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 * *
요양 병원에서 멀지 않은 어느 골목…….
한아성이 얼굴을 무릎에 포갠 채 앉아 있었다.
먹구름은 지나갔지만 비에 맞은 그녀는 바들바들 떨고 있다.
추워서가 아니였다.
그녀는 지금 겁에 질려 있었다.
‘내, 내가 사람을…….’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지금은 작고 하얀 손…….
하지만 그녀의 손은 덩치 큰 주열호를 한 번에 움켜쥐었다.
손바닥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입까지 있었고…….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던 그녀가 귀를 막았다.
‘싫어…… 싫어!’
계속해서 아드득아드득, 뼈 갈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때 존재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왔다.
-넌 어쩔 수가 없었다.
-네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유성현은 죽었을 거다.
-유성현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유성현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필요하니까.
한아성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쩔 수 없었어. 성현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어. 그런 거야…….’
같은 시각.
대짐승 진압 부대 C117대대.
한아성의 아버지 한명철 중령은 팔짱을 낀 채 100인치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요양 병원에 있었던 CCTV 영상이었다.
모자를 쓴 성현이 전갈과 싸우던 중 지연우가 나타났다.
그런데 모자를 쓴 누군가가 또 등장했다.
한아성이었다.
그녀가 멧돼지를 움켜쥐었고 성현과 대화를 나눈 뒤…….
“스톱.”
화면이 멈췄다.
한아성이 몸을 틀어 난쟁이를 향하는 순간이었다.
한명철 중령이 손가락으로 한아성을 가리켰다.
“확대해 봐.”
딸인 것 같아서가 아니다.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모자를 썼고 신체 변형이 일어나 외모가 바뀐 한아성을 알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CCTV의 화질이 썩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확대하는 이유는…….
“미친…….”
한명철 중령은 소름 끼치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껏 대짐승 진압 부대에서 일하며 수많은 계약자들을 만나 봤지만 이런 부류는 몇 없었고 언제나 위험했다.
그러니까 사냥을 즐기는 놈들…….
화면 속의 한아성이 그랬다.
모자를 써서 외모는 알 수 없었지만 드러난 그녀의 입술은 활짝 웃고 있었다.
정말 즐거운 듯이…….
한명철 중령이 불쾌감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체크해 둬.”
“알겠습니다.”
영상이 다시 이어졌다.
한아성의 손이 움직이자 난쟁이는 불쌍할 정도로 집어삼켜지기 시작했다.
CCTV 영상이었기 때문에 소리는 녹음되지 않았다.
하지만 영상을 보는 모든 사람은 그 소리를 예상했다.
한아성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꽈드득! 꽈드득!
잔혹함이 만들어 낸 소리가 울려 퍼졌을 거다.
* * *
-커스터마이징?
“어.”
창고였다.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묘하게 웃더니 성현의 주변을 빙글 돌며 살폈다.
-감정이 메마른 줄 알았는데 외모에 관심이 있었구나? 그래, 그대의 존재로서 커스터마이징을 선물해 주겠다. 무엇을 원하는가? 하얀 피부? 큰 눈? 내 생각엔 키를 좀 키우고 어깨를 좀 넓혔으면 하는데…….
“됐고. 흉터나 없애 줘.”
-뭐라?
“흉터만 없으면 돼.”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찌푸려졌다.
-그대여…… 커스터마이징에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 줄 아는가?
존재도 무엇인가를 하려면 그들의 돈을 사용해야 한다.
커스터마이징에 필요한 돈은 30골드, 약 3억 원…….
돈이 썩어 나는 존재를 제외하면 30골드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 성현은…….
“아, 여드름도 좀 없애 줘.”
외모에는 별 관심 없었다.
하지만 지르힐도 만만치 않았다.
-그대의 흉터와 여드름을 없애고 키와 어깨를 만져 주지.
“지르힐?”
지르힐의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한창 성장기다. 조금 커지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리고 난 그대의 존재다. 이 정도는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잠시 생각하던 성현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탁할게.”
대다수의 존재는 계약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 지르힐은 달랐다.
