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성현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과 같은 눈으로 아리를 바라볼 뿐이다.
그러다가 눈동자만 움직여 목에 닿은 그녀의 낫을 향했다.
눈으로 봐도 그녀의 낫은 날카롭다.
“……관리가 잘돼 있네.”
목에 낫이 닿아 있어도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
“뭐라?”
아리의 눈에서 지독한 살기가 쏘아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겉모습은 귀여운 소녀, 하지만 그 속은 존재, 그 살기를 인간이 이겨 내기 힘들다.
성현의 온몸에 핏줄이 솟아올랐고 곧 죽을 것처럼 심장이 뛰고 있었다.
하지만 꾹 참아냈다.
아리의 시선에는 성현의 그 모습조차 건방져 보였다.
그녀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감독관이 지켜야 할 서약 중 하나가 테스트 중에는 인간을 죽일 수 없다는 거지. 하지만 특약이 있어. 부정을 저지른 자는 그 즉시 죽일 수 있다는 것.”
성현의 목에 닿은 낫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그리고 성현의 목을 휘감더니 뱀처럼 콱 조르기 시작한다.
“컥!”
이어서 성현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성현은 발만 동동 굴렀고 그녀는 숨을 쉬지 못하는 성현의 고통을 즐기며 계속 말했다.
“인간아, 대답해라. 너와 가계약한 존재가 무엇을 알려 줬지? 대답 여하에 따라 네 생사가 결정될 것이다.”
“……난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어.”
“인간 따위가 끝까지!”
“컥! 사, 살려 줘…….”
성현의 얼굴에는 고통이 가득했고 이제 목숨마저 빌고 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진실인가?”
“진, 진실이야! 정말이야!”
“네 목숨을 걸고 확인해도 괜찮겠나?”
“내, 내 목숨? 제, 제발!”
아리가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그녀는 성현이 거짓말을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네놈의 진실을 들어 보겠다.”
그녀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먹구름이 몰려왔고 그 안에서 사악한 기운이 몰아쳤다.
그 기운이 소용돌이가 되더니 하나의 형체로 변해 갔다.
마치 왕이 앉을 것 같은 의자로…….
이것의 이름은 ‘심판의 의자’, 진실과 거짓을 가려 주는 의자다.
아리가 깔깔깔 웃었다.
“넌 곧 죽을 거야.”
그녀는 성현의 비명 소리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현이 어떤 식으로 살려 달라고 빌어 댈지 벌써부터 기대하는 중이다.
성현의 목을 뱀처럼 감았던 검은 연기가 사라졌다.
성현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아리를 바라봤다.
잔뜩 두려운 눈빛으로…….
“제, 제발…….”
하지만 아리는 성현의 눈빛을 외면하며 의자에 손을 댔다.
그러자 시스템 음성이 공간을 울렸다.
-잠시 후, 재판이 시작됩니다.
-피의 마왕 거브께서 재판 방청을 신청하셨습니다.
-버림받은 악 지르힐께서 재판 방청을 신청하셨습니다.
-나태의 군주 글루튼께서 재판 방청을 신청하셨습니다.
재판을 보기 위한 존재들이 이곳에 나타났다.
물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검은 하늘에 거대한 눈동자만 내놓고 있다.
아리가 계속 말을 이었다.
“관객도 왔는데, 쇼를 시작해야지? 자, 심판의 의자여! 저 인간은 가계약한 상태에서 이계의 아이템을 사용했으며 존재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스텟을 올렸다! 나는 저 인간이 룰을 위반했는지 알고 싶다!”
의자가 금빛을 뿜어내며 굵은 남성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인간이 룰을 위반했다면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형이다. 지금 당장 저 인간의 목을 베어 죽이겠다.”
-좋다. 그럼 인간에게 묻겠다. 그대의 목소리가 거짓이 아닌 진실일 경우 원하는 보상이 무엇인가?
아리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성현을 향했다.
“인간, 원하는 보상이 있는가?”
그런데 아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까지 겁에 질려 있던 성현이다.
그런데 지금은 심각할 정도로 차분했다.
게다가 손가락으로 아리의 낫을 가리키고 있다.
“보상으로…… 그 낫 한번 쓰고 싶은데. 테스트를 받는 동안만 쓰고 반납하지.”
“뭐라?”
아리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성현에게 뭔가 꼼수가 있다는 것을 느껴서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 낫?”
그녀의 얼굴이 살벌하게 변해 갔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 올 정도로…….
