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250화 (250/250)

< 90장 - 형 이찬 >

2027년 12월 24일.

우산을 탁탁 털어 접은 이한은, 자동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실내로 몸을 들이밀었다.

“아으, 추워. 얼어 죽겠네. 지구온난화 다 뻥인가?”

“온난화 때문에 더 추운 거야. 야, 물 떨어진다.”

뒤따르던 유치우가 지적한 말에도 소년은 태연했다.

이내 바퀴 달린 로봇들이 다가와 그 물기를 제거했기에.

“봐요, 봇들이 닦잖아. 됐고, 빨리 가요. 나 배고파.”

“하여튼 지 아빠 닮아가지고.”

“칭찬 기역시옷이요.”

“기역시옷은 뭐야?”

“감사라고요.”

“······요즘 애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원래대로 말하면 두 글자인 걸 왜 굳이 네 글자로 늘여서 말하는지 원.”

“옛날 사람처럼 말하긴. 유행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요. 그걸 무시하면 뒤쳐질 수밖에 없어요. 구세대야 구세대.”

구세대라고 말하기엔 턱없이 어린 열아홉 살이지만, 유치우로선 빠르게 변해가는 유행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촬영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까닭.

함께 걷는 이한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호기심 왕성한 열한 살 소년에겐 신세대의 표현들이 어렵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찬길로 가자. 나 방송 하나 해야 돼.”

“아, Chan Lee Avenue요?”

“그게 아니라 Chan Gil이야. 왜 멋대로 늘여서 부르냐?”

“그냥. 영어 재밌지 않아요? 괜히 길게 발음할 수 있으니까 애들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한국말은 너무 짧잖아요?”

“······세계인들이 다 우리말 배우려고 난린데, 애들이란 참.”

“그거 진짜예요? 난 국뽕들이 지어낸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야, 이 꼬맹아. <형사> OST가 그래미 앨범상 노래상을 열 몇 번을 탔는데 안 배우고 배기겠냐? 해외촬영 나가보면 찬쌤이 만든 노래 부르는 꼬맹이들이 널리고 널렸어.”

“좀 꼬맹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그러네. 아무튼 웃기다 그죠? 아빠 노래를 영어로 하면 찬 송. 찬송가야, 프헤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유치우가 소년을 잡아끌었다.

그들이 향한 ‘찬길’이라는 곳은, 배우 이찬의 역대 필모그래피 영상과 1:1 사이즈의 피규어가 상설 전시되는 회랑.

그 앞에서 이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아저씨. 아빠는 찬재를 왜 수원에 지은 거래요?”

“다 뜻이 있으셨겠지.”

“아니 이상하잖아? 왜 수원인지 모르겠어. 엄마아빠한테 물어봐도 절대 안 알려주던데. 별로 낡지도 않은 건물을 비싼 값 주고 사버렸잖아요? 그래서 대형 문화복잡공간을 만들었잖아요? 난 진짜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복잡공간이 아니라 복합공간이야. 아무튼, 시작한다.”

그곳을 걸어가며 개시한 유치우의 SNS 생방송에는 금세 수만 명의 팬들이 몰렸다.

“안녕하세요, 유치우입니다. 여기 한이랑 같이 찬길을 걷다가 여러분 생각나서 켰어요. 반갑습니다.”

“Hello everyone! Hell yeah! It’s me, Han!”

“넌 자꾸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한국어가 편한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우리말로 해.”

“Oh, really? Is that so?”

“그렇다니까. 영어가 네이티브인 사람들도 반 정도는 되겠지만, 내 팬 중에선 한국어가 제2외국어인 사람이 70% 이상이란 말이야. 어차피 자동 자막 달리기도 하고.”

그의 말대로 자동으로 번역되는 자막을 본 팬들이, 이내 유치우와 이한의 동행에 열광하며 무수한 채팅을 올렸다.

그것들 역시 0.1초 안에 한국어로 번역돼 표시됐고.

