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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94화 (94/252)

94화

성현은 저벅저벅,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오미로 베루스가 호랑이만 한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고양이가 밥을 먹고 있고 오미로 베루스가 고개를 틀어 성현을 바라봤다.

“지키느라 고생했다.”

오미로 베루스는 성현이 마녀의 피를 흡수하는 동안 혹시 모를 짐승의 공격을 대비하며 계단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크르르…….

오미로 베루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밥을 먹던 고양이도 성현을 향했다.

-냥.

“너도.”

성현은 빙긋이 웃으며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양이가 기분 좋은 듯이 냥냥거린다.

오미로 베루스와 고양이가 있는 이 던전의 시간이 꽤 여유롭게 느껴졌지만 계속 이곳에 머물 수는 없다.

밖에서 해야 할 일이 가득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나중에 보자.”

오미로 베루스와 고양이의 눈앞에서 성현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성현은 창고에 도착했다.

성현이 거울을 보며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있을 때, 지르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걸이의 펜던트를 지금 당장 만들어 넣었다.

성현이 슬쩍 자신의 목을 바라봤다.

의식을 치르며 뜯어냈던 펜던트가 다시 달려 있었다.

지금도 똑같이 8개다.

“땡큐.”

-혹시 필요한 게 있는가?

“잠깐만.”

성현은 지르힐의 말을 멈추고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흠…….’

마녀의 피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성현은 엄청난 고열에 시달렸다.

그 열기에 옷이 다 녹아내렸고 당연히 성현의 살가죽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몸이 녹았다가 재생하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몸의 독소가 모두 타 버렸고 성현의 몸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피부색은 물론 눈동자의 색도 상당히 깨끗하게 느껴졌다.

잠시 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성현이 입을 열었다.

“지르힐.”

-말하라.

“옷 좀 선물해 줬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초소에 들어갔는데 방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좀 부끄럽잖아?”

-돈을 받지.

“공짜로는 안 되나? 선물.”

-그대는 이제 금전적인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데…….

지르힐의 말대로다.

성현은 마녀와 싸워 이기며 한동안 돈 걱정 없이 펑펑 써도 상관없을 만큼 많은 판돈을 긁어모았다.

“좋아. 그렇게 해. 알아서 빼 가.”

-3실버를 가져가겠다.

“어?”

3실버는 약 3천만 원이다.

가볍게 2~3만원짜리 트레이닝복을 원했는데 옷 한 벌에 3천만 원?

“야! 지르힐!”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성현의 벌거벗은 몸에 옷이 입혀졌다.

RPG 게임 속 전사가 입을 법한 화려한 복장.

중세의 갑옷 같은 느낌으로 전체적으로 흰색인데 금색과 붉은색 그리고 반짝이는 보석이 곳곳에 달려 있다.

“차라리 벗는 게 낫지. 이건 좀 과하잖아?”

성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는 묘하게 즐기는 것 같다.

-예쁘구나.

“뭐?”

-그대는 그 옷이 어울린다. 그 옷을 입는다면 얼마든지 선물하지.

성현은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를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아, 잊고 있었네.’

존재는 인간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커스터마이징 하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지르힐은 이런 화려한 복장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금색’…….

* * *

“꽤 오래 걸렸네요?”

성현이 다시 초소에 나타났을 때다.

서은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현이 고개를 틀며 그녀와 벽시계를 번갈아 바라봤다.

새벽 1시다.

남자의 방에 있기에는 많이 이른 시간.

서은서도 그것을 알았는지 난처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지나가다가 없어서 어디 갔나 궁금해서 기다렸어요. 워낙 신출귀몰하잖아요.”

“제가 신출귀몰하다고요?”

“지금도 그런 옷을 입고 나타나신 것을 보면 신출귀몰한 게 맞죠. 그거 어디서도 못 구할 것 같은데…….”

“아.”

성현은 지르힐이 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참, 화려한 옷.

