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 * *
-카니발이 준비되었습니다.
-대기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귓가에 메시지가 들려왔다.
창고에 앉아 있던 성현은 눈을 떴다.
앞에는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 조심하거라.
카니발은 인간과의 싸움, 짐승을 상대로 한 싸움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짐승은 본능에 따르지만 인간은 야비하다.
짐승은 배가 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지만 인간은 탐욕을 채울 때까지 사냥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이유 없이 상대를 죽이기도 한다.
카니발은 그런 인간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다.
어떤 변수로 인해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었다.
성현은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걱정하지 마.”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방 하나를 어깨에 짊어졌다.
그의 모습이 곧 스르륵 사라졌다.
성현이 도착한 곳은 산 중턱에 있는 고즈넉한 사찰이었다.
수백 년이 넘은 건축물과 불상 그리고 성현을 포함한 16명의 남녀가 보였다.
성현은 낙엽이 쌓인 탑에 등을 기대고 주변을 살폈다.
‘소아 성애자 박준영, 기둥서방 이주안 그리고…….’
저 멀리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 서은서의 오빠 서준식도 있었다.
저들은 모두 지연우의 부하가 된다.
그리고 갖가지 쓰레기 짓을 하고 다닌다.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고 매일 밤 술에 취해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하지만 아직은 먼 미래다.
지금 저들은 서로를 모른다.
그리고 지금부터 저들의 미래는 틀어질 거다.
성현이 막아 낼 생각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곳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머리를 하얗게 탈색한 기둥서방 이주안이었다.
그가 담배를 입에 물며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저 모자를 쓴 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서은서의 오빠 서준식이었다.
모자를 눌러써서 누구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느껴지는 기세만 봐도 알 수 있다.
‘엄청난 실력자야. 일대일로 붙는다면 열에 아홉은 내가 질 것 같아.’
이주안은 쯧, 혀를 차며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만만한 놈이 없다.
다들 한가락씩 하는 게 느껴진다.
‘단 한 놈을 제외하고.’
그의 시선에 성현이 담겼다.
제법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얼굴이 앳되다.
게다가 걸치고 있는 장비를 봐도 허접하다.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낡은 도끼로 보였고 팔찌나 반지를 봐도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다른 참가자와 달리 폭력적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권능 이해도가 아직 20%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주안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저놈은 제물이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그 생각은 이주안만 하는 게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곁눈질로 성현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똑같았다.
‘저 새끼랑 붙었으면 좋겠어.’
‘저놈을 준비운동으로 삼으면 딱인데.’
‘먹이다. 먹이야!’
그들은 모두 성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잠시 후, 모두의 머릿속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카니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니발은 토너먼트 대전으로 이루어집니다.
-승패는 전투 불능 및 항복 선언에 따라 결정됩니다.
-승리할 때마다 숨겨진 보너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전투 외에도 숨겨진 퀘스트가 있으니 마음껏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대전 상대는 메시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전투 장소로 이동할 겁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사람들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 * *
-잠시 후, 카니발이 시작됩니다.
-거짓의 군주 카디르버께서 방청을 신청하셨습니다.
-폭식의 여왕 맨티스께서 방청을 신청하셨습니다.
-낫을 든 마녀 아리께서 방청을 신청하셨습니다.
존재의 이름이 계속해서 불렸고 하늘에는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세상을 살피며 카니발에 참가한 계약자들을 쫓고 있었다.
성현이 서 있는 곳은 형광 등이 깜빡거리는 지하 상가였다.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통로에 휴대폰과 옷, 신발, 화장품 가게 등이 가득했다.
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카니발에 참여한 사람도 없었다.
서로 떨어진 상태에서 상대를 찾아 싸우고 사냥하는 게 카니발이다.
성현은 텅 빈 가게와 물건을 슥 둘러본 후 가방을 열고 무기를 살폈다.
가장 먼저 활이 눈에 들어왔다.
