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뢰피크르는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서은서를 노려봤다.
“죽인다. 지금 당장 죽인다. 당장, 당장!”
뢰피크르의 눈이 뒤집혔다.
그녀는 자신의 등에 상처를 입힌 서은서를 지금 당장 짓이겨 죽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어!”
뢰피크르가 검을 쥔 손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녀의 손에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뢰피크르의 귓가에 성현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네 상대는 나다.”
“……!”
그래, 이 자리에는 성현도 있었다.
뢰피크르는 서은서만 상대하는 게 아니었다.
뢰피크르의 동그란 눈이 천천히 뒤로 이동했다.
성현의 주먹이 휘둘리고 있었다.
콰직!
뢰피크르의 몸이 출렁였다.
그녀가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성현의 주먹이 그녀의 얼굴에 꽂혀 들어갔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성현의 주먹 하나하나가 쇳덩이 같았다.
뢰피크르는 뇌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가 뒤로 빠진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성현이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완벽한 창의 공간이다.”
“……!”
성현은 작게 만들어 뒀던 창의 크기를 다시 키웠다.
성현의 창에서 마력이 진액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다.
“지금부터 지옥을 맛봐라.”
성현은 창을 한 바퀴 빙글 돌린 후 그대로 뢰피크르의 목을 향해 찔러 넣었다.
쉬이이익!
뢰피크르는 간신히 몸을 틀어 피했다.
하지만 본능에 의한 것이지 알고 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정신이 없었다.
“아직이다.”
그걸 가만히 둘 성현이 아니었다.
창을 휘둘러 뢰피크르의 몸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퍽! 퍼퍽! 퍼퍼퍽!
존재들의 세상은 난리가 났다.
-마녀가 인간에게 맞아 죽는 것인가?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데, 저렇게 얻어맞는다고? 이제는 이겨도 진 거다. 존재의 수치야.
-지금 배당이 어떻게 되지?
-10골드를 걸었는데, 인간에게 20골드를 넣어야겠어.
-폭식의 여왕 맨티스께서 인간의 승리에 10골드를 걸었습니다.
-폭식의 여왕 맨티스께서 유성현 님께 ‘죽지 마. 넌 무슨 맛일까?’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뢰피크르도 그 메시지를 확인했다.
뢰피크르가 맞는 것을 보며 낄낄대는 존재들.
그들은 그녀가 맞는 것을 보며 비웃고 욕하고 손가락질한다.
뢰피크르는 맞아서 아픈 고통보다 마음에 새겨지는 상처를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젠장!”
하지만 성현은 그녀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창을 휘둘러 그녀의 얼굴을 가격하고 지나갔다.
콰지직!
허공에 뢰피크르의 피가 흩뿌려졌다.
존재들은 인간에게 베팅하기 시작했다.
-……레오 님께서 인간의 승리에 10골드를 걸었습니다.
-……인간의 승리에 10골드를 걸었습니다.
-……걸었습니다.
존재는 극단적일 정도로 개인적이다.
자신과 자신의 무리 외에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이들은 바로 옆에 다른 존재의 사체가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할 수 있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이들에게 뢰피크르의 고통은 여흥일 뿐이었다.
-인간 힘내라고!
-뢰피크르의 비명을 더 듣고 싶어.
-나도, 나도 듣고 싶어. 마녀의 비명을 듣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난 다른 게 궁금해. 다리를 잘라 봐! 그럼, 마녀도 살려 달라고 빌까?
-해 봐.
-어서!
-이런 것은 돈을 주고 메시지를 보내야지. 그래야 읽겠지.
-마드렛 산의 지배자 레드 드래곤 레오 님께서 인간의 승리에 10골드를 걸었습니다.
-마드렛 산의 지배자 레드 드래곤 레오 님께서 “마녀의 입에서 살려 달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면 보상으로 100골드를 주겠다.”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성현의 머릿속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선택 퀘스트 : 마녀의 입에서 살려 달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어라]
성공 보상 : 100골드를 주겠다.
실패 페널티 : ??
그 모든 메시지가 뢰피크르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녀가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가 쓸쓸하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짧았다.
성현의 창이 그녀의 복부를 가격했기 때문이다.
콰지직!
* * *
서울…….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짐승의 날이 되며 한낮임에도 세상은 어두웠고 서늘한 기운이 세상 곳곳을 채웠다.
도심 곳곳에 짐승이 출몰했고 여기저기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경찰과 대짐승 진압 부대가 출동하는 소리였다.
-석촌 호수 앞에 B급 짐승 출현! B급 짐승 출현! 시민분들은 안전한 곳, 대피소를 찾아 대피하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석촌 호수 앞에……!
길이 40m의 아나콘다가 등장했다.
놈이 건물 사이를 스쳐 지나며 도심을 부쉈고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카아아아악!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피소를 찾아 숨었다.
하지만 모두가 숨는 것은 아니다.
파렴치한 양아치들은 편의점 등 동네 가게를 털었다.
누군가는 더 큰 범죄를 노리며 거리를 배회했다.
공권력이 없는 곳은 말 그대로 무법 지대, 대한민국의 오늘은 어두웠다.
그리고 서울 어느 주택가.
이곳 역시 적막했다.
아니, 이곳은 짐승의 날이 아니라 평소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도심 재개발이 시작되며 각 주택의 창문마다 시뻘건 색으로 엑스가 그려져 있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은 노숙자 또는 재개발 관계자들뿐이다.
그런데, 적막한 이곳에서도 그 누구하나 찾지 않을 것 같은 음산한 골목에서 한 남자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울 것 같았다.
