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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88화 (88/252)

88화

뢰피크르의 목소리는 서늘했지만 성현은 침착했다.

“원하는 대로 죽여 주려고?”

“그래, 대답해 봐. 원하는 대로 해 줄게.”

“늙어 죽고 싶은데. 내 옆에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두 다 있는 상황에서 눈감고 싶어.”

“그건 어렵겠는데?”

“원하는 대로 해 준다며?”

“그건 아니야.”

이들의 대화는 다정했다.

서로를 죽이려는 관계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다정했고 사랑스러웠다.

“다른 것을 말해 볼래? 예를 들어, 산 채로 피부가 벗겨지고 싶다든지…….”

뢰피크르가 성현과 대화하며 립스틱을 내려 둔 그 순간이었다.

“죽어!”

뢰피크르의 앞으로 서은서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콱, 뢰피크르의 손이 서은서의 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서은서를 집어 던졌다.

서은서가 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고 뢰피크르는 다시 거울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성현아, 네 몸을 태워 죽여 줄까?”

그 말과 동시에 성현의 주변에 불꽃이 일어났고 치솟은 불길이 벽처럼 성현을 둘렀다.

뢰피크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게 싫으면 얼려 죽여 줄 수도 있어. 고드름에 꼬치처럼 꿰어서 죽여 줄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쩍, 소리가 들리더니 천장에 고드름이 얼어붙었다.

그 크기가 약 2m.

고드름의 뾰족한 모서리가 성현을 꿰뚫기 위해 ‘쾅! 쾅! 쾅!’ 하고 떨어졌다.

성현이 바삐 피할 때, 뢰피크르는 피 묻고 찢어진 블라우스의 단추를 툭툭 풀었다.

블라우스를 땅에 떨어뜨린 그녀가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에 속옷만 입은 그녀의 모습이 비친다.

하얀 속살, 완벽한 몸매, 누가 봐도 그 아름다운 몸에 오점이 생겼다.

성현 때문에 생긴 상처, 서은서의 단도가 지나간 상처.

수건으로 닦아도 피가 뚝뚝 떨어진다.

“너희 두 사람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새로운 블라우스가 스르륵 나타났다.

하얀 블라우스를 입으며 뢰피크르가 계속 말했다.

“대답해. 고민할 필요 없어. 어떤 죽음이든 고통스러울 거야. 넌 살려 달라 빌 테고 난 허락하지 않을 거야. 아, 먼저 저 여자부터 네 눈앞에서 씹어 먹기로 했나? 예쁜 다리부터 씹어 줄까? 아니면, 고운 손가락?”

“능력 있으면 해 봐라.”

성현이 고드름을 뚫고 튀어나왔다.

무심한 눈으로 창을 휘두른다.

부아아아악!

뢰피크르가 몸을 틀어 가볍게 피했다.

“인간, 네 공격은 뻔히 보인다.”

성현은 멈추지 않았다.

허공에 8개의 라이트닝 볼이 나타났다.

그것들이 공기를 태우며 뢰피크르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무리였다.

“권능도 소용없다.”

뢰피크르는 귀찮은 듯 손을 휘둘렀고 그녀의 손짓에 라이트닝 볼은 허무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성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바닥에 손을 대고 방금 죽은 고릴라의 핏물을 끌어 올렸다.

핏방울이 모여 뾰족한 송곳으로 변했다.

“죽어!”

슈슈슈슉!

뢰피크르를 향해 날아갔다.

뢰피크르는 감정 없는 검은 눈동자로 그것을 노려봤다.

그러자 그것이 뢰피크르의 앞에서 뚝 정지했다.

이어서 단단하게 굳어 있던 핏물이 주르륵 얼음 녹듯이 흘러 땅으로 떨어졌다.

뢰피크르가 그 핏물을 보며 말했다.

“이것조차도 내겐 무의미하다.”

“헛소리!”

성현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전기를 뿌려 대고 피로 만든 구체를 쏘아 댔다.

심지어 가지고 있던 독을 던졌다.

