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 *
던전 안은 습했고 나무로 우거져 있었다.
성현은 자리에 앉아 흰 가루를 꺼내 뿌렸다.
개 코 가루라는 이름의 아이템으로 반경 50m 이내의 짐승을 찾아낼 수 있다.
스스스슥…….
가루는 멀리 가지 않고 그대로 땅으로 쏟아졌다.
주변에 짐승은 없다는 거다.
그런데 성현의 행동을 지켜보던 이영준이 픽 웃었다.
“던전 초입에는 짐승이 없어요. 그리고 그거 개 코 가루죠? 적어도 1브론즈는 할 텐데, 아까운 아이템만 낭비했네.”
성현은 이곳이 스페셜 던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기 싸움은 피곤할 뿐이었고 이 던전이 경험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까…….
성현이 가만히 있자 이영준이 계속 말했다.
“계약한 지 얼마나 됐어요? 솔플 하는 거 보면 3년 정도?”
이영준은 성현의 복장을 보고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놈이 솔플이라니…….
뭔가 이상해서 물어봤지만 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영준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이봐요!”
목소리가 커지자 이태산이 나섰다.
“이곳은 던전이다. 네 목소리를 듣고 짐승이 나타날 수도 있어. 그러니 조용히 해라.”
이태산의 덩치는 거대했다.
프로레슬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다.
이영준은 입술을 삐죽이며 입을 닫았고 성현이 나직이 대답했다.
“두 달 안 됐습니다.”
“……두 달? 두 달도 안 됐다고요?”
“네.”
“하!”
이영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두 달 된 놈이 혼자 던전을 공략하고 있다니, 죽고 싶어 안달 난 하룻강아지도 아니고…….
‘그냥 미친 새끼였네…….’
이영준은 성현이 똥을 싸지르면 곧바로 죽이겠다는 다짐을 하며 손뼉을 짝 쳤다.
“좋아요. 그럼 역할이나 나눠 볼까요? 저와 채윤이는 원거리 권능인데…….”
“저는 근접입니다.”
성현이 대답했고 이영준의 시선은 이태산에게 향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쪽은?”
“근거리.”
“그럼 전술은 간단하겠네요. 성현 씨와 그쪽이 수색조를 맡으시…….”
수색조, 먼저 몸빵을 하라는 거다.
그리고 성현이 평범하게 두 달 된 계약자였다면 몸빵을 맡는 순간 짐승의 발톱에 내장이 쏟아져 나올 것이었다.
즉, 이영준은 성현에게 앞서 나가 죽으라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영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허공에 아지랑이가 핀 것처럼 흔들리더니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끝이 아니었다.
허공에 모래시계가 나타났고 그게 천천히 뒤집어지더니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선택의 던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밖의 세상과 시간이 다르게 흐릅니다.
-대략적으로 이곳의 하루는 밖에서의 1분.
-시간은 많으니 느긋하게 즐겨 주십시오.
-그럼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모래시계가 끝나기 전에 선택하지 않으면 페널티가 있습니다.
한채윤은 당황했다.
“오, 오빠, 어떻게 해?”
처음 오는 던전이라 엄청나게 검색을 했고 공부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인터넷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영준이 대답해 줄 수준은 아니었다.
던전이면 짐승이 나오고 주인이 나와 치고받고 싸우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래시계라니, 뜬금없이 메시지라니!
이영준에게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의 경험을 송두리째 박살 내고 있었다.
‘뭐지? 뭐지?’
그가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꺄아아악!”
한채윤이 비명을 질렀다.
“왜, 왜 그래!”
한채윤은 나무에 쓰러진 백골을 가리키고 있었다.
딱 봐도 이곳을 헤매다가 나가지 못하고 죽어 간 계약자였다.
그런데 두개골은 거의 으깨져 있었고 그나마 성한 곳은 짐승의 이빨 자국으로 가득했다.
한채윤은 울먹였다.
“우, 우리도 저렇게 되는 거 아니야?”
이영준이 한채윤의 등을 토닥였다.
“당연히 아니지. 오빠만 믿어. 오빠만…….”
그들이 겁에 질려 있을 때 성현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파리처럼 생겼지만 엄연히 다르다.
이것은 길잡이라는 이름을 가진 벌레.
성현은 죽은 것처럼 굳어 있는 벌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마력을 주입했다.
‘이곳은 선택의 던전이야.’
말 그대로 단순한 선택을 통해 장소를 이동하는 던전이었다.
문제는 이곳이 미로 같아서 선택을 잘 못하면 같은 장소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략법을 모른다면 이 던전 안에서 몇 달을 헤매다 굶어 죽을 수도 있었다.
앞에 있는 백골처럼…….
하지만 공략법을 알고 있다면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클리어할 수도 있다.
‘난 공략법을 알고 있지.’
성현의 손바닥에 있던 벌레가 꿈틀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잡이 벌레]
-인생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을 때 조언을 해 준다.
-선택의 던전에 한해 목표로 한 길을 2번 안내해 준다.
성현이 길잡이 벌레를 하늘로 던졌다.
벌레가 성현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난 2층으로 갈 거다.”