대부분 성현의 의견을 따라 줬다.
그래서 이 정도는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허락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곧 성현의 온몸이 밝은 빛으로 감싸졌다.
커스터마이징이 시작된 거다.
지르힐의 손길에 따라 성현의 키와 덩치가 변해 갔다.
물론 마법처럼 키가 2~3m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진 성장판의 한계를 최대한 키우는 거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성현의 몸을 감싸던 밝은 빛이 스르륵 사라졌고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만족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키와 어깨는 한 달에 거쳐 서서히 커지게 했다. 185~188까지 클 것 같은데, 마음에 드는가?
성현은 거울을 바라봤다.
키와 어깨는 여전히 관심 밖이었고…….
‘흉터와 여드름은 사라졌네.’
성현이 입을 열었다.
“땡큐.”
이제 지르힐이 할 일은 끝났다.
그런데 창고를 벗어나려던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멈칫거리더니 성현을 향했다.
“왜? 무슨 일 있어?”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어떤 거?”
-……혹시 에느가인을 알고 있는가?
“에느가인? 그게 뭐지?”
-모르면 됐다.
존재들에게 전해져 오는 예언이 있다.
세상이 태엽처럼 되돌아갈 때 시간에 어긋난 자, 시간에 있어서는 안 될 자가 돌아오니 살육의 시간이 될지어다.
그자는 맨 처음 창조된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 이 세상에 없어야 할 사람과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에느가인을 찾으리라.
지르힐은 성현이 ‘시간에 있어서는 안 될 자’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지르힐이 떠난 뒤…….
성현은 창고에 서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는 죽여야 할 대상의 이름이 빽빽이 적혀 있다.
지연우와 놈의 조력자들.
성현이 손가락을 움직여 이름 하나를 툭 건드렸다.
그 이름은 서은서의 오빠이자 클럽 샤를을 공격하는 배후, 서준식이었다.
그는 서은서와의 후계 싸움에서 비참하게 패배한 후 페이트 길드를 떠나게 된다.
향한 곳은 암살자 집단이었고 그곳은 지연우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곳이었다.
‘지연우의 지시를 받고 죄 없는 사람을 숱하게 죽였어.’
그중에는 정치인과 종교인도 있었으며 죄 없는 민간인, 심지어 어린 중학생도 있었다.
성현의 손가락이 서준식의 이름을 툭툭툭 일정한 리듬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곧 만날 수 있겠어.’
클럽 샤를의 일을 끝내면 놈은 모습을 드러낼 거다.
아니, 드러내게 만들 거다.
그가 성현의 앞에 서면…….
‘지연우 사단의 첫 타깃은 너야.’
잠시 후, 창고를 나온 성현은 집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았지만 쉽게 열지 못하고 주저했다.
커스터마이징을 통해 상처까지 없앴지만…….
‘어쩌지?’
호텔에서 통화했을 때 어머니는 성현이 계약자인 것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병원에서 봤겠지?’
어떤 변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성현은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잡아떼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걱정하던 일은 없었다.
식사를 차리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공부 열심히 했어? 밥 먹어야지. 된장찌개 했어. 먹자.”
어머니는 병원에서 짐승을 마주친 것도 그곳에서 성현과 비슷한 사람을 본 것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식사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 둔 채 식사만 하신다.
혹시라도…….
“너 계약자니? 병원에 있던 게 너야?”
질문했을 때…….
“네.”
……라는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 거다.
성현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은 말씀드릴 시기가 아니다.
지금은 행복한 생각만 하셨으면 좋겠다.
그게 새롭게 얻은 인생을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맛 어때?”
“맛있어요, 정말로.”
* * *
며칠 후…….
실종된 주열호를 찾기 위해 경찰이 학교를 드나든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일 없이 흘러 지나갔다.
그리고 페이트 길드 사옥.
서은서는 자신의 사무실에 있었다.
창밖을 보며 초조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은 클럽 샤를과 상대 클럽이 협상을 하는 날이었고 성현은 그 자리에 가드로서 참석한다.