성현은 활을 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은 지하상가, 피하고 숨을 곳이 많다.
몇 걸음만 이동해도 다른 골목이 보였고 가게의 매대는 훌륭한 방패가 될 것이다.
개활지에 비해 파괴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효과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위협은 충분히 줄 수 있어.’
성현은 활을 꺼낸 뒤 화살촉에 준비한 독을 발랐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지형에 최적화된 무기를 고민했다.
이곳에 모인 계약자 중에 성현이 만만하게 생각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구와 싸우던 최선을 다해 이기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그게 이기적이든 치사하든 상관없다.
‘트랩이 괜찮겠어.’
미로 같다는 것은 숨을 곳이 많다는 뜻, 암기와 함정이 최고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성현은 거침없이 밧줄과 그물을 꺼냈다.
“저기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하게 생긴 2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성현이 경계의 눈빛을 보내자 그녀가 양손을 들었다.
“윤희진이라고 해요.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동맹을 맺는 게 어때요? 동맹을 맺지 말라는 규정은 없었어요.”
“그래서요?”
“우리 둘이 동맹을 맺고 힘을 합쳐 상대를 공격하면 적어도 1라운드는 통과할 수 있을 거예요. 우승은 못하더라도 숨겨진 보너스는 얻어야죠.”
카니발은 한 번 이길 때마다 보너스를 받는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떠나는 것보다는 한 번이라도 이겨 보너스를 받는 게 이득인 거다.
“첫 대전 상대로 우리가 매칭되면?”
“그땐 어쩔 수 없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손잡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하는 말은 간단했다.
이곳은 약육강식의 세상, 약자를 생각하는 마음 따위는 없다.
짓밟혀 죽기 좋은 개미끼리 손잡아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제발요…….”
그녀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꽃뱀 윤희진.’
그녀는 착한 외모를 앞세워 상대의 골수까지 뽑아 먹는 사기꾼이었다.
지금도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다.
그녀의 손에는 언제든 성현의 등에 꽂을 칼이 준비되어 있다.
성현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좋습니다. 대전 상대가 될 때까지 함께하죠.”
성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답했고 윤희진은 생긋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혼자 무서웠거든요.”
가식적이고 의미 없는 인사를 이어 갈 때였다.
머릿속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대전 상대가 결정됐습니다.
-상대는 7번입니다.
‘7번?’
이곳에는 이름이 아니라 넘버를 사용한다.
성현은 16번이고 윤희진은 3번.
그리고 7번은 기둥서방 이주안이었다.
‘좋아.’
윤희진도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녀가 손뼉을 치며 폴짝였다.
“다행이다! 우리 적이 아닌 거죠?”
“그러네요.”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른손을 펼쳐 주십시오.
-카니발에서 오른손은 레이더의 역할을 합니다.
-손바닥에 보이는 형광 녹색이 상대의 위치입니다.
-형광 녹색이 가운데에 올수록 상대가 근처에 있다는 뜻입니다.
성현이 오른손을 펼쳤다.
손바닥에 형광 녹색이 보였다.
그런데 거의 가운데에 찍혀 있었다.
이주안이 가까이에 있다는 뜻이다.
“그쪽 적은?”
“전 좀 멀리 있어요.”
“그럼 제가 먼저 도움을 받아야겠네요.”
성현이 다급히 펼쳐 둔 짐을 챙겼다.
그 모습을 윤희진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성현과 붙기를 원했다.
동맹이라는 말로 안심을 시킨 뒤 대전 상대로 매칭되면 곧바로 목을 그어 죽이려 한 거다.
그게 아니면 성현을 고기 방패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성현을 돕게 생겼다.
‘짜증 나네.’
하지만 그 차가운 미소는 성현이 일어서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졌다.
생글생글 착한 얼굴로 물었다.
“어떤 걸 도울까요?”
“일단…… 바닥에 물을 좀 뿌렸으면 좋겠어요.”
“네? 물요?”
같은 시각, 이주안은 넝쿨이 가득한 숲에 있었다.