그 말을 마치자 길잡이 벌레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오른쪽 길로 날아갔다.
성현은 길잡이 벌레를 쫓아 이동했다.
“오빠, 쟤 가는데?”
“따라가자.”
그리고 그 뒤를 이영준과 한채윤이 자연스레 따랐다.
이태산은 조용히 성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 천천히 그 뒤를 쫓았다.
배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학교 운동장이었다.
멀리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그리고 사자 동상이 음침하게 보였다.
그리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학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선택하세요.
-1. 운동장에 남는다.
-2. 교실에 들어간다.
-3. 밖으로 나가서 집을 찾아간다.
한채윤은 이번에도 이영준의 팔을 잡고 물었다.
“오, 오빠, 어디로 갈까?”
이영준의 시선은 3번 메시지에 닿아 있었다.
‘집을 찾아간다고? 이건 무슨 뜻이지?’
하지만 그의 고민은 무의미했다.
들려온 성현의 목소리…….
“가죠.”
성현은 길잡이 벌레를 쫓아 학교 안으로 이동했다.
고민도 없었고 걸음걸이는 마실을 나온 것 같았다.
그 당당함에 한채윤은 눈치를 보다가 성현의 뒤를 쫓는다.
더 이상 이영준에게 묻지 않고…….
이영준은 성현을 쏘아보며 입을 꽉 다물었다.
‘저 새끼가…….’
이영준은 한채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계속 성현이 나대며 그는 존재감을 잃어 가고 있었다.
중앙 현관을 통해 학교로 들어가자 길잡이 벌레는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 번의 선택을 도왔으니 그 힘을 잃은 거다.
‘고생했다.’
다행히 길잡이 벌레는 수십 마리나 더 있었다.
‘하지만…….’
벌레를 사용하려 해도 선택지가 나와야 한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선택의 메시지는 더 나타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인가?’
선택의 던전에서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주변의 짐승을 죽이는 것.
성현은 개 코 가루를 꺼내 뿌렸다.
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자연스럽게 바람에 날리는 게 아니라 아래로 곧장 떨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바닥이 마루다.
‘학교 건물은 새건데, 바닥이 마루야?’
물론 바닥이 마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던전이다.
어느 것 하나도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성현이 조심스레 바닥을 살피고 있는데 한채윤이 다가왔다.
“저기요? 이제 어떻게 해요? 아까 2층으로 간다고 하던데, 위로 올라갈 건가요?”
무식한 소리였다.
던전의 2층은 층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입구를 통한 또 다른 공간을 말하는 거다.
그 입구는 지하에 있을 수도 있고 이곳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썩은 냄새가 확 풍겨졌다.
“비켜!”
“네?”
“비키라고!”
성현이 한채윤을 확 밀친 뒤 승려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한채윤의 발이 있던 곳, 마룻바닥 사이를 찍었다.
콰아악!
-키에에에엑!
비명 소리와 함께 성현의 뺨에 피가 튀었다.
성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스쳤어.’
분명 짐승이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찌르지 못했다.
‘어디로 도망갔지?’
그때 ‘가가가각!’ 하고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틀자 멍하니 서 있는 이영준이 보였다.
“위험해!”
“네?”
그 순간 날카로운 손톱이 바닥에서 튀어나와 그를 향했다.
“뭐, 뭐야!”
이영준은 당황했고 눈만 깜빡거렸다.
성현은 허벅지에 힘을 주고 이영준을 향해 튀어 나갔다.
그 순간 스륵, 손톱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곳은 또 한채윤의 앞이었다.
놈은 성현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렸다가 방향을 튼 거다.
가장 약하고 가장 먹음직스러운 한채윤을 향해…….
“꺄아아악!”
갑작스러운 짐승의 공격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패닉 상태였다.
하지만 성현이 그녀에게 돌아갈 시간은 없었다.
이미 손톱은 그녀의 앞에 다가와 있었고 그녀는 날카로운 손톱에 찢겨 죽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껏 가만히 있던 이태산이 움직였다.
그가 무심한 표정과 함께 손에 든 칼로 바닥을 찍었다.
거대한 덩치만큼 엄청난 힘!
콰아아악!
바닥이 핏물로 물들어 간다.
손톱은 움직이지 않았고 이태산의 시선이 성현에게 향했다.
“됐나?”
성현이 조용히 웃었다.
“고생했어.”
겁에 질린 한채윤이 이태산에게 다가가 바들바들 떨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고, 고마워요.”
이태산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저기?”
“네?”
“소리 지르지 말고 뭐라도 해라. 그렇게 있으면 넌 민폐야.”
이태산의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고 한채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보통은 목숨을 구해 준 사람에게 “죄송합니다.” 또는 “고맙습니다.”라고 해야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뭐야, 뒤늦게 들어온 놈이……. 말이라도 친절하면 안 돼? 생긴 대로 놀고 있어.’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태산은 정말 무섭게 생겼으니까…….
그리고 성현은 가방에서 야전삽을 꺼내더니 핏물이 고인 마룻바닥을 파냈다.
퍽퍽퍽!