성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게 이렇게 보여도 3천만 원짜리 옷이거든요? 존재한테 뒤통수 맞고 사게 된 건데, 여기 박힌 게 진짜 보석이래요. 이건 진짜 금가루고. 하…… 이런 것을 어디서 입는다고.”

성현이 한숨을 내뱉자 서은서가 입을 가리며 웃는다.

“잘 어울리는데요?”

“그럼, 살래요? 딱 한 번 입었지만 어쨌든 중고니까 파격적으로 2,500만 원만 받을게요.”

“사양합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성현이 또 한 번 한숨을 내뱉었다.

서은서가 벽시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른 새벽에 커피 한잔 드실래요? 산책도 할 겸.”

“커피는 좀 그렇고 맥주 어때요? 냉장고에 많은데.”

이창민 중사가 대단한 주당이다.

그래서 냉장고에는 항상 소주와 맥주가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걸 몰래 꺼내 먹는다고, 또는 다 먹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먹고 싶은 것은 마음껏 먹으라는 말을 한다.

서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성현과 서은서가 마당을 걸었다.

그 모습을 윤희진이 창가에 앉아 보고 있었다.

윤희진이 소주를 홀짝이며 살짝 웃는다.

“좋을 때다.”

그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삐걱 열리더니 군인 출신 이주안이 들어왔다.

윤희진이 물끄러미 보고 있자 이주안이 험악한 얼굴로 다정하게 말한다.

“맥주 마실래?”

“소주 마시는 중인데?”

“그럼 소맥 어때?”

* * *

“서준식 본부장과 싸우게 됐어요.”

“네?”

마당의 벤치에 앉았을 때다.

성현의 말에 서은서의 행동이 멈칫거렸다.

“오빠랑 싸운다고요?”

“네.”

“설마…….”

서은서는 방금 방송국과 인터뷰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 인터뷰에서 성현은 서은서의 가면을 벗겼고 그녀의 얼굴은 노출됐다.

인류 최초 온전한 힘을 가진 마녀, 그것도 던전이 아닌 마녀의 성을 찾아 승리한 사건.

잘은 몰라도 시청률이 30%는 넘었을 거다.

인터넷을 보면 그 체감이 확실히 다가왔다.

실시간 검색어 1위부터 10위까지 서은서와 유성현 그리고 마녀 뢰피크르에 대한 것으로 가득했다.

댓글도 난리다.

페이트 길드에 경사 났네, 서은서가 예쁘네 등등.

당연히 서준식도 봤을 거다.

서은서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예상은 했지만 반응이 빠른데요?”

서준식의 반발은 예상했다.

애초에 서준식과 서은서의 목표는 페이트 길드의 왕좌다.

그런데 서은서가 유성현을 앞세워 치고 나갔다.

방송국에 얼굴을 내밀었고 마녀를 잡은 ‘최초’의 길드라는 타이틀을 얻어 왔다.

평소 독을 연구한다며 손가락질을 받던 페이트 길드가 단숨에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기념비적인 순간이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 서문길 마스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랜 시간 후계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어떤 업적도 남기지 못한 서준식과 순식간에 치고 오르는 서은서를 보며 어떻게 비교하고 있을까?

정상에 서 있던 서준식은 아찔했을 거다.

“저는 물론 성현 씨까지 적으로 취급했을 게 분명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싸우지 않아도 돼요. 어린애의 투정이에요. 일일이 받아 주면 피곤해져요.”

서은서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피붙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다.

성현은 조용히 서은서를 바라봤다.

그녀의 냉랭한 눈빛에 회귀 전 알던 그녀가 떠오른다.

이기적인 소시오패스.

승리를 위해 가족도 버리던 악녀.

성현도 그녀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가까이 지내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조금 계산적이기는 하지만 거기까지다.

친절하고 희생할 줄도 안다.

소시오패스라 불리던 그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가족에게는 왜 저러지?’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없었다.

‘어쨌든…….’

오해는 풀어 줘야 한다.

서준식이 성현을 생각하는 감정이 어떤지 몰라도 그는 성현을 해할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에 최악의 계약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서준식이 성현과 싸우겠다고 선언한 것은…….