대전 상대를 확인한 그는 입이 찢어질 정도로 웃고 있다.
‘됐어.’
원하던 대로 성현이 상대가 됐다.
가장 약한 먹잇감이며 한입에 꿀꺽 먹기도 미안한 놈.
급기야 웃음소리가 밖으로 터져 나왔다.
“크핫핫핫핫!”
그의 머릿속은 청사진으로 가득했다.
이미 성현을 죽이고 카니발에서도 우승한 것 같았다.
‘우승하면 로즈를 만나야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었다.
본명은 모르고 가명은 ‘로즈’, 강남 유흥가의 최고 미인이다.
한 번 만나는 데 몇 백씩 깨지지만 상관없다.
우승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이제 늙은 년은 됐어.’
그의 눈이 서늘하게 변했다.
‘돈만 있으면 다 끝이야.’
그는 대짐승 진압 부대에 있다가 사고를 치고 불명예제대 한 한 군인이었다.
지금 함께 사는 여자는 전역 후 싸구려 술집에서 만난 미희.
그녀는 5년 동안 이주안의 뒷바라지를 했다.
집의 월세는 물론이고 생활비와 용돈 그리고 로즈를 만나러 가는 돈까지 모두, 그녀가 버는 돈으로 해결해 왔다.
하지만 이제 끝이다.
이주안이 낄낄낄 웃었다.
“끝이야, 씨×.”
그러는 동안에도 시스템 메시지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1라운드 16번 VS 이주안.
-16번이 승리할 확률 : 69%.
-이주안이 승리할 확률 : 31%.
이주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니발에서 존재들이 돈을 거는 것은 알고 있었다.
16번은 성현이다.
그런데 승리할 확률이 이주안보다 성현이 높단다.
비슷한 것도 아니다.
이 정도면 압도적인 차이다.
‘그 얼빵한 놈이?’
이주안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존재들이 눈이 삐었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여 주마!’
한참을 걷던 이주안은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 앞에 섰다.
‘놈은 이 안에 있다는 것인가?’
손바닥에 있는 형광 녹색은 분명 이 앞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앞은 개활지이며 보이는 사람은 없다.
그럼 성현은 이 지하에 있다는 것.
이주안은 저벅저벅, 지하로 들어갔다.
지하는 작은 점포로 가득했다.
‘신발, 옷…….’
은폐 엄폐할 수 있는 공간이 많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운 후 걷고 있는데 ‘피잉!’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이주안은 곧바로 몸을 틀었다.
서 있는 바로 옆 간판에 화살이 ‘퍽!’ 하고 꽂혔다.
이주안은 곧바로 화살의 궤적을 좇았다.
그는 프로다.
그것도 대짐승 진압 부대에서 매일같이 전쟁을 치르던 프로 중의 프로.
비록 5년 동안 놀고먹었다지만 그 감각은 아직 살아 있었다.
‘화살이 날아온 곳은 저기야.’
이 궤도로 화살을 쏘아 맞히려면 저 한 곳이 전부다.
휴대폰 가게의 매대, 상대는 저 뒤에 숨어서 활을 당기고 있을 거다.
‘위치만 알면 끝이지. 어린애 목 따는 것쯤이야.’
이주안은 정글도를 꽉 잡았다.
그리고 파아아앙, 빠르게 달렸다.
상대에게 항복 선언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포로는 귀찮기만 하다.
그냥 죽일 생각이다.
그리고 단번에 화살이 쏘아진 매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
없다.
매대에는 활만 놓여 있다.
그리고 물이 묻은 신발을 신었는지 작은 발자국이 보인다.
약 225mm, 여자다.
이주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16번은 분명 성현이었다.
그런데 여자라면 말이 안 된다.
‘소환마를 쓴 것인가? 그럼 이 활은 미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헤이?”
이주안이 다급히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늦었다.
파직거리는 전기가 그의 얼굴에 처박히고 있었다.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