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성현이 금고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금고에 들어 있던 은화 10개가 둥실 떠오르더니 손에 놓였다.
동전을 쥐고 가볍게 흔들자 짤랑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이계의 돈, 현실에서는 1실버당 약 100만 원에 거래되는 중이다.
하지만 현금화할 생각은 없다.
해결해야 할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돈보다는 테스트 통과가 우선이야.’
물론 수십 년의 경험을 가진 성현에게 테스트 통과는 당연한 일이다.
대학생이 초등학교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 쉬울 거다.
하지만 성현의 목표는 단순 통과가 아니라 이 지역의 역대 최고점이다.
성현이 창고의 문고리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이계 시장.”
동시에 성현의 몸이 스르륵 사라졌다.
성현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하얀 바탕의 창고에 있었는데, 지금은…….
후우우웅.
모래 폭풍이 이는 사막이었다.
코와 입이 퍽퍽해질 정도로 건조하다.
성현은 옷을 벗어 터번을 만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주변을 살핀다.
‘저쪽이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를 디디며 끝이 없을 것 같은 지평선을 향해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걸었다.
신기루같이 일렁이는 뭔가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자 일렁임이 사라지며 점차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뚫을 것처럼 높은 탑.
이곳이 이계 시장이다.
성현은 거침없이 탑의 입구에 섰다.
터번을 둘러쓴 남자 2명이 휘어진 칼을 들고 성현의 앞을 막았다.
“몇 층에 가십니까?”
“1층.”
2층, 3층……. 높이 올라갈수록 좋은 물건이 있다.
하지만 올라가려면 각 층마다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와 싸워 이겨야 한다.
성현은 지금 힘으로 그들을 이길 수 없고 다행히 1층은 조건 없이 누구나 오갈 수 있었다.
“들어가십시오.”
문지기가 칼을 치운다.
성현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모랫바닥에 돗자리를 펼치고 노점을 차린 상인들과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인간도 있었지만 눈동자가 여러 개 있는 등 전혀 다른 종족도 있었다.
성현은 시장의 중심부터 훑었다.
포션부터 무기나 방어구까지 전투에 필요한 물건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성현이 찾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있지?’
1층에 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 두리번거린 건데, 성현의 행동이 어리숙하게 보였나 보다.
콧수염을 기른 음흉하게 생긴 남자가 다가와 성현의 귀에 속삭였다.
“예쁜 악마 있는데 사진 볼래? 귀접도 가능한데.”
남자가 품에서 사진첩을 꺼내 펼쳤다.
판타지 세계에서 볼 법한 아름다운 엘프의 사진이다.
남자가 말을 잇는다.
“3브론즈에 어때? 녹여 줄게. 흐흐.”
이곳의 돈 단위는 크게 세 가지다.
브론즈, 실버, 골드.
각각 10배의 차이가 난다.
성현은 남자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손을 저었다.
“꺼져.”
단순 쾌락을 위해 저런 곳에 드나들면 저주에 걸릴 수도 있다.
죽을 수도 있고.
성현은 남자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호객 행위를 하는 놈들이 따라붙었지만 계속해서…….
성현은 열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의 앞에 멈춰 섰다.
펼쳐진 돗자리에 깨진 조개껍질부터 금이 간 선글라스, 압박붕대 등 잡화가 가득했다.
누가 봐도 쓸모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성현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도 도금이 벗겨져 지저분하게 보이는 낡은 회중시계에…….
“얼마지?”
손부채를 부치던 꼬마가 성현을 빤히 본다.
꼬마의 얼굴은 정말 귀엽다.
금발 머리에 하얀 피부, 올망졸망한 눈, 코, 입.
서양 아역 모델을 떠올리면 꽤 비슷할 거다.
하지만 그 속은 끔찍한 악귀, 이 꼬마는 인간을 산 채로 씹어 먹는 걸 즐기는 미친 새끼다.
이 끔찍한 꼬마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물건 볼 줄 아는 손님이 오셨네요. 그런데…… 가계약자야?”
꼬마는 성현의 몸에서 존재의 권능을 살폈지만 느낄 수 없었다.
꼬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가계약자가 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이곳에 오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온 거예요?”
존재는 가계약자에게 어떤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게 룰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꼬마가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누구랑 가계약했죠?”
