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당장 지연우를 죽이고 싶었다.
찢어 죽여도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꾹 참았다.
성현은 미래를 알고 있다.
지연우 때문에 갓 태어난 아기가 존재에게 바쳐지는 미래.
그 자신을 제외한 구악의 모두가 비참하게 사망하는 미래…….
그 때문에 과거로 돌아왔고 이서아가 소멸됐다.
성현은 지연우를 막아야 할 책임이 있었다.
지금의 분노로 모든 것을 망쳐버릴 수는 없었다.
‘냉정해야 해.’
지연우를 박살 낼 수 있는 확률은 무량대수 중의 하나.
분노를 참지 못하면 모든 계획이 틀어질 거다.
하지만 계획대로 움직이면 나중에 지연우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다.
성현은 낮은 한숨을 내뱉으며 전갈에 꽂혀 있던 철근을 쑥 뽑아냈다.
철근의 두께는 약 4cm, 길이는 2m.
성현이 쓰던 창과 비슷한 크기다.
‘괜찮네.’
철근을 몇 번 휘두른 뒤 시선을 다시 지연우에게 향했다.
놈은 성현을 향해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부터 나라는 사람을 네 머릿속에 각인시켜 주마.’
지연우의 동료가 되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강하거나 도움이 되는 인간이라고 판단되거나.
성현은 아직 강하지 않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보여 줄 수 있다.
성현의 온몸에서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파아아앙!
성현은 전갈의 머리를 밟으며 지연우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지연우의 코앞까지 도달했고 철근을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지연우는 여유 있게 몸을 뒤로 젖히며 성현의 공격을 피해 냈다.
심지어 느긋하게 묻기까지 한다.
“……왜 그러죠?”
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몸을 빙글 틀며 승려의 단검을 꺼내 지연우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그 뒤로도 마찬가지, 성현이 연이어 공격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쉬이이익!
바람 가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놈은 성현의 공격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쉽게 쉽게 피해 냈다.
그리고…….
내려찍는 공격에 지연우는 한 발 뒤로 물러섰고 철근은 바닥에 꽂혔다.
꽈아앙!
성현의 시선이 천천히 지연우를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지연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그 순간, 성현은 바닥에 꽂힌 철근에 집중했다.
‘전기를 쓸 수 있어.’
성현은 지연우를 상대하는 동안 육체적인 공격만 이어 갔다.
그 시간 동안 미약하지만 라이트닝 볼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전기가 충전되었고 바닥은 빗물에 젖어 있었다.
‘라이트닝 볼.’
빗물을 타고 광범위한 공격이 이뤄졌다.
파지지직!
지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죽일 정도의 파괴력은 없었지만 ‘찌릿’은 했을 테니까.
“큽.”
지연우가 몇 발을 물러섰다.
성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연우의 심장을 향해 철근을 찔러 넣었다.
완벽한 찬스였다.
지연우는 균형을 잃었고 무너졌고 이 거리에서 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지금껏 느긋하던 지연우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그리고, 꽈아아앙!
성현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바닥에 처박혔다.
“쿨럭!”
지연우가 허공으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화르르륵, 손에 불길이 치솟았다.
대상이 잿더미가 될 때까지 타오른다는 지옥의 불길…….
시뻘건 불꽃이 꿈틀대며 성현을 향했다.
저게 몸에 닿으면 끝이다.
하지만 성현의 표정은 담담했다.
‘넌 날 죽일 수 없어.’
곳곳에 CCTV가 깔려 있었다.
짐승과 싸우던 계약자가 치고받는 모습은 꽤 가십거리가 될 거다.
게다가 그 대상이 지연우라면 더욱 더…….
‘그리고 지금쯤 느꼈지? 난 아직 호칭도 못 얻은 초짜다.’
성현의 예상대로였다.
지연우는 성현이 가진 힘이 약한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전갈을 잡았다고?’
그는 공격을 멈춘 채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성현을 바라봤다.
이 모든 것은 모두 성현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성현의 어머니는 달랐다.
모자를 쓰고 바닥에 처박힌 남자가 성현인지 아닌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놀란 눈을 뜨고 몸을 움직였다.
“서, 성혀……!”
하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잠깐만요.”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
지연우와 어머니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서은서였다.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렸고 지연우의 앞으로 다가온 그녀가 입을 열었다.
“페이트 길드의 인사 팀장 서은서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우리 길드의 사람이에요.”