“감히 네까짓 놈의 목숨과 내 낫의 무게가 맞는다고 생각하는 가!”
재판은 성현과 그녀가 원하는 보상이 균형을 이뤄야 시작될 수 있다.
“인간! 벌레 같은 네놈의 목숨은 고작해야…….”
그런데 심판의 의자가 진동하며 검붉게 변했다.
-인간의 목숨과 테스트 기간 동안 존재의 무기를 빌리는 것! 서로의 보상이 균형을 이뤘다.
“이런 거지 같은 게!”
아리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은 심판의 의자에 앉아 주십시오.
아리의 얼굴이 구겨졌다.
벌레 같은 인간에게 자신의 무기를 빌려줘야 한다니.
그녀의 눈빛이 성현을 좇았다.
성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고 있었다.
“저, 저게!”
성현이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아리는 성격이 급하고 눈으로 본 정보만 믿는 성격이다.
또한 심판의 의자를 사용해 인간 죽이기를 즐겼던 마녀다.
성현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현은 그녀가 등장했을 때부터 심판의 의자를 역 이용해 아리의 낫을 사용하기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용할 것은 전부 이용한다.’
자리에 앉은 성현이 눈을 감았다.
“재판을 시작하지.”
의자에서 흘러나온 핏빛 안개가 성현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심판의 의자는 당연하게도…….
-인간은 룰을 위반한 적이…….
아리가 마른침을 삼켰다.
의자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없다.
아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 없다고? 룰을 위반한 적이 없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분명 이계의 아이템을 사용했어!”
성현이 받은 의혹은 ‘존재에게 뭔가를 배웠는가’였다.
하지만 모든 것은 미래의 지식이다.
성현이 아리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깨끗하게 쓰고 돌려주지.”
아리의 손에 들렸던 낫이 희미해지더니 성현의 손으로 옮겨졌다.
아리가 분노로 가득한 눈빛으로 성현을 쏘아봤지만 재판의 결과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것이 따라야 하는 룰이다.
잠시 성현을 노려보던 아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일정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이제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을 방청했던 존재들은 이만 떠나 주세요.”
그 말에 검은 하늘에서 깜빡이던 눈동자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눈에는 홀로그램이 보였다.
-30초 후 몬스터가 등장합니다.
땅이 울리더니 높이가 10m쯤 되는 거대한 문이 솟아났다.
심각할 정도로 검은색의 문.
문틈으로 짐승의 포악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가 계속 말했다.
“원래는 10마리만 내보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 낫을 손에 들고 있는 인간이 있네.”
-첫 번째 웨이브, 짐승 30마리가 등장합니다.
-웨이브는 10분마다 반복됩니다.
“30마리?”
“말도 안 돼…….”
보통은 10마리만 등장한다.
30마리는 이곳에 있는 전부를 몰살시키겠다는 것.
그런데…….
“두 번째 웨이브에는 40마리, 마지막 세 번째 웨이브에는 60마리가 나갈 거예요.”
말 그대로 미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성현에게 향했다.
“너 때문이잖아! 어떻게 해 봐!”
“빨리 사과해!”
“제발……. 그럼 10마리만 나올 수도 있잖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는 붉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녀는 이곳에 있는 인간을 단 1명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다 죽이면 다른 존재에게 욕은 먹겠지. 하지만 보석을 선물하면 대충 넘어갈 거야. 인간은 보석보다 못한 존재니까.”
그녀가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우울한 날에는 비명을 들어야 속이 풀리는 거야!”
끼이이익.
검은 문이 열린다.
그 안에서 뱀과 잠자리, 쥐 등등의 짐승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모두 30마리, 가장 작은 개체의 크기가 2m 이상.
콰악!
날아온 잠자리가 한 남자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끄아아악!”
남자의 얼굴과 몸이 분리됐다.
피가 튀었고 뼈가 뭉개지는 소리가 들린다.
“꺄아악!”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망친다.
하지만 무리다.
“막, 막혔어!”
공간은 투명한 방어벽으로 막혀 있다.
도망칠 곳은 없다.
“×발!”
짐승이 인간을 사냥하는 소리가 잔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시 성현이다.
“그, 그 낫이 좋은 거라며! 좀 싸워 봐!”
“다 네 탓이잖아! 그러니까 싸우라고! 제발!”
테스트에 나타나는 짐승은 혼자서도 싸워 이길 정도로 등급이 낮다.
하지만 사람들의 머리는 공포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
“탓만 하면 뭐 해요? 싸워야지.”