마룻바닥 안에는 손톱이 20cm 정도 되는 손이 있었다.
손만 덩그러니 놓인 것이 기괴해 보였는데, 성현은 그 끔찍해 보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졌다.
그리고 그 손에서 손톱을 뜯어낸다.
빠드드득, 잔인한 소리가 울렸다.
이영준과 한채윤은 고개를 돌렸고 성현은 뜯어낸 손톱을 이태산에게 건넸다.
“받아.”
“내가 왜?”
“던전에서의 배분은 공정해야 하는 거야. 네가 잡았으니까 네가 가져야지. 그리고 이 손톱…… 사골처럼 달여서 마시면 스피드가 오를 거야.”
“……이걸 달여서 마신다고?”
“스피드가 떨어지잖아? 못 먹겠으면 설탕이라도 타든지.”
이태산은 물끄러미 성현을 바라봤다.
그의 약점은 스피드였다.
덩치에 걸맞게 힘은 좋았지만 스피드가 떨어져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성현은 정확히 그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태산이 손톱을 받아 들었다.
“일단은 갖고 있지.”
이영준과 한채윤은 부러운 눈으로 이태산을 바라봤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손톱의 시가는 천만 원 정도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태산에게서 저 손톱을 빼앗을 용기는 없었다.
성현은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아직도…….’
손톱을 잡았지만 아직도 선택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해결해야 할 짐승이 더 있다는 거다.
‘저쪽인가?’
품에서 개 코 가루를 꺼내 뿌렸더니 이번엔 복도의 끝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성현은 가루가 날린 곳을 향해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교장실, 교무실, 그리고 교실 6개…….’
각 교실에는 약 50명의 학생이 보였다.
6개면 약 300명.
‘모두 짐승이지.’
성현은 가방에서 휘발유가 담긴 물병을 꺼냈다.
그걸 바닥에 뿌렸다.
“뭘 하려고요?”
한채윤의 질문에 성현은 담담히 답했다.
“전투준비 하세요.”
“네?”
성현은 더 이야기하지 않고 비상벨을 콱 눌렀다.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교실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의 얼굴이 푸르르르 떨렸다.
놈들의 코가 길어지고 광대가 솟아났다.
머리가 듬성듬성 빠지며 허리가 굽었고 피부는 녹색으로 변해 갔다.
-캬아아아악!
놈들이 복도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놈들을 기다리는 것은 성현이었다.
성현이 느긋한 표정으로 부싯돌을 꺼내 휘발유를 향해 툭 던졌다.
“파이어 볼.”
화르르륵!
불이 붙었다.
가장 앞서 뛰어온 놈이 불길을 보고 몸을 멈추려 했다.
하지만 무리다.
놈의 뒤에서는 짐승들이 계속해서 밀려오는 중이었고 결국 놈의 몸에 불길에 닿았다.
-끼에에엑!
치이이익! 불에 익는 냄새가 확 퍼지더니 놈의 몸이 가뭄 든 땅처럼 쩍쩍 갈라졌다.
성현이 단도를 꽉 쥐었다.
그리고 콰아아악, 짐승의 목에 칼을 꽂았다.
터진 피가 성현의 얼굴에 쏟아졌다.
하지만 성현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
말 그대로 학살이었다.
성현은 칼을 휘두르고 휘발유와 부싯돌을 던지며 인간형 녹색 짐승의 목을 잘라 냈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이영준과 한채윤이 죽인 짐승의 숫자보다 성현 혼자 죽인 게 배는 더 많았다.
성현의 귓속에는 계속해서 메시지가 울렸다.
-100마리 사냥에 성공하며 ‘학살자’를 달성했습니다. 스텟 포인트 1을 얻었습니다.
-70마리를 연속해서 단칼에 죽이며 ‘일격의 달인’을 달성했습니다. 스텟 포인트 1을 얻었습니다.
지켜만 보고 있던 이태산도 움직였다.
짐승의 목을 잡고 그대로 집어 던졌다.
콰아아앙!
벽에 금이 갈 정도였다.
그렇게 약 300마리였던 짐승이 사체가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학교 복도는 핏물로 가득했고 이영준과 한채윤은 성현의 능력에 기겁했다.
‘두 달 됐다고? 10년하고 두 달 됐겠지! 저게 인간이야?’
‘저렇게 센 놈이 왜 옷은 저렇게 입고 다니는 거지?’
두 사람이 인상을 구길 때 이태산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성현이 아직 스킬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단해…….’
이태산은 클럽 샤를에서 성현에게 당한 것이 기습적인 공격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더 강해졌어.’
잘은 모르겠지만 클럽 샤를에서 마주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그때 성현은 바닥에 쓰러진 짐승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명치 바로 밑 오른쪽에 칼을 쑤셔 넣었다.
인간형 짐승의 배를 가르는 게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뭐 하는 거예요!”
한채윤이 소리 질렀지만 성현은 계속해서 짐승의 배를 갈랐고 그것에서 지름 1cm 정도의 작은 구슬을 찾아 끄집어 냈다.
그리고 이태산에게 그 구슬을 던졌다.
“어이, 덩치. 이거 가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