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 *
성현의 학교 친구 한아성은 병원에 있었다.
식물인간이 된 여동생의 침대 옆에…….
그녀가 동생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계약했다는 이야기는 했었지? 존재가 말하기를 이계에 가면 ‘소멸의 바다’라는 곳이 있대. 식물인간이 된 인간의 영혼은 대부분 거기에 머문다고 하니까……. 내가 강해지면 거기에 가서 너를 찾을 수 있을 거래.”
한아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음 소식……. 나 존재와 계약한 후에 후각이 예민해졌다고 했잖아. 그런데 맛있는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어, 못 참을 정도로……. 이상하지? 아,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 그냥…… 맛있어 보여. 이 말이 더 이상한가?”
한아성은 계속 쫑알댔지만 식물인간이 된 그녀의 동생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저 누워 있는 게 전부다.
물끄러미 동생을 보던 한아성이 무릎에 올려 둔 문제집을 펼쳤다.
“난 이제 공부할게.”
하지만…… 한아성은 시끄러운 뉴스 소리에 고개를 들어 텔레비전을 바라봤다.
-인제군 천도리에 나타난 D급 던전, 이곳에 레이브 길드원 20명과 고등학생 등으로 이뤄진 짐꾼 30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던전과 길드라는 말에 한아성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도 조만간 저런 곳에 가게 될 테니까.
그래서 관심이 있었는데…….
-던전을 평가한 평가사들이 계약자연맹에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탐사를 하지 않고 거짓 보고서를 올렸으며…….
평가사들은 던전 안을 훑어보고 위험 요소를 판단한 후 돈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죽는 사람도 많다.
들어갔더니 S급이나 등급을 넘어서는 던전이면 그대로 몰살당하니까.
그래서 때때로 거짓을 보고했고…….
-정부와 계약자연맹은 구조대를 보내려 했지만 전투가 벌어졌는지 던전의 문은 이미 닫혀 있었습니다.
던전에서 전투가 일어나면 던전은 문을 닫아 버린다.
그리고 안에서 문을 열 때까지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구조대가 들어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 던전에 들어간 사람은…….
화면에 학생들의 사진이 떴다.
한아성이 눈을 깜빡였다.
‘어?’
같은 학교에 다니는 양아치 오양정의 이름과 사진이 화면에 올랐다.
‘오양정이라고?’
그녀는 문제집을 덮고 병원의 복도로 나갔다.
타박, 타박…… 복도의 끝을 향해 걷는다.
그리고 어느 병실 앞에 서자 낯익은 이름이 걸려 있었다.
그 이름은…… ‘오양정’.
그는 성현에게 두들겨 맞고 수술 후 입원한 상태였다.
‘그런데 던전에 있다고? 말이 안 되잖아.’
한아성은 상황을 확실히 하기 위해 문을 열고 빠끔히 안을 들여다봤다.
오양정이 침대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역시 오양정은 여기에 있어. 그럼……. 저기에 간 사람은 혹시 유성현?’
한아성은 성현이 오양정의 신분증을 빼냈던 것을 기억했다.
* * *
인제군 천도리 던전 1층.
길드원 5명이 쏜 화살이 멧돼지의 몸에 촘촘히 박혔다.
“다음!”
팀장의 목소리에 근접 전투원이 빠르게 달려가 멧돼지의 목에 칼과 창을 쑤셔 넣었다.
꾸웨에에엑!
거대한 멧돼지였지만 다수의 계약자를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계약자들의 거친 공격을 당하며 그 행동이 점차 멎어 갔고 ‘쿵!’ 하고 쓰러져 버렸다.
그때 삐이이익, 토벌대장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10분간 휴식!”
서은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투가 있기는 했지만 멧돼지 몇 마리가 전부였다.
길드원은 물론 짐꾼들의 체력도 멀쩡한 시간인데…….
‘왜 쉬는 거지?’
그녀의 시선이 토벌대장에게 향했다.
토벌대장은 꽤 어렸다.
서른이 안 된 것 같은 외모, 말끔하게 생긴 얼굴에 금테 안경은 꽤 인텔리하게 보였다.
이런 사람은 딱 두 가지다.
정말 뛰어난 능력으로 상급자를 씹어 먹고 저 자리에 올랐거나…….
그의 얼굴을 살피던 서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윤진영?’
그는 여당 당 대표의 아들이다.
그리고 권력자의 아들이 어울리지 않게 토벌대 대장으로 온 이유는 단 하나다.
