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 *
다음 날, 던전이 나타나는 날이었다.
아파트 앞 대로변에 선 성현은 택시를 잡아탔다.
“경기도 광주요.”
성현이 자세한 주소를 말하자 택시 기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 액셀을 꾹 밟았다.
그때였다.
“잠깐!”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덩치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가 성현이 탄 택시를 향해 멈추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잠깐만!”
하지만 택시는 그를 보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덩치는 입을 꽉 다물었다.
‘이익!’
택시를 쫓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고 달렸다.
‘아직은 잡을 수 있어!’
하지만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차가 그의 앞길을 막았다.
끼이이익!
“젠장!”
그사이 성현이 탄 택시는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덩치는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포기할 수 없어!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왔는데!’
그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저 앞에 가는 은색 택시요. 쫓아 주세요.”
잠시 후, 경기도 광주의 습지 공원…….
성현이 택시에서 내렸다.
가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오후 7시인데 벌써 어둑하다.
‘30분 후에 등장한다고 했지?’
시간이 좀 남았다.
딱히 할 일도 없고해서…….
‘잠깐 창고 좀 다녀올까?’
성현은 창고로 이동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테이블에 놓인 반지를 손에 쥐는 것이었다.
꼬마에게 얻은 반지였다.
성현은 반지를 착용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스텟.”
책장에서 뽑혀 나온 스텟 책이 성현의 손에 놓였다.
성명 : 유성현
계약한 존재 : 버림받은 악 지르힐
파워 : 11
스테미너 : 7
스피드 : 12
마력 : 7
신체 평균 : 9.25
권능 이해도 : 9%
‘좋아.’
반지를 착용하며 스피드가 10에서 12로 상승했다.
이제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
‘평균이 9를 넘었어.’
평범한 계약자가 평균 9의 스텟을 가지려면 3년은 걸릴 테고 재능 있는 계약자도 6~8개월은 걸릴 게 분명했다.
즉, 성현의 발전 속도는 엄청났다.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도 말이 안 될 정도였다.
‘게다가…….’
하나도 갖고 있기 힘든 특수 아이템을 벌써 3개나 갖고 있었다.
문지기의 팔찌, 승려의 단검, 사막의 반지.
‘이렇게 성장하면…….’
언젠가 지연우의 심장을 찢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성현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방심은 금물.’
우쭐대면 안 된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뜬금없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태고 나무의 액기스 100ml가 체내에 흡수 완료되었습니다.
-태고 나무의 액기스는 마력이 10 이하일 때 최대 50%의 마력을 향상시켜 줍니다.
그리고 스텟이 변했다.
마력이 7에서 10.5로, 신체 평균은 9.25에서 10.12로…….
이어서 성현의 몸에 마력이 담기기 시작했다.
마력이 늘어난 만큼 채우는 중이다.
숫자로는 고작 3.5가 올랐을 뿐이지만 성현이 느낀 것은 달랐다.
끝없이, 마치 홍수가 난 것처럼 마력이 넘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라이트닝 볼을 만들어도 지치지 않을 것처럼…….
하지만 성현의 머릿속에 담긴 의문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갑자기 태고 나무의 액기스라니, 성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은 본 적도 없고 먹은 적도 없…….’
성현의 눈이 반짝였다.
집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서동길, 그가 건넸던 독.
‘……그게 독이 아니었나?’
사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해독제도 없이 독을 가지고 다닌다니…….
‘말이 안 되잖아.’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완벽히 속았어.’
속기는 했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별난 노인네…….’
성현은 서동길을 떠올리며 한참을 웃었다.
성현은 단순히 독을 배우기 위해 서동길과 가까이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비즈니스 관계로 접근한 거다.
하지만…… 그의 괴팍한 행동이 조금은 마음에 들고 있었다.
성현은 창고를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쌀쌀해진 바람을 맞으며 던전을 기다렸다.
‘아무도 안 왔으면 좋겠는데.’
던전이 나타나면 정부가 소유권을 갖고 길드가 토벌권을 갖는다.
