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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86화 (86/252)

86화

서은서가 붉은 안개를 모으고 있을 때, 성현은 계속해서 고릴라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고릴라의 팔꿈치 뼈는 창에 찔려 망가졌고 두꺼운 피부는 찢겨 나갔다.

고릴라의 몸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으며 뼈의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너덜너덜…….

하지만 이놈의 가장 무서운 점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창에 찔려도 놈은 멈추지 않는다.

성현을 향해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성현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놈의 주먹이 꽂힌 바닥이 포탄을 맞은 것처럼 움푹움푹 팼다.

꽝! 꽝! 꽝! 꽝! 꽈앙!

성현은 뒤로 물러서며 실소를 흘렸다.

‘미친…….’

회귀 전 이 고릴라가 도심에 나타났을 때 왜 약 100명의 진압 부대원이 몰살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절망적일 정도로 파괴적인 힘.

이계의 돌로 만든 이 성조차도 고릴라의 주먹에 맞고 부서지며 파편이 튕겨 나가는데, 인간이 만든 건물이 버틸 리 없다.

저 주먹에 맞은 건물은 허무할 정도로 무너졌을 테고 그 잔해에 깔려 죽은 사람이 태반이었을 거다.

스피드가 떨어지는 부대원은 저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한 방에 맞아 죽었을 게 분명하다.

압도적인 힘, 그 앞에 인간의 전술은 무력했고 당황한 지휘관은 부대원을 오합지졸로 만들었을 거다.

당시의 지옥 같은 상황이 성현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성현은 다르다.

고릴라를 상대로 당황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며 기회를 기다렸다.

성현은 놈의 약점과 무너뜨릴 방법을 알고 있었다.

품에서 꺼낸 것은 케르베로스의 발톱, 그 길이가 약 30cm.

성현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할 수 있어.’

케르베로스의 발톱은 고릴라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아이템이다.

하지만 발톱을 손에 들었다고 바로 고릴라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아직이야. 기다려야 해.’

완벽한 찬스를 위해서는 조바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성현은 놈이 독에 중독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 그냥 보고 있기는 아쉬운데, 네놈을 상대로 도박판을 벌여도 될까?”

목숨 걸고 고릴라의 주먹을 피하고 있는데 헛소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들어 볼 생각은 있었다.

“도박?”

“네가 살아남는다면 판돈의 1%를 주지.”

지금 이 싸움을 많은 존재들이 지켜보고 있다.

카니발에서 했던 것처럼 그들이 베팅을 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면 수수료를 먹을 수 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1%면 인간들의 돈으로 30억은 될 것 같은데. 어때?”

그동안 창을 만든다고 모았던 돈을 거의 다 썼다.

성현은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아리가 챙기게 할 수는 없다.

“3%.”

아리가 고개를 저었다.

“인간……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게 좋아. 내가 챙기는 것도 3%가 안 돼.”

“3%.”

“내가 수수료를 주기 싫어서 그 싸움에 끼어들 수도 있어. 네가 죽으면 안 줘도 되니까.”

“싸움에 안 끼어든다고 했잖아? 약속은 지킨다며?”

“내가 그런 말을 했나?”

아리가 딴소리를 하자 천장에 박힌 존재들의 메시지가 머릿속에 울렸다.

-아리, 분명 그렇게 말했다. 내가 들었다.

-존재가 인간과 약속을 안 지키면 누가 계약을 할까?

-아리, 3% 주고 도박판이나 열어라. 빨리 안 열면 널 찢어 죽일 거다.

삶이 지루한 존재들에게 이런 도박은 즐거운 여흥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던 아리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2%.”

“콜.”

성현의 대답을 듣자 아리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도박판의 전권은 내가 갖지. 내용은 고릴라와 유성현. 방식은 승, 무, 패. 계약 내용은 판돈의 2%를 수수료로 지급한다. 어때? 상황이 이러니 사인을 받을 수는 없고 구두로 계약하겠나?”

“계약하지.”

그 말과 동시에 아리가 낫으로 땅을 찍었다.

‘쾅!’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하늘로 솟구쳤고 기다렸다는 듯이 메시지가 쏟아졌다.

-마드렛 산의 지배자 레드 드래곤 레오께서 유성현의 승리에 10골드를 걸었습니다.

-폭식의 여왕 맨티스께서 유성현의 승리에 10골드를 걸었습니다.

