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몇 번을 다시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저 얼굴에 주름과 상처를 새기면 정확히 이태산이다.
‘……미등록 계약자로 숨어 지낸 적이 있다고 하더니 이러고 살았던 거야?’
성현은 이태산의 과거를 잘 몰랐다.
계약자들의 암묵적인 룰 중의 하나.
‘상대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대부분의 계약자에게 과거는 말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니까…….
그래서 구악의 멤버들이 어떤 사연이 갖고 있는지 잘 몰랐다.
그때 성현의 머릿속에 이태산이 유언처럼 내뱉은 마지막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거지처럼 살지 말고 돈 좀 많이 벌어요. 내가 칭얼댈 때 맛있는 것도 좀 사 주고!
죽었던 놈이 회춘해서 돌아다니고 있다니…….
성현은 반가운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참으려 해도 저절로 웃음이 터지고 있었다.
‘살아 있었구나……. 그런데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도 노안이야.’
이태산은 성현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런데 덩치 때문인지 20대 중반처럼 보였다.
조금 더 과장하면 30대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성현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반갑다.’
하지만 그 말은 속으로만 내뱉어야 했다.
이태산은 성현을 모른다.
게다가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입장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거다.
지금은 죽일 듯이 싸워야 할 적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성현은 다시 구악을 결성할 생각은 없었다.
웬만하면 구악의 멤버들을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자칫 성현의 운명에 말려 버리면 이번에도 비참하게 죽을 수 있어서다.
성현은 동료가 내지르는 그 비명을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아라.’
그사이 모든 사람들이 VIP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스무 명이 앉아도 넉넉할 것 같은 거대한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샤를의 대표와 이사들이 호탕한 척 웃었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하하하.”
상대 클럽의 관계자들도 마찬가지다.
크게 웃으며 서로 악수했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물론 그들의 인사는 형식일 뿐이다.
샤를의 대표는 악수를 나누면서도 저들이 데려온 해결사들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누구를 데려온 거냐…….’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이태산의 얼굴에서 멎었다.
동시에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저, 저 새끼는……!’
그는 정보 상인이었고 이태산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이태산은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미등록 계약자, 아직 그의 나이는 모르지만 그가 뒷골목의 해결사로 일한 지 1년…….
혼자서 칼을 든 조직을 궤멸시키며 유명세를 탔고 서울 동부 지역의 유명한 킬러 ‘강’을 죽이며 이 지역 해결사 베스트 5에 등극했다.
‘저놈은 프로 해결사야. 아직은 곰 새끼지만 언젠가는 거물이 될 놈이라고!’
대표는 좁은 쇠창살 안에 곰과 함께 갇힌 기분을 느꼈다.
도망칠 곳도 없다.
괜한 반항을 했다가 곰의 이빨에 살점이 뜯겨 나갈 거다.
대표의 눈동자가 천천히 성현에게 향했다.
이태산에 비하면 참 허접해 보였다.
‘반면에 저놈은 고등학생……. 답은 결정 났어.’
대표는 이사들에게 눈빛을 보냈다.
‘계획대로 간다.’
이사들이 입술을 비틀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괜히 버텼다가 죽을 수도 있다.
목숨은 소중한 것이고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
대표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앉으시죠.”
양측의 관계자 8명이 마주 앉았고 가드로 온 사람들은 그 뒤에 섰다.
대표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최근 클럽 샤를과 에라트의 직원들이 자주 부딪치고 있습니다. 일단 저희 의견은 이벤트 날짜를 달리해서…….”
이태산이 무섭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손바닥을 빌면서 샤를의 모든 것을 내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서은서에게 죽고 말 거다.
서은서에게 붙어도 죽고 저쪽에 붙어도 죽고!
그래서 이들이 결정한 방법은 뻐팅기는 척하면서 간이고 쓸개고 모두 내주는 것이었다.
그럼 서은서에게 버텼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세상은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짧은 머리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협상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지시를 내리러 왔어요.”
“지, 지시요?”
“정확히는 명령이라고 하죠.”
“이, 이봐요!”
짧은 머리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대표님…… 이 클럽에 관계된 모든 사람을 싹 다 죽일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말리더라고요. 50명이 죽어 버리면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요. 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경찰이 눈감아 줄까? 그리고 떠올렸죠. 대표님과 이사님만 죽이면 어떨까?”
조폭 영화처럼 전쟁을 일으켜 모두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이 커지면 경찰이 움직인다.
공권력의 눈 밖에 나면 이들의 조직이 와해될 수도 있다.
그래서 놈들은 협상장을 만들었다.
대표와 이사를 한곳에 몰아넣고 죽이기 위해…….
짧은 머리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경찰도 좋아하더라고요. 100명 죽일 것, 4명만 죽여서 고맙다는 인사도 받았습니다.”
“이익!”
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적당히 밀당을 해 주면 알아서 바짝 엎드리려고 했는데 시작부터 강하게 나오고 있다.
그럼 놈들과 맞부딪혀야 한다.
처음부터 비굴하게 피했다는 소리가 서은서에게 들어가면 정말 죽는다.
짧은 머리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우리 직원 1명을 이 클럽의 실장급으로 넣어 두겠습니다. 그리고 주류나 음료도 우리 쪽에서 받으시고…….”
“저, 저기…….”
짧은 머리 남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대표를 쏘아봤다.
“한 번만 더 내 말을 끊으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일 겁니다.”
그 말과 동시에 이태산이 한 발 앞서 나왔다.
가진 존재감만으로 대표는 마른침을 삼켰다.