“예, 맞습니다. 찬길이에요. 아직도 못 보신 분들이 많으신 모양이네요. 한국의 명물 ‘찬재’ 1층입니다. 찬 영화제 때가 아니더라도 볼거리가 많으니까 꼭 와보세요. 오늘은······ 찬 영화제를 기념해서 <형사> 시리즈부터 쭉 살펴볼게요. 자, 여기가 2014년이에요. 이때부터 역사가 시작됐죠.”

“나 태어나기도 지읒이응니은.”

“이한, 초성체 쓰지 마라. 그러면 번역이 안 돼.”

“오, 지읒쌍지읒니은? 그래도 알아서 해석하겠지 뭐.”

“어휴. 아무튼 이 작품으로 찬쌤이 아카데미에서 두 번째 남우주연상을 받으셨어요.”

“오······ ‘찬샘’은 번역 안 되네요?”

“고유명사니까 그래. 하지만 이때까진 그래미 대상 후보에 오르진 못했죠. 최우수 영화음악상 정도로 만족해야 했어요.”

부친의 젊은 시절이 고스란히 구현된 정구산업의 피규어를 훑어보며, 이한이 건성으로 물었다.

“매출 13억불 나왔죠? 그때 아마 <저스티스>에 밀렸나?”

“그렇지. <트랜스포머>보단 더 흥행했지만 이후로 전설을 써내려간 <저스티스> 1편에는 좀 밀렸어요.”

“그렇지만 이 영화가 기록을 참 많이 세웠던 거죠? 일단 뮤지컬 필름 중에서 최고 매출이었고, 영화 OST 중에서 최다국 차트 1위였고, 모든 영화 통틀어서 블루레이 최고 매출 달성했고. 여기서 벌어들인 돈으로 찬재 세웠던 거잖아?”

“야, 그런 얘기는 하지 마. 기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응이응디귿디귿?”

“그건 또 뭐야?”

“왜 안 된대?”

“······어휴. 자, 넘어갈게요.”

이후 아카데미와 그래미를 동시 폭격한 2부를 조명한 뒤, 유치우와 이한은 <형사> 3부 피규어 앞에 섰다.

“여기서부터 진아 이모가 출연하기 시작하셨죠. 찬쌤이랑 두 분이 결혼하신 해기도 하고요. 아, 한이 네가 설명할래?”

“Yeap bebe. 막 완공된 찬재에서 결혼식 올리자마자 캐스팅했다는 behind story가 있죠. 그래서 엄마가 시리즈 처음으로 등장하게 됐다고 하네요. 이때는 조연이었고 다음 편부터 히로인 됐던 건데, 난 거기부턴 잘 못 보겠더라고요. 그래도 엄마아빤데 키스씬 나오고 그러니까 민망해서. 아무튼 그러다가 7부에 하차하셨던 건, 부부싸움 심하게 해서!”

“그게 아니라 시나리오상 하차하시게 돼 있었어. 이상한 루머 만들지 마.”

“헤헤. 사실 엄마아빠가 부부싸움은 안 해요. 가끔 그런 얘기는 하죠. 바람피우면 손가락을 몽땅 잘라버리겠다고.”

“거짓말 하지 말라니까? 너 엄마한테 등짝 맞는다?”

“Oh, deung-jjak smash!”

그 뒤로도 이한이 처음으로 출연하게 된 5부와 아카데미 남녀 주연상을 모두 휩쓴 6부와 아카데미 최연소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송유리가 참여하기 시작한 7부와 OST로 그래미 3개 대상을 한꺼번에 수상한 9부와 호아킨 피닉스가 인생작품으로 손꼽았다는 11부와 올해 여름에 개봉해 최초로 40억 달러 매출을 돌파한 14부까지 소개하는 데에 한 시간이 걸렸다.

기록만 열거해도 다큐멘터리가 나올 판인데, 이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기대하는 팬들까지 넘쳐났던 까닭.

