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금고 안에는 볼펜 크기의 막대가 보였다.
색은 어두운 갈색, 이 막대가 창이다.
평소에는 품에 넣고 다닐 수 있게 작은 크기지만 마력을 주입하면 길죽하고 날카롭게 변할 거다.
‘일단 첫 고비는 넘겼어.’
다음 문제는 그 길이와 강도다.
마력을 주입했는데 창의 길이가 30cm 정도 길어진 후 멈출 수도 있다.
어쩌면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질 수도 있다.
그럼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거다.
하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야 한다.
성현은 낮게 한숨을 내뱉은 뒤 손에 든 막대에 마력을 주입했다.
* * *
철컹! 철컹!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외롭게 들리는 곳, 끝없이 높은 탑의 최상층이었다.
지르힐이 쇠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그녀의 하얀 손목에 피가 맺힐 뿐이다.
“루카누스!”
그녀의 입에서 분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카누스는 마녀 케이트를 통해 성현에게 접근했던 존재, 놈이 성현을 노리고 있다.
“감히!”
지르힐의 눈에 시퍼런 안광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루카누스를 만나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없었다.
그녀는 가둬진 상태였다.
“아아아악!”
그녀의 분노가 탑을 울렸다.
그때였다.
그녀의 귓가에 성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르힐?
성현의 목소리에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화를 참기 위해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리고 최대한 평소의 표정을 지었다.
성현의 창고였다.
그곳에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물었다.
-무슨 일이지?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어.”
-말하라.
성현이 그녀의 금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야? 기분 나쁜 일 있어? 눈빛이 평소와 다르네?”
-부탁이나 말하라.
“뭐…….”
성현이 테이블에 놓인 창을 들어 올렸다.
창날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붉은 것이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창이었다.
[새벽의 장창]
-자루의 길이 : 약 3m.
-창날의 길이 : 약 50cm.
-낮은 확률로 방어력을 무시할 수 있다.
-낮은 확률로 꼬리가 아홉 달린 늙은 여우를 소환할 수 있다.
-모든 능력치 +1
-물리력에 의한 공격력 +20%
-스킬 공격력 +20%
지르힐은 조용히 창을 살폈다.
-한눈에 알 수 있다. 좋은 무기구나.
“그래서…… 여기에 네 이름을 사용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내 이름?
존재의 이름을 무기에 새긴다는 것은 단순한 상징성을 넘어서는 일이다.
무기를 매개체로 존재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고 자격을 갖추면 존재를 소환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궁극의 무기다.
하지만 지르힐은 걱정하고 있었다.
-그대…… 내 이름을 사용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가?
그녀는 존재의 세상에서 계급이 없다.
그녀는 마녀도 아니며 여왕이나 신도 아니다.
그녀는 갇혀 있는 죄수다.
즉, 성현은 죄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인지 아느냐 물었다.
“어.”
-난 적이 많다. 너의 존재가 나라는 것이 알려지면 날파리가 꼬일 게다.
“말했잖아, 네 목표를 도와준다고.”
그녀의 목표는 존재의 멸망이다.
“어차피 다 죽여야 한다면 순서는 상관없어. 파리 떼부터 죽이면 되는 거야.”
지르힐은 한숨을 내뱉었다.
성현의 눈을 보면 도저히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무기에나 존재의 이름을 새길 수는 없다.
그녀의 마력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거다.
그녀가 다시 창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불가하다. 내 마력이 들어가면 부서져 버릴 거다.
“아쉽네.”
-하지만 훌륭한 무기인 것은 맞다. 다음, 어쩌면 그다음으로 업그레이드된 무기라면 가능할 것도 같다.
이 창을 만드는 데에만 수십 억이 들었다.
조금 더 업그레이드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돈이 들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천천히…… 조급해하지 말자.’
성현은 아쉬움을 달래며 지르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더 이야기할 것은 없는가?
“어.”
-나도 하나 이야기할 게 있다. 루카누스는 괜찮은 존재다.
“뭐?”
-루카누스는 괜찮은 존재라고 했다.
그녀는 그렇게 말을 꺼낸 뒤 조심스레 성현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다가 성현이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루카누스는…….
“안 가.”
-어?
“안 간다고. 사슴벌레로 변하기는 싫어. 그리고…….”
성현이 손을 들자 손에서 스파크가 파직거렸다.
“난 이게 제일 편해.”
-사슴벌레로 변하기 싫다고?
“난 톱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도 싫고.”
성현의 입에서 루카누스가 싫은 이유가 계속 이어졌다.
다시 끝없이 높은 탑의 최상층.
사슬에 묶인 지르힐이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분노는 완벽히 사라진 것 같았다.
* * *
성현이 마을을 떠나 초소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이창민 중사는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평소처럼 술을 마셨고 담배를 피웠을 뿐이다.
그리고 성현과 박상문 하사는 성큼 다가온 여름을 맞이해 매일같이 풀을 베고 또 베는 게 일이었다.
초소에 팩스가 도착했다.
성현에게 국방부 장관상을 시상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용히 팩스의 내용을 살피던 이창민 중사가 고개를 틀었다.
“상문아.”
“네?”
통신 장비를 수리하는 중이던 박상문 하사가 몸을 돌렸다.
“성현이 좀 불러와.”
“옙!”
박상문 하사가 계단을 걸어 아래로 내려갔다.
이창민 중사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그의 표정이 씁쓸하다.
성현은 1층의 마당에 있었다.
마당에 있는 벌집을 제거한 후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마녀 케이트와 싸웠던 일로 가득하다.
계속해서 의문이었다.
‘끝까지 싸웠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피로 만든 송곳의 숫자는 충분했고 그녀는 그게 만들어지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녀가 중간에 떠나 버리지 않았다면…….