“쓸데없는 말 말고. 장사꾼은 돈이나 받으면 되는 거잖아? 얼마지?”
꼬마가 깔깔깔 웃는다.
“그렇죠. 깜빡 잊을 뻔했네요. 난 지금 장사꾼이죠. 중고니까 싸게 줄게요. 원래는 5실버인데 4실버만 주세요.”
싸게 준다고 말했지만 4실버가 정가다.
성현은 흥정을 해 볼까 생각했지만 아직은 흥정이 통할 때가 아니다.
가계약자이며 어떤 명성도 없으니까.
“좋아. 그럼 다음. 스텟을 올리는 알약 있지?”
“……알약?”
“있잖아. 알고 왔으니까 속이려 하지 마. 얼마야?”
스텟을 올리는 알약은 5층 이상에서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성현은 이 꼬마가 몰래 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꼬마가 배를 잡고 한참을 웃는다.
“재밌는 손님이네요. 좋아요. 원래 단골한테만 주는 건데 특별히 팔도록 하죠. 30분 동안 스텟 1을 올릴 수 있는 알약이 종류별로 있어요. 가격은 2개에 1실버.”
“스태미너, 파워, 스피드 골고루 해서 6개 사지.”
성현은 주머니에서 동전 3개를 꺼내 꼬마에게 건넸다.
꼬마가 방긋방긋 웃는다.
“필요한 게 더 있나요?”
“쓸 만한 진통제 있나?”
“진통제요? 잠시만…….”
꼬마가 품을 뒤적거리더니 성현에게 검은색 알약을 하나 보였다.
“팔이 잘린 통증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거예요. 효과는 5분 정도…….”
“얼마지?”
“하나에 1실버.”
“3개 줘.”
성현은 마지막 3실버를 꼬마에게 건넸다.
그렇게 10실버를 모두 사용했다.
흥정을 못 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은 원하던 아이템을 모두 구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꼬마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한다.
“혹시 정식 계약을 못 하게 되면 나를 찾아와요. 테스트 없이 계약해 줄 테니까요.”
잠시 후, 다시 하얀 공간…….
성현은 창고로 돌아왔다.
이계 시장에서 산 회중시계를 꺼내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자 회중시계의 정보가 홀로그램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중고 회중시계]
-어린 소녀 앨리스를 지옥에 몰아넣었던 토끼가 사용하던 것.
-1초간 시간을 멈출 수 있다.
-사용 횟수 : 6/8
남은 사용 횟수가 세 번만 되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여섯 번이나 쓸 수 있다.
비싸게 주고 샀다고 생각했는데 엄청 싸게 산 거다.
‘괜찮네.’
성현은 회중시계와 각종 알약을 장비함에 넣어 둔 뒤 창고를 빠져나왔다.
다시 현실 세계다.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이계에서 꽤 오랜 시간을 있었지만 현실의 시간은 고작 10분 정도 지났을 뿐이다.
* * *
-오늘 새벽,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짐승이 나타났습니다. 2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당시 현장에 있던 서 모 씨가 제보한 영상에 따르면…….
뉴스를 보던 성현은 리모컨을 들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오셔서다.
“일찍 일어났네?”
“밥해 놨어요. 식사하시고 출근하세요.”
어머니가 눈을 깜빡거렸다.
“……밥을 했다고?”
“네.”
성현이 먼저 일어나 밥을 차린 일은 처음이다.
아니,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아들이 밥을 차리다니…….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진짜 없어요.”
“그런데 밥은 왜……?”
어머니의 출근 시간은 다가오는데, 이대로 있으면 말이 길어질 것 같다.
성현은 소파 앞에 어머니를 앉힌 후 익숙하게 상을 펴고 반찬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국을 내려 두자 어머니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기분 좋게 수저를 손에 쥐고 한 숟갈 떠드셨다.
그리고 놀란 얼굴로 성현을 바라봤다.
“맛있죠?”
“어? 어. 빈말이 아니라 정말 맛있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성현은 혼자 살았다.
죽을 때까지 계속…….
게다가 짐승과 싸우다 보면 야외에서의 취침이 일상이었으니 음식 솜씨는 자연스레 늘었다.
그것도 꽤 수준급으로.
“나중에 더 맛있는 거 해 드릴게요.”