마침내 참지 못한 이한이 배고프다고 징징거릴 무렵에야 생방송이 종료됐다.

“어휴. 넌 참 참을성도 없다. 그래서 생방송 시청자 기록은 언제 경신할래?”

“엥? 생방송 시청자 기록 내가 세웠어요?”

“몰랐어? 찬쌤이 너 두 살 때 처음으로 연기 가르친 걸 생방송으로 내보냈는데, 그걸 4천만 명 정도가 봤던 거야.”

“힐러리!”

“······힐러리는 또 뭐야?”

“헐-헐랭-헐레리-힐러리 이런 식으로 발전한 건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4천만은 좀 심한 거 아닌가? 미음이응디귿?”

“말이 되냐고? 되지, 인마. 그때 이미 찬쌤 없는 아카데미랑 그래미를 상상할 수 없게 된 시점이었는데, 무려 진아 이모랑 결혼해서 낳은 애한테 연기를 가르치는 순간이었으니까 말이야. 얼마나 천재일까 궁금해서라도 켜보게 됐던 거지.”

“힐러리······.”

살짝 힘 빠진 소리를 내는 이한의 머리를, 유치우가 조심스레 쓰다듬어줬다.

“아니 뭐······ 그땐 그랬다는 얘기야. 부담감 느낄 건 없고.”

“부담감은 아니고, 좀 씁쓸해서요. 아, 천재 부모를 둔 아들의 삶이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부모의 위대한 업적을 따를 수 없으니, 이야말로 천형의 굴레가 아닌가.”

“짜식.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라. 어쩔 수 없는 거야. 원래 자식농사라는 게 마음처럼 되는 게 아니라고 하니까.”

명진아를 꼭 닮아 여자들보다도 더 예쁘다는 말을 듣는 이한은, 그렇지만 연기력 면에서는 그녀를 닮지 못했다.

신화가 된 이찬과는 아예 격이 다른 입지.

태어난 직후부터 <형사>에 출연하며 얻은 네임밸류가 아니었다면, 연기 쪽으로는 활약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해. 지난 세기 말이에요. 조혁수 삼촌, 강정후 삼촌, 아빠, 송유리 이모까지······ 한 시대에 한 명만 나왔어도 신기했을 사람들이, 이 좁은 땅에서 한꺼번에 나타났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2013년을 세계영화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부른다면서요?”

“뭐, 그렇지. 그분들 활약 덕분에 영화의 패러다임이 헐리웃에서 충무로로 넘어오기 시작한 시점이니까. 찬 영화제가 칸이랑 아카데미랑 해서 세계 3대 영화 시상식이라고 불리고 있는 지금은, 새삼 놀랄 것도 없는 일이 됐지만.”

“아저씨는 어때요? 좀 씁쓸하지 않아요? 그 선배들이 아직까지도 정정해서 스타 대접을 제대로 못 받고 있잖아?”

“뭔 헛소리야? 선배들이 닦아놓은 길 위에서 편하게 경력 쌓고 있는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하면 어떡하냐? 애초에······ 재능으로 따지면 한참 부족한 걸 아는데.”

동병상련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두 소년은 피식 웃었다.

바로 그 시점에 에스컬레이터가 끝나고 ‘찬재’의 2층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소녀의 외침과 함께.

“치우 오빠! 이한! 왜 이렇게 늦었어?”

소리치며 달려오는 건 남태형과 신수영의 딸인 남재희. 그녀를 조혁수와 이채진의 딸 조이라가 뒤따르고 있다.

“왜 늦었냐니? 우리 방송 하면서 왔는데, 알림 안 떴어?”

“알림? 몰라, 나 오빠 언팔해서.”

“뭐? 어, 왜?”

“오빠 자꾸 이상한 거 올리잖아. 한밤중에 이불 속에서 웅얼웅얼거리는 그런 걸 왜 올려?”

