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너니?”
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뢰피크르의 눈이 점점 더 사나워진다.
“너냐고 물었잖아!”
폭발적인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쏟아졌다.
그 기운이 어찌나 강한지 성현의 머리카락이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성현은 그녀를 신경 쓰고 있지 않고 있었다.
그가 지금 신경 쓰는 것은 머릿속에서 울린 시스템 메시지.
-히든 퀘스트 ‘지금 당장 마녀의 침실을 엿보세요.’를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스텟 포인트 10을 드립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곧바로 메시지가 또 울렸다.
[연계 퀘스트 : 지금 당장 뢰피크르를 죽이세요]
보상 : ???
실패 페널티 : ???
성현은 눈을 찌푸렸다.
스텟 포인트를 한 번에 10이나 주는 퀘스트는 흔치 않다.
그런데 곧바로 연계 퀘스트가 이어졌고, 게다가 이번에도 그 내용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게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은 성현에게도 처음이었다.
‘뭐지?’
순간 성현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어 싸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누군가가 성현의 등을 떠밀며 강요하고 있다.
-마녀와 싸워라.
-마녀를 죽여라.
생각하던 성현은 픽 웃었다.
‘꼭두각시?’
그게 사실이라 해도 상관없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꼭두각시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고 학교를 다녔다.
책상에 앉았으며 수업을 들었다.
수능을 봐야 했고 군대에 갔으며 일을 해야 했다.
성현은 누구나 가는 그 길을 똑같이 따랐다.
계약을 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의 의지는 없었다.
회귀 전에는 지연우의 지시를 받아 싸웠고, 회귀 후에는 지연우를 죽이기 위해 싸운다.
어차피 자신의 의지는 해변의 한 줌 모래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죽이려 했다.’
어차피 마녀와 싸울 생각이었다.
등을 떠밀지 않아도 마녀를 박살 내고 조금 더 강해질 생각이다.
성현이 고개를 들어 마녀 뢰피크르를 노려봤다.
“와라.”
그때였다.
뢰피크르의 의자 뒤에서 깔깔깔 웃음소리가 흘렀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성현의 눈이 다시 한번 찌푸려졌다.
웃고 있는 것은 금발 머리에 검은 드레스,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 낫을 든 마녀 아리였다.
그녀가 눈물까지 흘리면서 배를 잡고 웃고 있다.
“뢰피크르, 내가 말했잖아! 저 미물은 널 정말 죽일 생각이야. 푸하하하하!”
텅 빈 공간에 아리의 웃음소리만 어울리지 않게 울렸다.
그녀를 보며 성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뢰피크르만 해도 쉽지 않다.
이곳에 있는 계약자 전부가 달려들어 싸워야 한다.
성현부터 서준식 그리고 서은서와 이주안, 이준 그리고 윤희진까지…….
그렇다 해도 승리의 확률은 낮다.
높은 확률로 누군가 사망할 거다.
그런데 낫을 든 마녀 아리가 합세한다면?
‘절대 이길 수 없어.’
5분도 걸리지 않을 거다.
이 성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전부 죽는 시간은…….
혼란에 휩싸인 성현을 뒤로한 채, 아리는 그 말을 끝으로 유리가 깨진 화장대로 걸어가 살포시 앉았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눈으로 성현과 서은서를 바라보며, 마치 성현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걱정하지 마. 난 끼어들지 않을 거야.”
“정말인가?”
“인간 따위에게 거짓말을 하겠어? 밟아 죽이면 그만인걸.”
아리가 다리를 외로 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싸워’. 난 지켜볼 테니까.”
그 말이 신호였던 것 같다.
성의 천장에 눈동자가 박힌 것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눈동자가 껌뻑거리며 성현과 서은서 그리고 뢰피크르를 향한다.
존재들의 눈동자다.
그들은 인간이 존재에게 반기를 든 지금 이 상황을 매우 즐기고 있다.