병역 면제를 받으려고…….
던전 토벌의 업적이 쌓이면 군대를 안 갈 수도 있다.
그래서 난이도가 높지 않은 D급 이하 던전에는 권력자의 아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때…….
“짐꾼 30명, 길드원 19명이 모두 죽는다면…….”
성현의 목소리였다.
서은서의 시선이 성현에게 향했다.
성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전멸의 이유는…… 짐승이 아니라 저 토벌대장일 수도 있겠네요.”
“그게 무슨……?”
“무능한 리더는 최악의 적이죠. 그리고 제 예상이 맞는다면 짐승보다 먼저 죽여야 할 놈…….”
서은서는 성현에게서 오싹한 살기를 느꼈다.
지금 당장 토벌대장 윤진영의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살기…….
성현이 빙긋이 웃었다.
“농담이에요.”
하지만 서은서는 웃을 수 없었다.
‘무슨 살기가…….’
성현은 고등학생이다.
게다가 존재와 계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계약자다.
그런데 폭력적인 살기를 뿜어내고 있다.
전쟁터를 경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살기를…….
‘이게 가능해?’
서은서는 성현을 알면 알수록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토벌대장 윤진영의 앞으로 팀장이 섰다.
윤진영이 병역 면제나 노리는 놈이기 때문에 실제로 병력을 지위해야 할 팀장은 나름 경험자를 배치한 것 같다.
나이는 40대 초반, 얼굴에 그어진 많은 상처는 연륜이 있어 보였다.
그가 윤진영에게 물었다.
“왜…… 휴식입니까?”
갑작스러운 휴식에 팀장도 의아했다.
하지만 윤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이도 한참 어린 놈이 반말로…….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던전 2층으로 가는 문이 저거 아니야?”
윤진영이 가리킨 곳은 바로 앞 작은 산 정상에 있는 검은 문이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6시간 정도 더 걸어야 합니다.”
“6시간? 2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눈 덮인 곳이라 뭐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반대편 능선으로 돌아가는 중이라…….”
윤진영은 고개를 저었다.
“목적지가 바로 앞인데, 빙 돌아서 6시간을 걸어? 그것도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길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 안 해? 팀장 아저씨…… 우리 합리적으로 가자.”
“대장님, 눈은 위험합니다. 선발대의 보고에 의하면 뒤쪽으로 마른 땅이 있다니까…….”
팀장은 간절한 목소리로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윤진영은 한심한 눈으로 팀장을 봤다.
“팀장 아저씨…… 만년 과장이라며?”
“네?”
“진급하고 싶지?”
“대, 대장님…….”
“진급하고 싶으면 내 말 좀 들어 봐. 이 던전이 내가 군대를 면제받는 마지막 조건이거든? 그런데 내 친구 놈…… 전직 대통령 아들 알지? 그놈이 5일 만에 D급 던전을 클리어했대.”
팀장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어 갔다.
하지만 윤진영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던전에 또 올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이번에 4일 찍어 보자.”
“대장님, 5일이면 정말 작은 던전일 테고…… 여기는 딱 봐도 크기가…….”
“그거 알아? 토벌이 끝나면 인사 차원에서 레이브 길드 마스터랑 밥 먹을 거야. 그때 마스터한테 팀장 아저씨가 잘해 줬다고 이야기 할게. 진급 좀 시켜 달라고.”
“저…… 저기…….”
“우리 아빠가 대선 주자 지지율 1위야. 팀장 아저씨 진급 정도는 일도 아니지. 그러니까 4일 찍자. 난 자존심을 지키고 팀장 아저씨는 진급을 하고.”
“대장님!”
“하…… 반대하려는 거야? 내가 좋게 말하니까 이해가 안 돼? 생각 좀 해……. 내가 길드 마스터한테, 아저씨의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자르라고 하면 어떨 것 같아?”
“네?”
“‘던전에 들어왔는데, 정말 능력 없더라…….’라고 하면 어떨 것 같아? 만년 과장을 해고하는 게 어려울까?”
두 사람의 대화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엿 됐다.
윤진영은 던전이 뭔지 모르는 쓰레기다.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기록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말려야 하는 팀장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다.
“알겠습니다. 4일…… 도전하겠습니다.”
윤진영이 빙긋이 웃었다.
“그럼 눈밭 뚫고 직진하자. D급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한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하하하하.”
팀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차피 D급, 무리하면 할 수 있어.’
그가 입을 열었다.
