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79화 (79/252)

79화

* * *

“그 말이 사실이더냐!”

카펫과 커튼 그리고 벽에 붙은 그림까지도 온통 붉은 그곳.

끝없이 높은 계단 위, 한 여인이 일어나 있었다.

낫을 든 마녀 아리에게 성현에 대한 보고를 받는 그 여인이었다.

“대답하라. 그 말이 사실이더냐!”

그녀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울렸다.

그러자 이계의 시장에서 성현에게 물건을 파는 꼬마가 비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따위가 어찌 유르라헬의 피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우연히 예언서의 뒷장을 얻었고 가장 먼저 보여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요. 헤헤.”

지금까지 존재의 세상에 알려진 예언서는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창조주의 에느가인을 찾으러 간다는 내용뿐이었다.

그 뒷장이 있다는 이야기는 억겁의 시간에도 들어 본 적 없었고 위대한 예언자 아그네일의 예언서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게 존재한다고?”

여인은 물론이고 붉은 옷을 입은 장군과 검은 돌로 만들어진 석상도 무서운 눈으로 꼬마를 쏘아봤다.

하지만 꼬마는 주눅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계 시장의 하수구에서 주워 왔습니다. 제가 그 냄새나는 곳을 직접 들어갔다 왔죠.”

여인의 눈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너무 오래 살아왔다.

그녀의 손에서 태어난 자손만 수백, 수천……. 이제는 누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여왕벌과 여왕개미처럼 출산이 그녀의 업이었다.

삶은 지루했고 심심했으며 악몽과 같았다.

여인에게 목표가 있다면 단 하나다.

‘지배.’

존재의 세상에서 정점에 오르는 것.

그것은 지금껏 누구도 하지 못한 것.

그렇기에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그 유흿거리로 세상이 멸망하고 수백, 수천억의 생명이 갈려 나갈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정점에 올라 세상 모든 어머니를 발아래 무릎 꿇리고 그들의 머리를 짓밟는 게 그녀가 원하는 쾌락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앞에 또 다른 예언이 나타났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라. 무엇이 쓰여 있는가!”

그녀의 목소리에 공간 전체가 흔들렸다.

시종들은 겁을 먹고 무릎을 꿇었으며 장군들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꼬마는 달랐다.

“저는 상인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그냥은 못 드립니다.”

여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꼬마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진심이 느껴진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예언서를 내놓지 않을 생각이다.

“그래, 필요한 게 무엇이더냐?”

“어머니의 고귀한 피가 필요합니다.”

여인의 표정이 굳었다.

이어서 서늘한 살기가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내 피?”

그녀는 최초의 어머니 유르라헬의 피를 이어받은 성녀다.

그녀의 피는 이들에게 신앙과 같은 것.

더러운 꼬마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히!”

붉은 갑옷을 입은 장군이 꼬마의 멱살을 잡았다.

이어서 인간형 석상이 창을 뽑아 꼬마에게 다가갔다.

석상의 크기는 높이만 10m다.

움직일 때마다 쿵쿵 소리가 울렸다.

석상이 창을 뽑아 꼬마를 꿰뚫을 것처럼 위협했다.

“하찮은 네놈이 어머니의 피를 원해? 그 죄는 네 더러운 피로 받아 낼 것이다!”

“죽이십시오. 하지만 저는 어머니의 피 한 방울이 예언의 가치와 걸맞다고 생각합니다.”

“목숨을 내놓아라.”

“그만!”

여인의 목소리에 모든 행동이 멎었다.

그녀가 꼬마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는다.

하얗고 아름다운 손가락에서 하얀 연기가 일렁였고 곧 단도가 되어 그녀의 손에 쥐였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그었다.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동시에 계단 아래에 도열한 모든 신하가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하지만 그녀는 무심한 눈으로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핏방울이 뭉실뭉실 떠올라 때 묻지 않은 하얀 도자기 술병에 담겼다.

“가져가라.”

그 도자기 술병이 꼬마의 앞으로 날아갔다.

