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 * *
-살육의 장 : 어둠이 끝나고 새벽이 지나갈 때, 저주받은 피가 문을 만드니 욕심 많은 자, 욕심 많은 어머니가 군을 이끌고 문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원하는 핏물, 둘 중 하나의 별이 떨어진다.
창조주가 원치 않던 세상이니 타락한 그대는 느껴 보지 못한 고통을 알게 되리라.
카펫과 커튼, 벽에 붙은 그림까지도 온통 붉은 그곳.
끝없이 높은 계단 위에 여인이 앉아 꼬마가 가져다준 예언서의 뒷장을 읽고 있었다.
‘뭘까?’
그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동시에 붉은 갑옷을 입은 장수 2명이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 예언서를 가져온 꼬마를 죽이겠습니다! 지금 당장 그 꼬마를 잡아 왕가의 핏줄을 끊어 버리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불허한다.”
“어머니!”
여인은 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예언서로 옮겨갔다.
하지만 소란은 멈추지 않았다.
“죽여 버리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방금 꼬마가 찾아왔었다.
꼬마는 성현이 계약한 존재가 버림받은 악 지르힐이라는 정보를 알려 주며 여인의 피를 받아 갔다.
하지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성현이 지르힐의 권능을 사용하며 그 정보는 모두가 알고 있는 공공재가 되어 버렸다.
애꿎은 피만 버리게 된 거다.
저들은 여인이 꼬마에게 속았다고 생각했고 그 복수를 하고 싶었다.
“어머니!”
“시끄럽다. 계속 떠드는 놈이 있다면 짐승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 한마디에 장수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서로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섰다.
여인은 그제야 펼쳐 둔 예언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어둠이 끝나고 새벽이 지나갈 때, 저주받은 피가 문을 만드니……?’
새벽이 지나간다는 것이 뢰피크르의 죽음인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주받은 피가 문을 만들어?’
여인은 그 저주받은 피가 뢰피크르의 피라고 생각했고 그 피로 어떤 문이 만들어진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성현이 뢰피크르의 피를 챙겨 갈 때까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뭘까?’
한참을 생각하던 여인의 시선이 다시 신하 또는 자식 들에게 향했다.
계단부터 문까지 양옆으로 도열한 자들, 그들은 신하이며 자식, 그 숫자가 이백은 될 거다.
그리고 이들의 힘 하나하나는 마녀 뢰피크르를 아득히 넘어선다.
여인이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둠이 끝나고 새벽이 지나갈 때, 저주받은 피가 문을 만드니……. 이 구절을 해석해 보라.”
그 말에 흰 수염이 길게 난 노인이 한 걸음 앞서 나왔다. 그리고 여인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미천한 자가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예언서에 적힌 문장은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문이라는 것 역시 실제 존재하는 문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의 시작을 의미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로 이번 뢰피크르의 죽음을 많은 인간들이 지켜봤습니다. 자극받은 사람도 있겠고 누군가는 나도 할 수 있다고 여길 겁니다. 어떤 이는 실제로 존재를 사냥하려 할 겁니다.”
“해서?”
“그리고 또 누군가는 대군을 이끌고 존재와 전쟁을 벌이려 할 것입니다.”
“문이란 전쟁이다?”
“네, 그러면 그 다음 구절인 ‘욕심 많은 어머니가 군을 이끌고 문으로 들어간다.’라는 것까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인의 시선이 다시 예언서로 향했다.
‘욕심 많은 어머니라……. 그게 누굴까?’
* * *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는 소리가 툭툭툭, 일정한 리듬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지연우의 집이었다.
전등을 켜지 않아 완벽히 어두운 공간에서 텔레비전만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여전히 마녀의 성 앞에 선 리포터가 호들갑을 떨고 있다.