그 인간이 예언서에 나오는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다는 게 여흥의 포인트다.
그들의 시선을 뢰피크르도 느꼈다.
그녀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또각또각, 대리석을 밟으며 성현과 서은서를 향해 걸어갔다.
서은서는 한숨을 토해 내듯 작게 내뱉었다.
‘이게 마녀?’
그녀는 마녀급의 짐승 마리안느를 상대해 봤다.
하지만 진짜 마녀는 다르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주저앉아 울고 싶었고, 살이 찢어질 것 같았으며, 심장이 죄여 왔다.
서은서는 마녀 앞에서 태풍을 마주한 것처럼 자신이 경이로운 자연 앞의 작은 인간임을 깨닫고 있었다.
서은서의 앞에 뢰피크르가 섰다.
“네가…… 이놈에게 소중한 존재라고?”
“……네?”
서은서는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썼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의문인 것은 뢰피크르의 말이었다.
‘소중한 존재?’
성현의 행동을 보면 세상 모든 것을 도구로 여기는 것 같다.
이용하고 이용했으며 이용할 사람.
그것은 서은서,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는데…….
‘소중한 존재라고?’
서은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서은서의 표정을 물끄러미 보던 뢰피크르가 아리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화장대에 앉아 있던 아리가 입을 열었다.
“맞아. 소중한 존재. 내가 지켜봤을 때 저놈이 유일하게 챙긴 게 저 여자였어.”
그 말과 동시에 존재의 세상이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시스템 메시지가 댓글처럼 드러났다.
-뢰피크르, 유성현 앞에서 서은서를 산 채로 씹어 먹어 봐.
-그래, 소중한 존재부터 죽여.
-나는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싶어.
-난 마녀가 죽는 것을 보고 싶은데.
-나도.
-인간에게 죽으면 얼마나 자존심 상할까?
-차라리 소멸되는 게 낫지.
“닥쳐!”
뢰피크르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서은서에게 닿았다.
그 순간, 성현이 재빨리 서은서의 앞을 막아섰다.
“도망쳐…….”
성현은 끝까지 말할 수 없었다.
쩌어어엉!
뢰피크르의 마력이 쏟아졌고 성현의 귓가에 폭발음이 들렸다.
이어서 서은서가 뒤로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성현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서은서가 반대편 벽에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서은서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콜록거렸고, 뢰피크르는 어이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쫑알쫑알……. 내가 인간에게 죽는다고? 개소리!”
그녀의 손에서 스르릉, 칼이 나타났다.
시퍼런 칼날이 피를 원하듯 우우웅, 울고 있다.
뢰피크르가 칼을 달래듯 어루만지며 저벅저벅, 서은서를 향해 걸어갔다.
뢰피크르의 눈에 성현은 보이지도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서은서다.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저 여자부터 찢어 죽여 주지. 먹어 달라고? 그래, 어디부터 먹어 줄까? 팔? 다리? 머리는 싫어. 난 맛있는 곳은 가장 마지막에 먹거든.”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뢰피크르는 성현에게 등을 보인 채 서은서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성현은 손에 쥔 창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창에서 검은 마력이 진액처럼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이, 도망치지 말지?”
“도망?”
“그래, 네 상대는 나다.”
성현은 뢰피크르를 향해 그대로 창을 휘둘렀다.
뢰피크르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깔깔깔 웃었다.
“도망이라고? 도망? 하하하하!”
그리고 성현의 창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콰직!
갑자기 나타난 뢰피크르의 소환마, 털 없는 고릴라가 막아섰기 때문이다.
어깨높이만 약 5m, 피부에서는 더러운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고릴라가 성현을 보며 포효했다.
-커허어엉!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였다.
그리고 뢰피크르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인간…… 내가 인간 따위와 싸울 것이라 생각했는가? 네 상대는 내 애완동물이면 충분하다.”
