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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77화 (77/252)

77화

“서은서? 페이트 길드의 막내?”

지금껏 그녀의 이름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지난 부여에서의 일, 그러니까 서은서가 환각의 가루를 해결한 것처럼 알려지며 그녀의 이름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언론에 노출되는 순간 유명해지는 것은 당연했는데 특히 군대에서 유명했다.

박상문 하사의 관물대에 그녀의 사진이 붙어 있을 정도다.

“맞습니다. 페이트 길드의 서은서가 여기 왔습니다. 진짜 겁나 예쁩니다.”

이창민 중사는 창가로 걸어가 1층을 내려다 봤다.

청바지에 가벼운 셔츠를 입은 그녀가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100여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저 100여 명의 사람은 길드원일 것이다.

이창민 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이트 길드가 여기는 왜 온 거지? 서은서 정도면 우리와 평생 만날 일 없는 사람이잖아? 사단장, 아니 군단장 정도는 만나야 어울리지.”

“……글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생각에 빠졌을 때 성현은 난처하기만 했다.

그녀가 이곳을 왔다면 그 이유는 하나, 성현을 만나기 위함일 거다.

그게 아니고서는 그녀가 이곳까지 올 일이 전혀 없다.

‘왜 온 거야?’

성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온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그중 도망자들의 마을을 손에 넣는 것은 이뤘고 다음으로 이창민 중사와 손잡는 것이다.

그런데 서은서가 등장하는 바람에 그 계획이 흩어질 수도 있다.

‘회귀 전에 봤던 이창민 중사는 반란군의 수장이었어.’

그는 기본적으로 현 시스템에 삐딱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다.

이 세상을 저주하고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서은서는 그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사람 중 하나.

그가 부숴야 할 상대다.

그녀가 성현을 찾아왔다고 하면 이창민 중사는 성현도 그녀와 같은 세계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럼 나와 함께하지 않을 거야.’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숨길 수는 없다.

서은서는 코앞에 와 있으며 어설프게 속이려 하다가 더 큰 문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성현은 자백하기로 했다.

“초소장님…….”

그때였다.

계단에서부터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검은 복면으로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는 사내가 나타났다.

무령이었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온 그가 허리를 살짝 굽혔다.

“페이트 길드 경호 7팀 팀장입니다. 국방부와 군사령부 그리고 군단과 사단에 허락을 받았고 이어 초소에도 공문을 보냈는데…… 못 보셨습니까?”

“공문요? 못 받았는데요?”

대답은 이창민 중사가 했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박상문 하사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 가고 있었다.

그가 중얼중얼 거렸다.

“공문…… 공문…… 공문?”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헐레벌떡 이면지를 뒤지기 시작했다.

종이 한 장을 손에 쥔 박상문 하사가 이창민 중사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공문이 왔었습니다.”

짐승의 날을 통해 실전 훈련을 하고 싶다는 협조 공문.

국방부는 물론이고 사단과 대대, 초소를 제외한 모든 상급 부대의 서명이 이미 들어가 있었다.

박상문 하사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매번 그랬잖습니까? 이번에도 온다고 해 놓고 안 올 거라고 생각해서 짬 시켰습니다. 죄송합니다.”

“됐다.”

한숨을 내뱉은 이창민 중사의 시선이 무령에게 향했다.

“공문을 이제 확인해서 그러는데, 짧게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곳에서 100m 떨어진 곳에서 숙영을 할 것입니다. 귀하의 부대에 방해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대신 그 공문에 적힌 대로 병사 한 명을 안내병으로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머지 훈련 계획과 일정은 문서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죠.”

성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숙이고 슬쩍 웃었다.

서은서의 갑작스러운 난입으로 입장이 난처해질 줄 알았는데 기우였다.

서은서는 역시 서은서, 성현이 난처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준비해 왔다.

같은 시각, 서은서는 마당에 서서 꽃을 보고 있었다.

“이게 짐승의 땅에서만 피는 꽃 맞지?”

“맞습니다. 인간의 피를 맛보면 이빨이 자라나는 식물입니다.”

“그래? 독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그녀가 손가락으로 꽃을 툭툭 건드렸다.

꽃이 동물처럼 꿈틀꿈틀 움직인다.

그녀가 식물을 관심 있게 보고 있을 때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틀어졌다.

성현과 이창민 중사 그리고 박상문 하사가 무령과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오직 성현만 보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그런지 정말 반가웠다.

하지만 대놓고 알은척을 할 수는 없기에 그저 눈인사를 보낼 뿐이다.

성현도 그녀의 시선을 느꼈지만 표현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창민 중사가 그녀의 앞에 섰다.

“초소장 이창민 중사라고 합니다.”

“며칠 동안 잘 부탁드릴게요.”

* * *

다시 초소의 3층.

이창민 중사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 뒤에서 박상문 하사가 신이 나서 떠들고 있다.

“진짜 겁나 예쁘지 않습니까? 딱 보는데 그림인 줄 알았습니다. 제 관물대에 서은서 사진이 있는데, 서은서는 사진발이 안 받습니다. 실물이 2천 배는 더 예쁜 것 같습니다. 특히 그 눈!”

이창민 중사는 박상문 하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창밖을 통해 밖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숙영 장비를 나르는 길드원을 지나 그들을 돕는 성현에게 꽂혔다.