짧은 머리가 빙긋이 웃으며 대표의 앞으로 서류를 한 장 놓았다.
“좋은 내용이니까 읽어 볼 필요도 없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대표는 서류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불공정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건 공짜로 이 클럽을 꿀꺽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쩌지?’
대표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했지만 막막하다.
저들의 불법을 고발하기엔 이들도 저지른 죄가 많고…….
하지만 대표는 결정해야 했다.
여기서 죽느냐 서은서에게 죽느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억지 같은데요.”
들려온 곳은 뒤!
대표는 물론이고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흐른 곳으로 시선을 틀었다.
성현이었다.
그리고 성현을 본 대표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저놈 때문이야! 서은서가 괜찮은 놈을 가드로 넣어 줬어도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거야!’
대표는 정보 상인이다.
그런데 성현의 얼굴을 처음 봤다.
그것은 성현이 약하다는 뜻.
“넌 왜 나서! 입 닥치고 있어!”
대표가 부랴부랴 말렸지만 성현의 시선은 이미 이태산에게 닿아 있었다.
그리고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끄럽지 않나?”
이태산의 눈이 찌푸려졌고 성현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딱 봐도 이 양아치들이 너를 믿고 억지를 부리는 것 같은데. 이런 새끼들을 돕는 것, 안 부끄럽냐?”
“뭐?”
대표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성현을 보며 미쳤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이태산이니까!
하지만 성현은 더욱 비꼬고 있다.
“아니지……. 양아치나 돕고 사는 거 보니까, 덩치만 컸지 사실 약한 거 아니야?”
“조용히 해라.”
성현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안 조용하면 어떻게 할 건데? 덩치만 큰 놈들이 실속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잖아?”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나불거려라.”
“죽는 것은 너 같은데? 난 너와 달리 강하거든.”
이태산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계속 까불면 죽이겠다는 협박용이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진짜였다.
기세에 눌린 샤를의 대표와 이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고 상대 클럽의 관계자들은 낄낄낄 웃기 시작했다.
“대표님…… 저놈 입 좀 닥치게 하세요. 저놈 때문에 대표님하고 이사님들도 싹 죽겠어요. 하하하하!”
대표가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성현을 향했다.
그런데 성현이 품에 손을 넣고 있다.
대표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총인가? 그래, 서은서가 평범한 고등학생을 아무 준비도 없이 들여보낼 리 없지! 역시, 서은서!’
계약자들이라 해도 살점이 있는 인간이다.
높은 수준의 계약자가 아니라면 총에 맞고 피를 흘리며 죽을 수도 있다.
‘계약자를 죽이려면 평범한 권총은 아닐 테고…… 뭐지?’
그런데…… 성현이 품에서 꺼낸 것은 동전만 한 돌멩이였다.
조금은 긴장하고 있던 이태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새끼! 돌을 던지겠다는 거냐!”
“이게 평범한 돌멩이로 보여?”
물론 아니었다.
[부싯돌]
-비에 젖은 모험가가 몸을 녹이기 위해 쓰던 것.
-던지면 파이어 볼이 된다.
-사용 횟수 1/1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당하는 거야.”
성현은 돌멩이를 머리 뒤로 툭 던졌다.
동시에 돌멩이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덩이로 변했다.
“저, 저 새끼가 뭐 하는 거야?”
모두가 당황했다.
사람을 향해 던진 것도 아니고 허공이라니…….
곧 시끄럽게 사이렌 소리가 울렸고 스프링클러가 터졌다.
쏴아아아아!
“앗, 차가워!”
사람들의 몸이 물에 젖는 순간이었다.
성현은 테이블을 밟고 파아아앙, 이태산을 향해 튀어 나갔다.
순식간에 다가온 성현이 이태산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이태산은 눈을 부릅떴다.
피할 시간은 없었다.
그럼 방어다.
이태산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감싸는데…….
성현은 주먹을 날리지 않았다.
‘그건 페이크였다.’
대신 성현의 주먹은 이태산의 어깨를 콱 잡았다.
“잘 가라.”
동시에 성현의 손에서 전기가 솟아났다.
파지지직!
물기에 젖은 이태산의 전신은 전기에 휘감겼다.
“끄으으읍!”
이태산이 비틀거렸다.
성현은 정신을 못 차리는 그를 향해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열었다.
“형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이다. 앞으로는 착실하게 살아라.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먹고 아버지께 효도하고.”
그 주먹이 그대로 이태산의 인중을 가격했다.
뻐어억!
이태산의 얼굴이 튕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성현은 멈추지 않았다.
손에 라이트닝 볼을 만들었고 이태산의 얼굴에 처박았다.
꽈아아앙!
그 거대한 덩치가 붕 떠올라 벽에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그게 끝이었다.
이태산은 꿈틀거릴 뿐 움직이지 못했다.
실내는 얼음이 쏟아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상대는 물론이고 샤를의 관계자도 마찬가지…….
‘이, 이태산이…… 저렇게 허무하게……?’
‘도대체 저 괴물은 누구야?’
성현이 고개를 틀어 서늘한 시선으로 짧은 머리를 쏘아봤다.
그리고 전기를 일으키며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전기가 바닥에 닿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진 물 때문에 공간 전체는 모두 젖어 있었다.
전기는 물기를 통해 이동할 테고 모두 감전될 게 분명하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이태산도 쓰러져 있는데 평범한 사람인 그들이 감전되면…….
단체로 죽는다.
상대 클럽에서 찾아온 짧은 머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협상해야죠, 협상…….”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명령’을 내리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