“아니······ 그거······ 나름 철학적인 고민들인데······.”

“아무튼 피드 더러워지는 느낌이라 언팔했지. 이라는?”

“나는, SNS 안 해요.”

“아 맞다, 올드한 집 요조숙녀지? 아무튼 빨리 가자. 엄마아빠들 다 기다리고 있대. 언니가 데리러 올 거라고 그랬는데.”

“언니? 어떤 언니?”

“유리 언니. 아, 저기 있다! 유리 언니!”

남재희의 뒤를 따르며, 이한은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아저씨, 그거 알아요? 태형 삼촌이랑 수영 이모랑 어떻게 결혼했는지? 유리 이모한테 들은 건데, 수영 이모가 태형 삼촌 자빠뜨렸대. 그래서 책임감 때문에 결혼한 거라나 뭐라나. 하여튼 그 이모 참 돌격대장이야. 지읒기역기역이야.”

“음······.”

“뭐냐고 안 물어봐요? 장군감이라는 건데.”

이한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유치우는 우아하게 다가오는 송유리의 얼굴만을 멍하니 바라봤다.

“우리 꼬맹이들, 이제 왔어? 중간에 납치라도 당했나 했네.”

“오, 나도 그 걱정 했는데! 한이 납치당하면 큰일이잖아요? 협상금으로 몇 조 달라고 할지도 몰라. 안 그래?”

“힐러리? 재희 누나 그거 몰라? 내 주변으로 1km 반경에 경호원 아저씨 300명 깔려 있어. 아무도 못 건드려 난.”

“헉······ 진짜야? 300명이라니······.”

“그것도 전부 용태 할아버지 체육관에서 권법 배운 전문가들이거든. 스파르타! 걸리면 그냥 지읒시옷 나는 거지.”

“지읒시옷? 아, 작살난다고? 하하핫, 말도 잘해요 참.”

“떽! 이라가 듣고 배운다. 이한, 부탁이니까 저기 치우처럼 좀 의젓하게 행동하렴.”

송유리의 지목에 유치우가 펄쩍 뛰었다.

그게 비유가 아니라 실제 행동이어서 웃음이 번졌다.

“으헤헤! 저거 봐. 저 오빤 소심한 거죠. 안 그래, 이라야?”

“소심······ 찌질······.”

“떽! 하여튼 애들이란. 됐고, 손 꼭 잡고 따라와. 회장 주위로 기자들 꽉 차 있어서 놓치면 바로 길 잃어버린다.”

그렇게 송유리의 손을 잡은 유치우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 시도가 초인적인 관찰력의 송유리를 속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조금쯤 귀여운 인상을 주긴 했다.

“······흠. 치우 너, 김도철 역 준비는 잘돼가?”

“앗, 네 네! 저······ 찬쌤한테,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그래. 잘해야 돼. 첫 <형사> 출연이 마지막이 되긴 하겠지만, 정말 중요한 역할이니까. 겁주는 건 아니고 잘할 거라고 생각해. 너 전에 올린 영상 꽤 재밌더라고. 시대의 요구에 대한 인간이란 종의 응답이랬나? 뭐 보고 그런 생각 한 거야?”

“네, 네? 어, 저······ 누나 보고요.”

“응? 날 보고? 내 뭘 보고?”

“최연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최연소 그래미 3관왕! 그야말로 시대의 요청에 응답한 프리마돈나라고 할 수 있죠.”

“흐흠. 오페라 할 생각은 없지만, 적절한 비유네. 가점 1점.”

“아······ 가점, 이제 몇 점 남았어요?”

“62점 남았어. 100점 채우면 무슨 소원 빌 건데?”

“그, 그건 비밀이에요······.”

빤히 보이는 속을 모른 척해주며 송유리는 길을 서둘렀다.

무수한 기자와 팬들이 월드스타의 등장을 알아봤지만, 1층에서 그랬듯 마구 달려드는 사람들은 없었다.