어머니가 엷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들 다 컸네.”
잠시 후, 학교…….
성현은 가방을 걸고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누구도 인사하지 않는다.
원래 친구도 없었지만 곽동진을 팼던 게 이유 중 하나다.
그 일로 양아치 패거리가 성현을 노린다는 소문이 쫙 깔렸으니까.
‘뭐…….’
상관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편했다.
성현의 껍데기는 10대지만 그 속에는 중년의 아저씨가 들어 있다.
게다가 성현은 사람을 죽이고 죽였던 지옥에서 살아왔다.
평화에 젖은 어린애들과 대화하는 것이 더 피곤한 일이다.
성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마지막 칸에서 라이터 소리와 함께 담배 연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누군가와 전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 학교지.”
성현에게 맞은 곽동진이다.
그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아, 어제? 그 새끼가 치사하게 선빵 쳐서 맞은 거야. 계약자 아니야. 약한 주먹이었어. 걱정하지 마. 내가 오늘 그 새끼 깔 거야. 그래, 학교 와서 이야기하자.”
그렇게 양아치 친구들과의 허세 섞인 통화가 끝났다.
이윽고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 소리가 들린다.
“유성현 이 새끼…….”
보나 마나 양아치가 괴롭힘당하던 상대에게 맞으면 학교에서 설 자리가 없어져셔 그런 걸 거다.
얼마 남지 않은 학교생활이지만 어깨에 힘주고 다니려면 어떻게든…….
이윽고 변기의 물이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앞에 성현이 보였다.
곽동진이 인상을 콱 일그러뜨렸다.
그 순간 성현이 주먹을 날렸다.
콰직!
곽동진이 비틀거렸고 코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렀다.
“이, 이 새끼가 또 비겁하게!”
“생각해 보니까 내가 조금만 때렸지? 그동안 맞은 걸 생각하면 억울하네.”
“뭐?”
“오늘부터 넌 내 눈에 띌 때마다 맞는다. 알아서 피해 다녀라.”
“뭐? 이 새끼…….”
퍽!
성현의 주먹이 다시 곽동진의 얼굴을 가격했다.
이어서 곽동진을 가볍게 넘어뜨린 후 다시 짓밟기 시작했다.
콱! 콱! 콱!
고통을 주면서도 뼈를 부러뜨리지 않는 것은 성현의 전문이었다.
곧 곽동진이 울며 애원했다.
“미,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곽동진은 또 학교를 떠났다.
그리고 아침부터 가볍게 몸을 푼 성현은 교실로 돌아왔다.
학생들은 웃고 떠들며 수업을 기다리는 중이다.
‘누가 계약자일까?’
성현은 교실을 살폈다.
어차피 무료한 학교생활, 할 일 없이 죽치고 있느니 누가 계약자인지 찾아보기로 했다.
‘노리개로 계약한 애들은 좀 있네.’
존재는 8명의 인간과 계약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계약을 전투형으로 채우지 않는다.
1~2개는 꾸미고 키우며 흐뭇한 눈으로 감상하기도 한다.
1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를 그 시간, 전투만 하는 게 아니라 지루함을 달랠 캐릭터도 필요한 법이니까.
그리고 존재는 그들을 노리개라 부른다.
‘가지고 노는 거지.’
고등학생은 한창 외모에 민감한 나이다.
이때 존재를 만나 계약에 성공한 학생들은 램프의 요정을 만난 기분일 거다.
-소원을 들어주지.
존재가 이런 말을 하면 목숨 걸고 ‘짐승과 싸우고 싶어요!’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예뻐지게 해 주세요.”
“공부 잘하고 싶어요.”
“돈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영원히 살게 해 주세요.”
노리개가 되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떠든다.
그래서 예쁘고 잘생긴 애들, 얼굴이 작고 다리가 긴 체형을 가진 학생들, 그들은 계약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한심한 놈들, 우리 반에는 저런 애들만 있나?’
노리개는 노리개다.
영원한 장난감은 없다고 가지고 놀다 방치되거나 버림받는다.
또는 전투 기술 하나 없는 상태로 짐승과 싸우기도 하고.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난 버림받지 않을 거야.’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함께 계약하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때 속삭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어제 가계약했어. 정식으로 계약하려면 테스트를 봐야 한다고 하는데…….”
성현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