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이태산은 성현이 건넨 구슬을 바라봤다.
“이게 뭐지?”
“이 짐승의 코어야. 오른손에 올려놓고 마력을 주입하면 흡수할 수 있지. 많지는 않지만 스텟 포인트가 오를 거야.”
코어를 흡수하면 스텟이 최대 0.1포인트 오를 수 있다.
“스텟 포인트가 오른다고?”
“어.”
이태산이 코어를 손에 쥘 때, 성현은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죽었다 살아난 동생에게 주고 싶은 형의 마음이었다.
앞으로 살아 나갈 세상, 그 지옥 같은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현은 또 다른 짐승의 배를 갈랐다.
짐승은 300마리나 있었고 나눠 먹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이번에 찾은 것은 성현이 흡수했다.
-코어를 흡수했습니다.
-스텟 포인트가 0.1 올랐습니다.
이영준도 눈치를 보다가 짐승의 배를 갈랐고 코어를 꺼내 마력을 주입했다.
‘저 새끼, 유성현이라고 했지? 이런 코어를 먹고 강해진 건가? 나도 이걸 먹으면 강해질 수 있어.’
그는 계속해서 짐승의 배를 갈랐다.
코어를 흡수할 때마다 진흙을 씹어 먹는 것 같은 맛이 입에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흡수했다.
-코어를 흡수했습니다.
-스텟 포인트가 0.1 올랐습니다.
-코어를 흡수했습니다.
-어떤 효과도 보지 못했습니다.
-코어를 흡수했습니다.
-스텟 포인트가…….
모든 코어가 포인트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높은 확률로 어떤 효과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영준은 악착같이 짐승의 배를 갈라 코어를 흡수했다.
성현은 그를 보며 슬쩍 웃었다.
‘미련하게…….’
인간형 짐승의 코어는 쉽게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했다.
일단 보관할 수 없다.
짐승이 죽은 후 1시간 내에 코어를 꺼내지 않으면 모두 썩어 버린다.
그리고 두 번째, 하루 먹을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50마리가 최대였다.
그걸 넘어서면…….
“우웨에에엑!”
이영준은 복도의 벽에 손을 대고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스텟 포인트가 0.1 사라졌습니다.
-스텟 포인트가…….
그리고 먹은 것을 다 쏟아 냈다.
다행히 이태산은 미련하지 않았다.
포인트를 흡수하며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고 더 이상 짐승의 배를 가르지 않은 거다.
그렇게 이태산은 2포인트를 올렸다.
조용히 있던 한채윤도 슬금슬금 1포인트를 가져갔다.
이영준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과를 얻은 거다.
그리고 기다리던 선택지가 떴다.
-선택하세요.
-1층에 남는다.
-2층으로 올라간다.
-지하로 내려간다.
모두 성현만 보고 있다.
“……어디로 갈 거죠?”
한채윤의 질문에 성현은 길잡이 벌레를 꺼냈다.
“따라가야죠.”
길잡이 벌레는 지하로 내려갔고 성현도 그 뒤를 쫓았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빛이 사라지고 어두워졌다.
배경이 바뀌려는 거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어두컴컴하고 습한 동굴이었다.
이제는 메시지로 나타난 선택지가 아니라 매번 갈림길을 선택하며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미로처럼 꼬인 갈림길이라 해도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길잡이 벌레를 따라가면 쉽게 미로를 통과할 수 있었다.
한참을 걸은 뒤 모두는 비상구처럼 보이는 계단 앞에 섰다.
성현이 거침없이 내려가려 하자 한참을 걸으며 피로가 쌓인 한채윤이 입을 열었다.
“저기……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피곤할 만했다.
던전에 들어와서 약 6시간 동안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까.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모두는 각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성현이 앉은 곳은 이영준, 한채윤과 약 2m 떨어진 곳이었다.
성현의 옆으로 이태산이 다가와 앉았다.
이태산은 궁금한 게 있었다.
클럽 샤를에서 성현과 대적했을 때, 성현이 왜 ‘형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이다. 앞으로는 착실하게 살아라.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먹고 아버지께 효도하고.’라는 말을 했는지…….
분명 이태산을 아는 것 같은 말투였다.
“저기…… 나를 어떻게 알고 있지?”
성현은 대답 대신 가방에서 삼각김밥을 꺼내 이태산에게 건넸다.
“이거나 먹어.”
