을, 모두 함께 축복해-!”
“······음. 역시 좀 후지네. 보컬 레슨을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이쪽은 아무래도 전문가들이 아니다보니까.”
“아하하핫! 야 이 바보야, 그게 뭐가 중요해? 사랑해!”
끌어안는 두 사람을 보며, 송유리만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 진짜 한심해. 이게 뭐야? 이거 하나 때문에 백만 달러를 발전기금으로 냈다는 게 말이냐고 방구냐고. 하여튼 과소비 대빵이야. 완전 빈털터리 돼버렸네.”
“그게 마음이 부유하다는 증거다. 송유리, 너도 언젠가는 그 마음을 알 수 있게 될 거야.”
“혁수 삼촌한테 그런 말 듣기 싫거든요? 아 싫어 싫어.”
치기 어린 투정 속에 담긴 상실감을 알아볼 수 있었기에, 조혁수는 조용히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금방 또 나타날 거야. 너도 마음이 부자니까.”
“흥······ 뭐래. 소개팅이나 해주고 말해요.”
“음. 그건 좀. 후배들 중에서 찾아보긴 하겠다만.”
“말이라도 고맙네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키스하는 연기 엄마와 연기 아빠 대신, 송유리는 느릿한 푸코의 진자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길 두 번쯤 한 뒤에야 작게 웃음이 나왔다.
공인된 예비부부가 가장 먼저 소녀의 앞에 다가왔을 때엔, 어렵사리 울음기를 지우고 말할 수 있었다.
“스승님, 이제 행복해 보여요. 그래서······ 세상에 한 사람도 만나기 어려운 별들 가운데에서 가장 따뜻한 색깔로 날 찾아줘서, 고마워요.”
“뭔 소리야? 축하한단 말을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하냐? 하여튼 꼬맹이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아, 짜증나! 이게 되게 중요한, 그분이, 어휴. 몰라 몰라. 아무튼 빨리 인사하고 내려가요. 나 다음 작품 준비해야 돼.”
안정록이 언젠가 스승에게 건네주라고 했던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는, 별들이 반짝이는 주차장에 나왔을 때에야 이해됐다.
“아. 그게 그때 그거였구나. <아저씨> 찍을 때, 운이 좋았으면 좋겠다,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그런 소리 했었는데.”
“하하. 찬이 넌, 기억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
“나야 뭐, 그냥 다 좋은 사람이지. 야 송유리! 너도 타!”
밤하늘을 배경으로 산을 내려가는 길.
가족처럼 서로를 지켜온 세 사람은, 진짜 가족의 탄생을 축복하는 따뜻한 별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 89장 - 인간 윤대흥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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