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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53화 (53/252)

53화

잠시 성현을 바라보던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틀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닥이다.

-그런데 이건 뭐지?

바닥에는 쇠사슬이 놓여 있었다.

마리안느를 옥죄고 있던 것으로 길이는 약 5m, 닿는 대상의 마력을 없앨 수 있다.

“무기로 쓸 수 있을까 해서 가져왔어.”

-무기?

성현이 쇠사슬을 향해 가며 답했다.

“영화를 보면 쇠사슬을 갖고 싸우는 사람이 있어. 그걸 떠올리면서 생각해 봤는데, 이 끝부분에 손잡이를 만들면 가능하지 않을까? 휘둘러서 싸우는 거지.”

성현이 무릎을 꿇고 쇠사슬을 손에 쥐었다.

마력이 쭉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쇠사슬에 맞은 상대는 그만큼의 타격을 입을 게 분명하다.

성현이 조용히 웃었다.

“이런 무기는 사기나 마찬가지지.”

* * *

다시 던전이었다.

창고에서 나온 성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토벌대는 던전 곳곳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건물에도 들어가고 골목을 두리번거리고, 숨겨진 아이템을 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수색이 끝나야 던전에서 나갈 수 있다.

성현은 그들의 수색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모닥불 앞에 앉았다.

혼자서 휴식을 취하는 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얄미울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불편한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김보명과 염준안을 통해 성현의 활약을 들었기 때문이다.

던전 토벌의 일등 공신은 휴식을 취할 자격이 충분했다.

“하…….”

서은서가 한숨을 내뱉으며 성현의 옆에 앉았다.

그녀가 긴 머리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오진구를 죽인 것, 환각 상태에 빠진 토벌대를 구한 것, 그거 모두 제 공으로 올라갔어요.”

“아, 괜찮아요.”

성현은 아쉽지 않았다.

애초에 이 던전에 들어온 게 불법이다.

그리고 오진구를 죽인 게 자신이라는 것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조금 더 조용하고 은밀하게 지연우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잠시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러다가 잠시 후, 서은서가 모닥불에 나무를 던지며 입을 열었다.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있죠?”

그녀는 성현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던전에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지휘를 맡게 됐다.

게다가 그녀의 생각에 성현은 예지 능력자다.

신분 정도야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다.

성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럼 제 목표도 알고 있나요?”

“조금은.”

그녀의 목표는 페이트 길드의 마스터가 되는 거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막내가 후계를 노리는 것은 확률 제로의 게임이다.

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그 자리를 노리고 있다.

“그럼 말하기 편하겠네요.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오빠와 언니들이 저를 경계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지금껏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당연히 그녀의 형제들이 경계할 게 분명하다.

그녀가 한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성현 씨는 예지 능력이 있잖아요. 제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말해 줄까요?”

그녀는 분명 망설였다.

미래를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뇨, 됐어요. 생각해 보면, 성현 씨가 무슨 미래를 봤는지 몰라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내가 실패하는 미래라고 해도 난 계속 도전할 거니까요.”

“계속 도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좋은 결과라……. 그 말 참 좋네요.”

그녀가 조용히 미소를 그렸다.

멀리서 퇴각을 준비하라는 토벌대장의 목소리가 던전을 울리고 있었다.

* * *

“다…… 죽었다고요?”

토벌대는 퇴각했다.

그리고 집결지로 사용하던 학교.

교무실에 서 있던 서은서는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던전을 빠져나오며 그녀가 고민했던 것은 하나다.

앞으로 언니와 오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런데 뜬금없는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오진구의 팀원이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경비를 서던 페이트 길드의 길드원과 경찰까지 모두 사망했다.

사망자는 총 23명.

서은서가 머리를 헝클었다.

“이 정도 인원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수 있어요.”

랭커, 적어도 30위 안에 드는 사람일 거다.

“그 사람들의 알리바이를 조사하세요.”

“할 필요 없어요.”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은서가 고개를 틀자 오빠 서준식이 있었다.

긴 코트를 멋스럽게 입은 그가 다가오며 말했다.

