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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36화 (36/252)

36화

성현은 뚜벅뚜벅 걸어 계단 앞에 섰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일단 제물을 바쳐야지.’

살아 있는 생물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몇 계단 오르지 못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고 말 거다.

성현은 이계 시장에서 구입한 알을 꺼내 마력을 주입하고 땅에 심었다.

이제 1시간 뒤면 나무가 자랄 것이고 맺어진 열매에서 생물이 태어날 거다.

그 생물을 이 제단의 제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1시간만 휴식하죠.”

고릴라와 싸우며 지쳐 있던 일행은 성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영준과 한채윤은 성현과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다.

한채윤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 계단 위에 뭔가 있는 것 같지?”

한채윤도 계약자였다.

마력을 느낄 수 있었고 심상치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뭔가 있어. 적어도 5억 이상일 거야.”

“……5억?”

“내 도굴 경력 알지? 그런데, 이런 던전은 처음이야. 선택의 던전이라니……. 그럼 특별한 만큼 아이템도 특별하지 않겠어?”

게다가 계단은 눈부실 정도로 하얀색…….

눈처럼 푹신하고 여성의 속살처럼 부드러울 것만 같다.

이영준은 당장 저 계단을 짓밟아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한가득이었다.

‘저런 계단 위에 있을 아이템이 평범할 리 없어.’

그리고 한채윤의 눈에는 욕망이 가득해졌다.

“5억…….”

“어쩌면 그 이상……. 진짜 내 인생의 로또일 수도 있어.”

“내 인생이라니?”

“아, ‘우리’ 인생이지. 공평하게 나누자고, 흐흐.”

이영준이 입맛을 다셨고 한채윤이 계속 말했다.

“슬슬…… 할래?”

“하다니?”

“죽이는 거.”

이영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던전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사람 죽인다는 말을 참 쉽게 한다? 혹시 계약 전에 살인자였다든가?”

한채윤이 고개를 저었다.

“눈 딱 감으면 내일 벤틀리 매장에서 계약서를 쓸 수 있어. 어떻게 해? 난 벤틀리가 타고 싶은데.”

“……그럼 작전을 좀 세우자.”

이영준은 한채윤에게 성현과 이태산을 죽일 계획을 말했다.

“먼저 유성현을 죽이자고.”

“어떻게?”

“조금 있으면 저 곰 새끼가 화장실에 갈 시간이야. 매일 이 시간에 화장실을 가서 20분쯤 있다가 오더라고. 그때 성현이라는 놈 앞에서 팬티를 살짝 보여 봐.”

“……팬티?”

“네 얼굴에 안 넘어갈 남자 없어.”

“그리고?”

“내 스킬이 암살이야. 네가 시선만 끌어 주면 기습으로 죽일 수 있어.”

이영준의 눈은 자신감으로 넘쳐 났다.

한채윤이 혀로 입술을 적시며 물었다.

“그럼 저 덩치는 어떻게 죽일 거야?”

“유성현을 죽이고 함정을 파는 거야. 놈은 20분 후에 오니까 준비할 시간은 충분해.”

한채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 이영준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흐린 연기를 내뱉으며 그는 생각했다.

‘마지막에는 이년도 죽여야지.’

던전의 레벨을 생각하면 아이템의 가격은 적어도 5억…… 아니, 그 이상일 거다.

‘10억? 20억?’

그는 그 큰돈을 한채윤과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한채윤을 꼬실 생각에 던전까지 같이 왔지만…….

‘돈이 있으면 이런 여자를 만날 이유가 없지.’

돈만 있으면 한채윤보다 훨씬 더 늘씬한 미녀의 허리에 손을 휘감고 그녀의 가슴팍에 돈을 꽂을 수 있다.

‘죽이자.’

이영준은 그렇게 다짐했다.

한채윤이 품 안에 은장도를 만지작거리며 웃는 것도 모르고.

10분 후…….

알을 심은 곳에서 푸른 새싹이 쑥 자라났다.

성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이계의 생물이 태어날 거다.

그 생물을 제물로 바치고 계단을 올라가 던전의 주인과 싸우면 된다.

‘그럼 매개체를 얻게 되겠지.’

조금은 궁금했다.

꼬마는 이번에 나타나는 매개체가 최상급이라고 했는데…….

‘어느 정도일까?’

잠시 후면 알게 될 일이었다.

성현의 옆에 앉아 있던 이태산이 갑자기 일어섰다.

“어디 가?”

“화장실.”

이태산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성현의 앞으로 한채윤이 절뚝절뚝 걸어왔다.

“……저기요?”

성현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자신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삐끗해서 그러는데 좀 봐줄 수 있을까요?”

“제가요?”

“좀 부은 것 같아서요.”

그녀는 성현의 앞에 앉아 양말을 벗었다.

짧은 반바지 사이로 그녀의 허벅지가 살짝 보였다.

성현의 시선을 완전히 돌리기 위해서다.

그녀가 성현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그리고 자신의 발목을 가리키며…….

“아까부터 여기가 계속 아팠어요. 혹시 진통제 같은 것 있으면…….”

“눈으로 볼 때는 아무 이상도 없는데요?”

“아뇨, 여기가 정말 아파요. 만져 보세요.”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약이나 드릴게요.”

성현은 가방의 지퍼를 열고 이계 시장에서 사 온 진통제를 찾았다.

그 순간 성현의 뒤에서…….

“죽어!”

이영준이 성현의 등에 칼을 찔러 왔다.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이영준과 한채윤의 속셈을 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이해했다.

이곳은 인간의 법과 윤리가 통하지 않는 던전이다.

살기 위해 사람을 방패로 사용하고 배가 고프면 인육을 먹기도 한다.

이기적인 놈들의 본능만 득실거리는 곳…….