2027년의 한국은 이미 세계 문화산업의 중심. 시대의 요청에 응답한 프리마돈나가 나타난 거라고 해도, 그녀에게 호들갑스레 달려드는 구시대적인 행동은 눈총만 받을 터였다.

다만, 한 사람에 한해서는 얘기가 달라졌다.

“이찬! 주차장에 이찬 도착했대!”

“꺄아앗! 찬이 오빠아아아!”

“빨리 움직여! 한 컷만 따도 바로 메인이야!”

수백 명의 군중이 일거에 이동해 싹 비워진 앞길을 보며, 송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하여튼 이길 수가 없는 스승이라니까. 대체 언제쯤이 돼야 이찬의 제자 꼬리표를 뗄 수 있을지 원. 계속 앞에 오빠가 있으니까, 치우 같은 애는 남자로도 안 보이잖아······.’

입지는 전혀 다르지만, 신세는 이한과 별다를 게 없었다.

*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4년째 찬 영화제 시상자로 참석 중인 호아킨 피닉스를 VIP석까지 안내한 뒤, 이찬은 천천히 단상 위에 올라섰다.

아직 개회까지는 시간이 좀 남은 상황.

그렇지만 이미 3000여 명이 들어찬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4년 연속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그래미에서 통산 17개의 대상을 거머쥔 문화대통령을 향한 열광.

그건 마치 신을 영접한 이들이 보여줄 법한 반응이었다.

“흠······ 반갑습니다. 객석이 다 찬 것 같아서 미리 인사드릴 겸 올라왔습니다. 올해는 참 많은 일이 일어난 해였습니다. 멀게는 티벳과 홍콩이 비로소 평화적인 독립에 성공하고, 가깝게는 남북한이 13개년 연방국가 발전안에 합의했죠. 아, 그리고 마침내 화성 유인탐사가 이뤄지기도 했네요.”

웃으며 둘러보던 중, 객석 한복판에서 외침이 터졌다.

“명의 넷째 아이 출산!”

“아······ 그것도 물론 저희 가족에겐 중대한 일이죠. 그래서 전 연회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오늘도 빨리 집에 가서 산후조리 도와야 되거든요. 아무튼······ 그렇게 올해를 보내며, 미리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아마 2028년을 끝으로 연기를 그만둘 것 같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5초의 정적.

그 직후에 탄식이 장내를 뒤덮었다.

*

“진심이냐?”

대기실까지 찾아온 강정후의 질문에, 이찬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갈 때 됐죠. 하고 싶었던 건 다 했으니까.”

“······그래미의 제왕에 아카데미 16년 연속 수상자라 그거냐. 이기적인 놈. 끝내 널 넘어설 기회를 안 주는구나.”

“소위 명예로운 패배라는 겁니다. 평생 붙어봐야 내가 계속 이길 게 뻔한데, 이쯤에서 빠져주겠다는 거죠.”

“개새끼.”

“하하핫. 선배, 혹시라도 애들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요.”

“조카들 살뜰히 챙기긴. 당연히 안 한다.”

“누나 차기작은 잘되고 있대요? 요새 통화를 못 했네.”

“잘되고 있다더라. 불참하긴 했지만, 올해 여우주연상은 세영이가 맞지?”

“그건 비밀.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잖아요? 그래도 수상소감은 준비해놔요. 버벅거리는 매형은 보기 싫으니까.”

역시 세영이로군- 생각하며 강정후는 픽 웃었다.

“이놈의 찬 영화제는 참 재밌단 말이지. 이찬 가족들은 쏙 빼고 상 준다는 게. 다른 모든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꿰찰 명진아를 제외하고 후보를 세우면 무슨 의미가 있냐?”

“어쩔 수 없잖아요? 가족 버프라고 뭐라고들 할 수 있으니.”

“그럴 인간 하나도 없을 거다. 명진아 그 녀석은, 이제 이찬 너조차 뛰어넘었어. 그 연기를 보고는 아무도 딴소리 못 해.”