“네가 던전을 왜 들어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생각이 없던 직원은 허리를 굽힌 뒤 다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만큼 서은서를 바라보는 서준식의 눈은 싸늘했다.

그가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뭐? 알리바이? 더 나서지 마. 그리고 여기 상황은 종료됐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서울로 올라가.”

“……종료라고?”

“언론에는 짐승이 나타나서 다 죽인 것으로 보도될 거야.”

“오빠! 칼에 베인 흔적이 명확해! 그런데 짐승이라고?”

서은서의 목소리가 커지자 서준식이 차갑게 웃었다.

“왜? 너도 후계에 관심 있냐?”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그렇지 않으면 닥치고 있어. 회사를 흔들어서 기회를 만들려 하지 말고. 거지새끼 몇 마리 죽은 것으로 호들갑 떨지 마!”

무려 23명이 죽었다.

몰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길드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서준식은 그것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그 태도와 방식이 잘못됐다.

“……거지새끼 몇 마리?”

“어. 알았으면 꺼져.”

서은서는 한숨을 내뱉으며 서준식의 옆을 스쳤다.

문 앞에 선 그녀를 향해 서준식이 말했다.

“은서야……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언니 오빠 싸움에 끼지 마라. 난 너 죽이기 싫다.”

서은서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

“알았어, 오빠.”

“그래, 난 네가 계속 착한 동생으로 남아 줬으면 한다.”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오빠.”

“집에 가면 맛있는 거 사 줄게.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먹자.”

“고마워.”

그녀는 미닫이문을 열고 교무실을 벗어났다.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살짝 지었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졌고 눈빛이 싸늘해졌다.

‘미친 새끼.’

복도를 걷던 그녀는 휴대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네, 서은서입니다.”

-유성현입니다. 학교죠? 제가 지금 2층에 있거든요.

2층은 오진구의 팀원이 잡혀 있던 곳이다.

그리고 폴리스 라인 너머에 성현이 앉아 있었다.

“여긴 어떻게……?”

살인 사건 현장은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

경찰이나 연맹, 페이트에서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자만 들어올 수 있다.

그런데 성현이 멋대로 들어와 시신을 살피고 있으니 웃기기만 했다.

성현이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강진안요.”

그녀가 성현에게 발급해 준 가짜 신분증이다.

“소속이…… 전략 기획 본부였네요?”

“네, 덕분에 편하게 들어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분증이 아니었다.

성현이 사망한 자의 목을 가리키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고속으로 휘둘렀어요. 그런데 일부러 여기서 칼을 비틀었어요.”

“……왜?”

“피가 튀게 만든 거죠.”

“일부로요?”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짓을 좋아하는 변태 새끼는 몇 명 있죠. 그런데 고속으로 칼을 휘두르다가 순간적으로 날을 비틀 수 있는 사람은 딱 1명뿐이에요.”

“누구죠?”

“오즈.”

서은서의 눈이 떨려 왔다.

오즈,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녀도 들어 본 적이 있다.

“미치광이?”

“네, 상대가 오즈가 맞는다면 증거는 없을 겁니다. 미친 것 같아도 꽤 치밀하니까요.”

성현이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조심하세요. 오즈가 오진구의 팀원을 타깃으로 삼은 이상 팀장님도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어요.”

서은서는 오진구를 죽인 사람으로 되어 있다.

오즈가 그녀를 노릴 수도 있다는 거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녀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녀는 이번 토벌에서 마리안느를 두고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었다.

그런데 오즈 역시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압도적인 미치광이.

성현이 손을 툭툭 털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네?”

“오빠요. 서준식 본부장.”

“글쎄요. 별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성현이 그녀의 옆을 스치며 말했다.

“본부장을 그대로 놔두면 안 좋을 거예요.”

* * *

낙엽이 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해의 겨울은 참 많은 눈이 내렸다.

고 3의 관심사는 딱 하나다.

“합격했어?”

“어디 갈 거야?”

“난 재수하려고.”

대학 합격 여부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성현은 달랐다.

애초에 대학에 갈 생각이 없었고 지금 중요한 것은 카니발이었다.

