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잠시 멍하니 있던 서은서가 더듬더듬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죠? 오빠가 왜?”
그녀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성현은 카니발에서 서준식 본부장을 만났고 박살 냈다.
그녀가 성현에게 군 입대를 추천한 것도 서준식 본부장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런데 서준식 본부장이 성현과 함께한다니…….
성현이 입을 열었다.
“설명드리죠.”
성현은 서은서에게 서준식 본부장과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물론 모든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저 카니발에서 서준식 본부장을 만났으며 이번 짐승의 날에 함께하기로 했다고만 전했을 뿐이다.
성현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단 하나, 성현은 서은서가 포기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부여 던전, 병원에서 존재급의 짐승 마리안느를 만났을 때, 성현은 서은서를 시험했었다.
그녀가 위기 상황에서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성현은 그녀가 이기적으로 살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성현을 돕기 위해 돌아왔다.
‘그러면 안 돼.’
성현은 의리나 정, 전우애라는 하찮은 이름으로 죽어 가는 동료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서준식 본부장과 함께하게 됐습니다.”
“그게 전부인가요?”
“네.”
“하…….”
서은서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그녀는 서준식 본부장을 꺾고 길드의 마스터가 되는 게 목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현을 적토마로 사용하려 했다.
그런데 성현과 서준식 본부장이 함께한다니, 자신의 모든 계획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서준식 본부장에게 성현을 빼앗긴다는 느낌마저 받고 있었다.
그녀가 허망한 눈으로 성현을 보며 물었다.
“……왜 말하지 않았죠? 말해 줬더라면……. 아니죠. 성현 씨 입장에서는 굳이 제게 알릴 필요는 없죠.”
그녀의 표정이 불편했다.
성현과 거래를 위한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조금은 동료애를 가지고 있었나 보다.
거리감이 느껴지자 괜히 쓸쓸했다.
성현은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됐습니다.”
“알았어요. 같이할게요.”
“네?”
“같이하고 싶어요. 대신 가면을 쓸 수 있게 해 주세요. 오빠에게 얼굴을 알리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 정도는 괜찮죠?”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떼어 놓으려 했지만 무리였다.
그녀는 끝까지 쫓아오려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몇 가지 약속이 필요합니다.”
“뭐죠?”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 그곳에 남겨져도 어쩔 수 없다는 것.”
상대할 대상은 온전한 힘을 가진 마녀다.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서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리고 누가 죽어도 관여하지 말 것.”
“네?”
“저는 물론이고 서준식 본부장이 위험에 빠져도 모른 척할 것, 남을 돕지 말 것, 누군가가 그곳에 남겨져도 상관하지 말 것.”
성현의 눈빛이 강렬했다.
그 눈빛은 그녀의 입에서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없도록 묘한 압박감까지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마녀의 손에 누가 죽어도 모른 척하세요.”
“알았다고요.”
서은서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마음 한편이 또 쓰리다.
성현의 말투와 행동, 그녀가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치 물건을 다루는 것 같다.
하지만 그 기분을 밖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잖아?’
지금껏 그녀 역시 사람을 물건 취급했다.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자신을 따르면 된다고 여겼다.
그런데 내로남불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물건으로 여긴다고 섭섭해하다니…….
‘바보 같아.’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성현이 떠났다.
서은서의 앞에는 무령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령을 앞에 앉혀 두고도 한참 동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지휘소 텐트가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를 들으며 커피만 마실 뿐이다.
결국 무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가씨?”
“길드원들을 뒤로 뺄 거야.”
“네? 오늘 숙영지를 편성했습니다.”
“어, 철수할 거야.”
서은서가 지도를 펴고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훈련은 해야 하니까 여기가 좋겠네. 훈련은 여기서 하도록 해.”
“인간의 땅까지 물러나는 겁니까?”
“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서은서가 찻잔을 내려 두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위험해질 거래.”
“유성현이 그랬습니까?”
“어.”
무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예언가가 지껄였다면 헛소리로 치부했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유성현이다.
무령 역시 그동안 성현을 지켜보며 그의 예지력이 100%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일 아침 철수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무령은 힐끗 서은서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함께 철수하지 않는 겁니까?”
“여기에 남을 거야.”
“그럼 저도 남겠습니다.”
무령은 서은서의 경호 팀장이다.
남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서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같이 있을 필요 없어. 유성현은 존재를 불러낼 거야.”
“……그게 무슨? 조, 존재를 불러낸다고요?”
성현의 방식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미친 짓이다.
무령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존재가 강림하면, 그리고 폭주라도 한다면 일대는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알아. 그래서 경호는 필요 없어. 아무리 무령이라 해도 존재를 상대로 가드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까 물러서 있어.”
“아가씨!”
서은서가 숨을 크게 내뱉었다.
“무령…… 나 지금 정말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짐승이 있고 존재가 있는 세상, 위험한 만큼 큰 보상이 뒤따른다는 것은 룰이잖아. 이번 일로 어떤 보상을 받을까? 어떤 일이 펼쳐질까? 난 그것을 기대하고 있어.”
“도박입니다.”