“어떻든 간에, 찬 영화제는 새 얼굴을 발굴하기 위한 장입니다. 그래서 선배도 남우주연상 다시 못 타는 거고요. 프로메테우스 죽으면서 탄 걸로 땡. 여우주연상은 희재 누나가 받았으면 좋겠어요. 벌써 일곱 번째 노미네이트만 됐으니.”

“하긴. 오늘도 못 타면 네 멱살 잡겠다더라. 이찬맘이 여기서 주연상 한 번을 못 타는 게 말이 되냐고. 어쨌든······ 축하한다. 훌륭하게 레퀴엠을 완성하고 퇴장하게 된 걸.”

“아직 완성은 아니거든요? 기대하라고요. 내년에 나올 대단원은 세계 유일의 50억불 대작이 될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IMDb 만점 채워서 세세무궁토록 모든 인류가 보게 만들 겁니다. 아, 시간 됐다. 슬슬 나가죠.”

대기실을 나선 이찬과 강정후 주위로는 소위 ‘이찬 가족’이라 불리는 사단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선비>와 <형사>를 통해 세계를 주름잡은 그 면면이 지나치게 호화로워서, 그들이 단상에 올라설 때쯤에는 이미 기립박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

시상식에서 빠져나와 1층으로 향하며, 이찬은 조혁수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도 고생했다. 매번 직접 사회 보느라 힘들겠네.]

“뭐 내년이면 끝이에요. 이젠 다 물려주고 은퇴할 거니까.”

[······그래. 후임자는 결정한 거냐?]

“물론 유리죠. 좀 어리긴 하지만, 잘할 거예요.”

[그렇군. 겉으론 툴툴거려도 네 말을 금과옥조처럼 믿는 애니까, 이찬 재단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안 할 거다.]

“그럴 거예요. 선배는 좀 어때요? 불사조처럼 이번에도 죽음을 극복하고 돌아온 ‘크리스’가 또 얼마나 활약하려나?”

[별로 대단한 건 없다. 말 안 했나? 시나리오가 재밌더라.]

“하하하, 혁수의 저주구나? 이번에는 20억불 못 벌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장수 시리즈로는 기록적인 거니까 만족하세요. 히스랑 베일한테 인사 전해주시고요. 이만 끊죠.”

[잠깐만.]

이찬의 움직임을 막고 잠깐 고민하던 조혁수는, 이내 결심한 듯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음 널 봤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너라는 배우를 만난 건, 내 운명이 아닐까 하고.]

“하하. 그게 갑자기 뭔 소립니까?”

[잠자코 들어봐. 나는, 하류인생이었다. 히어로가 아니었어. 집안은 그저 빈한하기만 했고, 어린 나는 잘하는 거라곤 남들 눈치 살피는 일뿐이었던 꼬마. 그래서 도박판에서 시다 노릇을 했던 거야. 감정의 배출구는 오직 바이크 몰면서 속도감을 즐기는 일이었지. 그러다 사고를 당했고.]

“예······ 전에 심성윤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그래. 그 뒤에야 우연히 연기를 시작했던 건데······ 너를 보고 나서 그게 우연이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나는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고. 너라는 천재가 처음으로 연기를 제대로 마주하게 하는 계기로서, 연기의 신이 나를 안배한 거라고······.]

이미 마흔이 넘은 월드스타가 하는 말로는 지나치게 낭만적이었지만, 이찬은 그저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랬는데······ 그것도 아니었어.]

“아니었어요? 얼추 맞는 것 같은데? 나 선배 덕분에 제대로 연기하게 됐습니다. 고맙게 생각해요, 정말로.”

[쉽게 인정하기는. 도움이 됐다니 기쁘다만, 그게 아니었어. 네가 연기의 신이었던 거다. 네가, 너의 형이, 우연히도 나를 좋게 봐줬을 뿐인 거야. 그 인연 덕분에 나는 내 이름을 건 히어로무비로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 고맙다, 이찬.]

