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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54화 (54/252)

54화

성현은 다시 독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성현의 독에 대한 이해력은 서동길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독을 만들고 조합하는 것도 그렇지만 독을 공기 중에 살포하고 포집하는 능력은 서은서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대단해.’

서동길은 막걸리를 마신 후 기분이 좋은 듯 껄껄껄 웃었다.

뒤늦게 얻은 제자가 쑥쑥 성장해 가는 게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성현은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도 서동길의 비급을 붙잡고 있었다.

읽을수록 감탄만 나왔다.

독에 대한 지식은 세계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현은 잠시 회귀 전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서동길의 사후, 그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비급이 세상에 공개됐다.

하지만 공개된 것은 일부였다.

나머지는 불에 탔거나 없어졌다.

‘하지만 그 일부만으로 ‘독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어.’

성현의 시선이 다시 비급으로 향했다.

‘그런데 난 지금 비급의 전부를 읽는 중이야.’

심지어 내용 중에는 서동길조차 달성하지 못하고 이론만으로 정립해 둔 것도 있었다.

‘만약 내가 그 이론을 달성한다면…….’

성현이 책을 꽉 쥐었다.

지금까지는 지연우의 발목을 잡아채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성현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해지는 중이다.

조금씩 놈의 숨통을 끊어 버릴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책을 쥔 성현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 * *

-마스터께서 내년도 인사에 대한 의중을 내비치셨습니다. 주요 사항으로…… 서은서 팀장이 부장으로 진급할 것 같습니다.

페이트 길드, 서준식 본부장실.

소파에 앉아 전화를 받고 있던 서준식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은서가 부장이라고?”

20대 초반의 나이에 차장을 달고 팀장 놀이를 한 게 1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부장…….

아무리 오너 일가라 해도 지나치게 빠른 승진이다.

서준식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어떤 일을 맡을 것 같지?”

-정확한 업무는 모르겠지만 전략기획실에서 일할 것 같습니다.

통화가 종료됐다.

서준식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구겨지고 있었다.

전략기획실이면 길드의 핵심이다.

그곳에 부장을 달고 들어간다는 것은 서은서 역시 후계 구도에 올랐다는 거다.

서준식은 쯧, 혀를 차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도대체…….’

아버지 서문길 마스터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우애를 돈독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형제들의 전장을 만드는 게 아버지다.

능력 있는 사람이 길드를 맡아야 한다, 장남이라고 안심하지 마라, 여자라고 안 물려 주는 것 아니다 등등…….

그런데 이제는 서은서까지 전장에 참여할 것 같다.

‘젠장.’

마스터를 향한 왕좌의 게임, 아직은 서준식이 가장 유리한 고지에 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위태하다.

아버지의 변덕에 의해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게다가 최근 부여 던전 이후가 문제다.

서은서를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따듯하게 변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서준식이 담뱃재를 툭툭 털며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

이계에서 온 초대장 하나가 보였다.

‘카니발이라…….’

참석 여부는 자유다.

하지만 참석하지 않으려 했다.

개나 소나 몰려들어 치고받고 싸워야 하는 곳, 거지같은 놈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리의 보상이 거스르기 힘들었다.

서준식은 다시 초대장에 적힌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초대장을 사용시 카니발에 참여할 수 있다.

-개인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상대의 스텟을 일부 흡수할 수 있다.

-최종 우승 시 스텟 +30을 보너스로 지급한다.

-최종 우승자에게 총 베팅 금액의 1%를 우승 상금으로 지급한다.

-최종 우승자에게…….

수많은 보상들이 있었다.

평범한 계약자라면 이것만으로도 로또를 외치며 무조건 참석을 했을 거다.

하지만 서준식이 흔들리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이 초대장을 가진 자가 최종 우승을 했을 경우 페이트 길드 지주사 지분 1%를 지급한다.

서준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주사 지분? 1%?’

지금 그는 자신의 자리를 위태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라는 지분이 손에 들어오면 숨을 돌릴 수 있을 거다.

같은 시각, 수원의 다세대주택.

퍽! 퍽! 퍽!

머리를 하얗게 탈색하고 벌거벗은 남자가 여자의 뒤통수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이주안, 그가 여자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긴 후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씨×, 내가 큰 돈 요구했냐? 800만 원이 없어?”

“며칠 전에도 200 가져다 썼잖아! 그동안 가불한 게 많아서 더 안 해 준대. 다 네 탓이야, 이 새끼야!”

여자는 맞으면서도 비명처럼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주안의 눈이 번뜩였다.

“이런 병신 같은 썅×이 말대답을 하고 있어, 내가 안 갚는데? 한 방에 돈 벌어 준다고 했잖아! 하는 일만 아니면 네 얼굴 아작났어.”

퍽!

여자가 축 처졌다.

그러자 이주안은 씩씩거리며 다 낡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화가 풀리지 않는지 입에서는 여전히 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같이 살아 주면 고맙다고 생각해야지, 병신×이.”

이주안이 기절한 여자의 배를 발로 차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상품은 아껴야지.”

대신 그는 여자의 몸 위로 툭툭 담뱃재를 털었다.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카니발에 초대되었습니다. 초대장을 확인하려면 창고로 오세요.

이주안은 창고로 이동해 초대장을 들고 다시 현실 세계로 빠져나왔다.

‘초대장?’

담겨 있는 내용은 ‘스텟 +30을 보너스’로 준다는 등 서준식이 받았던 것과 비슷했다.

다른 점은 마지막이었다.

서준식이 받은 초대장의 마지막 내용은 ‘페이트 길드의 지주사 지분 1%’였다.

그런데…….

-최종 우승 시 빚을 전액 탕감해 주고 벤틀리를 지급한다.

“벤틀리?”