-성의 색이 변한 것을 보셨습니까? 마녀의 마력이 다한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마녀급의 존재와 싸워 이겼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몇몇 마녀와 싸워 이긴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짐승의 날, 온전한 힘을 가진 마녀입니다! 도대체 누구일까요? 누가 마녀와 싸워 이길 수 있었을까요?
리포터의 옆으로 가면을 쓴 무령이 섰다.
리포터가 무령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질문했다.
-제보해 주신 분인데요. 성에 들어간 계약자가 누구인지 살짝 귀띔해 주실 수 있나요?
-랭커는 아닙니다. 아마 처음 보는 사람일 겁니다.
-처음요?
지연우는 한숨을 내뱉으며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꺼 버렸다.
마녀의 성을 공략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지만 굳이 텔레비전을 지켜보면서 실시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내일이면 곳곳에 그의 이름과 얼굴로 도배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연우의 시선이 휴대폰으로 향했다.
실검의 1위부터 10위까지, 전부 마녀를 잡은 사람으로 가득하고 SNS도 난리다.
-랭커 아니라잖아.
-처음 보는 사람? 그런데 웬만하면 다 랭커에 들어갈 수밖에 없잖아? 계약자 등록을 하고 업적을 기록하니까.
-힘숨찐인가?
-랭커들 이제 순위 밀려야 하니까 짜증 나겠네 ㅋㅋㅋ
어디에도 지연우의 이름은 없다.
짐승의 날이기 때문에 지연우는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구로, 영등포, 강남, 잠실……. 잡아 죽인 짐승만 수십 마리다.
그중에는 A급 짐승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마녀, 마녀, 마녀…….
지연우가 입술을 물어뜯었다.
무엇을 위해 뛰어다녔는지 모르겠다.
그때였다.
지연우의 머릿속에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의 목소리가 스쳤다.
-숭배받고 싶어 하는 탐욕,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 그것을 버려라.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탐욕이 아니라 정의입니다.”
-너 스스로를 속이려 하지 마라. 넌 욕심을 가진 인간이다.
“하…….”
지연우가 중얼거렸다.
“……내가 저 마녀와 싸웠다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이겼다.
“어머니도 저 싸움을 지켜봤습니까?”
-봤다.
“내가 그놈과 싸우면 어떨 것 같습니까?”
-네가 이긴다.
플로르의 시원한 대답에 지연우가 그제야 슬쩍 웃었다.
그런데 플로르의 대답이 찝찝하게 이어졌다.
-아직은.
“아직은?”
그것은 언젠가 뒤집힐 수도 있다는 뜻.
지연우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플로르는 그런 지연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네 성장 속도가 지금까지 모든 인류 중 가장 빠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녀와 싸운 인간의 성장 속도는 인류를 넘어 전 계약자 중 가장 빠르다. 곧 네 발뒤꿈치를 쫓을 거다. 그놈이 네 아킬레스건을 자를 수도 있을 거다. 움직여라. 벗어나라.
플로르의 말을 듣던 지연우는 눈을 감아 버렸다.
온전한 힘을 가진 마녀와 싸워 이긴 사람.
아마 곧바로 랭커가 될 테고 새로운 히어로로 취급받아 국민적 영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니, 국민을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도 있다.
연맹에서도 데려오려고 애를 쓸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어쩌면 지연우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다고 한다.
지연우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 * *
그 시각, 성현은 아직 마녀의 침실에 있었다.
마녀의 붉은 핏물이 모두 모였고 일단 그것을 창고로 옮겨 뒀다.
피가 사라진 마녀는 스르륵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끝났나요?”
그 모든 과정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서은서가 물었다.
성현이 시선을 틀어 그녀를 향해 대답했다.
“네.”
이제 할 일은 모두 끝났다.
그리고 성을 빠져나가야 할 시간이 다 되었다.
그 증거로 침대와 화장대도 마녀와 똑같이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서은서가 사라져가는 마녀의 화장대 앞에 섰다.