그 공격에 서은서도 참여했다.

서은서의 붉은 안개가 공간을 채웠고 형체 없는 공격으로 뢰피크르의 공간을 압박해 갔다.

쾅! 쾅! 쾅! 쾅!

요란한 공격이 쉬지 않고 이뤄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뢰피크르의 앞에서 무의미했다.

권능은 닿지 않았고 독은 효과가 없다.

결국 성현과 서은서의 공격은 먼지만 일으켰을 뿐이다.

이윽고 성현이 비틀거렸다.

짧은 시간 폭발적인 힘을 사용하며 체력의 한계를 느낀 거다.

서은서도 마찬가지다.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하지만 뢰피크르는 달랐다.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성현과 서은서를 노려보며 손을 휘저어 눈앞의 먼지를 없애고 있다.

뢰피크르는 지나칠 정도로 여유롭다.

그녀가 다시 검을 잡았다.

지금껏 맨손으로 성현과 서은서를 상대하던 그녀가 검을 쥔 것이다.

“이제 죽이겠다.”

뢰피크르가 두 사람을 향해 움직이자 존재들의 메시지가 다시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인간은 역시 안 되나?

-그래, 그만 죽여라. 역시 인간 따위는 지켜볼 가치가 없다.

-잠깐…… 죽인다고? 그럼, 예언은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이지 마! 저놈이 있어야 에느가인을 찾을 수 있잖아! 그래야 우리들의 신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잖아!

-에느가인은 없어. 예언은 거짓이야.

-예언이 있다 해도 저 인간은 아니다. 다른 때라면 인간이 존재를 이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필 짐승의 날이라니. 저 인간은 무모했어.

-수억 년을 살아왔으면서 아직도 예언을 믿나? 내일 해가 뜨는 것, 그게 예언이다. 오늘 달이 뜨는 것, 그게 약속된 룰이다.

-뢰피크르에게 제안하고 싶다. 남자 인간을 내게 다오. 그 육체를 맛보고 싶다.

-이 상황에 미식을 생각하는 넌 대체 누구야?

이대로 성현이 죽으면 예언은 깨지는 거다.

아니면 운명의 굴레에서 그 예언이 다시 시작되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이미 영원의 시간을 살아온 이들에게 다음 이뤄질 영원의 시간은 생각만으로 끔찍했다.

하지만 성현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며 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예언에 나온 인물이라면 뢰피크르 정도는 이겼을 거야.

그들은 성현이 이미 패배했다고 확정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뢰피크르가 성현과 서은서에게 다가설 때 ‘꽈아앙!’ 하고 검은 구체가 뢰피크르의 앞에서 터졌다.

“하…….”

뢰피크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틀었다.

방문 앞에 10여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서준식과 이준, 이주안 그리고 윤희진,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용병들이었다.

“내 새끼들을 죽였나?”

뢰피크르의 계약자 8명.

서준식과 그 일행은 뢰피크르의 계약자를 모두 죽이고 이곳에 섰다.

그 증거로 서준식이 툭, 한 사람의 머리를 던졌다.

랭커 이두용의 머리였다.

그 머리를 본 뢰피크르의 눈썹이 꿈틀댔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온라인 게임과 같다.

한 인간을 랭커로 키우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캐릭’이 지금 죽어 있다.

서준식이 담배를 입에 물며 입을 열었다.

“약하더라.”

당당하게 말했지만 이들의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가장 강한 서준식도 광대뼈가 으깨져 함몰되어 있으니 다른 사람의 상태는 말하지 않아도 끔찍했다.

이들은 지금껏 뢰피크르의 계약자와 치열한 싸움을 했고 겨우 이곳에 설 수 있었다.

뢰피크르가 묘한 눈으로 그들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갔으면 좋았을걸……. 도망쳤으면 살려 줬을 텐데. 내가 그렇게 야박한 존재가 아니란다. 지금이라도 말하지. 가라. 내 너희들은 살려 주마.”

그 말에 윤희진이 킥킥킥 웃었다.