이런 곳에서 이영준과 한채윤 정도의 속셈은 귀여웠다.

하지만 그것도 그 속셈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나 귀여운 거다.

후우우웅!

성현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이영준의 공격을 피해 버렸다.

그리고 서늘한 시선으로 이영준을 향했다.

“이익!”

이영준은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 봤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순한 줄 알았는데…….’

성현이 강하기는 했지만 이영준, 한채윤에게는 친절했다.

그런데 지금 성현은 두려울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전혀 없는 것 같은…… 그래, 마치 기계 같았다.

‘이게 본모습인가?’

이영준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 살아야 해!’

그는 인상을 쓰고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젠장! 죽어, 이 새끼야! 죽으라고!”

하지만 칼은 닿지 않는다.

허공만 가를 뿐이다.

그리고 텁, 성현의 손에 이영준의 팔목이 잡혔다.

이영준이 울 것 같은 눈으로 말한다.

“사, 살려 주세요.”

성현은 대답 대신 승려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이영준이 더 거세게 외쳤다.

“살려 달라고!”

스아악!

이영준은 자신의 손이 허전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툭, 뭔가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시선을 옮겨 보니…….

땅바닥에 손이 떨어져 있었다.

“아…… 아…… 아…….”

이영준은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도망치고 싶었고 살고 싶었다.

하지만…….

콰아아악!

성현의 손에서 나타난 라이트닝 볼이 이영준의 입에 쑤셔 넣어졌다.

“꾸에에에엑!”

한참을 바르르르 떨던 이영준은 그대로 무너졌다.

바닥에 쓰러져서도 계속해서 몸을 떨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성현의 눈빛은 무심했다.

“아, 악마…… 악마야…….”

뒤에서 한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현이 중얼거렸다.

“……악마라고?”

불과 몇 달 전, 성현이 있던 곳은 지옥 같았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몸을 파는 아이가 있었고 정치인이 먹다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다 먹는 사람도 있었다.

굶주림은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몰아세웠고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또 죽였다.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한 가지의 룰이 있었다.

살심을 갖고 덤비는 사람이 있다면 살려 두지 마라.

살려 둔다고 감사해 하지 않는다.

놈은 언젠가 반드시 보복할 거다.

그러니까 죽여라.

성현의 시선이 천천히 한채윤에게 옮겨졌다.

한채윤이 뒤로 물러선다.

“난…… 난 몰라! 난 아무것도 몰라! 쟤가 제 멋대로 지랄 한 거야! 모른다니까? 정말이야! 믿어 줘!”

성현의 눈동자가 그녀의 발목으로 향했다.

“멀쩡하네?”

그녀가 아프다고 했던 발은 정상이었다.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고 이어서 온 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666개로 이뤄진 계단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열 계단 정도 올랐을 때…….

드드드드!

계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쇠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 제물은 생명의 희생이다.

-제물의 피로 제단의 죄를 씻으리라.

-완성의 제물로 생명을 받아들이겠다.

-불사의 노예가 그대를 기다렸노라.

그녀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160에 45kg 정도 되던 그녀의 몸은 어느새 100kg, 150kg으로 보였다.

“사…… 살려 줘…….”

그러다가…….

“뿌에에에!”

퍼어어엉! 터져 버리고 말았다.

투투툭!

계단은 그녀의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성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불사의 노예라고?’

이 던전의 주인 이름이다.

그리고 성현은 불사의 노예를 알고 있었다.

아니, 이놈을 소환마로 사용하던 사람을 알고 있었다.

바로 지연우의 동료였던 오진구였다.

‘불사의 노예라……. 지금까지 모은 스텟이 얼마나 있지? 모조리 스피드에 추가.’

남은 스텟은 4였다.

그 모든 것을 스피드에 추가했고.

-스피드가 16에서 20으로 상승했습니다.

스피드만 올려서 좋을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균형이 잡혔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극단적인 불균형이 필요했다.

상대는 불사의 노예…….

‘그런 칭호를 받는 주인은 단 하나지.’

인간의 왕이었던 자, 하지만 왕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신이 되기를 갈망했던 자.

그는 신이 되기 위해 세상을 처녀의 피로 물들였던 재앙이었고 신은 그에게 저주를 내렸다.

살과 근육이 썩어도 죽을 수 없으며 백골이 가루가 될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하는 끔찍한 저주.

‘오미로 베루스.’

놈의 약점은 스피드였다.

그리고…….

“문지기의 팔찌 사용.”

문지기가 숨겨 둔 팔찌는 하루에 한 번. 10분간 모든 스텟을 +5 할 수 있다.

성현의 스텟 평균이 17.12로 솟아올랐다.

몸의 감각은 공기의 흔들림도 느낄 정도로 예민해졌고 근육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성현의 손에 전기가 파직거렸다.

‘좋아.’

몸의 점검을 끝낸 성현이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람 갈리는 소리가 ‘쐐애애액!’ 하고 들려왔다.

계단의 가장 위, 지름이 2m쯤 되는 마법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백골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오미로 베루스였다.

그런데 한채윤이 터져 죽은 순간이었다.

마법진에 금빛이 일렁이더니 백골의 손가락이 꿈틀댔고 눈동자가 있던 어두운 곳에 시퍼런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오미로 베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효했다.

-크아아아악!

그 키가 약 3m.

포효하는 목소리가 동굴 전체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때…….

“헤이!”

오미로 베루스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어느새 계단 끝까지 올라온 성현이 보였다.

-하찮은 인간이 나를 깨웠는가?

오미로 베루스의 눈에 불꽃이 번쩍일 때 성현이 슬쩍 웃었다.

“고마워해라. 죽여 주마.”

-……!

성현의 손에 있던 라이트닝 볼이 오미로 베루스의 얼굴에 처박혔다.

꽈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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