“이런 것을 먹자고 물은 게 아니야. 날 어떻게 알고 있지?”
“네가 유명해서 알고 있다고 치자. 그건 그렇고 배고프잖아? 독 안 탔으니까 먹어.”
이태산은 성현의 눈빛에 담긴 진심을 봤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눈빛, 부모님 외에는 받아 보지 못한…….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사랑을 받으면 사람은 약해지니까…….
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었다. 거절하면 그 진심을 박살 내는 것 같았다.
“에이! 더럽게 맛있네!”
이태산은 삼각김밥을 받아 우걱우걱 씹었고 성현은 그런 이태산의 모습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많이 먹어라. 더 못해 줘서 미안하다.’
다시 말하지만 성현은 구악의 멤버들과 가까이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비명을 또 듣게 된다면 미쳐 버릴 거다.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건 너희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게 아니야.’
성현의 목표는 오직 하나.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지연우에게서…… 존재에게서…….
그리고…….
“오빠, 어떻게 할 거야?”
성현과 이태산에게서 2m 떨어진 곳.
한채윤과 이영준은 속닥이고 있었다.
이영준이 물을 마시다가 한채윤을 바라봤다.
“뭘 어떻게 해?”
“계속 질질 끌려다닐 거야?”
한채윤은 던전 도굴이 처음이었다.
일확천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왔는데 지금껏 그녀가 한 일은 꺅꺅, 소리 지르는 게 전부였다.
얻은 것이라고는 스텟 포인트 1…….
이영준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대범한 척 물었다.
“뭘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런데 한채윤의 눈빛이 서늘했다.
그녀가 이영준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쟤들…… 죽이면 안 돼?”
“뭐?”
“던전에서는 막 죽일 수 있다며? 짐승의 밥이 됐다고 보고하면 된다면서?”
“그건 그런데…….”
“쟤들이 오빠보다 강한 것은 알아. 그런데 뒤만 졸졸 쫓아다니면 우리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아까 봤지, 우리한테는 말도 안 하고 저 덩치한테 손톱을 주는 거. 내가 미끼가 되어 주지 않았다면 절대 못 잡았을 거야. 그럼 나한테도 지분이 있는 거 맞잖아?”
“그렇지?”
“고생만 하다가 탈출할 거야? 100만 원이라도 먹어야 일당이라도 버는 거지.”
이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에 들어와서 고생만 하다가 멍청하게 집에 가는 모습, 그건 정말 억울했고 싫었다.
“그렇지, 아무것도 못 가져가면 억울하기는 하지.”
이영준이 동의하는 것 같자 한채윤이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습에 장사 없다고 했어. 때가 되면 내가 기회를 만들 테니까 오빠가 찔러. 그 검, 비싼 거라며…… 다 죽일 수 있다며?”
이영준이 손에 쥔 검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3천만 원을 주고 산 검으로 ‘혈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장사꾼의 말에 따르면 베지 못할 것이 없다고 했다.
‘이거라면 저 두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
잠시 고민에 빠졌던 이영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죽이자.”
한채윤이 활짝 웃었다.
“이용 가치가 있을 때까지는 살려 둬야 해. 그러니까 보물을 찾을 때까지는…….”
이영준도 씩 웃었다.
“당연하지.”
두 사람의 눈빛과 함께 이영준의 혈마검이 번쩍였다.
던전에 들어온 지 7일째였다.
하지만 이곳은 스페셜 던전, 밖의 세상과 이곳의 시간관념이 달랐다.
이곳의 하루는 밖에서의 1분.
그러니까 이곳은 일주일이 지났는데 밖은 7분 정도 지났다는 거다.
어쨌든 이들은 이곳에서 일주일이나 있었고 모두의 몰골은 꼬질꼬질했다.
제대로 씻은 적이 없어서다.
“……멀었을까요?”
한채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성현이 가져온 길잡이 벌레가 아니었다면 길도 찾지 못하고 굶어 죽거나 짐승의 밥이 되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 감사함은 없었다.
어서 성현과 이태산을 죽이고 보물을 독식할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얼마짜리 보물이 있을까, 억 단위가 되면 좋겠는데, 그럼 자동차는 벤츠를 살까 벤틀리를 살까…….
“거의 다 온 것 같은데요.”
성현은 주변에 마력이 짙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끈적끈적한 기분 나쁜 느낌…….
그때 그들의 앞에 짐승이 나타났다.
고릴라 모습의 짐승, 그 숫자가 3마리다.