“흠. 고마우면 자식교육 좀 잘하십쇼, 선배. 재희 걔는 대체 왜 그렇게 못된 말들을 가르치는 건지 모르겠어. 우리 한이가 걔 때문에 막말에 물들어버렸단 겁니다.”

[응? 내가 아는 거랑 반댄데? 네 아들 때문에 다른 애들이 전부 물들고 있다던데. 널 닮아서 아주 개차반이라고.]

“으, 으음. 그건······ 확인을 좀 해보죠. 어흠.”

‘하늘나라’ 스타군단의 2세들 중에서 악의 축으로 군림하는 듯한 자식놈을 어떻게 교육할까 고민하며 로비로 나선 이찬은, 문득 통유리 창 바깥을 바라봤다.

시상식이 진행되는 사이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듯했다.

‘······아니, 눈인가? 어정쩡한걸. 참 얄궂은 날씨야.’

장남이야 2세들끼리 신나게 음료수 마시고 있겠지만, 세 아이를 돌보고 있는 명진아를 위해 빨리 귀가해야 마땅한 상황.

그러나 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진눈깨비는 늘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 이찬은 감상에 젖어 한산한 1층을 거닐었다.

한창 진행 중인 찬 영화제 덕분에 로비에 나와 있는 사람이 없어, 느긋하게 추억을 되새길 수 있었다.

‘딱 이 자리쯤이······ 구 터미널이었지. 형과 처음 만났던 곳.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니까, 딱 28년 전이기도 해. 지금 내 나이의 형이 범인을 잡기 위해 잠복하고 있던 터미널······.’

그렇기에 이찬은 주상복합단지를 통째로 인수해 문화복합공간 ‘찬재’를 지었다.

그곳에서 명진아와 결혼식을 올리고, 장남 이한의 돌잔치를 열고, 2027년까지 10회째 찬 영화제를 개최 중인 것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이곳 1층을 거닐었지. 얼굴을 바꾼 채 무수한 시민들을 관찰하며, 혹시라도 나나 송유리 같은 아이가 없을까 찾곤 했어. 하지만, 쉽게 나올 리 있나.’

벌써 11년이었다.

이찬은 방문하는 모든 곳에서 송유리의 뒤를 이을 천재를 찾아 헤맸지만, 언제나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은 우리 세대가 특이했던 거지. 조혁수에 강정후에, 나에 송유리에. 천재들이 한 시대에 그토록 즐비하게 태어난 건 그야말로 신의 장난이야. 어쩌면 평생 한 명도 더 찾지 못할 수도 있어. 그렇다 해도 원망할 순 없는 일이지. 15부에 등장할 이찬 역으로는, 역시 내 아들이나 다시 출연시켜야 되나. 하지만 걔는 얼굴만 잘생겼지 연기는 영-’

생각하며 걷던 중, 시야의 가장자리에 뭔가가 포착됐다.

1층의 벤치 중 하나. 비인지 눈인지에 잔뜩 젖은 채 이찬을 바라보던 소년 하나가, 쳐다보자 시선을 확 피했다.

그쪽으로 다가서자 불안한지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큼······ 금방 나가겠습니다. 밖이 너무 추워가지고······.”

“아냐, 괜찮아. 아무나 들어와서 쉬라고 24시간 열어놓는 곳이야. 건물이 좀 위압적이라 노숙자들은 잘 안 오지만.”

“아······ 그런 거구나? 감사합니다, 이찬 아저씨.”

어색하게 웃으며 안심하는 소년에게, 이찬은 말했다.

28년 전의 형처럼.

“형. 형이라고 부르렴.”

열 살 남짓한 소년의 표정이 황당함에 물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찬이 울면서 웃기 시작했다.

< 90장 - 형 이찬 > 끝

ⓒ 비벗

작가의 말

여기까지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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