꼬마가 양손으로 도자기 술병을 받들며 굽실거렸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드리겠습니다.”

꼬마는 예언서가 적힌 양피지를 꺼냈고 그것은 여인의 앞으로 날아갔다.

여인이 양피지를 손에 쥐고 심각한 눈으로 훑었다.

-살육의 장 : 어둠이 끝나고 새벽이 지나갈 때, 저주받은 피가 문을 만드니 욕심 많은 자, 욕심 많은 어머니가 군을 이끌고 문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원하는 핏물, 둘 중 하나의 별이 떨어진다.

창조주가 원치 않던 세상이니 타락한 그대는 느껴 보지 못한 고통을 알게 되리라.

여인이 눈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새벽이 지나간다는 것은 뢰피크르가 유성현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뜻인가? 그리고 창조주가 원치 않은 세상은…… 혹시 존재들의 전쟁? 그럼, 욕심 많은 자와 욕심 많은 어머니는 뭐지?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원하는 핏물이라니?”

그녀 역시 완벽히 해석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의문뿐이다.

그녀가 꼬마에게로 시선을 향했고 생각하고 있는 바를 이야기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꼬마가 허리를 굽혔다.

“몇 번이나 읽어 봤지만 예언서의 뜻을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창조주가 원치 않는 세상은 존재들의 전쟁이라고 해석됩니다.”

“전쟁?”

“네.”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높은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리며 그녀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들어라. 아들딸에게 전하라. 나에게 오라. 태초부터 기다렸던 그 순간이 왔음이다. 전쟁에 대비하라. 계약자를 더 만들어 병력으로 세워라. 우리가 기다리던 날이다. 우리는 신이 될 것이다.”

오랜 시간을 아무런 변화 없이 살아온 그들이다.

인간은 키가 크고 살이 찌며 늙어 가지만 이들에게 그런 것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삶.

그런데 그들의 삶에 처음으로 변화가 찾아왔다.

신이 될 수 있는 기회.

그녀의 앞에 선 수백 명의 신하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예! 예! 예!”

꼬마는 비굴하게 웃으며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조심스레 실내를 벗어났다.

밖으로 나온 꼬마가 배를 잡고 낄낄낄 웃기 시작했다.

“멍청해, 멍청해! 왜 예언서에 적힌 살육이라는 단어는 보지 않는 거지? 멍청한 놈들! 너희 모두는 죽을 거야! 하하하하!”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보고 유리하게 해석한다.

그게 오만한 존재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한참을 웃던 꼬마의 표정이 점차 차갑게 굳어졌다.

* * *

하늘을 뚫고 올라선 것처럼 높은 탑.

지르힐이 갇힌 곳이었다.

지르힐은 고개를 저었다.

성현은 지금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만에 하나 신비한 새벽의 마녀를 이긴다 해도 문제다.

존재를 죽인 인간을 다른 존재들이 내버려 둘 리 없다.

특히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를 원치 않는 존재들, 세상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자들, 그들은 이번 일을 명분으로 삼을 거다.

그 명분으로 성현을 죽이려 할 거다.

하지만 지르힐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성현은 이미 각오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그리고 그녀는 이곳에 갇혀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단단히 닫힌 문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녀는 수만 년 전 이곳에 갇혔고 그 시간 동안 이 탑에 찾아온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시 들렸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들라.”

문이 끼이이익 열렸다.

들어온 것은 금발 머리의 꼬마였다.

지르힐이 눈을 크게 뜨고 꼬마를 바라봤다.

“그대는 멸망한 황실의 황자가 아닌가?”

“최근에는 정보 상인으로 일하고 있습죠. 지르힐 님의 계약자인 유성현도 종종 만나고 있고요. 흐흐.”

꼬마는 비굴한 웃음을 지었지만 지르힐은 눈을 찌푸렸다.

그녀가 성현의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존재끼리도 자신의 계약자는 철저히 숨기기 때문이다.

그녀의 경계로 가득한 눈빛에 꼬마가 손을 저었다.

“정보 상인입니다. 모르는 게 이상한 거죠. 전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그대 외에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없어요.”