“유성현의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항상 외줄을 타고 최단 거리로 달리고 있어. 그리고 언제나 최고의 성과를 보여 줬고. 난 그 뒤를 따르며 떡고물을 주울 뿐이야.”
“아가씨…….”
“도구야, 도구. 유성현도, 나도…….”
그녀의 표정이 정말 외롭게 느껴졌다.
* * *
그 시각, 성현은 창고에서 독을 공부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창고에서만 독을 공부하고 연구했다.
독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지며 점점 더 독한 독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수련하다가 일대를 독으로 오염시킬 수도 있었다.
성현이 오른손을 살짝 움직이자 대접에 담겨 있던 독극물이 스르륵 허공에 떠올랐다.
성현은 독극물을 띄운 상태에서 단도로 손가락을 살짝 그었다.
떨어지는 핏방울 역시 독극물에 합쳐 둔다.
그러자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어서 수증기가 되어 사방에 흩뿌려진다.
“좋아.”
독에 대한 면역이 없다면 이 공간에 들어와 호흡을 하는 순간 죽을 테고 피부에 닿는 순간 기포가 솟아오를 거다.
성현이 손을 허공으로 올렸다.
파지지직!
사방으로 전기가 떨어지더니 허공에 떠다니는 독과 함께 불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적을 특정하지 않은 광범위한 공격에 좋겠네.’
그때였다.
뒤에서 지르힐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대…… 마녀를 강림시킨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강림시키는데 특별히 다른 뜻이 있나?”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러는가?
성현이 천천히 몸을 틀어 지르힐을 마주 봤다.
“죽일 거야. 존재에 대한 선전포고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가!
“어, 몰라.”
회귀 전, 성현은 존재를 죽여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는 아직까지 인간의 손에 죽은 존재가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지연우가 마녀급의 존재를 갈기갈기 찢고 다니지만 지연우와 성현은 엄연히 다르다.
지연우의 존재는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 그가 마녀급을 죽여도 막아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지르힐은 등급이 없는 죄인이다.
성현이 마녀를 죽이면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조차 안 됐다.
-나는 허락할 수 없다. 이것은 명령이며…….
“지르힐…… 넌 내가 마녀를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구나?”
-어?
성현이 그녀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 그만큼 강해졌나? 마녀와 싸워도 이길 정도로?”
-솔직히 그대가 패배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길 확률도 있다는 거지?”
-그대는 그만큼 강해졌다. 하지만 그 싸움으로 그대는 정말 벼랑 끝에 서게 될 거다. 난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명령이다.
“안 돼. 시간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명령 같은 거 하지 말자.”
-그대!
“안 그러면 난 계약된 권리를 사용할 거야. 잊었어? 난 하루 2시간 지르힐의 시선을 벗어날 수 있어.”
처음 정식 계약을 했을 때, 성현이 특약 사항에 집어넣었던 거다.
존재는 인간의 행동을 24시간 지켜볼 수 있지만 성현은 하루 2시간을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 멋대로 행동할 수 있다.
그 2시간 동안 마녀를 불러내 싸울 수도 있다는 거다.
성현이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를 보며 슬쩍 웃었다.
“미안.”
* * *
검은 하늘에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존재들.
그들의 세상에 이상한 소문 하나가 돌았다.
바로 짐승의 날에 유성현이라는 인간이 ‘신비한 새벽의 마녀 뢰피크르’를 불러내 죽인다는 거다.
존재들은 웃기기만 했다.
-인간이 존재를 죽인다고 한다.
-뢰피크르가 누구 밑에 있는 마녀인지 아는 존재 있는가?
-신비한 새벽이면 그쪽 계열일 게다. 더럽혀지지 않은 피, 유르라헬.
-그 인간을 원하는 존재가 많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조각이 나겠구나.
-몇 조각이 될지 내기하겠는가?
존재들은 마녀의 압승을 기대했다.
벌레 같은 인간이 이긴다고 생각한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심기가 불편한 존재는 있었다.
시커먼 의자에 앉은 소녀.
검은 머리가 허리까지 오는 그녀의 이름은 신비한 새벽의 마녀 뢰피크르였다.
그녀도 성현이 자신을 죽인다 어쩐다 하는 소문을 들었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 각지의 계약자들이 짐승의 땅으로 모인다는 소식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찮은 생명체가 감히…….”
그녀는 셀 수 없는 시간을 살아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인간 따위에게 이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현실로 벌어졌다.
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그 인간의 호칭이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라는 것.
그래서 몇몇 존재는 ‘너 그러다가 인간한테 죽는 거 아닌가?’라며 놀려 대기까지 했다.
생각을 이어 가던 뢰피크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한참을 깔깔 웃던 그녀가 웃음을 뚝 그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오래 살았구나. 오래 살아서 이런 치욕도 당하는 구나. 그래, 어떻게 죽여 줘야 할까?”
인간은 잘 찢어지는 살과 잘 부서지는 뼈로 이뤄진 생명체다.
맛은 별로 없지만 산 채로 씹어 먹을 때의 비명 소리는 듣기 좋았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의 눈빛이 시퍼렇게 빛났다.
“죽여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