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 *
성현의 등장으로 세 번째 웨이브는 5분도 걸리지 않고 종료됐다.
그리고…….
-세 번째 웨이브가 종료되었습니다.
짐승이 모두 죽었다.
성현은 짐승의 피를 뒤집어쓴 채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악귀와 같았고 끔찍했다.
모든 사람들이 성현을 두려워하는 게 보인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다.
그런데 성현의 앞으로 한 남자가 터벅터벅 다가갔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서러웠고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아기의 수술비 때문에 존재와 계약한 자다.
마지막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 점수가 모자랐고 죽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성현은 모든 것을 휩쓸며 가차 없이 죽였다.
주변에는 짐승의 피와 살이 튀었고 60마리의 짐승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남자는 성현의 손에 죽은 짐승의 사체에서 심장을 구했고 1마리를 타깃으로 잡아 싸워 이길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성현은 조용히 남자를 바라봤다.
이 가혹한 세계를 살아갈 남자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어떤 것도 없다.
오늘은 살았지만 내일은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테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1등 : 흰 가면(488점)
-최초의 1등을 달성하여 스텟 포인트 3을 보상합니다.
흰 가면은 성현이다.
가장 많은 점수를 얻었고 이 테스트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것도 압도적인 성적으로…….
그리고 성현의 손에 있던 사신의 낫이 스르륵 사라지더니 아리의 손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 낫을 바라봤다.
얼마나 많은 짐승을 죽였는지 지금도 짐승의 더러운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중이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더러워진 낫만 보고 있다.
시스템 메시지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살아남은 모든 분이 테스트에 통과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지금부터 각 존재의 부름에 따라 창고로 이동합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짐승의 사체와 인간의 시체, 땅에 고인 핏물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성현을 비롯해 살아남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없어졌다.
그리고 공원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풀벌레마저 찌륵거리며 우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그 자리에 아리가 없었다면 방금 있었던 일은 모두 허상처럼 여겨졌을 거다.
아리가 자박자박 성현이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를 조용히 바라봤다.
세상을 얼려 버릴 것 같은 서늘한 눈동자로…….
* * *
성현은 존재의 부름에 강제로 공원을 떠났고 어디론가 이동됐다.
주변을 살피자 모든 곳이 하얀 공간, 창고다.
-알약의 효과가 종료되었습니다.
-문지기의 팔찌 효과가 종료되었습니다.
-평균이 2.75가 되었습니다.
아이템의 효과가 사라지자 9를 넘기던 평균이 2.75로 확 낮아졌다.
하지만 아쉬움은 없다.
곧 아이템의 도움 없이 9를 넘길 수 있을 테니까.
‘그건 됐고.’
성현은 시선을 테이블로 옮겼다.
두툼한 종이가 보인다.
계약서다.
지르힐과 유성현, 두 당사자는 아래의 조건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약정하고 계약을 체결한다.
성현은 계약서를 펄럭펄럭 넘겨 봤다.
특별한 내용은 없다.
성현은 다시 테이블을 바라봤다.
날 길이가 6cm인 작은 나이프가 있다.
‘맹세의 나이프.’
이제 나이프로 손가락에 피를 내서 지장만 찍으면 된다.
그럼 계약은 성립되는 거고 성현은 지르힐이 가진 번개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성현은 나이프를 들지 않았다.
계약서조차 테이블에 내려 뒀다.
의외의 행동에 지르힐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리며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왜 내려 두지? 계약은 그대가 원하던 게 아닌가?
성현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테스트 중에 이뤄진 재판 봤지?”
지르힐의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이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스텟을 올렸다는 것도 들었지?”
-들었다.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녀는 성현에게 스텟 올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스텟은 인간이 올리는 게 아니라 존재가 올리는 거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게임 캐릭터와 비슷해.’
인간은 스텟 포인트를 받아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존재가 올려 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야 한다.
올리고 싶지 않은 능력을 올려도 닥치고 따라야 한다.
이곳에서 인간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뜻에 따라야 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는 것은 오직 전투, 또는 유흿거리가 되어 얼굴과 몸매를 꾸미는 것이지.’
하지만 성현은 그 룰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성현이 테이블에 놓인 계약서를 가리켰다.
“계약에 변경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스텟은 내 의지로 올리고 싶다.”
성현의 목표는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와 계약한 지연우의 발뒤꿈치다.
그걸 따라잡으려면…….
‘내 의지가 필요해.’
하지만 지르힐은 못마땅한 목소리를 내뱉는다.
-인간…….
성현은 그녀가 못마땅해할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의 말을 들을 시간이 아니라 설득을 해야 한다.
“꼭두각시는 사양이야.”
인간은 단 1명의 존재와만 계약할 수 있지만 존재는 다르다.
최대 8명의 인간과 계약할 수 있다.
“꼭두각시는 너와 계약한 다른 인간에게서 찾아. 그럼 나 역시 대가를 지급하지.”
대가라는 말에 금빛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렸다.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계속 말해 보라는 뜻이다.
성현이 입을 열었다.
“버림받은 악……. 너를 지칭하는 말이지. 그럼 넌 버려졌다는 것이고 널 버린 대상이 있다는 뜻이지.”
성현은 이미 지르힐을 경험했고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른 척, 추측하는 것처럼 말을 이어 갔다.
“널 버린 대상도 존재, 아마 너보다 더 윗급의 존재겠지. 난 널 버린 대상의 계약자를 모조리 없애 주겠다.”
그 순간 지르힐의 검은 그림자에서 살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인간이 존재의 복수를 대신해 주겠다니…….