16명이 벌이는 살육의 파티.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성현의 앞에 섰다.

-마지막으로 물어보지. 괜찮겠느냐?

“어.”

-그대가 못 나올 수도 있다.

“시간이 없어.”

조금 있으면 세상은 큰 변화를 맞이할 거다.

그 전에 더 강해져야 한다.

더 빨리, 더, 더!

그러기 위해 경기도 양평의 단독주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북한강이 보이는 곳, 독의 아버지라 불리는 서동길의 자택이었다.

최근 시간만 나면 그를 찾아와 독에 대해 배우는 중이다.

지금은 가장 기초인 독의 제조.

한창 독을 빻던 성현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정말 악명을 쌓을지도 모르겠어.’

지르힐의 번개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준다.

거기에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가진 호칭의 권능은 강령술과 피를 이용한 스킬, 강령술과 피는 대대로 악당들이 사용하던 기술이다.

그런데 독까지 이용하면…….

‘악마지.’

악마라 불렸던 구악, 이번에는 진짜 악마가 될지도 모르겠다.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상념은 그만.’

지금은 집중할 때다.

성현은 독초를 피워 연기를 냈고 그 연기를 바람에 실리게 했다.

하지만…….

“다시!”

서동길의 거친 목소리에 성현이 움찔거렸다.

“그 책에 그렇게 써 있더냐!”

성현의 앞에는 너덜너덜한 책이 있었다.

서동길이 한평생 적어 온 비급이다.

성현이 입을 삐죽였다.

“거참…… 글씨나 예쁘게 쓰시지. 그리고 또 ‘읍니다.’ 는 뭐예요?”

“옛날에는 ‘읍니다.’ 그렇게 썼어! 이놈아!”

“에이.”

성현은 다시 비급을 넘기며 독공에 집중했다.

“드시겠어요? 파전 했거든요.”

연습이 끝난 뒤 성현은 파전을 가지고 마당으로 나왔다.

서동길이 정자에 앉아 있었다.

“막걸리는?”

“있죠.”

성현이 품에서 막걸리를 흔들어 보였다.

서동길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환하게 웃는다.

“냉장고에 가면 열무김치 있다. 그것도 가져와라.”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성현은 사이다를 마셨고 서동길은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다가 서동길이 사이다를 손에 쥐었다.

“사이막이라고 아느냐?”

“네?”

“젊을 때 막노동을 하면서 먹었던 거지.”

서동길이 막걸리에 사이다를 부었다.

한껏 마시며 기분 좋게 웃는다.

“이 맛이지, 흐흐흐.”

서동길의 시선이 북한강으로 향했다.

“내가 왜 너를 제자로 받았는지 아느냐? 너도 나와 비슷한 것 같아서야.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지. 주변에 다른 말이 같이 달리고 있지만 네 눈에 보이지 않을 게다. 외롭고 또 외롭지.”

“…….”

“이 나이까지 달려 보니까, 남은 게 없어. 넓고 큰 집에 가면 뭘 하나? 날 맞이해 주고 기다리는 것은 딱 하나, 죽음뿐인데.”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경주마처럼 열심히 산 것에 대한 후회.

그가 성현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넌 즐겨라.”

“노력할게요.”

“노력이 아니라 즐기라고.”

“일단 목표는 이뤄야죠.”

“목표는 이루는 게 아니야. 지나가는 정류장이지. 분명히 다음 목표가 생길 게야. 그러니까 즐겨. 미성년자일 때 술 도 좀 마시고.”

은근슬쩍 성현에게 잔을 내밀고 있다.

혼자 마시는 게 적적한 모양이다.

그걸 보며 성현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그런데 스승님.”

“왜, 이놈아.”

“제가 서준식을 잡아도 됩니까?”

“네놈이 준식이를?”

“네.”

서동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굳은 얼굴로 성현을 살핀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난 그놈이 페이트의 수장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넌 준식이를 이길 수 없어.”

“있다면요?”

“있다면…… 목숨만 살려 줘라.”

그게 끝이었다.

서동길은 막걸리를 입에 대며 껄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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