명함을 받은 지연우가 다시 그녀를 향했다.
그런데 그 눈빛이 서늘해졌다.
“페이트 길드?”
“네.”
“보통의 계약자라면 모를까…… 길드에서 날 공격했다면 말이 조금 달라지는데…….”
지연우는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순수 연맹의 사람이다.
연맹과 길드는 항상 힘겨루기를 해 왔고 지금의 공격은 암살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페이트 길드는 국내 5대 길드에 포함되지만 독을 다루는 곳이다.
정의를 표방하는 지연우와는 항상 반대되는 지점에 서 있었다.
지연우가 명함을 툭 떨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해명해 줄 수 있겠나?”
그의 눈에서 압도적인 살기가 뿜어졌다.
그 순간 서은서의 옆으로 복면인 서른 명이 스르륵 나타났다.
복면인…… 그들 하나하나가 실력자다.
하지만 지연우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그들을 도발한다.
“그동안 페이트 길드의 가드가 얼마나 강할지 궁금했는데…… 오늘 확인해 볼 수 있을까?”
분명 느긋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복면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낮추고 싸울 준비를 갖췄다.
“그만!”
서은서가 손을 들어 그들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면 기세에 밀려 튀어 나가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서은서의 눈동자가 다시 지연우에게 향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혔다.
“이 사람의 공격은…… 죄송합니다. 그런데 독에 중독된 상태였습니다. 제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독?”
지연우의 시선이 다시 성현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니 몸이 시커멓다.
난쟁이의 독침에 맞은 거다.
지연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서은서가 계속 말을 이었다.
“해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상은 나중에 해 드릴 테니 여기서 그만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은데, 모자와 마스크를 벗겨 줄 수 있겠나?”
“불가합니다. 이곳은 민간인들이 있습니다.”
“불가라…….”
그런데 성현을 살피던 지연우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가 천천히 자신의 목을 만져 봤다.
‘이런…….’
목에 있어야 할 목걸이, 그러니까 소환석이 없어졌다.
그것은 성현의 손에 쥐여 있었다.
지연우가 천천히 허리를 굽히고 성현의 손에 쥐인 목걸이를 빼앗았다.
그때 성현의 목소리가 작게 흘렀다.
지연우만이 들을 수 있도록…….
“소환석…….”
“어, 어떻게……?”
소환석은 지연우가 최초로 발견한 거다.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데…….
지연우의 눈이 떨려 왔고 성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곧…… 다시 봅시다.”
그게 끝이었다.
성현은 그대로 의식을 완전히 잃었다.
지연우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허리를 폈을 때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돌아와 있었다.
다시 평온하게…….
그가 서은서를 향했다.
“가라. 보내 주지.”
동시에 공간을 압박하던 지연우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러자 심각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복면인들도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서은서가 고개를 틀어 복면인들을 향했다.
“데려가세요.”
복면인들이 성현을 둘러업고 그 자리를 떠났다.
서은서의 시선이 지연우에게 향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은서는 떠났다.
복구 작업반이 나타났고 정부 요원들이 전갈을 수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연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손에 쥔 목걸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 목걸이를 빼 간 것만으로도 충격인데, 소환석을 알고 있다고?’
지연우의 시선이 성현이 떠난 곳으로 옮겨졌다.
* * *
요양 병원에서 가까운 호텔 VVIP 객실…….
통유리로 된 창문에 빗물이 주륵주륵 흐르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빠진 서은서의 옆으로 무령이라 불리는 복면인이 다가왔다.
“곧 깨어날 것 같다고 합니다.”
성현의 상태는 꽤 심각했었다.
독에 중독되었고 멧돼지에 당했고 전갈의 꼬리에 맞았으며 집게에 살이 찢어졌다.
다행히 페이트 길드의 의료진이 손쓴 덕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서은서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아까 지연우하고 싸웠으면 누가 이겼을까?”
“아가씨는 다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랬겠지. 위험해지면 너희가 날 데리고 피했을 테니까. 그런데 내 질문은 누가 이겼을 거냐는 거야. 너희 30명과 지연우…….”
무령의 대답은 침묵이었고 서은서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럼 다른 걸 물어볼게. 지연우는 우리나라에서 몇 번째로 강할까?”
랭킹이라는 게 존재했다.
그리고 국내 100위에 들면 랭커라 불린다.