주제를 넘어선 말에 지르힐은 분노했다.
온몸이 떨려 왔고 심장마저 오싹거린다.
하지만 성현은 그 살기를 꾹 참으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테스트 중 얻은 팔찌가 찰랑였다.
“난 문지기를 죽였어. 보통의 인간이 문지기를 죽이고 이 팔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성현은 그것을 해냈다.
지르힐의 검은 그림자에서 쏘아지던 살기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계속 말해 보라.
“그 문지기와 마찬가지야. 난 너를 버린 대상과 계약한 인간을 모두 죽여 버릴 수 있어.”
-인간…….
“아직 내 능력에 대한 불신이 있겠지. 그럼 내가 계약 직후에 네 능력을 1% 이상 이해한다면 믿어 주겠나?”
-1%?
존재의 힘은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다.
수십 년간 지르힐과 함께했던 과거의 성현도 고작 30%를 사용한 게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존재와의 계약 직후 인간이 사용한 권능은 평균적으로 0.2%였다.
-그런데 그대가 1% 이상을 사용할 수 있다고?
“어.”
성현이 자신만만하게 답하자 지르힐의 검은 그림자가 심하게 일렁거렸다.
‘1%는 무리라고 생각하겠지.’
처음부터 1% 이상을 사용한 인간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지연우 같은 놈을 비롯한 몇몇은 처음부터 1% 이상의 힘을 펼쳤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전 세계 수백만의 계약자들 중에서 1% 이상을 사용한 인간은 지금껏 10명도 안 된다.
‘지르힐은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야. 나를 놓치기 싫을 테니까.’
성현은 확신했다.
테스트 중 얻은 점수는 역대급이다.
모르긴 몰라도 역사상 상위 100명에는 포함될 것 같다.
‘나와 지르힐의 계약이 엎어지기를 바라는 존재가 많겠지.’
지금은 가계약이다.
계약이 엎어지면 성현은 다른 존재를 찾아 계약할 수 있다.
‘존재는 탐욕스러워.’
그것은 지르힐도 마찬가지다.
눈앞에 있는 가능성 많은 인간을 놓치고 싶지 않을 거다.
이게 높은 점수를 노렸던 이유다.
‘그리고 지르힐은 내가 1% 이상의 힘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할 거야.’
1%란, 평생 정신을 수련한 종교인이나 근육으로 무장한 사람도 불가능한 일.
그것을 성현의 나뭇가지 같은 몸으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좋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예상대로 지르힐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성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첫 번째 고비는 넘겼어.’
이제 1%를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다만 2%는 사용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스텟 포인트의 자유를 얻을 자격이 있지.
“2%?”
-그래, 2%. 자신 없는가?
성현은 자신의 팔다리를 바라봤다.
운동 한 번 하지 않아 나무젓가락 같은 팔다리는 극단적으로 빈약하다.
그런데 2%의 권능을 사용하라니.
몸이 부서져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지르힐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테이블에 놓였던 계약서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촤르륵 펼쳐진다.
그리고 계약서의 가장 마지막의 빈 공간에 ‘특약 : 계약 직후 권능을 2% 이상 사용하게 되면 스텟 포인트 사용의 자유를 준다.’라는 글씨가 적혔다.
-인간, 난 그대의 의견을 최대한 배려했고 존중했다. 이제 그대가 성의를 보일 시간이다.
성현은 입을 꽉 다물었다.
‘젠장.’
존재는 계약 해지 등에 대한 이유로 인간을 죽일 수 있다.
그게 룰이다.
하지만 지르힐은 성현에게 배려와 존중을 건넸다.
명분이 없는 한 따라야 한다.
존재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거절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박살 내는 것.
모든 존재들의 적이 되어 살해당할 수도 있다.
‘이렇게까지 나오다니, 그렇게까지 자유를 주고 싶지 않다는 거지?’
성현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지르힐의 뜻은 잘 알겠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자유에 대한 특약을 넣은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좋다. 계약하지.”
성현은 맹세의 나이프를 손에 쥐고 엄지손가락을 살짝 베었다.
그 피로 계약서에 이름을 적었다.
-축하드립니다. 버림받은 악 지르힐과 정식으로 계약되었습니다.
-버림받은 악 지르힐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금빛이 휘황찬란하게 빛난다든가 하는 거창한 퍼포먼스는 없었다.
하지만 성현은 자신의 몸에 지르힐의 권능이 들어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번개를 사용해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존재…….
성현의 몸에 전기가 돌고 있다.
“시작하지.”
이제는 지르힐의 권능을 2%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먼저, 진통제.’
성현은 이계의 시장에서 꼬마에게 검은 알약을 샀었다.
팔이 잘린 통증 정도는 견딜 수 있다는 진통제…….
-검은 알약을 사용했습니다. 30분 동안 고통의 80%가 상실됩니다.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성현을 빤히 바라봤다.
성현이 슬쩍 웃었다.
“아이템 사용을 금지한 적은 없잖아?”
지르힐의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성현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양반다리를 하고 눈을 감았다.
‘몸에 돌고 있는 전기를 통제해야 해.’
신경을 집중해서 몸에 숨어 있는 그녀의 전기를 찾아내야 한다.
‘단전에 하나.’
정신을 집중해서 찾아낸 전기를 손끝으로 이동시켰다.
파지직!
성현의 손끝에 전기가 일어난다.
-버림받은 악 지르힐의 권능을 0.01% 사용할 수 있습니다.
‘좋아.’
아직은 짜릿한 정도다.
하지만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통증은 대단할 거다.
이를 악물고 견뎌야 한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통제를 잃은 전기가 심장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