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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95화 (95/252)

95화

안개는 피가 연상될 정도로 붉었다.

그리고 서늘한 살기와 함께 곧 폭력적인 기운마저 느껴졌다.

주변에 있던 짐승들이 붉은 안개를 느끼고 도망칠 정도다.

만약 성현이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붉은 안개의 마력을 느낀 것만으로 다리를 벌벌벌 떨 것이다.

하지만 성현은 무던한 눈으로 서준식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서준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애초에 서준식도 여기서 끝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카니발 당시의 성현이었다면 모르지만 지금의 성현은 그때와 다르다.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강해졌다.

생각해 보면 마녀의 마력에 모두가 겁을 먹고 있을 때도 성현은 멀쩡했다.

서준식이 슬쩍 웃었다.

“그래, 이 정도로 겁먹지는 않는다는 거지? 그럼, 가볍게 시작해 볼까?”

서준식과 계약한 존재는 거짓의 군주 카디르버, 그 권능은 붉은 안개, 능력에 따라 반경 10km에서 100km까지 안개를 펼칠 수 있다.

“가장 기초적인 스킬부터 시작하지. 난 안개에 독을 숨길 수 있어. 인간은 호흡을 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안개를 들이마실 수밖에 없지. 그럼, 그 즉시 독에 중독되는 거야.”

서준식이 손을 하늘로 뻗었다.

그러자 일대에 붉은 안개가 쫙 깔렸다.

동시에 손바닥 위에 독약을 꺼내 놓고 마력을 담았다.

마력의 열기에 약이 녹아내리며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연기가 붉은 안개에 숨는다.

서준식이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자 독은 붉은 안개를 타고 성현을 향해 이동했다.

호흡하는 즉시 독이 흡수될 테고 혈액이 서서히 굳어 간다.

땅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스럽게 죽어 갈 거다.

하지만 성현은 독의 아버지라 불리는 서동길에게 독을 배웠다.

이 정도 독은 기침 정도로 끝낼 수 있었다.

서준식이 멀쩡한 성현을 보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무렇지도 않나?”

“더 센 독이 아니면 날 중독시킬 수 없어요. 그럼, 다음.”

“그래? 그럼, 환각의 가루 알지? 붉은 안개에도 비슷한 효과가 있어. 운 좋게 독을 마시지 않아도 붉은 안개를 흡수하면 착각을 일으키지. 보고 싶은 사람 또는 내면의 두려움을 마주하게 될 거다.”

붉은 안개가 성현의 주변으로 확 몰렸다.

이어서 성현의 귀와 코 그리고 입으로 스며들었다.

뇌를 조작해 환각을 보게 하려는 거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용없었다.

성현은 뢰피크르의 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죽는 고통을 느꼈는지 모른다.

의식의 끈이 끊어지는 것을 계속 붙들고 견뎠다.

정신력은 상당히 강해졌고 어설픈 환각은 우습기만 했다.

당연하지만 성현은 멀쩡했고 서준식이 고개를 저으며 끌끌끌 웃었다.

“그래, 쇼는 그만. 제대로 상대해 주지.”

그 말과 동시에 사방에 깔려 있던 붉은 안개가 확 걷혔다.

그 안개가 한곳에 모이더니 소용돌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붉은 밧줄의 형상을 띠어 간다.

마지막으로 채찍처럼 변해 서준식의 손에 쥐였다.

‘카디르버의 채찍’.

채찍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던 서준식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다.”

서준식이 채찍을 휘둘렀다.

파아아앙!

채찍이 공기를 찢으며 성현을 향해 날아갔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성현은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채찍이 바위를 부수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서준식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제법!”

꽈앙! 꽈앙!

서준식의 채찍질에 공기가 찢어지고 공간이 부서졌다.

모든 공격에 살기가 가득했다.

성현과의 서준식의 계약에 따르면 서준식은 성현을 죽일 수 없다.

