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31화 (31/252)

31화

* * *

서울 강남.

경기도 광주의 던전이 나타나기 전날.

성현은 계약자 연맹에 와 있었다.

등록을 위해서다.

“절차는 간단해요. 채혈기로 손가락을 찔러 감정의 돌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릴 겁니다.”

성현의 앞에는 형광 녹색의 돌이 있었다.

이것이 감정의 돌이었다.

안내원이 계속 말했다.

“감정의 돌은 피를 흡수한 후 색이 변하죠. 그 색의 변화에 따라 유성현 씨의 계열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유성현 씨의 계열은 연맹의 2급 기밀로 관리될 겁니다.”

“…….”

“그런데 계약 후 한 달이 지났다면…… 미등록 기간에 따라 돌의 색은 검정에 가깝게 변할 겁니다. 그리고 그 색에 따라 벌금으로 끝날 수도 있고 조사를 받을 수도 있죠.”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성현은 묵묵히 안내원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내용의 고지는 안내원이 전해야 하는 필수 업무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로 등록되면 홈페이지에 이름이 올라갑니다. 당연히 계약자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발급받은 사람만 확인할 수 있으며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럼 궁금하신 점이 있습니까?”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러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안내원은 채혈기를 들고 성현의 가운뎃손가락을 쿡 찔렀다.

피 한 방울이 떨어졌고 감정의 돌은 형광 녹색에서 검정색으로 변해 갔다.

완벽한 검정색이 아니라 빛을 잃은 녹색, 이것은 계약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다는 뜻이었고…….

성현이 입을 열었다.

“학생이라 연맹에 오는 게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정도 늦었네요. 벌금 내죠.”

일부러 늦게 온 거다.

한 달이 지나면 평범한 감정의 돌로는 계열을 알 수 없으니까…….

안내원이 입을 열었다.

“계열을 알아야 하니까 다른 기기를 가져오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 그럴 필요 없어요.”

“네?”

성현이 손에서 전기를 파직거렸다.

“제 계열은 전기거든요.”

번개와 전기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안내자는 계약자의 계열이 2급 기밀로 관리된다고 말했지만 바꿔 말하면 그 이상의 관리자는 모두 볼 수 있다는 뜻…….

성현은 자신의 계열을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그리고 강남의 한 커피숍…….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꽉 차 있었다.

그런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에 쏠려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이 많은 강남에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외모…….

서은서였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던 그녀가 스트로를 입에서 떼고 앞을 바라봤다.

성현이 앉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나요?”

“아뇨, 저도 금방 왔어요.”

성현이 10분 정도 늦었지만 충분히 봐줄 수 있었다.

오빠 서준식에게 엿을 선물해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등록은 했나요?”

“네.”

서은서는 계약자 홈페이지에 접속해 성현의 이름을 검색했다.

유성현

“등록됐네요.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로 보자고 한 거죠?”

서은서는 가방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1명 찾았어요.”

성현이 클럽 샤를을 돕는 대가로 찾아 달라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지연우의 참모진이 될 사람들, 지연우가 세상을 꿀꺽하는 것을 도왔던 자들……. 성현은 그들에게 죄를 물을 생각이다.

성현이 쪽지를 들어 펼쳤다.

권순용 :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후략)…….

“그리고…….”

권순용의 주소를 확인하던 성현은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매혹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성현 씨를 보고 싶다는 분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클럽 샤를의 일을 부탁했던 때 그녀는 말했었다.

-혹시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되나요? 성현 씨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하지만 당시 성현은 거절했었다.

그 토요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날이니까…….

그 말을 기억한 성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분이 성현 씨를 꼭 보고 싶어 하거든요. 혹시 오늘 시간 되시면…….”

“좋습니다.”

성현은 흔쾌히 답했다.

그녀는 페이트 길드 마스터의 딸이다.

비록 후계 구도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지만 그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몇 없다.

그런데 그녀가 ‘그분’이라고 표현한다.

‘누굴까?’

성현의 머릿속에 몇몇의 얼굴이 스쳐 갔다.

페이트 길드의 마스터 서문길부터 그녀의 오빠 서준식 등등…….

어떤 식으로든 거물과의 만남은 성현이 겪었던 역사를 뒤트는 데 도움이 된다.

서초구에 있는 한 빌딩 지하 주차장에 스포츠카가 멈춰 섰다.

내린 사람은 성현과 서은서였다.

“그분이 이 집의 음식을 정말 좋아하시거든요.”

서은서가 말한 사람은 이 빌딩에 있는 한정식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현과 서은서는 엘리베이터에 탔고 8층으로 향했다.

바뀌는 층수를 보며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짓궂은 분이에요. 그러니…… 험한 말이 나와도 기분 나빠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죠.”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올라갔고 8층에서 멈춰 섰다.

문이 열리자마자 도열하고 있던 직원들이 허리를 굽혔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였다.

값비싼 목재와 고즈넉한 사찰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분위기…….

그런데 손님은 단 1명도 없다.

서은서가 말한 ‘그분’이 통째로 빌렸기 때문이다.

성현과 서은서는 직원을 쫓아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양옆에는 복면인들이 나열해 있었다.

‘그분’을 경호하기 위해서다.

* * *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테이블과 금장식이 박힌 의자…….

그 상석에 여든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지저분하게 자란 머리와 수염, 심지어 눈썹까지…… 그 모든 것이 붉었다.

이 노인은 서은서의 작은할아버지이며 국내 랭킹 톱 10에 올라 있는 거물, 서동길이었다.

서동길의 시선이 테이블로 향했다.