‘잘될 거야…….’
성현은 예지 능력이 있다.
그런 성현이 이번 일을 수락한 것은 분명히…….
‘유성현은 자기가 가서 이기는 미래를 본 거야. 그러니까 수락했겠지.’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그 시각, 전철에 타고 있던 성현은 휴대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서은서였다.
“네, 유성현입니다.”
-오고 있나요?
“10분 후쯤 내릴 것 같아요.”
-……고생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긴장되어 있었다.
몇 가지 당부의 말을 들은 뒤 성현은 통화를 종료했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오늘 협상 자리에 계약자는 동반되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연맹에 등록된 계약자는 나올 수 없다.
그러니까 성현처럼 등록되지 않은 사람이 해결사로 함께할 거다.
‘누가 나올까?’
성현은 상대를 기대하며 품에 손을 넣었다.
이계 시장에서 사 온 잡다한 물건들이 만져졌다.
샤를의 겉모습은 평범한 클럽이다.
밤이면 젊은 사람들이 몰려와 춤을 추고 노는 곳.
하지만 사실은 세상의 정보를 모으는 조직.
그곳의 3층, VIP 룸에 샤를의 대표와 이사 3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10분 남았습니다.”
10분 후면 상대 클럽의 주요 인물이 이곳으로 찾아온다.
대표가 입에 담배를 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솔직해지자. 서은서하고 서준식…… 누구의 손을 잡는 게 좋겠냐?”
“대표님…… 그래도 의리라는 게 있는데…….”
“미친놈아, 우리는 정보 상인이야. 서은서와는 계약관계지 의리가 어디 있어?”
“신용은 있어야죠.”
“미치겠네. 이 새끼야, 서은서가 의리를 지킬 것 같아? 그런 사람이 해결사가 온다는데 우리만 덩그러니 두겠어? 우린 지금 단두대에 목 내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밖에 한 사람 왔잖아요.”
대표가 답답하다는 듯 담배 연기를 뻑뻑 내뿜었다.
“못 들었어? 교복 입고 있었대. 고등학생이야.”
“……고등학생이요?”
“그래, 우린 버림받은 거라고. 형제 싸움에 우리 등만 터지게 생겼다고!”
그들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성현은 그들이 제공한 양복으로 갈아입고 복도로 나왔다.
문에 기대서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은서를 배반해야 하네 어쩌네…….
성현은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서은서도 외롭겠네…….’
그녀는 미래에 페이트 길드의 마스터가 된다.
하지만 그걸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의 그녀는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였다.
‘뭐…….’
성현이 해야 할 일은 내부 단속이 아니라 상대를 짓밟는 거다.
시선을 틀어 클럽 내부를 둘러봤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와 보네.’
성현은 고등학교 졸업 후 곧장 공장에서 일했었다.
공부도 잘 못했고 부모님도 안 계셨으니 대학은 꿈도 못 꿨었다.
그때는 먹고사는 게 유일한 목표였으니까.
그러다가 군대를 제대하고 늦은 나이에 존재와의 계약.
이후에는 쉬지 않고 싸움만 했다.
그래서 클럽에 오는 것은 생각조차 못 해 봤다.
‘이번에는 한번 와 봐?’
지금은 극단적일 정도로 적막하지만 밤이면 쿵쾅쿵쾅 귀를 찢을 것처럼 시끄러운 노래가 울리는 곳이다.
그게 어떤 분위기인지 조금은 궁금했다.
그때…….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계단을 뛰어오더니 VIP 룸의 문을 열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와, 왔습니다.”
성현의 시선이 계단을 향해 틀어졌다.
10여 명의 사람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
걸을 때마다 얼굴이 출렁댈 정도로 비만인 남자, 기름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입에 담배를 무는 남자 등등.
그런데 성현의 시선은 그들의 가장 뒤에 선 사람에게서 멎어 있었다.
키가 2m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덩치, 한눈에 봐도 엄청난 힘의 소유자…….
‘서, 설마……?’
성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가운 얼굴, 구악의 동료였던 이태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