만약 서준식이 성현을 죽이면 서준식도 그 자리에서 함께 죽기 때문이다.

그런 계약이다.

하지만 지금 서준식은 진심으로 성현을 죽이려 한다.

그래야 이길 수 있다.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싸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순수한 실력으로 보면 내가 더 세겠지.’

서준식은 성현보다 자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놈에게는 잔머리가 있어.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놈이야.’

그래서 방심할 수 없었다.

쾅! 쾅! 쾅! 쾅!

‘또 피해?’

서준식은 더 빠르고 더 강하게 움직였다.

성현의 움직임을 눈에 담으며 계속해서 팔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때마다 성현은 모두 피했고, 서준식은 미간을 찌푸렸다.

‘쥐새끼 같은 놈!’

채찍이 휘둘리는 속도는 소리보다 빠르다.

하지만 성현은 요리조리 공격을 피하며 생명을 연장해 가고 있었다.

파파파파팡!

그런데 서준식은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어서 꽈앙, 채찍에 닿은 땅이 두부처럼 갈라졌다.

처음보다 채찍의 공격은 예리해졌고 그 속도가 더 빨라졌다.

서준식은 더 강해지고 있었다.

성현을 잡기 위한 고도의 집중력, 그리고 반드시 이기고 싶은 욕망.

그는 더 강해지고 싶은 갈증을 느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그동안 페이트 길드의 왕좌라는 작은 자리만 눈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성현을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내가 원하던 것은 그게 아니었어.’

서준식의 머릿속에 잠시 어릴 때가 떠올랐다.

아버지 서문길 마스터가 여덟 살 서준식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준식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지?”

그때 대답했던 것은 페이트 길드의 마스터가 아니었다.

언제나 노리는 것은 하나.

No. 1, 랭커의 정점.

‘잊고 있었어.’

서준식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난 최고가 되고 싶었어.’

서준식의 서늘한 눈빛이 성현을 담았다.

‘오늘 내 과거의 치욕을 꺾는다.’

서준식은 성현에게 패배했었다.

그게 치욕스러웠다.

‘그때는 방심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성현은 서준식의 앞으로 전혀 다가올 생각도 못 하고 있다.

채찍을 피하는 데 급급하다.

‘오늘 널 부수고 난 내 갈증을 채울 거다.’

채찍이 잔상을 남기며 사정없이 움직였다.

꽝! 꽈앙! 꽝!

그리고 서준식은 그냥 강해진 게 아니라 한 단계 더 성장했다.

서준식의 머릿속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카디르버의 스킬, 4차원의 공격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서준식이 작게 호흡을 하며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똑같이 채찍이 휘둘린다.

그런데 채찍의 일부분이 허공에 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졌다.

그 일부분이 나타난 곳은 성현의 뒤.

파아아앙!

서준식이 활짝 웃었다.

“피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성현은 갑자기 튀어나온 채찍에 맞지 않았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튀어 나갔기 때문이다.

성현은 서준식의 품에 뛰어들 듯이 파고들었고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다가온 성현을 보며 서준식이 당황했다.

그래서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지만 성현의 주먹이 이미 그의 얼굴에 처박힌 뒤였다.

콰앙!

서준식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반격했지만 마찬가지.

퍼퍼퍼퍽!

서준식은 성현과 싸우며 깨달음을 얻었고 순간 강해졌다.

하지만 성현은 마녀의 피를 흡수했다.

그 차이는 컸다.

성현은 계속해서 주먹을 내던졌다.

짧게, 짧게 그리고 크게!

꽈앙!

서준식의 몸이 흔들렸다.

성현이 서준식의 머리를 잡고 무릎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콱! 콱! 콱!

서준식은 정신을 못 차리고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잠시다.

서준식은 페이트 길드의 장남.

권능만 뛰어난 게 아니라 육박전에도 능하다.

곧 정신을 차리더니 팔로 얼굴을 감싸고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하지만 최악의 선택이었다.