뢰피크르의 눈빛이 찌푸려졌다.

“웃어?”

“그럼, 안 웃기겠어? 못 도망치게 만든 게 너잖아!”

서준식과 이준을 제외하고 윤희진과 이주안 그리고 용병들은 도망치려 했다.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폭주하는 마녀의 마력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문은 닫혀 있었고 열리지 않았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윤희진이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우리를 보내 준다고 하면 오케이. 갈게. 그러니까 문을 열어 줘. 갈 테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뢰피크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목소리를 토해 냈다.

“보내 달라고!”

비웃거나 욕할 수는 없다.

공포 앞에서 인간의 행동은 다르지 않다.

저 감정이 무뎌질 때까지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뢰피크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이 닫혀 있어?”

이 성은 뢰피크르가 태어나면서 만들어진 곳이다.

단 한 번도 문이 닫힌 적이 없다.

언제나 열려 있었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닫혀 있다고 한다.

오히려 그녀가 반문한다.

“왜?”

그 시각.

끝없이 높은 탑.

지르힐의 앞에 금발 머리의 꼬마가 서 있었다.

“지르힐 님의 위대한 이름을 알려도 되겠습니까? 지르힐 님의 계약자가 유성현이라는 것을 알려도 되겠습니까?”

계약자는 자신의 존재를 숨긴다.

마찬가지로 존재는 자신의 계약자를 숨긴다.

그런데 지금 꼬마는 지르힐의 이름을 알리겠다고 한다.

평소라면 화를 냈겠지만 지르힐은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유성현이 이계 시장에서 제게 사 간 물건을 보면 다음 권능이 예측됩니다. 지금까지 유성현이 쓰던 권능은 일반적인 전기 계열이었지만 다음은 다를 겁니다. 존재들은 그 권능을 보고 지르힐 님의 이름을 떠올릴 겁니다.”

“그래서?”

“어차피 알게 될 이름, 미리 알려 주고 피나 좀 받아 오겠습니다.”

꼬마는 유르라헬의 성으로 찾아가 지르힐의 이름을 말할 생각이며, 그 피를 얻어 지르힐을 묶고 있는 사슬을 녹일 계획이다.

“허락해 주십시오. 헤헤.”

꼬마가 간사하게 웃었고, 지르힐은 그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하라.”

꼬마는 고개를 숙인 뒤 탑을 빠져나갔다.

다시 탑 내부는 적막해졌다.

쓸쓸한 고독만이 가득하다.

지르힐은 자신을 묶고 있는 사슬을 바라봤다.

지난번 유르라헬의 피를 뿌리며 조금은 녹은 흔적이 보인다.

앞으로 몇 번이 될지 모르지만 쇠사슬이 끊어지고 자유의 몸이 되면 존재의 세상은 신의 분노를 느끼게 될 거다.

지르힐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조금만 더…….’

그리고 같은 시각.

뢰피크르의 성 앞으로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숫자가 3명, 계약자는 아니다.

한 사람은 서은서의 경호실장 무령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리포터,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든 남자였다.

“더 가까이 가야 하나요?”

리포터가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2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짐승의 공포를 견딜 수 있는 약을 먹었지만 존재의 마력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속이 메슥거렸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문제는 마녀의 성까지 1km도 더 남아 있다는 거다.

지금도 이런데, 성의 코앞까지 가면 어떨지 예상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도 충분히 잡을 수 있어요.”

카메라맨도 마찬가지, 마력에 짓눌리며 허덕였다.

그가 카메라를 손으로 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찍을 수 있습니다.”

무령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뢰피크르의 성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제 마녀의 성까지 데리고 온 이유를 설명해 드리죠.”

리포터와 카메라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사람은 이곳에 끌려온 이유를 모른다.

PD의 지시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울면서 이곳에 따라온 거다.

그리고 이제야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저 안에서 마녀와 싸우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큰 리포터의 눈이 더 커졌다.

“이, 인간이 존재와 싸운다고요? 그것도 짐승의 날에?”

“네.”

리포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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