-폭식의 여왕 맨티스께서 유성현 님께 ‘이제야 찾았네.’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마족 모아마제께서 고릴라의 승리에 10골드를 걸었습니다.

-거짓의 군주 카디르버 님께서 유성현의 승리에 10골드를 걸었습니다.

-거짓의 군주 카디르버 님께서 ‘어서 함께 온 동료를 도와라.’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돈을 걸었다는 내용과 알 수 없는 응원의 메시지가 시끄럽게 박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메시지들 중 두 가지가 성현의 신경을 쓰이게 했다.

하나는 카디르버.

그는 어서 동료를 도우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동료는 당연히 서은서.

성현의 시선이 힐끗 서은서에게 향했다.

그녀는 뢰피크르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다.

성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금만 더 버텨라.’

성현 역시 지금 당장 그녀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앞에 고릴라가 막아서고 있다.

놈을 쓰러뜨려야 서은서를 도울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신경 쓰이는 메시지는 바로 맨티스…….

‘……이제야 찾았다고?’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다.

하지만 생각은 여기까지다.

지금은 싸움에 집중해야 한다.

앞에 있는 고릴라는 여전히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성현은 놈이 독에 중독되기를 기다렸지만 두꺼운 피부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쉽게 중독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성현은 기회를 보며 계속해서 창을 찔렀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붉게 흐르던 고릴라의 핏물이 검게 변했다.

드디어 독에 중독된 거다.

물론 놈은 S등급의 짐승, 독에 중독되었다고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행동이 둔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몸이 마비된 것처럼 뻣뻣해질 거다.

‘지금이야.’

성현은 뒤로 물러나던 것을 멈추고 케르베로스의 발톱을 대검처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고릴라가 주먹을 휘두를 때 놈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 가슴에 발톱을 박았다.

콰악!

고릴라의 눈에 핏줄이 솟았다.

발톱은 고릴라의 신경을 건드렸고 놈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심각한 고통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성현은 멈추지 않았다.

케르베로스의 발톱이 박히며 구멍 난 가슴에 손을 쑤셔 넣고 상처를 벌렸다.

이어서 그사이에 창을 욱여넣었다.

이제 전기를 써서 심장까지 감전시키면 끝이다.

‘라이트닝!’

그런데 고릴라가 거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킹콩처럼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려 한다.

이번 공격은 피할 수 없었다.

전기를 흘려 넣던 중이라 성현은 그 주먹에 그대로 노출됐다.

저 주먹에 맞으면 죽고 말 거다.

거대한 주먹이 성현을 향해 다가왔고 성현은 창을 굳게 잡은 채 눈을 부릅떴다.

그 풍압에 성현의 머리카락이 흩날릴 정도였다.

그리고 잔인한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꽈지지직!

아리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죽었나?’

고릴라의 주먹에 맞으면 마녀들도 버티기 힘들 거다.

하물며 성현은 인간이다.

‘수수료 안 줘도 되겠네.’

그녀의 속마음은 건조했다.

그녀는 성현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었다.

어머니께 보고만 하면 된다.

그녀는 성현의 상태를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

성현은 멀쩡했다.

고릴라의 주먹에 맞은 것은 오미로 베루스였다.

어느새 나타난 오미로 베루스가 방패처럼 성현을 막아서고 있었다.

투투툭.

오미로 베루스의 갈비뼈와 척추가 으스러지며 먼지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고릴라의 주먹이 다시 움직였다.

-키아아아악!

성현은 고릴라의 가슴에 박힌 창을 더 깊이 찔러 넣으며 전기를 쏟아부었다.

“죽어!”

오미로 베루스가 완전히 박살 나느냐, 아니면 고릴라가 먼저 죽느냐.

어쩌면 그 주먹이 그대로 성현을 짓이길 수도 있다.

목숨을 건 도박.

성현은 고릴라의 섬뜩한 살기를 느끼며 계속해서 전기를 뿌려 댔다.

“제발 죽어!”

하지만 고릴라의 두 번째 공격은 없었다.

방금까지 펄떡거리며 뛰던 심장이 전기에 타 버리며 고릴라의 피는 싸늘하게 식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기등등하던 모습이 무색할 정도였다.

놈은 그대로 멎어 있었다.

성현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앞을 바라봤다.

‘이것도 다행이네.’

다행히 오미로 베루스도 살아 있었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멀쩡했다.

던전으로 돌아가 휴식하면 충분히 재생될 거다.

‘고생했다.’

오미로 베루스의 몸이 스르륵 사라졌다.