“그럼 그대의 목숨만 취하면 앞으로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그 말과 동시에 열렸던 문이 쾅, 닫혔다.

이어서 둥근 탑이 어둠으로 채워지더니 벽 전체에 전기가 파지지직거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전기로 지져 죽일 생각이다.

꼬마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력을 없애는 사슬에 갇혀 있으면서도 지르힐은 두려울 정도의 괴력을 보이고 있다.

만약 그녀가 자유의 몸이 된다면 존재의 세상은 지옥으로 물들 거다.

꼬마가 다급히 말했다.

“제가 왜 금지된 땅, 금지된 탑까지 올랐는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지르힐의 전기가 꼬마의 발끝에서 멎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꼬마는 전기에 타 죽었을 거다.

꼬마가 빠르게 말했다.

“멸망한 황실의 황자가 신의 분노로 태어난 지르힐 님을 돕고 싶어서 왔습니다.”

“도와?”

꼬마가 품에서 도자기 술병을 꺼냈다.

지르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도자기 술병을 바라봤다.

“그게 뭐지?”

“유르라헬의 2대 어미 그리피네의 피입니다. 아시겠지만 유르라헬의 고귀한 피는 그 사슬을 녹일 수 있죠. 물론, 이 몇 방울의 피로 사슬을 끊을 수는 없겠지만……. 사슬은 약해질 겁니다. 그럼 지금보다 더 강한 권능을 펼치실 수 있겠죠.”

꼬마가 술병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저는 앞으로도 유르라헬의 피를 계속해서 담아 오겠습니다. 언젠가 그 사슬이 완벽히 끊어질 때까지, 계속…….”

“원하는 게 무엇인가?”

꼬마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답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제 힘을 되찾는 데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황실을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지르힐은 물끄러미 꼬마를 바라봤다.

놈은 뭔가 숨기고 있다.

하지만 그 조건이 지르힐에게 나쁘지 않다.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그대에게 그 두 가지를 약속하겠노라.”

꼬마가 지르힐에게 절을 한 후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에 술병을 기울였다.

핏물이 쇠사슬에 닿으며 허연 연기가 탑 내부를 채웠다.

* * *

“나하고 박상문 하사는 도망자들의 마을을 지켜 달라고?”

“네.”

그 시각, 성현은 이창민 중사와 짐승의 날에 대비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창민 중사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넌?”

“전 초소를 지키겠습니다.”

“이유는?”

이창민 중사에게 마녀를 불러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할 일이 있습니다.”

이창민 중사는 물끄러미 성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지로 뭔가를 본 것인가?”

“네.”

“좋은 아이템이 나와서 혼자 꿀꺽하려고?”

“아, 그건 아닙니다.”

“그럼?”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이창민 중사는 더 묻지 않았다.

예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좋아, 그럼…… 하나만 묻지. 며칠 전 이야기했던 것. 나와 함께할 생각이 있나?”

“반란군 말씀이십니까?”

“어.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시기나 작전 뭐 그런 것은 아직 생각해 두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성현이 물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말과 동시에 이창민 중사의 앞에 스르륵 기관총이 나타났다.

방아쇠만 당기면 앞에 있는 모든 것은 넝마가 되어 버릴 거다.

그 기관총이 성현을 겨눴다.

“반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어쩔 수 없잖아? 처리 해야지.”

농담이었다.

하지만 기관총까지 꺼내고 내뱉은 농담이라 우습게 들리지는 않았다.

성현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고 싶지 않으니까 함께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반란이라는 단어, 생각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하지만 두 사람은 초등학생이 짝꿍을 정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그리고 며칠 후, 짐승의 날 하루 전.

이창민 중사와 박상민 하사는 도망자들의 마을로 떠났고 초소에는 성현만 있었다.

1층의 마당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있을 때, 낯선 음성이 들렸다.

“지금 머리를 쏴 버리면 딱 좋을 텐데.”

“왔어요?”

성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여전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성현의 앞에 선 것은 카니발에서 만났던 저격수 이준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