그런데 남자의 복장이 이상했다.
바지는 엉덩이까지 내려와 있고 상의는 훌떡 벗고 있다.
그리고 남자의 뒤에는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여자는 코뼈가 뭉개진 채 의식을 잃었고 그녀의 옷은 끔찍한 일을 당하기 직전처럼 북북 찢어져 있다.
남자는 혼란을 틈타 여자를 강간하려 했던 거다.
하지만 도중에 나타난 것 때문에 실패했다.
남자는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남자가 공포에 질려 바라보는 곳에는 한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한아성, 성현의 고등학교 친구였다.
그런데 그녀의 손이 이상하다.
우선 오른손은 마치 낫처럼 변해 있다.
살짝 스쳐도 몸이 두 동강이 날 것처럼 살벌하다.
왼손은 더 끔찍하다.
웬만한 사람보다 더 크다.
그 손바닥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입까지 달려 있다.
그 입이 남자를 보며 입맛을 다신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
인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사나웠다.
마치…… 인간을 음식으로 생각하는 포식자.
그래, 짐승이었다.
남자는 울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정말 죄송해요. 정말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아성이 조용히 물었다.
“다시는 안 그런다고?”
“네! 정말이에요! 살려만 주시면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저기…… 저 여자도 살려 달라고 말하지 않았어?”
남자의 눈동자가 스르륵 뒤로 향했다.
검은 스타킹이 다 찢어진 여자, 저 여자도 방금 전까지 살려 달라 빌고 있었다.
남자를 거부하며 발버둥을 쳤다.
그래서 몇 대 때렸다.
기절하도록…….
남자의 눈동자가 다시 한아성을 향했다.
그리고 최대한 열심히 좋은 사람의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전 안 죽였어요.”
“난 죽일 거야.”
한아성이 남자를 향해 한발 내디뎠다.
남자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살려 달라고! 살려 줘! 제발!”
한아성의 거대한 왼손이 보자기처럼 남자를 덮었다.
남자가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우웁! 웁! 웁!”
쓰러져 있던 여자가 눈을 떴다.
얼굴에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으으윽.”
그런데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빠득, 빠득, 아그작, 아그작.
여자는 그 소리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조심스레 눈동자만 움직여 옆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짐승이 남자를 먹고 있는 것을 봤다.
“꺄아아아악!”
그 짐승의 시뻘건 눈동자가 여자를 향했다.
여자는 발발발 떤다.
파괴적인 공포에 도망치기는커녕 살려 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녀를 향해 짐승이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해.”
“……!”
“시끄러워.”
그 짐승은 남자의 옷을 뱉어 낸 채 골목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 짐승의 모습이 서서히 인간으로 변해 갔다.
그 짐승은 한아성이었다.
한아성은 가방에서 물수건을 꺼내 자신의 손을 닦았다.
남자의 피가 묻는다.
한아성은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이래야 해?”
손바닥에 붙은 입이 낄낄거린다.
-소멸의 바다에 도달하려면 먹고 또 먹어야지. 그 망령이 향하는 곳, 그 길이 너를 소멸의 바다로 안내할 거야. 이제 머지않았어. 조금만 더 먹으면 돼. 다른 인간을 불쌍해하지 마. 어차피 모르는 사람이야. 교통사고로 연간 3천 명 이상이 죽어도 안 불쌍하잖아. 똑같아. 그저 숫자야. 한 끼 식사고.
한아성의 동생은 식물인간이다.
그녀는 동생이 소멸의 바다에 있다는 것을 들었고, 구하기 위해 계약자가 되었다.
자신의 동생을 식물인간에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데 한아성이 인간의 마음을 잃어 가고 있었다.
점차 손바닥에 붙은 입이 하는 말과 그녀의 생각이 같아지고 있다.
그때였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존재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유성현을 찾았다.
지금까지 시무룩해 있던 한아성의 눈빛이 반짝였다.
-군대에 갔더구나.
“……군대요?”
그 나이대의 남자들이 군대에 가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성현이 군대에 있다니, 의외였다.
그동안 한아성이 성현을 찾았는데 왜 못 찾았는지 알 것 같았다.
메시지가 이어졌다.
-유성현이 소멸의 바다로 향하는 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한아성의 눈이 반짝였다.
* * *
꽈아아아앙!
다시 뢰피크르의 성.
뢰피크르가 비틀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피투성이었고 하얀 블라우스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두들겨 맞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과는 다르다.
맞으면 맞을수록 그녀의 정신은 또렷해졌고 성현의 움직임이 눈에 보였다.
성현은 지금도 엄청나게 고속으로 움직였지만 그녀의 눈에는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장난은 그만.”
콰아아악!
성현이 휘두른 창이 뢰피크르의 손에 잡혔다.
뢰피크르의 눈동자가 천천히 성현을 쏘아봤다.
“잠시 당황했어. 오랜만에 싸워 보는 거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그런데 이제는 알았어.”
뢰피크르가 쥐고 있던 창을 집어 던졌다.
성현이 반대편 벽까지 날아가 부딪쳤다.
‘쩌어엉!’ 소리를 내며 벽에 금이 쩌억 갔다.
뢰피크르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화장대에 놓인 수건을 들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그리고 그녀는 깨진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전투 현장에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태도.
그녀가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손에 쥐고 입을 열었다.
“성현아?”
그 목소리 역시 다정했다.
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성현이 창을 지팡이 삼아 일어날 때, 그녀가 립스틱을 입에 바르며 말을 이었다.
“대답해 봐. 어떻게 죽여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