한참동안 성현을 보던 이창민 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 본 것일까?’

서은서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정확히 성현을 향해 있었다.

‘아는 눈치였는데…….’

이창민 중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성현에게 ‘반란군’이라는 단어를 듣고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그는 매일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았으며 그 하루하루는 죽은 것과 같은 삶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온몸에 도는 피를 느꼈고 다시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반역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서은서는 이창민 중사와 정반대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연관된 일이라면 돌다리 하나도 두들겨 봐야 했다.

잠시 후.

페이트 길드의 숙영지가 거의 완성되었다.

지휘소 텐트는 물론 각 숙영 텐트가 완벽하게 펼쳐졌다.

길드원들은 저녁을 먹기 위해 음식을 준비했고 성현과 서은서는 지휘소 텐트에 마주 앉았다.

그녀가 성현의 앞에 커피를 내려 두며 입을 열었다.

“아까 조금 당황하는 눈치던데, 예지력으로 제가 오는 것은 몰랐나 봐요?”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성현은 쓸데없는 인사말을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정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태도다.

하지만 그녀는 성현의 그런 태도가 야속하지 않았다.

성현과의 관계가 거래와 공생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다.

“제 부탁으로 군대에 왔잖아요.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직접 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지내는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불편한 것 없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아, 어머님은 잘 계세요. 우리 경호 팀이 24시간 경호하고 있어요. 물론 어머님은 모르시고요.”

매일같이 어머니를 챙겨 준다고 하니 조금은 고마웠다.

물론 성현과의 계약 때문이지만 의도가 무엇이든 고마운 것은 고마운 거다.

그녀에게 선을 긋던 성현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건 그렇고 어 두워지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고 싶은데요. 안내해 주시겠어요? 우리는 훈련하러 온 거니까요.”

“……정말 할 생각입니까?”

“네. 그렇지 않다면 100여 명이나 되는 인원을 왜 여기까지 끌고 왔겠어요?”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짐승의 날이 다가오고 있어요. 존재가 강림할 수도 있죠. 어쩌면 함께 온 길드원이 모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예지를 통해 본 것인가요?”

“아뇨.”

“그럼, 앞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를 또렷이 보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짐승의 날에 이 땅은 혼돈으로 가득 찰 것이고 꽤 높은 등급의 존재가 이 세상에 강림합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깊숙이는 안 들어갈 거예요. 존재와 마주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요.”

“제가 그 존재를 끄집어낼 생각입니다.”

커피잔을 들어 입에 대던 서은서의 행동이 멎었다.

그녀가 눈동자만 움직여 성현을 바라봤다.

“존재를 끄집어낸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올해 나타나는 존재는 신비한 새벽의 마녀 뢰피크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잖아요? 존재를 끄집어내다니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성현의 말을 믿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껏 성현을 경험해 왔다.

그가 하는 말은 언제나 미쳤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언제나 외줄을 타는 것처럼 세상을 살았고 지금 당장 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몸을 내던졌다.

그런데, 지금 꺼낸 말은 정말 미쳤다.

“우리가 던전에서 만났던 것은 마녀급의 ‘짐승’이었어요. 진짜 마녀는 달라요! 존재라고요, 존재! 그리고 짐승의 날이라면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성현이 싸웠던 마녀 케이트 그리고 마리안느를 단번에 죽인 마녀 아리.

그들은 이계와 다른 지구의 환경에서 완벽한 힘을 낼 수 없었다.

상당수의 힘을 이 환경에서 버티는 데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짐승의 날은 다르다.

그 힘이 온전해진다.

그런 존재와 싸운다는 것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과 같다.

닿자마자 날개가 타 버려 죽고 말 거다.

그 나방이 수천, 수만 마리라도 마찬가지다.

나방이 강해 봤자 불 앞에서는 나방이다.

모두 죽는다.

그게 인간과 존재의 차이였다.

서은서는 계속해서 성현을 설득했다.

“존재를 굳이 이쪽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은…….”

그런데, 그녀는 문뜩 뒷말을 끌었다.

상대는 성현이다.

분명 불나방이지만 언제나 벼랑 끝에서 기어 올라왔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 안에서 최대의 이득을 뽑아냈다.

‘설마…… 어쩌면 이번에도…….’

그녀는 머릿속에서 이득을 따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성현과 함께 있으며 인사 팀에서 전략기획본부로 적을 옮겼다.

그리고 후계자 후보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성현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됐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틀어 성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결심한 눈빛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짐승의 날이 되기 전에 길드원들은 인간의 땅으로 보낼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성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쉽게 포기해 줘서 고마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어진 그녀의 목소리는 성현의 생각과 달랐다.

“하지만 저는 같이 있고 싶어요. 성현 씨가 마녀를 잡는 그 현장에 함께 있고 싶어요. 도움이 되지 않으면…….”

“도움은 될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은서다.

서씨 가문의 권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 능력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된다.

서은서가 빙긋이 웃었다.

“그럼 함께해도 될까요?”

“……불편할 텐데요.”

“괜찮아요. 던전에서도 며칠씩 지낼 수 있어요. 하룻밤이야 충분하죠.”

“그게 아니라 그…… 오빠가 오실 거거든요.”

“오빠?”

“서준식 본부장요.”

“오빠요?”

서은서의 표정이 황당하게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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