“단순히 페이트 길드의 후계자 때문이 아니에요.”

“네?”

“이번 싸움에 자존심이 상했을 겁니다. 그런 감정은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을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서은서도 느낀 적이 있다.

부여 던전, 존재급의 짐승 마리안느를 마주쳤을 때다.

그때 서은서는 성현이 도망가라 했다고 그 자리를 피했다.

무서워서, 두려워서, 살고 싶어서, 밖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당시 서은서는 스스로 걸음을 멈추고 다시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향했었다.

그 이유도 그 자존심 중 하나였다.

성현이 말을 이었다.

“서준식 본부장은 마녀에게 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한 저는 끝까지 맞서 싸웠고, 이겼죠. 자존심이 상하고 질투가 났을 겁니다. 그 울분을 토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가요?”

“네.”

성현은 빙긋이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짐승의 날이 지나갔다.

서은서와 이주안, 윤희진, 이준 그리고 용병들은 초소를 떠났다.

남은 것은 이창민 중사와 박상문 하사 그리고 성현이었다.

“도망자들의 마을은 어땠습니까?”

“S급 짐승이 여섯 마리 나타났지만 다행히 피해는 적었어.”

이창민 중사가 텅 빈 냉장고에 맥주와 소주를 채우며 답했다.

옆에서 박상문 하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난 초소장님이 그렇게 센 줄 처음 알았습니다. 공룡 같은 짐승이 나타나자마자 하늘에서 미사일을 소환하는데……!”

이창민 중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됐다. 조용히 해라. S급 짐승 100마리를 죽이면 뭐 해? 핵을 소환하면 뭐 하고. 이등병 따위가…….”

“일병입니다. 진급했습니다.”

“어쨌든, 일병 따위가 마녀를 박살 냈잖아? 그것도 서은서라는 대단한 미인 앞에서.”

“죄송합니다.”

성현이 장난스럽게 대답하자 이창민 중사가 냉장고에 넣지 못한 미지근한 맥주를 성현에게 던졌다.

“마셔.”

“어제도 많이 마셨습니다.”

“또 마셔. 전투 끝나고 먹는 게 제일 맛있잖아.”

이창민 중사가 슬쩍 웃으며 미지근한 맥주를 입에 댔다.

* * *

며칠 후.

페이트 길드가 토벌 소유권을 확보한 던전.

포천에 나타난 곳으로 지금은 토벌대를 꾸리는 중이다.

즉, 지금은 문 앞에서 경계만 서고 있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횃불이 흔들리는 밤.

던전의 문 앞으로 성현과 서준식이 섰다.

서준식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

“휴가라고?”

“네.”

“휴가 기간에 괜히 미안하네.”

“미안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고맙고.”

두 사람은 저벅저벅, 던전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열어.”

서준식의 말에 경비원들이 그 큰 문을 양옆에서 잡고 당겼다.

그그그극.

문이 열리고 성현과 서준식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쿵, 다시 문이 닫힌다.

경비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야? 본부장이 와서 들어가고.”

“또 감정하나?”

그때였다.

“비켜 주시겠어요?”

낯선 목소리에 경비원들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서은서가 서 있었다.

그녀의 등장에 경비원들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서은서는 마녀를 사냥한 여전사로 여겨지며 꽤 유명해졌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죄송하지만 비켜 주세요. 여기는 제가 지킬게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기밀이거든요.”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주변으로 검은 옷을 입은 복면인들이 스르륵 나타났다.

그들의 등장만으로 경비원들은 압박을 느꼈다.

그리고 던전으로 들어간 서준식과 그 앞을 지키려는 서은서, 그 상황만 봐도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경비원들이 쪼르르 떠나고 서은서의 시선은 굳게 닫힌 던전의 문으로 옮겨졌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그리고 던전 안.

서준식이 몸을 풀며 성현을 향했다.

“권능을 사용할 거야. 너도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 줬으면 좋겠어.”

서준식의 몸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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