“길드원 집합!”
그의 앞으로 길드원들이 모이는 것을 보며 성현은 몸을 틀었다.
시선은 던전 2층으로 향하는 검은 문에 닿았다.
‘직진을 한다고?’
성현은 이 던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학생들의 사망은 큰 논란이 되었고 그 덕에 이 던전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난쟁이가 숨어 있어.’
이 산에는 온몸이 하얀색 털로 뒤덮인 난쟁이들이 있다.
키는 성인 남자의 허리까지 오는데, 하얀 눈에 매복한 하얀 난쟁이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길드원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산을 오르다가 놈들의 독침에 맞아 쓰러질 거다.
하지만 성현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이 산을 오르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야. 하지만 나에겐 최고의 선택이지.’
성현은 이 던전의 공략법을 알고 있다.
꽁꽁 숨어 있는 던전 주인을 찾아내는 방법까지도…….
* * *
“끄아아악!”
눈동자에 독침이 박힌 길드원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팀장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젠장! 난쟁이가 숨어 있었어! 몸을 낮춰! 낮추라고!”
하지만 늦었다.
난쟁이들은 길드원들을 향해 독침 조준을 끝냈다.
“커헉!”
또 1명이 눈밭에 쓰러졌다.
벌써 길드원 6명이 당했다.
피부색이 시커멓게 변한 것을 보면 독에 중독되어 사망한 거다.
“퇴각! 퇴각이다! 아래로 내려가! 어서!”
팀장은 손까지 흔들며 퇴각을 지시했다.
그런데 윤진영이 팀장의 멱살을 잡고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뭐? 퇴각? 이 멍청한 새끼야, D급 짐승도 못 이겨? 그러니까 네가 삼류인거야!”
팀장이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장님, 일단 산 아래로 퇴각해서 다시 정비한 후에…….”
“그럼 4일 찍을 수 있어? 재정비하면 4일 찍을 수 있냐고!”
“대, 대장님…….”
“꺼져, 새끼야. 넌 해고야.”
윤진영은 팀장을 스쳐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팀장이 다급히 그 뒤를 쫓았다.
“대장님!”
“꺼지라고, 머저리 같은 새끼야. 나 혼자 할 거니까.”
팀장이 윤진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면 안 됩니다!”
“놔, 이 새끼야. 무능한 새끼. D급에도 밀려서 도망치는 병신 새끼. 그러니까 네가 만년 과장으로 있는 거야, 새끼야. 난 너하고 달라, 이 새끼야.”
새끼, 새끼, 새끼…….
팀장은 기분이 나빴지만 꾹 참았다.
윤진영은 유력한 대선 주자의 아들이며 레이브 길드 마스터와 가까운 사이다.
여기서 그가 죽으면 팀장의 인생은 끝이다.
‘애들이 이제 고등학교에 들어갔어.’
한창 돈 들어갈 곳이 많은데 길드에서 쫓겨나면 손가락이나 빨아야 한다.
프리랜서를 할 자신은 없고…….
“다시 올라와!”
팀장은 언덕 아래로 피신하던 길드원들을 멈춰 세웠다.
이유는 하나, 오직 윤진영을 보호하려고…….
그 상황에도 독침은 계속해서 길드원들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멈칫거리는 길드원들을 향해 팀장이 외쳤다.
“빨리 올라오라고, 새끼들아!”
길드원들이 인상을 구기며 다시 산길을 올랐다.
짐꾼들은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성현도 마찬가지다.
멀리 서서 그들의 촌극을 지켜보는 중이다.
‘참사가 일어났던 이유를 확실히 알겠어.’
천도리 던전 참사가 일어난 후 정부와 연맹은 다각도로 사건을 조사했다.
하지만 드러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알고 보니 C급’.
그것으로 모든 핑계를 댄 거다.
책임을 져야 할 윤진영은 대선 주자의 아들이라 건들지 못한 거고…….
‘저곳에서 도망쳤다면, 지금이라도 토벌을 멈추고 던전을 떠났다면 참사는 없었을 텐데…….’
성현의 시선이 윤진영에게서 멎었다.
‘너 때문이었구나.’
길드원을 죽음으로 밀어 넣으면서도 기름진 미소를 감추지 않고 있는 놈.
그놈이 외치고 있다.
“그래, 싸워! 싸우라고!”
그놈을 보는 성현의 눈빛은 점차 차갑게 변한다.
그리고 성현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는 내 계획에서 빠져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