‘정확히 타격할 수 있었어.’
그녀는 그 공격을 견뎠을까?
‘만약 견뎠다면…….’
성현은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져 봤다.
동그란 펜던트가 8개 달려 있는 금색의 얇은 체인 목걸이다.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라는 호칭을 얻었을 때 지르힐이 줬던 것.
병원에서 마리안느와 싸울 때 고리 하나를 뜯었지만 그것은 지르힐이 다시 수리해 줬다.
‘이 펜던트를 뜯으면…….’
봉인하고 있던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 그 힘이 폭주한다.
그 힘을 잘만 이용하면 이길 수도 있다고 판단됐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계약을 하고 약 1년, 벌써 마녀를 상대로 가능성을 고민할 실력이 되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고 있어.’
성현은 눈을 감고 다음 계획을 세워 봤다.
도망자의 마을을 시작으로 짐승의 땅을 점령하고 이계의 일부를 손에 넣을 생각이다.
그다음 존재와 인간 세상에 전쟁을 선포할 거다.
누가 들었다면 마왕이 인간 세상을 정복하냐며 비웃었을 계획이다.
하지만 성현은 진지했다.
불확실성 속에서 존재하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할 수 있어.’
그리고 그 계획의 시작은 조만간이다.
‘짐승의 날.’
1년에 한 번, 짐승이 미쳐 날뛰는 만월이 있다.
그날 짐승의 땅은 혼돈으로 가득 찰 것이고 꽤 높은 등급의 존재가 이 세상에 강령한다.
‘놈을 죽인다. 그리고 그 권능을 훔친다.’
성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빛이 또렷했다.
“유성현.”
박상문 하사의 목소리에 성현이 고개를 틀었다.
그가 초소를 가리킨다.
“초소장님이 보재.”
성현을 넣어 놓고 박상문 하사는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이창민 중사는 성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담배만 피워 댔다.
재떨이에는 담배가 쌓여 갔고 사무실은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성현은 이창민 중사를 보채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조용히 그 앞에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창민 중사가 몸을 틀었다.
조용히 성현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지?”
“무슨 말씀이십니가?”
“그 마을…….”
성현이 마을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 그는 이제야 그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며칠 동안 성현을 믿어도 될지,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도 될지 엄청난 고민을 한 게 느껴졌다.
하지만 먼저 움직인 것은 성현이었다.
“초소장님이셨죠?”
“뭐?”
“마을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먹던 음식, 어디서 났겠습니까?”
오중찬을 죽이고 마을 밖에 숨었을 때였다.
성현에게 감사하다며 보답으로 빵을 준 노인이 있었다.
그가 건넨 빵, 그것은 미끼로 사용되던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이창민 중사가 물건을 옮기는 권능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초소장님은 성칠음에게 뇌물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음식을 사셨죠. 그 음식은 모두 그 사람들에게 보내졌고요.”
“그래서 칭찬이라도 하려고 아니면 뇌물을 받았다고 위에 찌르게?”
“제 기록을 봤다면 아시겠지만 제 권능은 예지입니다.”
미래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창민 중사가 다리를 외로 꼬며 성현을 바라봤다.
“네 예지에 내 이야기도 있었나?”
“네.”
“뭐였지?”
“초소장님은 반란군의 수장이었습니다.”
담배를 입에 물던 이창민 중사의 행동이 멎었다.
그가 눈동자만 움직여 성현을 바라봤다.
“반란군?”
“거점은 그 마을이었습니다.”
“……성공했나?”
“전멸이었습니다.”
“다 죽었다는 거지?”
“네.”
“푸하하하하!”
이창민 중사가 무릎까지 치며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안 봐도 뻔해. 난 안될 걸 알았을 거야. 그런데 안될 걸 알면서 왜 시도했을까? 난 이 나라를 싫어하지만 딱히 도전 정신이 강한 사람은 아니야. 도전 정신이 강했다면 미끼로 살던 사람들에게 빵이 아니라 무기를 쥐여 줬겠지. 받아먹지 말고 싸워서 뺏어 먹으라고!”
한참을 웃던 그가 웃음을 겨우 멈춘 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성현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미래라는 것은 바꿀 수 있는 거지?”
“네.”
“그럼 바꿔야지. 허무하게 죽으면 부모님께 죄송하잖아. 그래, 내가 반란을 일으킨 게 언제지?”
“10여 년 후입니다.”
“좋아, 하나 더. 혹시 그 반란군에 너도 있었나?”
“……없었습니다.”
“그럼 정부군에 있었나?”
“연맹에 있었습니다.”
성현도 그 전투에 있었다.
그리고 이창민 중사의 숨을 끊은 사람이 성현이었다.
이를 악물고 그의 심장에 창을 꽂았다.
그의 피가 성현의 얼굴에 튀었고 그 한 맺힌 눈동자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이창민 중사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 짙어졌다.
“지금부터 미래를 바꿔 보지. 너, 내 반란군에 들어올 생각 있나?”
“반란군…… 안될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초소장님은 딱히 도전 정신도 강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함께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자,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야.”
성현이 대답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초, 초소장님!”
박상문 하사가 정말 다급하게 계단을 올라왔다.
숨을 헐떡이며 놀란 눈동자를 보인다.
이창민 중사가 테이블에 놓인 총을 손에 쥐며 벌떡 일어섰다.
“왜? 무슨 일이야!”
짐승의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산소 농도는 짙어졌고 언제 어떤 짐승이 나타날지 모른다.
성현 역시 마찬가지, 박상문 하사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초, 초소장님…….”
“말하라고!”
“서은서라고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