성현이 고릴라의 가슴에서 창을 뽑으며 아리에게 입을 열었다.

“어이, 아리. 바로 다음 도박판을 열어. 인간 대 마녀.”

아리가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이번 도박도 전과 똑같은 조건으로 가겠다. 계약하겠는가?”

“어.”

곧바로 메시지가 쏟아졌다.

-……마녀 뢰피크르의 승리에 10골드를 걸었습니다.

-……뢰피크르의 승리에 10골드를 걸었습니다.

-……크르의 승리에 10골드를 걸었습니다.

그중에 인간의 승리를 예상하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존재들은 마녀의 일방적인 승리를 점친다.

이들 사이에 10위권 랭커가 있으면 고민을 해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10위권 밖.

게다가 지금은 짐승의 날이었고 뢰피크르의 힘은 이계와 똑같이 온전했다.

“인간이 이길 수 없다.”

그게 존재들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성현은 존재들의 눈동자, 그 시선을 받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마치 콜로세움에 세워진, 왕의 명령에 싸워야 하고 죽여야 하는 그런 노예 같은 느낌.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피를 흘려야 할 운명.

방금 전에도 느꼈던 것인데, 이 세상에서 성현의 의지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흘러가는 톱니바퀴, 그 부품의 하나.

하지만 성현은 불평하지 않았다.

‘뭐 어때…….’

어차피 목표로 잡은 길이다.

피의 강을 지나다 보면 길의 끝이 결말이 되어 보일 거다.

성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앞에 뢰피크르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 미니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가 서은서의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뢰피크르의 뒤에는 붉은 안개가 모이는 중이었다.

서은서는 여전히 뢰피크르에게 절을 하고 있었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살려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진정성이 엿보였다.

뢰피크르의 입술이 빙긋이 휘어졌다.

“뭐든 다 하겠다고?”

“……네.”

“뭐든지?”

“네.”

서은서는 힘주어 말하며 힐끗 뢰피크르의 뒤를 바라봤다.

이제 거의 다 모였다.

저 붉은 안개로 뢰피크르를 죽일 수는 없어도 발목은 잡을 수 있을 거다.

서은서는 그다음, 다음의 계획을 머릿속에 세우며 말을 이었다.

“뭐든 다 할 테니까 제발…….”

서은서가 뢰피크르를 향해 눈동자를 옮겼다.

그런데 뢰피크르의 입술이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은서와 눈을 마주친 순간 뢰피크르가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인간아, 내가 모를 줄 알았니? 네 존재가 거짓의 군주 카디르버지? 어쩜, 자기 존재랑 똑같은 짓을 할까?”

“네?”

“내 뒤에서 붉은 안개를 모으고 있잖아! 그러면서 뭐든 하겠다고? 그 더러운 입을 찢어 줄까?”

뢰피크르가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서은서는 움찔거렸고 뢰피크르는 매서운 눈으로 붉은 안개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붉은 안개는 이미 구름처럼 변해 있었다.

하지만 완성 전이라 위력은 없다.

흩어 놓으면 끝이다.

그런데 붉은 안개를 보던 뢰피크르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보고 말았다.

저 뒤에 고릴라가 쓰러져 있었고 눈앞으로 성현이 나타났다.

성현이 고릴라를 죽인 거다.

뢰피크르가 더듬거렸다.

“……어? 이렇게 빨리?”

그 순간 뢰피크르의 머리를 향해 성현이 창을 휘둘렀다.

“죽어라.”

뢰피크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급히 칼을 들었다.

창과 칼이 부딪쳤다.

꽈앙!

뢰피크르는 서둘러 성현의 창을 막았지만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뒤에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재빨리 눈동자를 틀어 보니, 서은서가 단검을 들고 뢰피크르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서은서가 준비했던 붉은 안개, 그것은 처음부터 들킬 것을 예상하고 만들어 둔 거다.

뢰피크르가 붉은 안개를 흩어 놓으려 할 때 단검으로 그녀의 목을 찌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뢰피크르는 단검을 피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하지만 완벽히 피할 수는 없었다.

서은서의 단검이 그녀의 등을 그었다.

찌이이이익!

블라우스가 찢어지고 하얀 속살이 드러나더니 피가 솟아났다.

뢰피크르는 당황했다.

그녀는 자신의 피를 처음 봤고 그 고통 역시 생소했다.

그녀의 눈이 분노로 물들기 시작했다.

“인간 따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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