그게 세상의 법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도굴꾼들…….’
그들은 새로 나타나는 던전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멋대로 들어간다.
그리고 던전에서 찾아낸 자잘한 보물로 먹고산다.
그런데 연맹과 정부에서 그들의 불법행위를 크게 제재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좀도둑이기는 하지만 첨병(尖兵)의 역할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오지 마라…….’
성현은 이번 던전에 그들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보물을 찾는 게 목적이라면 사람의 숫자가 많아야 유리하다.
하지만 성현은 던전 2층에 있는 제단, 그곳에서 매개체를 찾는 게 목표였다.
‘이럴 땐 혼자가 편하지.’
하지만 세상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주차장으로 고급 세단이 멈춰 섰고 누군가가 내렸다.
공원 산책을 나온 사람이었으면 했지만…….
‘젠장.’
그들은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성현을 향해 다가왔다.
인원은 2명, 그들도 성현을 발견했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네?”
남자의 목소리에 성현은 한숨을 내뱉으며 시선을 틀었다.
남자와 여자였다.
포니테일을 한 여자는 대학생으로 보였는데, 가벼운 운동을 나온 것처럼 짧은 반바지에 보라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생김새는 매력적이었지만 딱 봐도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는 초보였다.
그리고 남자는…….
‘전형적인 도굴꾼이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이 아닌 곳이 없었다.
옷의 가격은 뒤로하고 액세서리로 착용한 팔찌도 800만 원대였다.
엄청난 과소비, 도굴꾼의 특징이다.
그들은 돈이 있으면 무조건 써 버린다.
언제 죽을지 모를 목숨, 지금 안 쓰고 모아 뒀다가 다음 던전에서 죽으면 억울하기 때문이다.
술과 여자 그리고 도박……. 그들의 인생을 대변하는 단어였다.
그리고 성현은 남자와 여자가 어떤 사이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남자가 꼬셨네, 던전에 들어오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면서…….’
물론 남자의 목적은 순수하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를 어떻게 해 보려 하는 거다.
짐승을 마주한 상황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 호감도를 높이려는 것일 수도 있고.
‘범죄를 노리고 있을 수도 있지.’
돈을 벌기 위해 던전에 왔다면 초보와 함께하지는 않을 테니까…….
가까이 다가온 사내가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이영준입니다.”
“유성현입니다.”
여자도 입을 열었다.
“한채윤이에요.”
가볍게 통성명을 한 후 이영준이 물었다.
“혼자 오셨어요?”
“네.”
“솔플 하시는 걸 보면 초보는 아닌가 봐요? 어차피 함께 들어갈 건데 같이 움직이는 게 어때요?”
권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던전에 들어가면 함께 움직이는 게 정석이었다.
서로의 목적도 실력도 모르는 완벽한 타인이기 때문이다.
자살이 목적인 놈이 저승길에 동행하자며 어디선가 장치라도 건들면…….
극단적인 예였지만 상대의 트롤 짓으로 위험에 빠진 사례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래서 눈에 있는 곳에 상대를 잡아 두고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변수를 최소화할 수 있다.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그럼 잘해 보십시다.”
가벼운 악수 후 이영준과 한채윤은 성현과 2m 정도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한채윤이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긴장되네. 죽은 사람도 많다던데, 괜찮겠지?”
한채윤은 계약자가 된 지 이제 세 달째, 스킬도 사용할 줄 모른다.
이런 사람이 던전에 들어가면 딱 죽기 좋지만…….
“괜찮아. 오빠만 믿어. 그리고 오빠가 말했잖아? 지난번에 스피드 올려 주는 보석 주워서 6천에 팔았다고. 저 차 그거 판 돈으로 산 거야. 무서운 거 딱 참고 용기를 내면 돈을 벌 수 있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알지? 흐흐흐.”
도굴꾼이 6천만 원짜리 아이템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영준은 아주 쉬운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한채윤에게 바람을 넣는 중이다.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던전에서 줍는 아이템은 당첨 번호가 적힌 로또하고 같은 거야. 운이 좋으면 S등급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고.”