분명 화려한 테이블인데 있는 것은 총각김치와 부추 전 그리고 막걸리가 전부다.

그가 손가락으로 총각김치를 집어 입에 넣은 뒤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이어서 막걸리가 든 대접을 손에 들고 쭉 들이켠 뒤 중얼거렸다.

“도대체 언제 오는 게야!”

그는 서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서동길에게 서은서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핏줄이었다.

비록 종손녀였지만 그 누구보다 아끼고 애지중지했다.

그런 서은서가 성현을 입에 담았다.

-예지 능력을 가진 유성현이란 사람이 있어요. 아직 약하지만 무슨 일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물론 서은서가 성현을 이야기한 것은 업무적인 뜻이었다.

하지만…….

“고 녀석이 남자를 말한 것은 처음이지. 그런데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라…….”

서동길이 낄낄낄 웃으며 무릎을 탁 쳤다.

“그건 믿을 수 있다는 뜻이잖아? 고 녀석이 벌써 시집갈 나이가 되었나?”

서동길의 머릿속에 서은서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옆에 낯선 남자가 서는 상상이 떠오른 순간 얼굴 표정이 싹 굳었다.

“시집?”

그의 주먹이 꽉 쥐였다.

빠드득 소리가 들릴 정도다.

“……어설픈 놈이면 여기서 죽여 화근을 없애야지.”

그의 살기가 스멀스멀 흐르자 공간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때…….

“어르신, 인사 2팀장 서은서가 왔습니다.”

문 밖에서 복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동길은 표정 관리를 한 후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열어.”

스르륵 문이 열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서은서가 보였고 그 옆으로 성현이 보였다.

서동길의 시선은 당연히 성현에게 향했다.

그가 또렷한 눈으로 성현을 바라보며 서은서에게 물었다.

“네가 주워 온 게 이놈이냐?”

서은서가 허리를 굽혔다.

“인사 2팀장 서은서가 인사드립니다. 어르신이 만나고 싶어 하셨던 유성현입니다.”

서은서는 서동길에게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성현에게 자신이 페이트 길드의 딸이라는 것을 아직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동길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그게 재벌집 딸과 평범한 남자의 로맨스지.’

고개를 끄덕인 서동길이 입을 열었다.

“들라.”

성현과 서은서는 방으로 들어갔다.

서동길은 자리에 앉는 성현을 보며 총각김치를 손으로 들고 베어 먹었다.

그리고…….

“막걸리 한잔할 텐가?”

성현 대신 서은서가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 유성현은 아직 미성년자입니다.”

서동길이 볼 때는 벌써부터 서은서가 성현의 편을 드는 것 같았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지만 서동길의 말투는 이미 삐뚤어졌다.

“미성년자? 내가 저 나이 때는 물에 알코올을 섞어서 마셨어.”

“그건 어르신의 시대고요. 지금은 그렇게 마실 수 없어요.”

“서 팀장, 너한테 안 물어봤다. 네놈이 대답해라. 마실 텐가, 안 마실 텐가?”

성현이 고개를 숙였다.

“몇 달 뒤에 주십시오. 그때 마시겠습니다.”

“에잉…….”

서동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막걸리를 대접에 부었다.

그리고 다시 성현을 향했다.

서동길의 주름진 눈매는 성현의 모든 것을 살피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평생 독을 연구한 사람답게 뱀과 같다.

살기가 넘치고 서늘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만 마주쳐도 주저앉고 말 거다.

하지만 상대는 성현이었다.

지옥을 겪어 왔고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와도 마주했었다.

서동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마주했다.

거만하거나 건방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게…….

그 눈빛이 서동길은 마음에 들었다.

‘암, 은서의 짝이라면 저 정도는 돼야지.’

서동길이 입을 열었다.

“미래를 볼 줄 안다고?”

“네, 제가 아는 미래라면 볼 수 있습니다.”

“네놈만 아는 미래라……. 그것 참 요상한 말이구나. 그럼 네놈이 아는 미래에 나도 있는가?”

“조금은 있습니다.”

“그래, 내가 장가를 드는가?”

“아뇨.”

“허허.”

서동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럼 내가 언제쯤 죽는가?”

성현은 그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서동길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지연우에게 죽는다.

서동길은 친정부파였고 세상을 뒤집으려던 지연우와는 반대에 있었다.

그래서 지연우는 서동길을 죽인다.

한남대교에서…….

성현이 입을 열려 하자 서동길이 손을 저었다.

“아, 말하지 마.”

“……?”

“어떻게 죽는지는 인생의 목표이자 마지막 퀴즈야. 그 답을 미리 알고 있으면 인생이 재미없지.”

그가 껄껄껄 웃으며 주전자를 기울여 대접에 막걸리를 채웠다.

“이제 다음 질문을 하지.”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 질문은 제 차례 같은데요.”

서동길의 행동이 멈칫거렸다.

질문하면 대답이나 할 것이지 핏덩이 같은 놈이 오히려 질문을 한다니…….

하지만 성현은 이번에도 당당했다.

“어르신, 제자는 안 구하십니까?”

“뭐라?”

성현은 서동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후 독의 아버지라 불린다.

물론 독의 이미지가 좋지 않기 때문에 존경받는 위인은 아니었지만 암살자 집단에서는 그를 위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후대에 남긴 것은 생전에 연구한 것에 비해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제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동길에게 독을 배우면…….’

독은 지르힐의 권능과 함께 사용할 수 있다.

번개와 독 그리고 미래를 아는 힘…….

완벽해진다면 지연우의 발뒤꿈치를 보는 게 아니라 발목을 잡아챌 수도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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