토끼 가면이었다.
그녀는 성현의 같은 반 학생인 한아성.
당당하게 나섰지만 식칼을 든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
“가, 가만히 있어도 점수를 얻지 못하면 죽는 거잖아요. 싸워야지……. 난 반드시 통과해야 해요.”
그녀는 식물인간인 동생을 깨우려 한다.
그 집념으로 괴물과 싸우는 거다.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어도 상관 안 하려고 했다.
하지만 노력하는 사람은 돕고 싶은 법이다.
게다가 저런 성격은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뒤로 돌아가서 찔러. 저 등급의 잠자리는 포식 중에 움직이지 않아.”
갑작스러운 성현의 지시에 한아성이 눈을 깜빡였다.
“네?”
“가라. 할 수 있어.”
그녀는 성현의 차분한 목소리에 신뢰를 느꼈고 마른침을 삼키며 잠자리를 향해 다가섰다.
성현이 해 줬던 말을 반복하면서…….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성현의 말대로 잠자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을 먹는 것에 열중하고 있다.
“찔러.”
다시 한번 성현의 지시, 한아성은 눈을 꼭 감고 잠자리의 옆구리를 콱 찔렀다.
-키아아악!
잠자리의 등에서 보라색 피가 터져 나왔다.
그 피가 한아성의 가면에 퍽퍽 튄다.
하지만 한아성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칼을 쑤셨고 잠자리의 몸이 그대로 굳어 갔다.
-8점을 획득했습니다.
잠자리가 죽었다.
그녀는 잠자리의 피로 물든 자신의 손을 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 아…….”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생각했다.
강아지 1마리도 죽이기 힘든 게 인간이다.
그런데 거대한 잠자리를 죽였고 손에 뜨듯한 피를 묻혔다.
잠자리가 가진 수만 개의 눈동자가 원망을 담아 그녀를 바라본다.
‘멘탈 잡기 힘들지……. 정신이 나갈 수밖에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토끼 가면을 쓰고 있지만 딱 봐도 여고생이다.
옷 입은 것을 보면 완벽한 모범생이고.
하지만 틀린 생각이었다.
가면 속 그녀는…….
‘아…… 기분 좋아. 좋은 냄새가 나.’
손에 묻은 피 냄새를 맡으며 웃고 있었다.
그때 성현이 그녀의 앞에 섰다.
“앉아서 쉴 시간은 없을 텐데.”
성현의 목소리에 한아성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피 냄새를 맡고 있던 변태 같은 행동에 역겨움을 느끼며 성현을 향했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고 있을 때, 성현은 낫을 휘둘러 잠자리의 가슴을 찍어 버렸다.
그리고 잠자리의 보라색 심장을 꺼내 들었다.
“첫 사냥 성공의 기쁨은 나중에 생각해. 지금은 계속 싸워야 할 시간이야.”
“……네.”
“짐승의 심장에서는 피 냄새가 심하게 나지. 이걸 사용하는 방법은…….”
성현은 잠자리의 심장을 빈 공간으로 던졌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짐승들이 일제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심장을 먹기 위해 서로 물어뜯고 난리를 부렸다.
“낮은 등급의 마물은 본능에 충실하지. 배가 고프면 짐승끼리도 잡아먹고 피 냄새라면 환장을 해. 그러니까 짐승의 심장은 괜찮은 미끼가 될 거야. 싸워서 이기면 살 수 있어.”
그 말은 한아성뿐만 아니라 겁에 질려 있던 계약자들도 들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하지만 싸우면 살 수 있다.
게다가 포식 중인 짐승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팁과 심장을 미끼로 쓸 수 있다는 노하우까지 들었다.
‘우리도 가능해.’
사람들이 짐승을 향해 달려갔고 곧 엉겨 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물론 죽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다 죽는 것보다 생존율은 높아진다.
사람들을 지켜보던 성현은 고개를 틀었다.
이제 생각했던 일을 해야 한다.
성현의 눈에 담긴 것은 짐승이 쏟아져 나오는 거대한 문…….
그곳에는 끝없는 어둠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회중시계와 알약을 산 이유가 저곳에 있지.’
손목을 틀어 시간을 확인하던 성현이 갑자기 그 문을 향해 달렸다.
‘지금이야.’
난데없는 성현의 행동에 짐승들과 싸우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저 새끼는 뭐 하는 거야?”
“문? 문으로 들어가는 거야?”
마녀 아리도 성현의 행동에 의문을 느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