“S등급?”
S등급의 아이템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얻는 즉시 한강이 보이는 고급 아파트로 이사 가서 전용 헬기를 타고 놀러 다닐 수 있다.
그런 돈을 벌 수 있다니, 한채윤은 말만 들어도 황홀했다.
그리고…… 이영준이 낮은 목소리로 게속 말했다.
“뭘 줍든지 공정하게 n분의 1 할 거야.”
한채윤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스킬도 사용할 줄 모른다.
그런데 공정하게 나누자니…….
당연히 짐승은 이영준이 모두 잡을 게 분명하니까 그녀는 공짜로 뭔가를 얻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확답을 받듯 다시 물었다.
“정말이지?”
“오빠 못 믿어?”
한채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영준의 시선이 성현에게 틀어졌다.
도굴꾼의 실력은 걸친 옷의 가격과 비례하는 법이고 그게 도굴꾼의 세상이다.
그런데 성현은 낡은 가방을 걸치고 마트에서 산 것 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딱 봐도 실력이 없어 보이는데…….’
이영준이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트롤 짓을 하거나 내 말을 안 들으면…….’
이영준은 성현을 짐승의 먹이로 던져 버릴 생각이었다.
던전 내부는 인간의 윤리가 통하지 않는 곳이다.
오로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인간을 고기 방패로 사용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라.’
성현은 이영준이 그러거나 말거나 손목을 틀어 시간을 확인했다.
7시 30분이었다.
‘시간이 됐어.’
성현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른 것처럼 허공이 일렁거렸고 곧 거대한 문이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나타났다.
그런데 흔히 봤던 던전 입구가 아니었다.
중세의 성문 같았는데 중앙에는 석상으로 만들어진 사자 머리도 박혀 있었다.
사자 머리가 포효했고 이영준은 긴장했지만 허세를 부렸다.
“오빠만 믿어. 알았지?”
“어? 어. 믿을게!”
조용히 앉아 있던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혼자 들어갔다면 최상이었겠지만 도굴꾼 2명이면 그래도 선방했다.
재수가 없었다면 10여 명으로 이뤄진 도굴꾼 크루가 왔을 수도 있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제 더 올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2명이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어.’
하지만 이번에도 성현의 바람은 무너지고 말았다.
또 저벅저벅, 멀리 발소리가 들렸고 성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또 누구야?’
거대한 덩치가 보였다.
슬쩍 보면 곰으로 착각할 정도…….
그 크고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며 한채윤이 움찔거렸고 그것은 이영준도 마찬가지였다.
놈은 폭력적인 기운을 숨기지 않았고 이영준과 한채윤은 놈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어졌다.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을 칼로 벨 것 같은 날카로움…….
성현은 그를 알고 있었다.
‘저놈은 또 왜……?’
그는 회귀 전 구악의 멤버 이태산이었다.
그가 성현의 앞에 섰다.
그리고 실망한 목소리로…….
“정체가 뭔가 했는데, 도굴꾼이었나?”
성현은 이태산이 실망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성현이 고민하는 것은 하나였다.
‘어떻게 하지?’
구악과 얽히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태산과 말싸움할 시간도 없었다.
계속해서 어물거리면 또 다른 누군가가 등장할 수도 있다.
그럼 통제해야 할 사람이 늘어난다.
‘그건 안 돼.’
성현이 고개를 들고 이태산을 향했다.
“그래, 같이 들어가자.”
“뭐?”
“안 들어올 거면 말고.”
성현은 이태산을 스쳐 던전 안으로 향했다.
이태산이 주먹을 꽉 쥐더니…….
“기다려!”
성현의 뒤를 쫓았다.
이영준과 한채윤도 마찬가지였다.
“채윤아, 우리도 들어가자.”
“어? 어.”
그렇게 네 사람이 던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자 석상이 눈빛을 번쩍이며 포효했고 거대한 문이 ‘꽈앙!’ 소리와 함께 닫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