가장 앞선 놈이 자신의 가슴을 쾅쾅쾅 치며 울부짖었다.
-캬아아아!
이영준과 한채윤은 마른침을 삼켰지만 성현은 달랐다.
곧장 튀어 나갔다.
‘스피드에 2 투자.’
-스피드가 12에서 14로 상승했습니다.
‘아직 모자라. 스피드에 또 2 투자.’
-스피드가 14에서 16으로 상승했습니다.
고릴라를 잡으려면 스피드가 중요하다.
성현은 스피드를 올렸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 가장 앞에 선 고릴라의 팔을 베었다.
-크허어엉!
고릴라가 주먹을 내질렀지만 이미 성현은 그 자리에 없었다.
멀리 뒤로 떨어져 놈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팔을 베었지만 고릴라는 멀쩡했다.
‘한 번으로는 안 된다는 거지?’
성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잘릴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칼을 휘두르면 된다.
성현은 고릴라의 팔과 다리를 베고 옆구리를 쑤셨다.
그때마다 핏물이 튀었지만 아직 멀었다.
성현은 계속해서 움직였고 고릴라의 온몸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놈이 가슴을 팡팡팡 치며 분노한다.
-크아아악!
성현의 스피드가 워낙 빨라 건드리지도 못하는 게 억울한 거다.
하지만 성현은 상대의 흥분에도 냉정했다.
타이밍을 보며 고릴라의 가슴에 칼을 휘둘렀다.
그때…….
-승려의 단검이 상대의 방어력을 무시합니다.
단검이 가진 권능이 발현됐다.
단검은 고릴라의 살가죽을 뚫고 들어갔고 짐승은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쏟아진 핏물이 성현을 적셨다.
하지만 성현은 멈추지 않았다.
고릴라의 상처에 라이트닝 볼을 쑤셔 박았다.
그것이 짐승의 상처를 파고들더니 짐승의 심장을 멈추고 뇌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짐승은 무너지는 것처럼 쓰러졌다.
그리고 겁에 질린 눈으로 성현을 바라봤다.
“고통을 줄여 주마.”
성현은 고릴라의 목을 향해 승려의 단검을 내리찍었다.
푸아아악!
고릴라의 몸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대로 굳어 갔다.
성현은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나타난 고릴라는 3마리, 그중 1마리는 성현이 방금 죽였다.
남은 것은 2마리, 그중 1마리는 이태산과 치고받는 중이었다.
고릴라는 거대한 힘을 가졌지만 이태산도 만만치 않았다.
서로의 주먹이 교차될 때마다 ‘꽝! 꽝! 꽝!’ 하고 교통사고가 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기는 이태산에게 맡기면 될 것 같고.’
지난번에 이태산과 싸웠을 때 이태산의 경험이 아직은 부족한 것을 느꼈다.
성현은 이태산이 많은 짐승들과 싸우며 경험치를 높일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그럼 나머지 1마리는?’
이영준과 한채윤이 1마리를 앞에 두고 폴짝폴짝 애를 쓰고 있었다.
아니, 도망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저쪽은 도와야겠어.’
그들이 싸우는 고릴라를 향해 성현이 뛰쳐나갔다.
그리고 고릴라의 눈동자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크아아아악!
고릴라가 고통스러운 몸짓과 함께 동굴 벽을 쾅쾅쾅 두들겼다.
하지만 고릴라의 생명이 끊기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콰아아악!
성현의 단검이 고릴라의 정수리를 찍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이영준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성현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망연자실했다.
‘저 새끼 또 강해졌어…….’
처음 이 던전에 들어왔을 때, 인간형 짐승과 싸우던 성현도 강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또 달랐다.
단순히 스텟이 올라간 게 아니라 싸움에 익숙해지는 모습…….
그도 그럴 것이 성현은 수십 년을 지옥에서 살아온 경험이 있다.
하지만 성현의 몸은 아직 고등학생, 그것도 싸워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굳은 몸.
전투를 할수록 몸이 익숙해지는 것은 당연했고 그것은 강함으로 직결됐다.
이영준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저놈을 죽이려면 기습밖에 없어.’
성현은 고릴라가 빠져나온 동굴로 거침없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끈적끈적한 마력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착했어.’
동굴의 끝, 666개로 이뤄진 계단이 보였다.
저 계단을 올라가면 성현이 찾던 제단이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제단에는 매개체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