그가 낄낄낄 웃기 시작했다.

이주안, 대짐승 진압 부대 출신으로 짐승을 잡으며 민간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러 쫓겨나게 됐다.

역사가 그대로 흐른다면 지연우에게 잘 보여 정치인이 된다.

즉, 국민에게는 개새끼지만 지연우에게 필요한 법안을 따박따박 상정하던 꼭두각시.

그가 카니발에 응했다.

“당연히 가야지.”

그리고 성현은 창고에 있었다.

호칭의 권능에 독을 합치는 수련을 하는 중이다.

손가락을 살짝 베자 핏방울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이어서 성현은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병에서 회색 연기가 흘러나오더니 핏방울과 합쳐졌다.

‘좋아. 가라!’

독과 합쳐져 검게 물든 핏방울이 탄환처럼 쏘아졌다.

쐐애액!

타깃은 오미로 베루스였다.

퍽!

오미로 베루스가 움찔거렸고 성현이 물었다.

“어때?”

오미로 베루스가 광대뼈를 긁적였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대답이다.

“됐어. 들어가서 쉬어.”

-크르르르.

오미로 베루스가 사라졌다.

그러자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나타났다.

성현의 수련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거다.

그녀가 입을 연다.

-속속 참가 신청이 이뤄지고 있다. 방금 이주안이라는 놈이 신청했다.

성현이 픽 웃었다.

“그놈은 고민 없이 신청할 것 같았어. 그런데 서준식은?”

-아직 고민하는 눈치다.

딱 성격대로 움직인다.

이주안 같은 놈은 생각 없이 냅다 신청하고 서준식은 고민에 고민을 이어 가는 중이다.

하지만 서준식은 결국 참가하고 말 거다.

‘페이트 길드가 돌아가는 상황이 서준식에게 좋지 않아.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기 마련이지.’

지르힐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대, 참가자들에게 전한 마지막 메시지를 책임질 수 있는가?

“어떤 거? 지분 1%? 벤틀리?”

-그래. 자동차까지는 그대가 가진 자산으로 가능하다 해도 지분 1%는 책임질 수는 없다. 만약 서준식이 우승하면 어쩌려고 그러지?

그들에게 전해진 마지막 문구는 주체자인 성현이 직접 적은 거다.

놈들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반드시 참가하도록…….

그리고 우승자가 결정되면 그 책임은 성현이 져야 한다.

그것은 성현이 카니발에서 죽더라도 어쩔 수 없다.

가까운 사람이 강제로 책임져야 한다.

-그대는 그럴 수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가?

“만약 서준식이 우승하면 던전을 팔지, 뭐.”

-어?

“지금 던전을 소유한 사람이 전 세계에 나 말고 없을걸. 그럼 그 값이 어떨 것 같아? 지분 1%는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황당하게 변했다.

지금껏 던전을 가진 사람이 없었으니 듣도 보도 못한 사고방식이었다.

성현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질 생각은 없어.”

-뭐라?

“무조건 이길 거야. 아니, 이겨야 해.”

-무조건?

“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성현은 다시 수련을 시작했고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지금 성현의 힘으로는 서준식은 물론이고 이주안도 이기기 힘들다.

그들과 성현의 힘 차이는 크다.

하지만 성현이라면 이번에도 뭔가를 보여 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까마귀가 우는 탑, 구름을 뚫고 올라선 그곳의 최상층.

그곳엔 발가벗겨진 채 쇠사슬에 묶인 지르힐이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인간 주제에 기대하게 하고 있어.”

* * *

카니발이 열리기 하루 전, 성현은 이계 시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에 꼬마의 노점에 들렸다.

광주 던전을 클리어한 이후로 처음이다.

꼬마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성현을 바라봤다.

“호칭을 얻었네요?”

“어.”

“그거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죠?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이미 존재의 세상에 소문이 쫙 났거든요. 아, 쫙 났다고 하면 좀 이상하나? 그래, 알 존재는 다 알아요. 난리가 났다고요!”

꼬마는 입가에 잔뜩 낀 미소를 거두지 않았고 성현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마리안느와 싸우던 날, 그 병원의 옥상에 박혀 있던 존재들의 눈동자, 그것들은 분명 성현을 관찰하고 있었다.

꼬마가 말을 잇는다.

“게다가 이번에 카니발을 연다면서요?”

“참관할 건가?”

“그럼요.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데요! 베팅도 할 거예요.”

뭐가 신이 났는지 꼬마는 말이 많았다.

쓸데없는 말로 한참을 떠들다가 손뼉을 짝 쳤다.

“아, 지금 고객님을 노리는 존재가 많아졌어요.”

“날 노려? 재밌네.”

성현은 정말로 재미있다고 느꼈다.

인간의 세상에서 성현은 존재감이 없다.

그런데 존재들의 세상에서 존재감이 생기고 있다니.

성현의 시선이 꼬마에게 향했다.

“너도 날 노리고 있나?”

“난 좋은 의미로 노리고 있죠. 그건 그렇고 카니발에 참여하는 인간들을 살펴봤거든요?”

꼬마는 정보 상인이다.

경마장에서 경마지를 파는 것처럼 카니발에 참여하는 인간들의 정보를 모아 존재들에게 팔고 있었다.

그가 계속 말했다.

“이길 수 있겠어요? 이 세상은 레벨이 깡패예요. 참가하는 인간들 중에 스텟이 가장 낮은 것 같던데…….”

“됐고. 필요한 물품을 말하지.”

꼬마의 말을 더 들어 줄 시간이 없었다.

성현은 필요한 물품을 이야기했고 꼬마의 표정은 점차 상기되어 갔다.

“당신…… 또 뭔가를 저지르려 하고 있군요?”

“물건이나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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