반쯤 남은 거울을 바라보며 가면을 벗고 성현이 건넸던 립스틱을 칠했다.
“어때요? 어울리나요?”
립스틱은 특별한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르는 순간 그 얼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으로 칠해진다.
그리고 매력이 10 올라간다.
가뜩이나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마녀의 립스틱까지 발랐으니 안 예쁜 게 이상한 거다.
“어울리네요.”
“고마워요.”
서은서가 살짝 웃으며 다시 가면을 썼다.
창고를 통해 곧바로 서울로 떠난다고 전해 온 서준식을 제외한 성현과 서은서 그리고 다른 일행은 왔던 그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창고에서 바로 서울로 갈 수 있지만 그것은 존재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꽤 많은 돈이 든다고 알려져 있다.
급한 일이 없는 이상 스스로 걸어서 움직이는 게 가장 편한 길이다.
케르베로스가 죽었던 동굴을 지나 완전히 성을 빠져나갔을 때였다.
갑자기 카메라가 들이닥쳤다.
“인류 최초로 온전한 힘을 가진 마녀와 싸워 이긴 파티가 지금 나타났습니다! 누군가는 오늘의 일을 보며 암스트롱이 처음 달을 밟았을 때와 같은 인류의 위대한 첫걸음이라고 하는데요!”
성현이 힐끗 서은서를 바라봤다.
이런 일을 준비할 사람은 이곳에서 서은서밖에 없다.
성현의 시선을 느낀 서은서가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해요. 제가 불렀어요. 이제 유명해졌으면 했거든요. 누가 좀 알아주기를 바랐고요.”
성현이 픽 웃었다.
그녀가 무령을 통해 방송사를 부른 이유를 뻔히 알 것 같았다.
지난번 성현은 도망자들의 마을에서 범죄자를 찾아 죽였다.
그 일로 인터뷰 요청이 계속 들어오는 중이다.
어차피 주머니에서 튀어나올 송곳, 이참에 확 드러낸 후 자신의 것이라고 알리고 싶은 거다.
다른 길드에서 침을 흘리지 못하게.
‘뭐, 상관없지.’
어차피 성현도 슬슬 자신의 이름을 알릴 생각이었다.
세력을 만들고 힘을 얻으려면 당연한 수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정도 제 멋대로 한 행동은 귀엽게 생각하기로 했다.
리포터가 성현의 앞에 와서 마이크를 내밀었다.
“처음 뵙는 얼굴인데요. 소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순간, 성현이 서은서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며 옆에 설 때, 성현이 그녀의 가면을 벗겼다.
“……왜?”
“혼자 당할 수는 없죠.”
서은서의 동그란 눈이 카메라에 잡혔다.
마녀의 립스틱까지 발라 더 아름답게 보이는 그녀를 보며 리포터는 마른침을 삼켰다.
같은 여자가 봐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리포터가 더듬더듬 물었다.
“이분은…….”
“저는 군복무 중인 유성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분은 페이트 길드 서은서 팀장입니다.”
리포터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유성현 씨는 페이트 길드의 길드원인가요?”
물론 아니다.
아직 계약서에 사인한 일은 없다.
하지만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은서가 활짝 웃으며 성현을 바라봤다.
같은 시각, 서울.
성현의 어머니가 눈을 깜빡였다.
어머니는 마녀가 성현이 복무하는 부대 근처에 나왔다고 해서 숨죽이고 텔레비전을 보던 중이다.
당연히 성현이 잘못되었을까 걱정하며 가슴 졸이고 있었는데, 예쁜 여자와 나란히 서 있다.
“……저게 뭐야?”
그 순간 어머니의 휴대폰이 울렸다.
메시지가 도착한 것인데 마치 전화가 온 것처럼 계속 진동한다.
-성현이 엄마, 저거 성현이 맞지?
-랭커 되는 거 아냐? 그럼 스타야, 스타.
-한턱 쏴!
메시지가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