그 말을 남긴 후 뢰피크르는 다시 서은서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성현은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뢰피크르의 말대로 지금 상대해야 할 것은 이 고릴라였다.
‘젠장.’
성현은 이 고릴라를 알고 있었다.
회귀 전, 성현이 아직 계약자가 되기 전이었다.
비상 사이렌이 울리며 S등급의 짐승이 나타났으니 가까운 대피소로 도망치라는 안내 방송이 도심을 울렸다.
성현은 당시 일반인이었기에 대피소로 도망쳤고 작은 텔레비전을 통해 밖의 소식을 볼 수 있었다.
대짐승 진압 부대의 부대원 약 100여 명이 나타나 고릴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릴라의 상대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폭력이었고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고릴라는 잡히는 대로 군인들을 죽였다.
다리를 씹어 먹고 머리를 으깨 먹고 몸을 찢어 먹고.
도심은 비명으로 채워졌고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고릴라가 쓰러졌을 때 그 자리에 서 있는 계약자는 단 2명뿐이었다.
나머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이가 되어 도심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지금 그때의 그 고릴라가 성현의 앞에 서 있었다.
-크허어어엉!
성현은 창을 툭툭 흔들며 중얼거렸다.
‘문지기의 팔찌.’
모든 스텟이 +5가 되었다.
이어서…….
‘남은 스텟을 모두 스피드에.’
성현의 허벅지가 부풀어 올랐다.
핏줄이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스피드를 올리는 알약을 집어 씹어 먹었다.
고릴라의 파워를 압도하려면 그 이상의 스피드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성현의 몸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엄청난 힘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성현의 눈동자가 천천히 고릴라를 향했다.
‘회귀 전이었다면 한 방에 으깨 버렸을 텐데.’
이런 고릴라 따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게 우스웠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긴장해야 한다.
과거의 영광을 잊고 현실에 충실하지 않으면 저 두꺼운 주먹에 으깨지는 것은 성현이 될 거다.
후우우웅!
고릴라의 주먹이 성현을 향해 휘둘렸다.
성현은 몸을 틀어 가볍게 주먹을 피하며 놈의 팔꿈치 뼈를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콰드득!
성현의 창에는 대모벌의 독침이 달려 있다.
높은 확률로 상대는 독에 중독되고 행동이 느려진다.
고릴라도 마찬가지였다.
두꺼운 근육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관절이 관통되며 그대로 독에 노출됐다.
“고운 피부부터 그어 줄까?”
서은서의 앞에 마녀 뢰피크르가 서 있었다.
뢰피크르는 긴 검으로 서은서의 뺨을 툭툭 건들며 잔인하게 웃고 있다.
“하나 물어보고 싶어. 내가 우습게 보였니? 마녀라고 하니까 약해 보여? 어떻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어?”
“……아뇨.”
“그런데 어떡하지? 유성현은 내 애완동물에게 맞아 죽을 거고, 넌 존재들의 유흥거리가 될 거야. 발가벗겨져서 씹혀 먹는 거지.”
“죄송합니다. 살려 주세요.”
서은서는 비참한 목소리로 목숨을 구걸했고 뢰피크르가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이 비참함을 봐라. 이게 인간이야. 찰나의 삶을 더 살아보자고 발발 기어 다니지. 푸하하하하!”
서은서는 화를 내지 않았다.
허리를 굽실대더니 이제 절까지 한다.
“위대한 존재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그 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목숨을 살려 주신다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서은서가 비굴한 목소리를 낼 것을 뢰피크르는 예상하고 있었다.
마녀의 힘은 대자연에 가깝고 그 앞에 선 모든 인간이 똑같이 발발 떨었기 때문이다.
“인간아, 살기를 원하느냐?”
“……네.”
하지만 뢰피크르는 몰랐다.
땅에 머리를 처박은 서은서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뢰피크르의 뒤에서는 붉은 안개가 거세게 모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