서준식이 몸을 웅크리며 시간을 줬고, 성현은 마음 놓고 창을 뽑았다.

그리고 원 없이 휘둘렀다.

쩌엉!

서준식이 100m는 튕겨 나갔다.

한참 동안 바닥을 뒹군 서준식이 비틀비틀 일어서려 할 때, 그 앞으로 성현이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서준식 본부장, 그쪽이 왜 두들겨 맞고 있는지 알아요?”

“…….”

“또 방심했어요. 내가 그쪽보다 약할 것이라 생각하고 여유를 부렸죠.”

“…….”

“싸움하면서 여유 부리면 안 돼요.”

서준식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성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

핏물로 가득한 이빨을 내보이며 낄낄 웃었다.

“여유 부리면 안 된다라……. 오늘 좋은 거 배우네.”

서준식은 얻어맞으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토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서준식이 크게 웃으며 성현에게 손짓했다.

“하하하하! 와라!”

성현의 창에 전기가 파직거렸다.

“그럼 저도 지금부터 권능을 사용하겠습니다.”

상대가 서준식이라 성현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뢰피크르의 피를 흡수하며 얻은 힘의 위력을 마음껏 느낄 수 있어서다.

* * *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던전의 문 앞.

무령이 닫힌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서은서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오빠가 이기겠지.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을 테니까, 이번에는 반드시 이기려고 할 테니까. 그런 오빠가 진 것을 본 적이 없어.”

서은서는 어릴 때의 서준식을 떠올렸다.

천재라는 말이 어울렸던 시절.

만약 서준식이 이 악물고 랭킹에 매달렸다면 적어도 30위, 아니 20위 안에는 들었을 것 같다.

“어쩌면 세계 랭커가 됐을 수도 있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1년 후라면 모를까, 지금 유성현이 본부장님을 이긴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됩니다.”

“적당히 싸우고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서은서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닫힌 문을 바라봤다.

잠시 더 그렇게 있던 무령이 화제를 전환했다.

“아가씨, 첩보를 들은 게 하나 있습니다.”

“첩보?”

“이번에 마녀사냥에 성공한 것을 보고 여기저기서 말이 많은 모양입니다.”

일단 일반인들은 성현과 서은서의 등장에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은 짐승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세상이며 짐승에게 땅을 빼앗기는 시기다.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영웅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상황을 조금 더 건조하게 보고 있었다.

“유성현은 랭킹에 잉크도 묻히지 않은 초짜입니다. 업적이라고는 짐승의 땅에서 수배범을 잡아 죽인 것뿐이죠.”

그동안 성현의 활약은 모두 은폐되어 있었다.

고등학생이라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약자들이 볼 때 성현은 완벽한 신인이었다.

“아가씨 역시 랭커가 아니죠.”

마녀를 잡았던 사람 중 얼굴을 공개한 것은 단 2명이다.

바로 성현과 서은서.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랭커가 아니었다.

“마녀를 우습게 보는 풍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비랭커 10명 정도가 모여 마녀를 잡았으니까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서은서가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넘겼다.

“쓸데없는 짓은 안 했으면 좋겠네…….”

성현이 랭커는 아니다.

하지만 엄청난 예지자다.

이번 마녀사냥도 성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성현은 뼛가루와 이계의 화산재를 이용했고 마녀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런 준비 없이 마녀를 사냥한다면 대단한 비극의 무대가 만들어질 게 분명하다.

“이미 준비하는 놈들이 있습니다.”

“뭘?”

서은서의 눈빛과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가득했다.

무령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지연우.”

“지연우?”

“존재에 대항하는 원정대를 준비한다고 합니다.”

“그게 또 무슨 소리야? 지연우나 되는 사람이!”

하지만 두 사람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끼이이익.

던전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싸움이 끝났다는 뜻이다.

서은서와 무령 그리고 다른 복면인들은 당연히 이 싸움의 승자가 서준식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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