하지만 그 순위가 100% 강함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싸움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더 위험한 짐승을 잡았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순위였으니까.
현재 지연우의 랭킹은 34위.
하지만 무령의 평가는 달랐다.
“마주해 보고 느꼈습니다. 열 손가락 안에는 들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페이트 길드의 서문길 마스터와 비견될 정도다.
서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지연우…… 적으로 두면 안 될 사람이네.”
잠시 더 생각을 이어 가던 서은서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성현이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령의 모습은 스르륵 사라졌고 방에 있던 의료진이 허리를 굽혔다.
“잠시 후면 일어날 겁니다.”
“고생하셨어요.”
“나가 있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십시오.”
의료진이 방을 벗어났다.
서은서의 시선은 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잠들어 있는 성현에게 향했다.
‘주말에 할 일이 있다고 했던 게 이거였어? 짐승이 나타날 것을 알고?’
성현은 자신의 능력이 ‘예지’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정의 내렸다.
성현의 예지 능력이 거의 100%에 육박한다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비의 날갯짓으로도 시시각각 변하는 게 미래니까.
그런데 100% 예측할 수 있다면…….
‘반드시 내 옆에 둬야 해.’
그녀의 결심이 더 확고해지고 있었다.
“끄음.”
성현이 몸을 틀었다.
등이 보였다.
붕대로 감고 있지만 멧돼지의 어금니에 박혔던 처참한 상처가 드러났다.
그 상처를 보던 서은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갑자기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성현을 오랫동안 본 것은 아니지만 뱀 소굴에서도 그랬고 던전에서 에우제서스를 잡았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성현은 자신의 능력으로 잡을 수 없는 짐승과 목숨을 걸고 싸웠다.
언제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싸웠다.
‘대체 왜……?’
순간, 성현의 등이 외롭고 쓸쓸하게 보였다.
어린 나이에 지독한 사연을 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거야?’
그때…… 성현의 눈꺼풀이 떨리더니 천천히 떠졌다.
깜빡깜빡, 초점을 맞추던 성현을 향해 서은서가 입을 열었다.
“……정신이 드세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성현이 다급히 일어섰다.
“휴대폰!”
“네?”
“제 휴대폰요, 어디 있죠?”
서은서는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을 건넸고 성현은 말없이 화면을 바라봤다.
부재중 통화가 32통.
모두 어머니다.
심지어 3분 전에 온 것도 있다.
“하…….”
성현의 입에서 긴장된 한숨이 흐르더니 미친놈처럼 낄낄낄 웃기 시작했다.
‘살아 계셨구나.’
지난 삶에는 돌아가셨던 어머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사시게 될 거다.
이제는 성현도 효도란 것을 하고 싶었다.
성현은 먹먹한 가슴을 다스린 후 통화 버튼을 누르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
-어디야? 전화는 왜 안 받아!
“독서실이에요. 무음으로 해 둬서 몰랐어요.”
-독……서실?
믿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의심으로 가득했다.
-일단 지금 바로 집으로 와, 빨리.
“알았어요.”
성현이 휴대폰을 내려 두자 서은서가 농담을 던졌다.
“독서실의 침대가 참 푹신하죠? 깨끗하기도 하고요.”
“그러네요.”
“그런데…… 얼굴의 상처는 어쩌려고요?”
몸은 옷으로 가릴 수 있지만 얼굴은 어렵다.
모자를 계속 쓰고 있을 수도 없고.
성현이 고개를 틀어 거울을 바라봤다.
깊은 상처는 없지만 쓸리고 찢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이 정도는 커스터마이징으로 해결되겠죠.”
잠시 후…….
성현은 가져왔던 여벌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 호텔의 현관 앞에 섰다.
서은서가 문에 비스듬히 선 채 입을 열었다.
“다음 주, 기억해 주세요.”
클럽 샤를의 일을 잘 해결해 달라는 말…….
그 일을 잘 해결해 주면 오늘 일을 빚으로 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성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문을 열었다.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섰고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를 빠져나가며 성현은 뭔가를 찾는 듯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손님의 얼굴은 물론이고 지나치는 직원까지도…….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없나?’
그 순간, 성현은 뒤에서 느껴지는 오싹한 살기를 느꼈다.
지금당장 목이 잘려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살기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설 정도였다.
그런데 성현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가식적인 새끼가 안 쫓아왔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성현의 예상대로였다.
뒤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너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지연우였다.
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이야기할 게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